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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을 보려고 돌아서니 일곱 금촛대가 보이더라(계 1:12).
사도 요한은 그 음성을 보려고 돌아섰는데 이것이 의미는 통할지라도 그렇게 일상적인 표현은 아니다. 그 음성을 발한 사람을 보려고 돌아선 것이지 음성을 보려고 돌아선 건 아니니 말이다. 음성은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니까 음성을 본다는 말이 어법상 그렇게 맞는 얘기는 아니다. 여러분이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이 작은 단어 안에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을 수 있으니 이런 곳에서도 보화를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물론 성령께서 실수하셔서 어법에 안 맞는 이야기를 기록하신 것은 아니며 이유가 있기에 이렇게 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자.
예수님의 성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말씀"이시다. 우리 말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고딕체로 쓰지만 영어에서는 첫글자에 대문자를 쓰기 때문에 더 확실히 구별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요 1:1).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라 해서 그 분이 보이지 않는 공기 같은 분이라는 것은 아니다. 바람 같고 물 같으신 위격은 성령이신데 성령은 느낄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는 분이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즉 사도행전 2장에서처럼 가시적 형태인 불의 혀 모양으로 강림하기도 하셨고 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내리기도 하셨으나 일반적으로는 성령께서 보이게 역사하지는 않으신다.
성부 하나님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나 분명 존재하시는 위격이신데 이에 대해서 딤전 6:16에서 설명한다.
오직 그분만이 불멸하시며,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영원한 존귀와 능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 6:16).
성부 하나님은 누구도 볼 수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분인데 마치 태양광선의 세 파장 가운데 적외선과 같다. 성령은 느껴지는 자외선이고 성자 하나님은 볼 수 있으나 느낌은 없는 가시광선 같다.
그렇기에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은 그 분이 셋째 하늘에 계시기에 직접 육안으로 뵙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난 사람들이 희미한 유리를 통해 보듯 그 분을 영적으로 본다.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고전 13:12).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 분의 말씀과 그 분 자신을 거의 구별할 수 없고 사실 구별할 필요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분의 인격이고 동등한 권위를 갖기 때문인데 그래서 바이블빌리버들은 성경이 최종권위라고 기꺼이 고백하는 것이다.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있나니, 누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나이까?”라고 할 수 있느냐?(전 8:4).
따라서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분을 보려고 돌아섰지만 예수님과 그의 말씀들은 항시 한 세트로 붙어 있기 때문에 굳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하신 분을 보려고 돌아섰다"라고 할 필요가 없고 그저 음성을 보려고 돌아섰다라 표현해도 되는 것이다.
그 일곱 촛대 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발까지 닿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띠를 둘렀더라(계 1:13).
금촛대는 성전이나 성막에 비치되는 기물인데 성스러운 기구이기에 제사장들이 항시 잘 관리해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유지시켜야 된다. 금촛대는 올리브 나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천사를 상징하는 의미일 수 있다.
그가 말하기를 “이들은 두 기름부음받은 자들이니,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자들이니라.” 하더라(슼 4:14).
슼 4장에서는 두 증인, 모세와 엘리야를 두 올리브 나무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는데 금촛대에 관해서도 상징적인 장치가 있는 것이다. 금촛대는 촛대로서 외양을 하고 있지만 그 내실은 일곱 개의 지역 교회들을 나타내는 이미지들이다. 상징이라던지 이미지는 사람들도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고 있다. 지도에 교회 표시를 십자가 무늬로 하고 절은 만자를 그려 놓기도 하고 교통 표지판에도 많은 상징적 그림들이 쓰이고 있다. 주님께서도 교회를 촛대로 보여주신 것인데 이 상징적 장치는 단순한 표현보다 더 많은 함축적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교회가 촛대라는 것은 이 지역 교회라는 모임이 갖는 기본적 의무, 그들의 존재 의의가 빛을 두루 비추는 사역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마 5:14).
세상의 빛이라는 의미를 여러 상징 장치에 대입할 수 있는데 교회는 촛불 같기도 하면서 달과 같기도 하다.
아침처럼 비추고, 달처럼 고우며, 해처럼 맑고 깃발들을 든 군대처럼 위엄이 있는 여자는 누구인가?(솔 6:10).
교회가 촛대라고 상징할 때 이 촛대는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다 하는 의미가 강하게 작용한다. 주님이 그 지역 교회가 마땅치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리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은 촛대를 적용하고 있다. 반면 교회를 달려 비유하는 솔 6:10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빛나지 않고 태양과 같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로 언급하는 것이다.
달을 쳐다보라. 그것이 빛나지 않으며 정녕, 별들도 그분이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못하거늘(욥 25:5).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 것은 과학적인 진리이기도 한데 성경은 이처럼 자연물들을 삼위일체나 교회에 대입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고 무식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교조적 개신교 목사들은 적외선, 자외선, 가시광선이나 물, 얼음, 수증기 등의 삼위일체 비교 설명을 "양태론"이라고 거부해 버린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가장 좋은 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연에 배치해 놓으신 주의 증거들을 "양태론"이라고 멸시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보여주신 신격의 증거를 무시한다.
세상의 창조 때부터 그분에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졌고 심지어는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까지도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알려졌으므로 그들이 변명하지 못하느니라(롬 1:20).
요한이 보았을 때 예수님은 일곱 교회들 사이에서 거닐고 계셨고 그 주님은 "인자 같은 이"라 지칭된다. 성경에서 "인자"와 "인자 같은 이"는 마땅히 구별해서 해석해야 하는 단어들인데 왜냐하면 논리적으로도 두 물건이나 사람이 비슷하다고 해서 동일한 것은 아니며, 비슷한 두 가지는 엄연히 서로 다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냥 "인자"라 하지 않고 "-같은 이"(-like unto)라 부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여러분은 알겠는가? 아직까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텐데 여러분이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표현의 차이들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고 깐깐하게 따져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짓처럼 성경의 흠을 잡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미묘한 표현 차이를 통해 무엇을 계시하시고자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흰 구름이라. 그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분의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썼고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4).
내가 밤에 환상들을 보았더니, 보라, 인자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오셔서 옛날부터 계신 분께로 오시니 그들이 인자 같은 분을 그분 앞에 안내하였더라(단 7:13).
이 두 참조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인자 같은 이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진실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데 설명하겠다. 첫째 계 14:14에서 "인자와 같은 이"는 구름 위에 앉아서 환란후휴거 추수를 준비하시는 모습이다.
두 번째로 단 7:13에서 보면 여기서 인자 같은 분이 하고 있는 일은 고전 15:24의 사역이다.
그후에는 끝이 오리니 주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폐하시고 그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이 상황은 천년왕국이 종료되고 백보좌 심판도 끝난 다음의 수순인데 그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천년왕국을 인수하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 전의 상태로 복귀하시어 삼위일체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통치하게 된다.
따라서 인자 같은 이, 인자와 같은 이, 인자 같은 분이라는 이 표현들은 동일 상황에서 쓰인 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쓰였다. 그러나 우리는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니까 이 표현과 "인자"라는 표현 자체와 어떻게 왜 다른지를 알아야겠다.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여기서의 인자는 지상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민족들의 심판을 주관하고 계시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후에 너희는 인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시자,(마 26:64).
여기서 인자는 지상 재림하시기 전 환란후휴거 때 구름을 타고 나타나신 모습이다. 그런데 계 14:14에서는 동일 장면을 묘사할 때 인자와 같은 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내가 결론내리기로는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 인자 같은 이라고 할때 그것은 주님께서 신격의 두 번째인 성자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자"로 33년 반 동안 사셨고 지금도 인자의 모양을 갖고 계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기에 "인자와 같은 이"라는 것은 주님께 최상의 격식을 갖춰 숭앙하는 의미로 쓰는 표현이라 볼 수 있겠다.
만일 이게 아니라면 가능한 해석은 하나밖에 없는데 뭔가 확실하지 않고 사람인지 천사인지 분간이 안 된다, 존재가 애매해 보인다, 그래서 -같은 이라고 불렀다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요한이 인자인 예수님을 보고 저 분이 무슨 천사인지 사람인지 알쏭달쏭했기에 그렇게 지칭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인자 같은-"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각 구절들의 맥락을 살피면 전부 주님의 영광과 신성과 두려운 면모가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이 한때 나사렛 예수이셨던 동일한 그 분은 맞지만 지금은 그 분이 단순한 유대인 청년이 아니다 하는 그런 강조점이 찍혀 있는 표현이다.
발까지 닿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으로 만든 띠를 둘렀더라 이 옷과 금띠의 의미는 무엇인지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발까지 닿는 옷은 대제사장이 입는 의복인데 출애굽기 28장에 그 양식이 나와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그렇고 요한이 목격한 이 시점에도 아직 하늘의 대제사장 신분과 사역을 유지하고 계시다. 주님이 하늘의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왜 중요한지에 대해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한다.
선두주자이신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그곳으로 들어가시어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느니라(히 6:20).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는 주님의 세 직분이 함축되어 있는데 주(왕), 예수(선지자), 그리스도(대제사장)의 세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림 공사역 당시 주님의 직분은 어디에 맞춰져 있었나 하면 바로 선지자 사역이다. 주께서는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로서 유대인들에게 예언하는 선지자이셨다. 지금 주께서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이신데 거듭난 이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중이다. 그가 재림하시면 왕이 되실 것인데 그때는 왕이자 대제사장이 되신다. 멜키세덱은 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이었고 주께서는 이미 취득하신 직분들을 시대에 따라 다른 것으로 대체하시는 게 아니라 계속 더 추가하시는 것이다. 다만 "선지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가 다른데 이는 천년왕국 이후로는 더 이상 예언이 존속하지 않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일하실 경우는 더 없다.
그래서 주께서 지금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 계신 것은 장래에 그 분이 지상 왕국의 왕이 되셔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 납득케 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을 모신 제사장들처럼 이 지상에서 하늘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지만 때가 되면 주께서 왕이 되실 것이고 우리는 그 왕을 모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신분이 전환될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이 본문과 같은 모양으로 계신다면 하늘의 천사들이나 성도들조차도 두려워서 주님께 잘 다가서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하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가지 형태로 자신을 계시해 보여주신다. 이를테면 계 5:6에서 예수님은 1장의 모습과는 다른 식으로 현현하신다. "도살당하였던 것 같은 한 어린양"은 1장의 심판주 예수님처럼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두려운 위용은 아니다. 어린양이 상기시켜 주는 이미지는 주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 질고와 슬픔까지 함께 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를 드리셨다는 사실이다. 어린양의 이미지는 순백, 순결, 희생이다.
이에 내가 보니, 보라, 보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 도살당하였던 것 같은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더라.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5:6).
물론 성도들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 계 19장의 흰 말을 타신 장군 예수님, 그 모든 예수님의 현현들에 대해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할 것이지만 어쨌건 1장에서의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한 방에 트럭에 깔린 승용차처럼 눌러버리는 위용을 갖추고 계셨다. 요한은 그 예수님을 도저히 마주볼 수 없었기에 바닥에 엎드렸다.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계 1:14).
사도 요한이 몸을 돌려서 예수님의 형상을 인지하고 기가 질려서 납작 엎드리기까지의 시간 간격이 몇 초 정도 되었을 것 같은가? 내가 생각하건데 그는 단 1초도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엎드렸을 것인데 그 찰나 동안 요한은 재주 좋게도 예수님의 전신 스캔을 마쳤다. 그는 예수님의 외관에 대한 아주 자세한 묘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여러분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는가?
우리의 영적 감각은 육신이나 혼적 감각을 상회하는 초월적 감각인데 거듭난 사람이 하늘에 가게 되면 스스로 체득하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늘나라에서는 대화하지 않고 이심전심, 소위 텔레파시 같은 기법으로 의사 전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 정면으로 보았을 뿐이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전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자세한 면을 살펴보겠는데 여러분이 요한과 같은 경험을 원한다면 조용히 휴거 때까지 기다리기 바란다. 그때 주님이 어떤 외관과 의관을 하고 우리를 데리러 오실지 모르지만 혹시 계 1장의 이 부분과 같은 두려운 모습으로 오신다면 우리는 편하게 셋째 하늘로 올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냉동 생선처럼 꽝꽝 언 모습으로, 훈련소 신병이 4성 장군 앞에서 바싹 군기가 든 모습으로 후덜거리며 올라가야 할지 모른다. 물론 나는 그러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데 솔로몬의 노래에서 묘사된 휴거 장면을 보면 주님은 신부를 식장에 데려가려고 온 로맨티스트 약혼자처럼 상냥하게 오시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니, 보라, 그가 우리의 벽 뒤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창살을 통해 몸을 내보이는도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솔 2:9-10).
"노루나 어린 사슴"은 누구를 해치는 존재가 아니며 위험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주님이 성도들을 부르러 환란전휴거 실행을 위해 오실 때 그 분은 어린 사슴처럼 온건한 태도로 오실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을 수행하러 오실 때에는 성도들의 군대 선두에 서서 완전무장한 채 살기등등하게 오시지만 우리를 부르러 오실 때는 그와 같지 않다.
머리와 머리털이 눈처럼 흰 까닭은 그 분이 영원부터 계셨던 알파와 오메가, 불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요, 노인들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 20:29).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노인 같은 백발을 지니셨다면 뭔가 안 맞는다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예수님은 영원히 늙지 않으시는데 왜 백발을 하고 계신가 말이다. 예수께서 항시 이 모습으로 계신다면 우리는 백발이 성성하신 노인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가 되는 것인데 물론 그런 의미에서의 백발은 아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유가 있어서 이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흔히들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검은 것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는 것이다. 그들이 흑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면서 내놓는 구호가 검은 것은 아름답다이다. 물론 검은 것도 아름다울 경우가 있는데 솔 5:11에서 신부와 함께 등장하는 예수님은 청년처럼 머리가 검은 모습이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의미에서 검다, 희다를 논할 때는 검은 것은 사탄의 편, 흰 것은 하나님 편에 속한다. 맥락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의 머리는 가장 좋은 정금 같고 그의 머리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도다(솔 5:11).
과거 계몽시대에, 지금도 그렇게 하는 영미권 나라들이 있지만 재판관들은 법정에서 흰 색 가발을 쓰곤 했었다. 귀족들도 흰 가발을 쓰고 다녔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법권을 가진 "재판관 자격"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 권위를 인식시키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재판관의 흰 가발을 보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는데 이는 그러한 흰 머리카락의 권위가 계 1장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공무를 수행하시는 입장에서는 옛날 재판관들처럼 백발의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이고 또 주께서 교회를 신부로 맞이할 때는 영원한 청춘의 의미로서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타래를 하고 계신 것이다. 상황이 서로 다른 것이지 주님이 늙어졌다 젊어졌다 한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계 19:12).
그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사람이 뭔가 엄청 화가 났을 때, 혹은 질투심에 사로잡혔을 때, 전장에 나가 있는 병사가 적군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돌격할 때, 그럴 때의 상황과 맞아 들어간다. 일상적으로 누가 눈에 불똥을 튀기면서 친구나 가족을 들여다 보지는 않는다.
주께서 신부인 교회를 아내로 맞을 때 주의 눈빛은 불꽃 같지 않으며 비둘기처럼 양순해 보인다고 역시 솔로몬의 노래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의 눈처럼 젖으로 씻겨 알맞게 박혀 있도다(솔 5:12).
이건 당연한데, 결혼식에서 신부를 보는 신랑의 눈이 잡아 먹을 것 같은 불꽃 튀기는 눈이라면 그건 뭔가 상황이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눈에 불을 담아서 요한을 보셨을까, 요한에게 뭔가 불만이 많으셔서 그를 노려보신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정평이 나 있었고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때 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더라(요 13:23).
예수께서 십자가 이전까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지만(요 13:1) 요한은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였다. 그런 요한이 하늘에서 만난 예수님은 무엇엔가 단단히 화가 나신 모습이었던 것이다. 요한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분노하신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는 복수의 날이 내 마음속에 있고, 내 구속의 해가 오기 때문이라. 내가 보았으나 도와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붙들어 주는 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겼도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고 내 분노가 나를 붙들었도다(사 63:4-5).
요한이 목도한 예수님의 모습은 자상한 목자의 모양이 아닌 사 63장에 묘사된 화가 날 대로 난 예수님이었다. 주님은 복수의 날을 위해서 칼을 갈고 계신데 이 땅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사탄의 교회에 대해 복수를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큰 바빌론이라 불리는 그 사탄의 교회는 2천 년 동안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살해해 왔으며 성경을 변개시켜 온 집단으로서 로마 카톨릭이라 일컫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에서 교회들을 보고 계셨는데 요한이 등장할 때 마침 주님은 일곱 교회들을 미혹하는 로마 카톨릭 창녀 교회의 가증함 때문에 화가 나 계신 상태였던 것이다.
혹은 질투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가 자기 아내를 질투하면, 아내를 주 앞에 세우고 제사장은 그녀에게 이 모든 법을 실행할지니라(민 5:30).
남편이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으면 질투하듯이 주님께서는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성결해야 할 신약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 여자 마귀(가짜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사탄의 교회 로마 카톨릭을 쳐다 보고 "로마로 향하는 길"(WCC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을 걷고 있음에 크게 노하신 것이다.
이는 그녀의 집은 죽음으로 기울어졌고 그녀의 길들은 죽은 자에게로 기울어졌음이라(잠 2:18).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솔 8:6).
질투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인데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이시라"라고 소개하셨다면 사랑의 한 측면인 질투도 주님의 성품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이 세상과 육신, 마귀를 사랑하는 것에 화를 내시며 질투하신다. 질투하는 남자의 눈에는 불똥이 튀기는데 그래서 주께서 요한을 보셨을 때 그 눈에는 화로가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것은 자신의 순결한 신부를 더러운 악한으로부터 지키려는 남자의 질투의 불이었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계 19:12).
가루 서 말에 누룩을 숨겨넣는 그 여인이 지옥까지 낮아져 내동댕이쳐지기 전까지, 또 그녀와 더불어 음행하며 세상을 미혹한 그 큰 거짓말쟁이 적그리스도, 그의 심복 거짓선지자가 불못에 던져지기 전까지 주님의 분노는 쉴 수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재림하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꽃이 보이는 것이다. 요한은 재림이 임박한 시점에서 큰 분노를 드러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보았고 비록 그 자신이 가장 사랑받는 제자로서 신부 교회의 예표이기도 했으나 맥없이 주님 앞에 엎드러지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죄악 세상에 대한 분노는 그처럼 거칠고 광포하고 무섭기에 그 분노가 사랑받는 자인 그리스도인, 나에게 퍼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분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가 질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살후 1:8-9).
어떤 불가지론자들이 "사과 하나 잘못 따 먹어서 아담을 괴롭히는 하나님"을 성토하는 것은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진노의 진면목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물정 모르고 헛소리 하는 것이다. 물론 선악과는 사과가 아닌 초자연적 포도나무 열매이지만 어쨌건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질투, 분노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이 기대하는 하나님은 착한 일에 대해서 상점 주고 나쁜 일에 대해서 벌점 주는 사감 선생님 정도의 존재인데 실상 하나님은 범죄한 혼들을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집어넣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영원토록 외면하실 수 있는 냉엄한 심판주이시기도 하다. 그런 분이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죄없으신 독생자의 몸을 주어서 희생제를 삼게 하셨다면 그 분의 사랑은 틀림없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100% 순도의 지고한 사랑일 것이다.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계 1:15).
여러분이 신혼방에서 신부와 사랑의 밀어를 나눌 때 "많은 물 소리와도 같은" 음성으로 대화한다면 그건 싸우자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주님의 외양에는 진노가 묻어 나오는데 그 목소리 또한 호령하고 외치고 부르짖는 것 같은 소리였다. 수 만명의 군대가 일제히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적들을 압도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주님에게서 나왔다. 역시 이 모양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현재 계시는 모습이 아니라 재림의 상황에 맞춰진 예수님이다.
더구나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았다. 그런 모습은 주님의 발 밑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주는데 여러분이 NASA 기지에서 우주 로켓을 발사할 때의 장면을 그려 보라. 왕복선 엔진 밑에서 지옥의 화마 같은 긴 화염이 솟구쳐 나오고 용이 불을 뿜는 듯한 그 화염과 연기 속에서 로켓이 서서히 올라간다. 그 광경을 볼때 여러분 가운데 "야, 저 엔진 밑에 가서 선텐 좀 해 볼까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위기감을 못 느끼는 실성한 사람이다. 보통은 무섭다는 느낌,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위협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즉, 발 밑에서 화염이 이글거리는 어떤 사람과 여러분이 마주 앉아서 티타임을 갖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주께서 올리브산 위에 착지하시는 재림 장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확인해 보라.
그의 발이 그 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슼 14:4).
주님께서 천상의 백마, 곧 유니콘에서 내리시면서 올리브 산 꼭대기를 밟으시는데 그 순간 산이 크게 요동하면서 좌우로 갈라져 버린다. 주님의 발이 용광로의 열기 같은 화염을 내뿜기에 산이 좌우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여러분이 모세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을 때의 상황을 연상해 본다면 그 바다를 갈랐던 하나님의 거대한 힘이 올리브 산을 내리쳐서 쪼개 버리는 광경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작정하고 한 번 발을 구르시면, 또는 가볍게 툭툭 지면을 두들기셔도 산이 무너지고 갈라지는데 여러분이 슈퍼맨, 아이언맨 같은 현대 헐리우드 영화들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이런 연상은 하기가 쉽지 않다.
요한이 보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이고 분노를 한껏 품은 채로 지상으로 내려가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려고 준비하시는 예수님이었다. 그러니 그 분노의 칼끝이 요한을 향한 것은 정녕 아니라 할지라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무섭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사탄도 이 우주에서 두려운 위용으로 따져서 둘째 가면 서러울 존재인데 사탄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은 어떻겠는가?
그에게 네 손을 대어 보라. 싸움을 상상해 보고 다시는 하지 말지니라. 보라, 그에 대한 소망이 헛되니 사람이 그를 보기만 하여도 기가 질리지 아니하겠느냐?(욥 41:8-9).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대적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마귀보다 수억만 곱절 위용이 있으신 주님이 우리의 엄호를 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주께서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진노를 보이실 때 그들은 주님 앞에서 차라리 소멸되기를 바랄 것이다(계 6:16).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을 소멸시키지는 않고 영원한 격리 장소인 불못으로 내려보내실 것이다.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주님의 음성은 지구 전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음성인데 나아가서 전 우주까지 채울 수 있는 음성이다. 많은 물 소리를 여러분은 어떤 소리라 여기는가?
높이 계신 주는 많은 물들의 소리보다 정녕, 바다의 큰 파도들보다 더 강하시나이다(시 93:4).
우리가 지구상에서 접하는 대서양, 태평양 등의 물 소리는 그 바다가 노호하고 태풍을 일으킬 때 얼마나 귀를 멍하게 만드는가? 파도가 노호하는 소리를 항상 들어야 하는 선원들은 많은 물 소리라는 말씀에 대한 감흥이 또다를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세상과 이 세상을 가르는 깊음이라는 바다는 지구상의 모든 물을 합친 것보다 훨씬 크다. 그 바다는 잠잠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요동하고 있는 거친 폭풍의 바다이다. 주께서 폭풍우 속의 배에 타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겁에 질렸다.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 1:2).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그를 보고, 불안하여 말하기를 “유령이다.”라고 하며, 무서워 소리지르더라(마 14:26).
주께서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시면서 형체가 분간될 정도의 거리에 이르자 그때 배에 있던 제자들이 사람 형상이 물 위에 선 것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쳤다. 폭풍이 불어닥치면 사람이 악을 쓰고 고함을 질러도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서 계신 예수님이 27절에서 "기운을 내라. 나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실 때 손으로 나팔을 하고 산 정상에서 야호~ 하듯이 목이 쉬게 외치셨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폭풍의 소음을 일시에 음소거 시켜버리고 주님의 음성만이 낭랑하게 들려오는 현상을 경험했을텐데 이것이 우주적 깊음의 파도들보다 더 강한 주님의 음성이다. 그 음성은 이 바다에 대해서 원리적으로 다 이해하고 알고 계신 분, 그것을 조성하신 분께서 하시는 전문가의 '안심하라'는 음성이었고 제자들은 그 분이 창조주이심을 순간적으로 인식하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하나님께 노래하라. 그의 이름을 찬송하라. 그의 이름 야로 인하여 하늘들을 타고 달리시는 그를 칭송하며 그분 앞에서 기뻐하라(시 68:4).
환란전휴거 때 주님께서 우주적 홍해를 가르고 하늘나라를 나오려 하시면 기세 높던 그 파도는 고개를 숙일 것이고 많은 물 소리 같은 그 분의 음성이 우주 공간을 관통하여 한참 아래쪽에 있는 지구까지 도달할 것이다. 이 지면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이 우주적 위쪽을 볼 때에 주님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은 많은 물 소리를 BGM으로 깔고 그들에게 들려올 것이다. 즉 우주적 홍해의 폭풍 소음이 주님의 음성에 배경음악처럼 "솨아아아"하고 깔릴 것이란 얘기다. 즉 제자들에게 물 위를 걸어 오신 그 장면처럼 주님은 극적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6).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인데 원래 섬기는 사역을 위한 인격적 존재인 천사들은 따로 있고 여기서 말씀하는 천사들은 각 교회들의 이미지가 별로 형상화되어 주님 손에 들어 있는 것이다. 주께서 언제든 이 지상의 교회들을 관찰하고자 하실 때 천체 망원경을 펴서 지구를 내려다보실 필요가 없고 오른손만 펴고 거기에 투영되는 홀로그램 이미지들을 보면 되는 것이다. 천사는 기본적 의미가 "현현"이고 주님의 손 안에 지상의 일곱 교회가 현현하여 등장했다는 말이다. 일곱 교회를 치리하는 목회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하늘에 현현해 있다는 말이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칼은 대인용 병기이며 연필 깎는 칼이나 무채 써는 칼이 아니다.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것으로 민족들을 칠 것이요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계 19:15).
계 19장에서 일어날 사건이 1장에서 예고편 격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어쩌면 요한은 주님께서 내려가기 전에 몸 풀기를 하면서 시동을 거는 준비 동작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시록을 순차적 진행 구조로만 파악하는 단순 무식한 해석가들은 계 19장의 지상 재림 상황이 1장에서 벌써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1장에서 22장까지를 연대기적 순서로만 보기 때문에 계시록이 대환란이라는 하나의 스토리를 여러 방식으로 달리 조명하며 여러 번 반복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 단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내가 계시록의 서사 구조를 파괴하는 사람처럼 보일텐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계시록 1장에서 지상 재림이 발생한다고 설명하는 게 아니다. 단지 주님께서 19장에서 보여주실 모습을 1장에서 이미 보여주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이유야 어떻게 추리하건 간에 여러분이 계시록 1장에서 22장까지를 일렬로 놓고 타임라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고 주님의 말씀은 그 말씀의 주인과 흡사하게 닮았다고 나는 이미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중에 재림하시는 주의 입에서 나올 그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은 지금 우리 앞에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한글킹제임스성경이기도 한 것이다.
이 말씀은 지금 누구를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지만 때가 이르면 2억의 군대를 살상하는 효과적인 살인 병기가 될 예정이다. 여러분은 성경책이 생명을 주는 책이고 소망과 믿음을 주는 책으로 알텐데 이 책은 원수의 피로 흥건하게 넘칠 아마겟돈을 묘사하고 있는 피의 책이기도 하다. 성경은 피로 점철된 책인데 최초의 살인자가 살인의 피를 흘렸던 시점부터 인류 최후의 피흘리는 전쟁이 묘사되는 계 20장까지 이 책은 쉬지 않고 피를 노래한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 있는 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피이지만.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주님의 용모는 재림 때에 해처럼 맹렬하게 비췰텐데 그 기세는 새벽녘이 되어 지면에 아지랭이를 남기면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아침 해의 맹렬함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 그리하면 너희는 나가서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자라리라(말 4:2).
주님의 말씀이 양날 가진 칼인 것처럼 의의 태양이신 주님 자신도 양면성을 갖고 계시다. 그 분의 빛은 메시아를 기다린 남은 자들에게는 치유의 효력이 있고 그를 대적하기 위해 진친 아마겟돈의 원수들에게는 맹렬한 기세로 태워 버리는 불, 소멸케 하는 불과 같다(히 12:29).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니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마 17:2).
주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던 일이 또 있는데 변화산 사건 때에 그런 주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의 얼굴이 이렇게 변화된다는 것은 지상 재림과 연관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즉 변화산 사건에서 모세와 엘리야, 곧 두 증인을 대동하여 지상 재림하신 주님의 해 같이 빛나는 용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16절을 살펴볼 때 이 모든 조합은 지상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모와 100% 일치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장면은 19장에 가서야 나온다. 그러면 그 사이에 있는 본문들은 시간적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는가?
이 문제를 쉽게 정리하기 위한 나의 설명 방법은 이것이다. 잘 이해해 보기 바란다.
1장 전체는 "과거 시제"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1장이 22장과 마찬가지로 주요 사건들이 종료된 후에 "후일담" 형식의 회상체로 기록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1장과 19장 사이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단지 우리는 2장-21장까지 서사적 구조로 이어져 있는 대환란과 천년왕국, 영원시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보면 된다. 때로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삽입식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따로 수집해 두면서 계속 보면 된다.
다만 유의할 점은 1장은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들과 별개로 독립장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1장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그런 용모를 갖고 나타나셔도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다. 계시록은 "양괄식 구조"를 갖춘 서사인데 1장의 책 머리와 22장의 책 말미에 전지적 시점에 처한 화자가 회고적 서술을 하고 있는 형식이다. 요한이 제시하는 미래의 주요 사건들은 이 처음과 끝 부분을 뺀 중간 단락들에 다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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