1.
한 때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 다르다는 설정에서 다양한 예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여자는 감정을 공감해주면 문제가 해결되고, 남자는 공감보다는 문제해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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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자와 대화를 할 때 그 감정을 받아주면 되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고, 다양한 연애 강의나 설교등에도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많은 경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 말을 100% 확신하게 되면 다양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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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감의 배신>이라는 재미있는 책이 나왔다. 공감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몰아가는 저자의 논리를 다 동의할 수 없지만 공감이 좋다는 인식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주는데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책이다. 지금은 공감의 시대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려움을 당하면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물론 먼저 공감이 필요하지만, 공감이 선한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면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것이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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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에서 '화평' 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을 공감해주어서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을 때, 사람의 감정에 공감만 해준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정말 사랑한다면 가장 아픈 말들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은 때로는 상대방에게 자기 왜곡을 강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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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광교회 이정규 목사는 빌레몬서 설교에서 두 사람이 갈등이 있을 때 이 사람에 대한 공감, 또 저 사람에 대한 공감을 하면서 명확한 기준이 아닌 감정의 공감만 하게 되면 결국 자신과 두 사람은 친분이 유지되지만 갈등이 있는 두 사람은 더 멀어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갈등있는 두 사람이 화해하려면 진리를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공감 이상의 말을 하면서 자신이 피해받고 관계가 어려워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을 주저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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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부분 동의가 되었다. 배우자가 어느 누구와 싸웠을 때 무조건 배우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마치 진리처럼 통용된다. 그러나 세상에 하나 뿐인 남편과 아내가 내 편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배우자 때문에 더욱 왜곡되어 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공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하지만 공감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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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런 저런 설교나 성경구절을 이야기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행위도 마치 진리처럼 통용되는 감정의 시대에 유행하는 문화내러티브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다르게 반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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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게 예수님께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질문하는 두 사람에게 각각 다른 대답을 주셨다. 마르다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자세한 설명을 구구절절 하신다. 그러나 마리아 에게는 함께 눈물을 흘리시면서 공감하신다. 팀 켈러는 이 대ㄱ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시는 인격이심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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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린 아이도 달려올 만큼 편안한 분이셨지만, 어떤 권력앞에서도 당당한 분이셨다. 이질적인 성품인 겸손과 용기가 예수님의 삶에는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제는 50%의 진리가 되어야 한다. 공감을 해주어야 하지만, 자기 왜곡이 심한 이 시대에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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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관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기술을 함께 가져야 하는 것 같다. 심리학과 일반 상담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과 정서는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을 참으면 문제가 되지만, 단순히 흘려보내고 공감하는 것으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은 승화 되어야하고 재조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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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감정의 재조정의 뿌리에는 언제나 건강한 자기인식이 있다. 흔히 말하는 메타인지가 높을 때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묵상과 함께 하는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해준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선명하게 알게 해준다. 그리고 영적인 우정이다. 명확한 나의 상태와 잘못을 지적해줄 수 있는 영적 우정을 통해 우리는 잘못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들을 교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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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목회자이지만 성도들에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나를 돌아보아도 미리 이야기하고 지적해 주었다면 쉽게 해결했을 문제도 그 말을 방치했기 때문에 더 큰 문제로 커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왜 나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두려웠을까? 어려울 때는 무조건 감정을 공감해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감정을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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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불편하지만 , 어려워질 수 있지만,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안에 있는 우상이 발견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하며 여전히 왜곡된 신념만 가중시켜 줄 수도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사람들을 향한 공감능력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공감을 기준으로 두면 맞거나 때로 틀릴 때도 있지만,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기준으로 둔다면 틀릴 때 조차도, 우리는 계속 더 성장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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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답이 아니다. 공감은 답으로 가는 첫 번째 발자국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고상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