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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 사진들.....
1. 김경철 (29세. 장애인노동자, 묘지 1-01)
어릴 때 사고와 약물 후유증으로 농아가 된 김경철은 5.18 최초 희생자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공수부대에 붙들린 그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할 수도 없어 그저 두 손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들겨 패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갔으나 19일 숨졌다.
화려한 작전의 첫 희생자는 불행하게도 장애인 노동자였다.
그는 4살 때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사지가 마비되면서 3개월이나 병원생활을 하였다. 농아학교에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그는 서울에 있는 계명양화점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80년에는 광주에 내려와 국제양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농아처녀와 결혼해 80년 1월에 혜정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5월 18일 그날도 온 가족이 모였다. 첫딸 혜정이 백일을 지낸지 스무날이 된 날이다. 김경철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이 영암에 간다 해서 버스터미널에 배웅을 나간 후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날 오후 금남로 제일극장 들어가는 골목에서 공수부대에게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농아신분증을 보여주고 악쓰며 몸부림치는 경철이를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을 친구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다고 한다. 그는 말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온 몸이 두부처럼 으깨진 것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으면 편히라도 갈 것인데, 온 몸이 터질 때 꺼정 맞아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아 죽다니…….”
어머니 임금단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2. 박금희 (18. 학생, 묘지 1-26)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4남 4녀중 막내딸인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인 전남여상에 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교통비가 없어 1시간 이상을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 했고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박금희는 몸과 마음이 대단히 건강하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하였고 선도부 장을 맡을 정도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해마다 21일이 오면 친구들은 금희가 누워있는 묘지 가까운 산 속에서 경찰들 눈을 피해 숨어서 생일파티를 해주었다.
3. 최미애 (25. 주부, 묘지 1-60)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남편이 부인을 떠나보내며 비석에 피눈물로 새긴 이별가다.
임신 8개월이던 최미애씨는 5월 21일 오후 1시 30분쯤 남편을 기다리다 전남대 정문 쪽 도로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친정 어머니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갔는 데 딸이 뇌 속의 골과 피를 길 바닥에 쏟아 놓은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딸을 집으로 옮겨 놓고 배를 만져보니 몸은 차가운데 태아는 아직도 살아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이라도 살려보려고 여러 병원에 연락을 했으나 아무도 와 주질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딸을 싣고 병원을 찾아다닐 수가 없었는데 20분쯤이 지나자 아이도 엄마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족들이 손수레에 관을 싣고 장례식을 하였다.
4. 손옥례 (20. 제일약품 대기발령 중, 묘지 1-80)
손옥례양은 희생자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은 사람이며 가정파괴도 가장 비극적으로 이루어졌다. 21일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손옥례씨는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70센티 박달나무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온 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아랫배에는 수십 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숨졌다. 동생도 공수부대에게 얻어맞은 휴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남동생 손병석씨는 이상현 외과병원에 일반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8일은 일요일이라 평소부터 다니던 은광교회를 가다가 서석병원 앞에서 공수부대원한테 두들겨 맞았다. 그 자리에서 실신한 후 깨어보니 통합병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받기는커녕 계엄분소로 끌려가 왼쪽 허벅지를 대검에 찔려 10센티미터 이상 상처가 났으며 오른쪽 무릎관절을 비롯한 온몸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통 멍들어 있었다. 손병석씨는 풀려나고서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하였다. 현재 간질 비슷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뿐 아니라 군인들만 보면 덤벼들어 싸우려 한다.
아들이 병원에 누어 있는데다 딸마저 끔찍하게 죽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술로 아픔을 달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자주 호소하더니 1981년 9월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딸 때문에 충격으로 사지마비를 일으켰다. 남편이 죽자 가슴앓이가 심해져 1986년 12월에 54세에 딸과 남편 곁으로 갔다.
5. 윤상원 (31. 노동운동가, 묘지 2-11 묘비명 윤개원)
윤상원 열사는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중에서 민중항쟁을 지휘한 전사였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군인가족이 일러주었다. 그때 도청에는 300여명정도 사람들이 있었는데 윤상원 열사는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말을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결사항전을 다짐한 150명은 총을 들고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27일 새벽 무장전사들은 대부분 건물 앞에 배치되었으나 계엄군 특공대는 뒤에서 기습공격을 하였다. 윤상원 열사는 대항하기 위해 복도로 나오다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피는 흘리고 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바로 밑에서 시민군 기획부장인 들불야학 동지 김영철씨가 그를 커튼에 싸서 옮기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커튼에 불이 붙어 윤상원 열사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 후 82년 노동운동 시절 윤상원 열사가 들불야학을 통해 알게 된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씨와 영혼결혼식이 올려졌고 지금은 5․18묘역에 함께 누워있다.
이 두 사람을 위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6. 방광범 (14세, 학생, 묘지 2-18)
24일 오전 11시 지원동에 주둔했던 공수부대는 27일 작전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일부는 차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었다. 주민들은 공수부대에게 물을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월동을 지나면서 주택가에 총격을 했다.
12시 40분쯤에 광범이는 10여명 친구들과 원제부락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던 그는 친구들이 “광범아 엎드려”하고 소리치는 순간 총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버지 방두형씨는 머리가 날아가고 없다는 말에 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후에 동네 청년들이 야산에다 아버지도 모르게 묻어줬다.
이틀 후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저수지를 지나서 정신 없이 야산으로 갔다. 야산에서 방광범씨의 묘를 찾으러 돌아다니는데 공수부대가 총을 겨누었다. 아내가 “아들이 죽어 묘 찾으러 왔다, 총 쏘지 마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밥도 못 먹고 술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결국 정신분열증까지 생겨 부인과 이혼하고 말았다. 공수부대는 광범이의 머리와 행복했던 가정을 이렇게 깨뜨리고 말았다.
7. 전재수 (11. 초등학생, 묘지 2-22)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자 학교는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24일 재수는 밖에서 놀다 들어와 점심을 먹고 여동생과 장난하며 놀았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애들 노는 소리에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며 야단쳤다. 재수는 마음이 착해 “밖에서 친구들과 놀겠다”며 나갔다. 내가 그때 “조용히 해라는 말만 안했어도 그 놈이 나가서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다.
오후 1시 15분쯤 집에 있던 아버지는 폭죽 터지듯 따다다다…하는 총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시 후 마을 아이가 와서 “재수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하는 청천병력 같은 말을 했다. 바로 밖으로 나갔으나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못 보게 했다. 안보는 것이 속편할거라고 했다.
시신 주위에는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황을 말해 주었다. 아이들이 마을 앞 선산에서 도로로 이어진 비탈길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놀고 있었다. 애들은 느닷없는 총소리를 듣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선산 위쪽에 있던 아이들은 총소리를 듣고 재빨리 숨었는데, 선산 아래에 있던 재수는 선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고무신이 벗겨졌다. 9일전 어머니가 생일선물로 사준 그 신발을 주우려고 돌아선 순간 총탄이 옆구리와 허벅지에 6·7발 날아와 어린 생명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식이 죽고 나서 아버지는 술이라도 먹고 잊어버리려 했지만 엄마는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다가 4년 후, 화병으로 아들 곁으로 가고 말았다.
8. 문용동 (28. 대학생, 묘지 2-33)
문용동씨는 목사를 꿈꾸며 호남신학대학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상무대에 있는 상무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으며 야학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8남매 중 여섯째인 문용동씨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착한 성품을 지녔는데, 거리의 부랑아까지 집에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밥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80년에는 개인적으로도 일이 많았다. 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19일 도청에 갔다가 잘 아는 목사가 공수부대에 붙들려 얻어맞자 이를 말리다 자신도 얻어맞고 말았다. 그리고 항쟁에 적극 참여한다. 5월 24일 집에 들어와서 도청에서 지하실에 있는 무기고 관리를 한다고 했다. 5월 26일 문용동씨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형과 형수가 도청으로 찾아갔는데, 완강히 거부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동생친구의 전화를 받고 상무관으로 갔는데, 군인들이 출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반 강제로 밀치고 들어가 한참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동생의 시신이 있었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 부분을 보니 많이 부어 올라 있었다. 아버지는 그 날로 말문이 막혀 술로 세월을 보내다 10년 후 돌아가시고 형도 얼마 지나 지 않아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었다.
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관속에서 27일로 멈춰진 손목시계와 M16총탄이 나왔다.
목사의 꿈과 달콤한 신혼의 꿈을 뒤로 접은 채 그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목숨을 바쳤다.
9. 박성용 (18. 학생, 묘지 2-37)
“공수부대는 이 나라 군인이고 국민인데 왜 부모형제 같은 광주시민을 이렇게 무참히 죽이는 것인가”
그는 ‘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시민을 죽이는가?’ 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총을 들고 불의에 맞섰던 것이다. 그는 27일 도청에서 배와 허벅지에 총을 맞고 숨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합니다.
간략한 당시 상황입니다. [1980년 5월18일 딸의 백일돌을 지낸지 20일여일만에 그는 서울에서 영암으로가는 처남을 배웅한후 금남로 제일극장앞에서 그만 계엄군에게 걸렸고 "하나, 둘, 셋" 이라는 구호소리를 듣지못하고 장갑차에 올라가지 않자 2명의 계엄군이 철로만든 특수살상용 곤봉으로 그를 마구 구타했다. 결국 그는 심하게 다쳐 국군 광주 통합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으면서 취조를 받았으나 결국 19일 새벽1시 갓 돌난 딸과 아내를 두고 전신타박상으로 숨을 거두니 그의나이 29살이다]
5월 20일 항쟁 3일째...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합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중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를 합니다. 이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합니다. 전남대 교내에서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합니다.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합니다.
5월 21일 석가탄신일...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합니다. 오전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합니다.
시민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오후 4시, 인근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합니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합니다.
이 날 돌아가신 최미애님입니다.
최미애님 (당시 23살)은의 전남대 앞에서 M16총알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당시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최미애씨의 어머니 김현녀씨(58)씨의 증언입니다.
『전남고 영어 교사와 중매 결혼한 딸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신방을 차렸다. 80년 5월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중략>... 나중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애기를 들어보니 미애가 평화 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 맨홀 뚜껑 위에 서서 남편을 찾고 있는데, 인근 전붓대 뒤에 서 있던 공수 부대원 한 사람이 미애에게 총을 겨누고 이어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미애는 임신복을 입고 있어서 누구의 눈에도 잘 뛸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와 함께 미애가 쓰러지자 사람들은 미애가 기절한 줄 알았단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 가보니 남색에 붉은 색 무늬의 임신복이 먼저눈에 들어왔다. 일으켜 세우려고 보니 머리 뒷부분이 없었다. 땅바닥에는 보리밥 같은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황적준박사는 M16 자동소총은 화력이 세 정통으로 머리를 맞을 경우 그 뒷부분을 절단 시킬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 하나가 잘못하면 시체마저도 뺏길지 모르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떤 사람은 팔을 붙잡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붙잡고 거실에 데려와 미애를 뉘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애의 배가 불쑥불쑥 깊은숨을 쉬듯이 튀어나왔다. 뱃속에 있던 아기가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살려야 한다고 발버둥을 치며 여러 군데 병원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위는 1시20분경에 집에 돌아왔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 」그 소리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23일에 장례를 치렀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공무원의 지원으로 전기, 수도 등도 해결합니다. 치안력 부재의 상황에서도 단 한건의 금융기관 사고가 없는 유래없는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합니다. 도청광장으로 수십구의 시체가 도착합니다.
5월 23일 금요일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합니다. 그 분풀이로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의 메아리가 도시를 울립니다. . . .
아래 보이는 영정사진은 고 박금희님이십니다. [박금희님은 당시 전남여상 3학년이셨습니다. 당시 시내를 돌며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계엄군에게 하복부관통상을 입고 사망을 하셨습니다.]
사망자 중 30명은 만 18세 이하였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학생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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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형선고 [ 서울지법 - 1996년 ]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 (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는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5,18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사형,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22년 6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내란 및 군사반란 사실 등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면서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함께 기소된 정호용, 황영시, 하화평, 이학봉 피고인에게 징역 10년, 허삼수, 유학성, 최세창, 이희성 피고인에게 징역 8년, 장세동, 차규헌, 주영복 피고인에게 징역 7년, 박종규, 신윤희 피고인에게 징역 4년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에게
각각 적용된
군형법상 반란 및 내란 수괴 내란목적살인,
상관살해, 뇌물수수죄 등 10가지 죄목과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뇌물수수죄
등 9가지 죄목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전,노피고인에게는 재임 중 기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뇌물로 각각 받은 2,059억 5천만 원과 2,838억 9천 6백만원 전액을 추징금으로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1심 구속기간(6개월)만료로 석방된 유학성, 황영시, 이학봉, 최세창, 장세동 피고인 등 5명에 대하여는 구속집행정지를 취소, 법정구속하고, 불구속 기소되었던 차규헌 피고인에 대해서도 직권으로 법정구속했다. 그러나 이희성, 주영복, 신윤희, 박종규 피고인등은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또 반란중요임무 종사혐의를 받고 있는 박준병 피고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김영일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전씨네 대해 "전피고인은 군병력을 동원, 군내부 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질서를 문란케 한 점에서 죄질이 매우 무겁다"며 "더욱이 수많은 기업체로부터 돈을 받아 엄청난 부정축재를 한 점은 비록 대통령 재직 중 경제적 안정에 기여하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례를 남기는 등의 업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참작할 수 없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검찰과 피고인측은 각각 항소했다.
대구공고 모교를 빛낸 동문 전두환 노태우 현관 사진
전씨는 이 학교 24회 졸업생이고, 노태우씨는 대구공고 전신인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녔다. 물론 학교가 내건 두 사람의 약력에는 '12·12 쿠데타 수괴'니 '수천억원대 추징금'이니 따위 망신살 뻗치는 약력은 빠졌다.
이를 두고 자신이 대구공고 졸업생이라 밝힌 한 누리꾼은 "후배들이 잘못된 역사의식을 가질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때 전두환씨가 건강상 이유로 빠지더니 체육대회를 가는 거 보니 몸이 많이 좋아졌나보다"라고 비꼬았다. 누리꾼 수사대는 전씨의 놀라운 '재테크'를 꼬집었다. "2003년에 예금 29만원이 전 재산이라고 하더니, 그 돈이 아직도 남아 대구공고까지 갈 차비가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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