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歌妓) 진 원원(陳圓圓)과 오삼계(吳三桂), 산해 관(山海關)
○ 전회(前回)에 청(淸) 시인(詩人) “장문도(張問陶)”가 지은 “노구(蘆溝)”라는 시(詩)를 소개하면서 『“북경(北京)”은 대막(大漠)의 북(北)쪽 지대에 있었다. 』라는 글을 소개해 드렸는데, “노구(蘆溝)”라는 장문도(張問陶)의 “시(詩)”는,
청(淸) 건륭(乾隆) 49년(A. C 1784년)에 ‘장문도(張問陶)’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처음으로 “북경(北京)”에 와서, 지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오늘은 그 이전(以前) 청(淸)이 명(明)을 파멸(破滅)시킬 때, “산해 관(山海關) 총 병(總兵)”으로 있던 “오삼계(吳三桂)”가 산해 관(山海關)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청병(淸兵)에게 붙어버렸다.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은 정확(正確)하게 알 수 없으나,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명(明)의 마지막 황제(皇帝)였던 “숭정제(崇禎帝)”는 『반란군(叛亂軍) 이자성(李自成)의 군대가 물밑 듯이 쳐들어오자, 매산(煤山)에서 자결(自決)해 버렸다.』 이때 “산해 관(山海關) 총 병(總兵) 오삼계(吳三桂)가 거느리고 있던 병력(兵力)은 “오만(五萬)”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 자(者)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지 않는 한 “오만(五萬)의 대군(大軍)”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청병(淸兵)이 산해 관(山海關)을 깨뜨리려고 안달이 났다.』고 하더라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叛亂軍)”이 황도(皇都)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오만(五萬)의 정예(精銳) 대병력(大兵力)은 바닷가 ‘산해 관(山海關)’ 망루(望樓)에서 해변(海邊)의 멋진 풍경(風景)만을 감상(感想)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명(明) 말(末) ‘숭정제(崇禎帝)’가 자살(自殺)로 끝을 맺기 전(前)의 긴급(緊急)한 상황(狀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있다. 명(明)이 마지막 운명(運命)을 다하게 되는 데에 “산해 관(山海關) 총 병(總兵) 오삼계(吳三桂)”의 변절(變節)이 결정적(決定的) 역할(役割)을 했다고 한다. 【명사(明史)를 보더라도 의문(疑問)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시(當時) “오삼계(吳三桂)”는 한 여인(女人) 때문에 명황(明皇)을 배신(背信)하고, 청(淸)에 빌붙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회자(膾炙)되었는데, 사실(事實)인 것 같다. “가기(歌妓)”출신의 “진 원 원(陳圓圓)”이라는 여인(女人) 때문이다.
이야기로는, 『진 원원(陳圓圓)은 당시(當時) 춤추고 노래하는 가기(歌妓)중에서 꽃처럼 아름답고 어여쁜 여인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어찌어찌하여 “오삼계”가 “진 원 원(陳圓圓)”을 가지게 되었는데【일설(一說)에는 많은 돈을 주고 사왔다고 한다.】, 시국(時局)이 어수선하고, 산해 관(山海關) 총 병(總兵)으로 전선(前線)에 함께 할 수 없어, 부모(父母)의 집에 맡겨 놓고, 출정(出征)을 하였는바,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叛亂軍)”이 물밑 듯이 쳐들어와 그의 부모(父母)와 진 원원(陳圓圓)은 포로(捕虜)가 되어 버렸다. 【그의 아버지 ‘오양’은 경성(京城)을 수비(守備)하는 경영(京營)도독(都督)이었다고 한다.】이때 “오삼계(吳三桂)”는 경성(京城)을 수복(修復)하고자 병력(兵力)을 인솔하여 달려갔으나,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스스로 회군(回軍)해 버렸는데, 그 이유(理由)가 『사나이가 사랑하는 여인 하나 보호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였다니 기막힐 일이 아닌가?
역사(歷史)란 이렇게 하찮은 일로부터 결정적 타격(打擊)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청(淸)군에게 귀순(歸順)하여, 자신(自身)의 휘하 『오만(五萬)의 대병력(大兵力)과 청(淸)의 군대(軍隊)와 함께 20만 대군(大軍)』이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 6만 병력”을 쳐, 이자성(李自成)은 서쪽으로 도주(逃走)해 버렸다.
“오삼계(吳三桂)”는 이후(以後), 평서 왕(平西王)이 되고, 사천(四川)성과 귀주 성(貴州省)을 거쳐 운 남 성(雲南省)의 남명(南明)을 무너뜨리고, 마지막 황제(皇帝)였던, 남명(南明)의 “주유랑”의 목을 베는 공을 세우고, 운 남 성(雲南省)의 곤명(昆明)에서 “진 원원(陳圓圓)”과 살았는데, 뒤에 청(淸)에 반기(反旗)를 들었다가 죽었는데, 이것을 “삼번(三藩)의 난(亂)”이라고 한다.
●『운 남(雲南), 귀주(貴州)의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상가희(尙可喜), 복건(福建)의 경 중명(耿 仲 明)』등의 삼번(三藩)이 중심(中心)이 되어 일으킨 난(亂)을 말하는데, 이 난을 “삼번의 난”이라고 한다.
문제(問題)는 이들의 난(亂)을, “만주족(滿洲族)에 대항(對抗)하기 위해 일어난 한인(漢人)들의 반란(叛亂)”이라고 규정(規定)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여인(女人) 때문에 조국(祖國)을 배신(背信)하고, 당시(當時) “적(敵)”이었던 청(淸)의 만주족(滿洲族)에게 붙었다가, 섬서(陝西), 감 숙(甘肅), 사천(四川), 귀주(貴州), 운 남(雲南) 등지의 “한족(漢族)”들을 무자비(無慈悲)하게 진압(鎭壓)하고, 평정(平定)한 후, 그가 마지막 남아있던 “남명(南明)”마저 무너뜨리고 황제(皇帝)의 목을 벤 오삼계(吳三桂)가, “만주족(滿洲族)에 대항(對抗)하기 위해 일어난 한인(漢人)들의 반란(叛亂)”이라고???????????????? 이렇게 역사는 필요(必要)에 따라 각색(脚色)과 편집(編輯)과정(課程)을 거쳐,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알자.
● 진실(眞實)로 이들이 한족(漢族)으로, 만주족(滿洲族)에 대항(對抗)하기 위한 ‘난(亂)’이었다고 한다면 “한족(漢族)”은 남방종족(南方種族)이었다는 말이 되며,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난 곳은 과거(過去) “왜(倭)”무리들이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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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산해 관(山海關) 남(南)쪽”에 당시(當時)에 “경성(京城)”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오위업(吳偉業)은 명(明) 말로부터 청(淸) 초의 시인(詩人)이다. 그가 지은『원 원 곡(圓圓曲)』이란 제목의 시 한편을 보자. 그 첫 단에서 노래하기를, 【아래 원문(原文)과 번역(飜譯)은, 이석호. 이원규 공저(共著) / 중국명시감상(中國名詩鑑賞)을 참조(參照)한 것임. 】
鼎 湖 當 日 棄 人 間 : 황제는 그날 매산(煤山)에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破 敵 收 京 下 玉 關 : 옥관에서 내려온 오삼계가 적을 깨뜨리고 경성을 되찾았네.
慟 哭 六 軍 俱 縞 素 : 육군(六軍)은 모두 통곡하며 흰 상복을 입었는데,
衝 冠 一 怒 爲 紅 頭 : 오삼계만 노발대발 화를 낸 것은 홍두의 ‘진 원원’ 때문이었나.
中略 : 중략
● 위 글에서 두 번째 글인 《破 敵 收 京 下 玉 關 : 옥관(玉關)에서 내려온 오삼계(吳三桂)가 적을 깨뜨리고 경성(京城)을 되찾았네.》라는 내용을 잘 보면,
옥관(玉關)은 서역(西域) 땅에 있는 중요(重要)한 관문(關門)인 “옥문관(玉門關)”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산해 관(山海關)” 역시 대단히 중요(重要)한 관문(關門)이었다는 것에 “옥관(玉關)”을 대신 차용(借用)한 글이라고 치자.
●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산해 관(山海關)은 북경【北京 : 명(明)의 황도(皇都)】에서 정동(正東)쪽의 발해(渤海)의 바다 가에 있으며, 산해 관(山海關)에서 정서(正西)쪽 284 km【구-글 어스 직선거리(直線距離)】에 “북경(北京)”이 있다. 이곳은 요 녕 성(遼寧省)과 가깝게 인접(隣接)한 곳이다. 이곳에서 북경(北京)으로 진군(進軍)하는 데는 “서쪽으로 진격(進擊)”하는 길 밖에 없는 곳이다.
오삼계(吳三桂)가 경성(京城)을 점령(占領)한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叛亂軍)”을 치기 위해서는 『오직 외통수 길인 서(西)쪽으로 달려가야만 한다.』이것은 청병(淸兵) 역시 마찬가지로, 산해 관(山海關)밖에 있었던 청병(淸兵)도, 서쪽으로 진격해야 만, 명(明)의 황제(皇帝)를 잡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당시(當時)를 살던 “오위업(吳偉業)”이라는 명(明)나라의 시인(詩人)이며, 관리(官吏)였던 사람은 말하기를, 《破 敵 收 京 下 玉 關 : 옥관(玉關)에서 내려온 오삼계(吳三桂)가 적을 깨뜨리고 경성(京城)을 되찾았네.》 라고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오삼계(吳三桂) 휘하 오만(五萬)과 청병(淸兵)의 십여(十餘)만등 모두 20만의 대군(大軍)이 “산해 관(山海關)”에서 경성(京城)을 향해 남하(南下)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당시(當時) 산해 관(山海關)은 경성(京城)이었던 “북경(北京)”의 북(北)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이 말은 “산해 관(山海關)의 남(南)쪽에 북경(北京)=연경(燕京)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산해 관(山海關)을 왜 옥관(玉關)으로 차용(借用), 인용(引用)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청병(淸兵)은 ‘산해 관(山海關)’의 북쪽지대 수백(數百)리에 펼쳐져 있는 “명(明)”의 변방(邊方)을 노린다면 휠 씬 수월(數月)하게 북경(北京)으로 진격(進擊)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음에도, 굳이 바다 가에 있었다는 관문(關門)인 “산해 관(山海關)”만을 노렸을까? 우회(迂廻)한다면 얼마든지 명(明)의 변방(邊方)지대를 뚫고 진격(進擊)할 수 있는 곳이 많았는데 말이다.
● 산해 관(山海關)은 저지대(低地帶)에 있었으며, 산해 관(山海關)을 제외한 그 주위(周圍)는, 물(호수 또는 하천)이나 암석(岩石)이나 절벽(絶壁)등으로 이루어진 천연적(天然的)인 장애물(障碍物)이 널려 있어, 산해 관(山海關)의 관문(關門)을 통과치 않는다면, 매우 험 난(險難)한 여정(旅程)이었기 때문에, 또는 저격(狙擊), 기습(奇襲)공격(攻擊)에 매우 취약(脆弱)한 지세(地勢)이기 때문에, “산해 관(山海關)”을 깨뜨려야 만이 북경(北京)으로 진격(進擊)이 가능(可能)했던 것은 아닐까?
● 장문도(張問陶)의 “노구(蘆溝)”
오위업(吳偉業)의 “원원 곡(圓圓曲)”
청사고(淸史考)의 “명(明)을 치기 위기 “남하(南下)하였다“는 기록(記錄)등【이미 전회(前回)에 이곳에 게재하여 소개하였음】
이들은 모두 명(明)과 청(淸)나라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로, 학자(學者)이며, 시인(詩人)이었으며, 관리(官吏)를 역임(歷任)했던 분들이며, 청사고(淸史考)는 비록 급조(急造)된 것일망정 청(淸)나라의 역사서(歷史書)라는 것이 아닌가. 역사서(歷史書)를 기록하고, 그 때 당시(當時)를 살았던 분들이 자신(自身)들의 왕조(王朝)였던 “왕성(王城), 그 방향(方向), 그곳의 지세(地勢)도 몰랐다”고 하기엔 우리의 지식(知識)이 너무 창피(猖披)한 것이 아닌가!!!!!!!!!!!!!!!!!!반도사학(半島史學)에 물들여진 우리 자신이 한(恨)스러운 것 아닌가!!!!!!!!!!!
2013년 04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