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구기행 19: 관광과 묘역순례- 빈의 중앙묘역에서
이번 글로 동구기행을 끝냅니다. 글이 길어져 쓰지 못한 것들을 동구기행 20: Epilogue로 올립니다. (사진도 같이)
빈에서의 일정으로 이번 여행은 마무리 지었습니다. 7월 5일 아침 일행들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한 뒤 각자 제갈 길로 갔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는 팀은 우리들 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이미 2-4주 여행을 한 후 이번 투어에 참여했거나 다음 여행을 위해 떠났습니다. 일부는 빈 호텔에서 쉬면서 다음 일정을 기다리더군요.
우리는 비행기 일정상 하루 더 빈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신우재 형이 ‘약간 조심스럽게’ 빈의 중앙묘지/묘역을 구경하고 싶다면서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쪼개졌다 저녁 때 만나자고 하더군요. ‘묘지’는 단순한 grave/tomb이라면 ‘묘역’은 공원화된 곳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묘지도 묘역이라 해야 하나요? ..... 나는 묘역 구경에 대찬성하고 모두 전차로 중앙묘역으로 향했습니다.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좀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묘역구경입니다. 묘지만 본다면 좀 청승맞겠죠. 그러나 도심의 쇼핑몰이나 역사적 유적지 구경하고 그 지역의 별미를 즐기면서 묘역에 가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묘들이 한국과 같이 산에 있는 게 아니라 공원화 되었거나 마을 중앙에 있는 교회 뒤뜰에 있기 때문에 찾기도 쉽습니다.
한국에서는 시내에 묘를 쓸 수 없죠. 서울 4대문 안에 묘를 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묘는 덕수궁을 짓기 전 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왕비의 능을 보고 싶어 황토마루(광화문) 언덕을 깎아 낮추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등극한 태종 이방원은 4대문 안에 묘를 쓸 수 없다는 명분으로 이 묘를 정릉으로 이장했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4대문 안에 묘가 하나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 성당을 지은 선교사 Mark Trollope주교입니다. 1930년 역병 구제 중 죽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성당 지하에 묻혔다는군요.
우리가 찾는 묘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입니다. 이들과 대하면 때로는 ‘일정 백년’ 사지도 못하면서, 또 옳고 그른 것 이기고 지는 것 모두 고개 돌려 보면 헛된 것(시비승패전두공是非成敗轉頭空)인데, 왜 초조하게 헤매었던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18세기 시인 Thomas Gray(1716-1771)의 ‘시골 교회마당에서 쓴 엘레지(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 한 구절을 보시죠. 이 시는 아래에서 다시 말할 것입니다.
The boast of heraldry, the pomp of pow'r,
And all that beauty, all that wealth e'er gave,
Awaits alike th'inevitable hour:
the paths of glory lead but to the grave.
(귀족들의) 호화로운 문장 장식, 권력의 화려함을 뽐내고
아름다움과 재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시간을 모두 같이 기다리는데,
영광의 길은 단지 무덤으로 향할 뿐이라.
또 묘지의 주인들이 생전에는 최고의 가치라고 믿고 이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 것이 최선이었다는 신념이 지금도 과연 그러한가라고 되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묘역여행이 가장 생생하게 남습니다. 나는 사진을 별로 찍지 않는데 묘역에서 찍은 사진들은 제법 있습니다.
빈 중앙묘역과 여기에 잠들어 있는 베토벤 등 악성(樂聖)들에 대한 긴 설명은 생략합니다. 중앙묘역은 넓이가 2.4㎢, 묻힌 사람이 330만 명이니 현재 비엔나 인구(175만 명)의 거의 두 배나 된다고 합니다. 2.4㎢라면 감이 잡히지 않겠지만 한쪽이 4km, 다른 한쪽이 600m인 직사각형 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혹은 3km x 800m)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가 약 2.8km라니 가로로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세로로는 을지로를 지나 청개천을 넘어 충무로 까지, 서울의 중심부를 거의 포함하는 넓이라면 감이 잡힐 것입니다. 런던 중심에 있는 Hyde Park도 옛날에 계산해 보니 이와 비슷한 것 같은데, 이 공원이 묘지공원으로 된 셈이네요.
악성들이 여럿이 묻힌 묘역을 찾는다는 건 역사적 인물들의 일생 부침을 되돌아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주는군요. 그들이 남긴 곡들이 벌써 나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고전 음악에 본격적으로 접하면서부터 이들은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의 매일’ 이들의 음악을 들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살아갔다는 말이 아닌가요.
나는 제주(祭酒)로 와인 한 병을 준비했습니다. 조상의 묘를 찾는 것도 아닌데 제주라니 하겠지만 나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할 일이 없을 때 호텔에서 마실 것이라고 모스크바 공항에서 산 것인데 그동안 싸돌아 다녀 마실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보르도 산 white wine 한 병을 골랐습니다. 값은 20유로 정도.
그런데 아내가 묘역 입구 옆에 늘어선 꽃 상점으로 가더니 반병(375ml)짜리 red wine을 한 병 사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바칠 꽃을 사려 가는 줄 알고 그 갸륵한 정성을 칭찬하려 했습죠. 그런데 꽃집에서 와인을 한 병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 왈, 내가 가져간 와인은 비싼 건 아니지만 보르도에서는 별로 재배되지 않은 품종으로 만들 것이라 와인그룹 친구들과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마셔야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품종인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흔치 않은 것 이었습니다.) 무거운 와인 한 병을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오후에 아내가 손주들 선물 사려 가게에 들어간 뒤 기다리는 시간에 목이 말라 혼자서 따 마셨습니다. 떳떳해진 white 와인의 향이 살아나 별미더군요. 화이트는 항상 차게 해서 마셔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은 것은 빈 물통에 넣었다가 슈베르트가 좋아했다는 햇포도주 생산지인 빈 근교 Grinzing에서 저녁 먹을 때 나누어 마시고요. 와인꾼들은 와인 병 따게는 항상 준비해 다닌답니다.
나는 악성들의 묘역에 경건한 마음으로 술을 뿌렸습니다. 이들이 천상에서라도 저 먼 극동의 한 나라에서 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정성스럽게 올린 와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리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가 와인을 좋아했다죠. (사진 1)
서양인 하나가 어슬렁거리면서 우리 일행들을 보고 있더군요. 묘역구경을 왔으면 제 볼 것이나 볼 것이지 왜 우리를 계속 처다 본당가? 기분이 나쁘더군요. 이 친구 역시 동양인들이 악성들의 묘역에 와인을 뿌리는 모습은 생소했겠죠. 헌주하는 동양의 풍습을 그가 알리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서서히 높아가는 감흥을 억누르면서 이 무식한 서양인에게 죽은 이와 술을 나누면서 일체감을 느끼는 우리의 음복의식을 설명해주고 싶지도 않고. 이곳에서는 공원에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답니다. 우리가 술을 마셨다면 이 못된 서양인의 고발로 경찰이 달려왔겠죠.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종이 잔을 입에 대고 집사람에게는 넘긴 것 같은데요?.....
음악, 특히 작곡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예술분야도 물론 인간의 천재적 창조성이 분출할 때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겠지요. 그런데 음악은 그 창조성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잡스러운 생각들을 비워야 할 것입니다. 음악의 표절이 가장 쉽게 잡히지 않는가요? 반면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접장들의 논문표절은 다른 교수의 글을 모조리 베껴서 채워도 한참 지나서야 발견되지요. 여기 중앙묘역에 묻힌 분들은 모두 인생의 상념과 망상에서 해방되어 정신이 순수한 無의 경지에 이른 분들일 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시냇물 소리와 봄이 오는 것을 느끼고 나폴레옹 군화의 행진에서 인간의 해방을 포효하는 웅장한 멜로디가 솟아났겠죠.
나는 우리를 감시하는 한 서양 촌놈 때문에 약간 잡친 기분으로 중앙 묘역을 떠났습니다. 나오는 길 양편에는 당시에는 잘 나갔던 왕후장상들의 화려한 묘역들이 늘어서 있더군요. 그러나 누가 눈길 한번 주기나 하나요. 런던 웨스트민스터 교회(Abbey)의 중앙에 뉴턴의 묘가 있지만 그 곁에는 우수마발(牛溲馬勃)들인 왕족들의 묘가 늘어져 있고 이 복도를 지나 문인들의 명패만 붙인 초리한 Poets’ Corner로 가는 기분입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전차를 타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의천하’, 치마 폭에 제국을 품은 암탉 Maria Teresa(독일어로는 Theresia)의 동상이 버티고 있는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이번 여행 중 이미 묘역 두 곳을 둘렀습니다. 첫 번째는 크라카우에서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 리스트를 촬영하면서 자주 들렸다는 유대인 식당 옆에 있는 유대인 묘역입니다. 묘역에 들어가는데 입장료 내고 또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관습에 따라 유대인이 쓰는 키파(kipa)라는 붉은 캡을 쓰는 것으로 잠시 동안 유대인이 되어 경건한 마음으로 묘역을 구경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중학생 정도 되는 독일애가 찍은 것입니다. 관광을 겸해 유대인 박해 현장을 찾은 듯합니다. (사진 2)
두 번째는 프라하 유대인 공동묘역입니다. 그러나 몸은 피곤한데 정문을 찾기 어려워, 또 크라카우에서 충분히 보았기에 높은 담장 뒤에 있을 묘역을 상상하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시내 중심부에 있는 이 묘역은 더 이상 넓힐 수 없어 시신 위에 다시 매장했다고 합니다. 죽은 이를 대하는 태도, 매장 풍습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한 묘역에 (가족들을) 합장하는 것이 유대인 관습이 아닐 것입니다.
묘지/묘역 순례는 쓸 게 많지만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소개하습니다. 첫 번째는 시신을 차곡차곡 쌓아 매장/합장하는 풍습입니다. 영국에서 런던 구경을 한 후 더 보고 싶으면 북으로 윈저성과 그 곁에 있는 Eton College를 보고, 또 더 보고 싶으면 북으로 처칠의 생가인 말보로 공작의 저택 Blenheim Palace와 옥스퍼드에 닿습니다. 또 더 보고 싶으면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Stratford와 Warwick(워릭) 성을 찾습니다. 윈저-이튼에서 영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약간 옆으로 틀어 20km 정도 가면 Stoke Poges라는 시골 교회가 나옵니다. 이곳이 앞서 말한 Thomas Gray의 ‘엘레지’의 고향입니다. 이 작품은 김성우 한국일보 고문이 쓴 <세계문학기행> 영국 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그레이 기념탑아래 앉아 엘레지를 읽고 있는 여인이 박원숙이고 그 옆에 어린 하원이가 보입니다. 지금은 42살로 두 애의 엄마입니다.)
그레이는 1757년 계관시인(Poet Laureate)으로 추천되었으나 거절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우리에게는 1750년 작품인 ‘엘레지’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는 전쟁터에서도 낭독될 정도로 운율을 중요시하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영국이 해상-식민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7년 전쟁’의 퀘벡전투(Battle of the Plains of Abraham, 1759)에서 영국 장군 James Wolfe는 출정을 앞두고 휘하 장졸들에게 ‘나는 퀘벡을 차지하기보다 이런 시를 쓴 시인이었다면 좋았겠다.’고 하면서 이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Wolfe는 7년 전쟁의 승리자로 유명합니다.) 하기야 인도보다 셰익스피어가 중요하다고 한 칼라일(Thomas Carlyle)도 있으니 뭐라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저도 즐겨 읽는 시 중 하나입니다.
첫 연은 소리 내어 읽어보면 첫 행과 3행이 day와 way로, 2행과 4행이 lea와 me로 운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강 번역하면,
저녁노을은 낮이 저물어 감을 알리고/ 울음소리를 내는 소 떼는 천천히 굽이굽이 걸어가고/농부는 집으로 지친 발걸음을 옮기고/이 세상엔 어둠과 나 홀로 남는다.
The curfew tolls the knell of parting day,
The lowing herd wind slowly o'er the lea,
The plowman homeward plods his weary way,
And leaves the world to darkness and to me.
그리고 ‘담장이 덩굴이 뒤엉킨 탑에서 올빼미가 투덜거리는.....’을 지나 12행부터
저 뒤틀어진 주목나무(yew-tree) 그늘아래/잔디 더미를 모아둔 곳에/여기 좁은 방(무덤)에 영원히 누운/조잡한(농군)인 나의 선조들이 잠들고 있다
Beneath those rugged elms, that yew-tree's shade,
Where heaves the turf in many a mouldering heap,
Each in his narrow cell for ever laid,
The rude forefathers of the hamlet sleep.
churchyard의 무덤에는 한 묘역에 한 사람씩 묻혔지만 교회 정문 옆에 있는 사각형 묘가 두 개 있는데 이 중 하나에 그레이가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합장되어 있습니다. 묘에는 그의 이름이 없지만 교회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시인이자 교수로 당시 유명인사인 그레이가 교회묘지에 따로 묻히지 않고 가족들과 합장되었는지는 아무 설명이 없군요.
다음은 소설가 Thomas Hardy(1840–1928)의 묘입니다. 런던에서 서쪽 끝 ‘땅 끝(Lands’ End)’이라고 부르는 곳까지 가는 길이 좋습니다. ‘땅 끝’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등대로(To the Lighthouse)>의 모델이 된 등대를 만나는 곳입니다. 그 중간쯤 Thomas Hardy의 고향인 돌체스터(Dolchester)가 나옵니다.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가 도망치면서 전전한 장소와 귀향(The Return of the Native) 도입부 명장면인 Egdon Heath 등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북으로 가면 Salisbury 평원의 Stonehenge가 나오죠.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해 그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못 들어가게 했지만 1970년대에는 그 돌덩이 위에서 놀았습니다. 죽음을 예견한 테스가 경찰에게 체포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은 하디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들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나는 특히 Egdon Heath 와 X Moor와 같은 황무지들을 좋아했습니다. 평원보다는 약간 높은 언덕으로 이어지며 무릎아래 오는 히스가 뒤덮인 황무지인데 여름에 보라색 꽃이 만발하면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이곳에서 지게 모양인 A형 (작은) 텐트를 치고 밤하늘을 올려보면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지는 어린 시절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죠.
무어에서의 며칠은 정말 좋습니다. 박사학위를 끝내고 한 6개월 정도 여유롭게 한국관계 영국외무성 문서를 수집하여 서울의 국사편찬 위원회로 보내는 작업을 하면서 7여년 영국생활을 마감하는 여행을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북쪽 Yorkshire Moor로 갔습니다. 브론테 자매의 고향이 바로 아래 펼쳐지는 대표적인 영국 황무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틀간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를 거닐다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만, 하디의 무덤은 그의 고향 Stinsford의 St Michaels 교회 뒷마당에 있습니다. 그런데 런던 Westminster Abbey의 Poets’ Corner에도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하디의 심장은 고향에 묻혔고 몸은 화장하여 웨스트민스터에 안장된 것입니다. 하디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Stinford 고향 묘역에 묻히고 싶다’고 했고 가족들도 강력히 고향 묘역을 원했답니다.
그러나 런던의 유지들이 웨스트민스터를 고집해서 그 타협으로 심장만이 고향 땅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하디의 심장만 남겨 받은 가족들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격분했다지만 유언집행인과 런던의 유력한 성직자들을 어떻게 꺾겠습니까? 그의 심장은 첫 부인 Jemma와 합장되고 두 번째 부인 Florence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힙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서는 하디의 심장을 꺼낸 의사의 고양이가 심장을 낚아채서 먹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심장이 묻혔다는 풍문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삼국연의>에는 장비를 죽인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을 넘겨받은 장포(장비의 아들)가 이들을 심장을 꺼내 아버지에게 제사지내는 장면이 나오듯 동양에서는 심장을 분리 매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유럽에서는 몸과 심장을 분리하여 장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혼과 애정, 용기, 양심 등을 상징하는 심장은 신체 부위 중에서 존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Richard 1세의 심장은 노르망디 루엥 성당에, Henry 1세는 몸은 영국 레딩(Reading)에, 심장은 내장과 뇌, 눈, 혀와 함께 루엥 성당에 있답니다. 쇼팽도 그의 소원에 따라 심장이 분리되어 알콜(아마도 브랜디)에 담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바르샤바에서 가장 유명한 크라코프 신세계 거리(Krakowskie Przedmieście & Nowy Swait)의 성십자가 교회 기둥 속에 봉인되었다고 합니다.
묘역들을 둘러보면 한 인간의 삶고 죽음, 그리고 후세의 평가를 통해 ‘내가 누구이며, 무얼 하며 살고 있는가/ 혹은 살아 왔던가’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코끝이 찡해 옵니다. 반대로 사체를 방부 처리하여 영묘(mausoleum)에 모시고 세인들이 참배하게 하는 인물들, 레닌에서 시작하여 스탈린(그 후 옮겨졌지만), 모택동, 김일성과 김정일 등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지 않습니까? 레닌은 멋진 삶을 살다 간 인물이지만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영묘 앞에 줄을 지어 기다라는 인간들은 사자(死者)의 얼굴을 보아 뭐 하려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더군요. 서안의 진시황능이나 복경의 명릉(明陵)도 마찬가지입니다. 4.19 후 탑골 공원에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상 머리부문을 똥차에 매달고 다닌 치욕스런 역사가 되풀이되기를 누구도 원치 않을 겁니다. 또 최근 들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혹은 되고 난 뒤 조상의 묘를 풍수가 좋다는 곳으로 옮기거나 치장한 이들은 어떻습니까? (2013.10.24.)
사진1: 24-4DSC 8779 베토벤 묘소 헌주.
사진2: 11-2 DSC 7244 크라카우 유대인 묘역에서.
사진3: 1970년대 중반 이 교회를 찾아서, yew-tree의 그늘아래 그레이의 무덤은 오른쪽에 쪼끔 보입니다. 모델은 박원숙.
사진4: 1970년대 중반 하디의 무덤을 찾았을 때. 그의 심장이 묻힌 곳을 찾았다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그의 할아버지 Thomas와 할머니 Mary의 무덤입니다. 하디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Thomas로 지은 겁니다. (동구기행 20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