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친구들 안동에서 첫모임 했다.
1월 22일 저녁 6시에 종찬이를 태우고 안동으로 가면서 4차선 따라 죽 가니 송현오거리 나오더라.
부창(府昶)에서 성연이 만나 잠시 얘기 중 상진이와 영길이가 왔다. 친구는 다섯 명.
식사 중에 성연이가 다니는 광진주식회사 이동시 사장님이 오셔서 일행은 여섯 명.
희한하게도 영주친구 모임은 늘 참석자가 육인이다. 육자회담이 북핵비핵화 6 개국 대표자 회담만 6자회담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영주친구들 모임도 6자회담이라 할 것이다.
먼저 참석장에 도착하는 여섯 사람이 당일의 6자회담 주인공이고 나머지 도착자는 참관자이다.
우리끼리 얘기는 성연이가 주문한 맛있으면서도 인공조미료가 거의 들지 않은 한식으로 얘기 꽃을 피우며 즐겁게 먹는데 사장님이 오셨다.
성연이 말에 따르면 사업해서 번 돈으로 알찬 사회사업과 기부사업을 많이 하여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던 분인데, 세 차례나 성연이를 광진기업 연구소로 와 주십사 하고 영입하여 마침내 연구소로 옮겼다고 한다. 이날도 검찰청, 교도소 관계자들과 선약이 있어서 늦게 오셨다고 하는데 전주가 있었음에도 우리들과 유쾌한 얘기가 많이 이어졌다.
사장님은 어릴 때 동시라는 이름이 "통시"라는 발음과 비슷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동시같은 인생의 동시란 이름이 좋다고 하셔서 함께 웃었다. 성연이의 사업수완과 여러가지로 인하여 사장님이 성연이를 믿고 함께 즐겁게 사업하는 이야기가 보기 좋았다. 영길이가 성연이와 사업협력하는 것도 잘 되는 것 같고.....사장님 허락을 얻어서 사진도 찍었다.
고맙게도 이날 식사대는 성연이 덕분에 사장님이 계산하셨다.
이날 우리끼리 오간 얘기는 단연 학교시절 이야기였다.
이날 공통된 의견은 당시 학교 다닐 때 우리들도 어지간히 공부를 안했지만, 선생님들도 예민한 우리들의 나이에 비하여 면학분위기 조성에는 책임회피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영길이는 결석을 한 달 넘게 했더니 담임 선생님이 부르더니 자퇴하라 하기에 마지 못해 나오게 되었고....이런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에 대하여 당시에 고민한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그래도 상진이는 이런 분위기라는 것은 다 인정하지만 자신만은 공부는 뒷전이었고 학교 다니는 자체가 즐겁고 좋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보다 우리 친구들이 더 자기가 바라던 것을 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었지만 종찬이의 "다 이렇게 살라고 하늘이 정해 놓은 일"이라고 하는 말에 다들 수긍하고.....
종찬이의 퇴학된 얘기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얘기였다는 것이 이날 알게 되었는데.....
종찬이가 사고치던 그날 학교앞 술집에서 대낮부터 술을 마셨는데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방을 돌아가며 술병이 빙 돌아갔다. 그러다 시비가 붙어 술병을 휙~쓰러뜨리니까 좌르르 넘어가며 깨지다가 깨진 조각 하나가 술집여자 발에 박혀 피가 났다. 그러자 물어 내라하니 종찬이가 내가 치료해주마하고 여자 손을 잡고 학교 양호실에 데려갔다......양호실에 치료하고 나오는 걸 교장이 봤다....그래서 퇴학이 되었는데 전학가기까지 한달가량은 그냥 건달양이로 학교에 나왔고, 평창 대화고교로 전학가서 첫날 퍼모스트를 외상으로 돌려 기를 잡았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안동에서 성연이가 돌아갈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아 오래도록 얘기했다.
헤어지고 종찬이와 성연이와 "아담"카페에 가서 다시 한잔하고 왔다. 집에 오니 새벽 1시.
우현이는 안동도착 시간인 7시 넘도록 목디스크 치료받느라 병원에 있어서 못 오고.
병학이는 야근하느라 못 오고.
서락이도 야근에 정신없어 참석 못해 미안하다고 하고.
국선이는 부산에서 한 잔 하는 중이라고 전화 왔고.
그래저래 확실한 6자 회담이다.
설 명절 잘보내고 2월에 보자.
2009.1.24.
영주에서 동규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