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들을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여자(花柳界女子)’라고 했다고 한다.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기생(妓生)은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됐다고 하였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인데,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든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이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일 이들이 남녀노비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사제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 내려와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역신(逆臣)의 부녀자들이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성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유녀(游女)의 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의 처자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또 조선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오르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속신(贖身)이라 하여, 양민 부자나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기생이 병들어 제 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했다. 고전소설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생이 되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기생은 조선사회에서 양민도 못되는 이른바 팔천(八賤)의 하나였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노리개를 찰 수 있었고,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의 자유연애가 가능했다. 또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었다. 기생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하였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조작품을 쓴 사람들은 대부분 기생들이다.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시조뿐 아니라 한시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서경덕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이며 명신인 허균·이귀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조선 중종 때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詩碑)를 세워주었다. 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기생들이 상당수에 이르는데 그녀들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고려가요의 전승이라 하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짙은 정한(情恨)의 고려가요는 대부분 그녀들의 작품으로 보인다.
최근에 발굴된 ‘녹파잡기(綠波雜記)’는 19세기 전반 평양의 기생들과 기방 주변의 남성들의 삶을 그린 산문집이다. 녹파잡기는 고려 중기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평양을 무대로 쓴 시 ‘송인(送人)’ 중 마지막 구절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에서 딴 것으로 명지대 안대회(한국한문학)교수가 찾아냈다. 이 책은 개성 명문가 출신의 시인 한재낙(韓在洛)이 평양에서 내로라하는 기생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산문인데 풍속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재낙은 개성의 자연·사적 등을 기록한 ‘고려 고도징’을 썼던 조선 정조·순조 무렵의 저명한 학자인 한재렴(韓在濂·1775~1818)의 친동생이다.
녹파잡기(綠波雜記)를 보면 평양기생들을 서정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열한 살 초제는 비 내린 어느 날, 벼슬아치 행차에 출장 나가려다 가죽신에 구멍이 났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녀를 위해 더벅머리 소년이 신을 벗어주고 맨발로 갔다. 그녀는 소년의 신발을 꼭 감싸 쥐며 말했다. ‘저 비록 어리지만 처녀의 몸으로 다른 이의 신발을 신었다. 규방 여인의 행실이 변해서는 안된다. 앞으로 그와 인연을 맺게 되면 오늘 일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애절한 시조 명수를 올린다.
매화(梅花)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음직도 하다마는
춘설이 어지러이 흩날리니 필듯말듯 하여라
매화 노등걸에 봄졀이 도라오니
노퓌던 가지에 픗염즉도 하다마
춘설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매화(梅花,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평양 기생. 애절한 연정을 읊은 시조 8수가『청구영언』에 전한다. 꽃피는 시기만으로도 너무 일찍 핀다하여 조매(早梅), 겨울에 핀다 하여 동매, 눈 속에도 핀다하여 설중매, 종류에 따라 봄기운이 완연할 때 피는 춘매까지 매화를 두고 부르는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성급한 매화로부터 시작하는 꽃 소식은 숨을 돌리느라 잠깐 쉬었다가 금세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 목련으로 이어지고 개나리, 살구꽃, 벚꽃, 복숭아꽃으로 맺음을 하면 봄이란 계절이 훌쩍 우리를 떠나가 버린다. 우리의 인생도 봄과 같이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고 말리라.
어이 얼어 자리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 베개와 비취 이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서 잘까 하노라
어이 얼어 잘이 무슨 일 얼어 잘이
원앙침 비취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 노라
한우(寒雨). 조선 선조 때 임제(林悌,1549-1578) )와 가까이 지내던 평양 기생. 황진이의 무덤에서 추모의 정을 나누고, 임제는 군사를 정돈하여 다시 평안도로 향했다. 그런데 평양근처에 도달하자 한양으로부터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도사가 대기 하고 있다가, 선조임금의 어명을 하달 삭탈관직, 모든 전권을 인계한 뒤 헌 바지저고리에 대금 하나 달랑 들고 방랑자가 되었다. 초가을 부슬비는 내리고 해는 서산머리에 황혼을 남기고 저물고 있어, 무작정 성 밖의 허술한 주막에 들어 헛간에 몸을 감추려 했는데 주모가 나와 왠 손이 헛간에 주무시려 합니까? 하고 안으로 들어오라 하니, “북천이 맑다 하거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 내리고 들에는 찬비 내리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하며 극구 사양하니 “ 어히 얼어 자리 어이하여 얼어 자리 원앙금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아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하며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대금가락과 시문을 즐기며 편한 밤을 보냈다 한다. 시조집에 보면 이 두 시조가 나란히 실렸는데 주모의 이름은 한우(寒雨)라는 것 밖에는 전해지는 게 없다.
만춘(晩春)
꽃이 지는 봄은 첫 가을과 같네
밤이 되니 은하수도 맑게 흐르네
한 많은 몸은 기러기만도 못한 신세
해마다 임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하고 있네
죽서박씨(竹西朴氏,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박종언(朴宗彦)의 서녀이며 서기보(徐箕輔)의 소실이다. 대략 1817∼1851년에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와 고시문(古詩文)을 탐독하였고, 소식(蘇軾)·한유(韓愈)를 숭모하였다. 10세에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시문은 매우 서정적이며 대개 임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여심과 기다리다 지친 규원(閨怨)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미모가 뛰어나고 침선에도 능하였다 하며, 동시대의 여류시인인 금원(錦園)과는 같은 원주사람으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깊이 교유하였다. 병약하여 30세 전후에 죽었다. 저서로는《죽서시집》1책이 있다.
이상곡(履霜曲)
비가 내리다가 개고 눈이 많이 내린 날에
서리어 있는 수풀의 좁디좁은 굽어돈 길에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잠을 빼앗아간 내 임을 생각하니
그러한 무서운 길에 자러 오겠는가?
때때로 벼락이 쳐서 無間地獄에 떨어져
고대 죽어버릴 내 몸이
내 임을 두고서 다른 임을 따르겠는가?
이렇게 하고자 저렇게 하고자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는 期約입니까?
맙소서 임이시여 임과 한 곳에 가고자 하는 기약뿐입니다
작자 ·연대는 미상이다. 창녀의 노래라 하여 조선 성종(成宗) 때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등과 아울러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배척되었던 속요(俗謠)이다. 그러나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전하는 그 내용은 그다지 음란한 것이라 볼 수 없으므로, 혹시 성종 때 고쳐 지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화우(梨花雨)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계랑(癸娘, 1513~1550).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호는 매창(梅窓)·계생(癸生)·계랑(桂娘:癸娘). 부안의 이름난 기생으로 가사·한시를 비롯하여 가무·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예술인이었다. 배꽃이 비처럼 흩날릴 때의 이별의 정화, 낙엽 지는 가을날에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 멀리 떨어져 있는 임과의 재회에 대한 염원 등을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냈다. 작품으로는 〈가을생각 秋思〉·〈술 취한 나그네에게 주다 贈醉客〉·〈봄날의 원망 春怨〉·〈무제 無題〉·〈스스로 한함 自恨〉·〈감회를 남김 遺懷〉·〈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등 가사와 한시 70여 수 외에 금석문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품집으로 〈매창집〉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묏버들 가려 꺾어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낭(洪娘, 1493~1583)은 조선조 선조 때 함경도 종성 기생으로 당시 문인이며 서화에도 능했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정이 깊었다. 고죽이 종성부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와서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종성에서 밤낮으로 이레 동안을 달려 서울까지 찾아 온 일이 말썽이 되어 고죽이 벼슬을 내 놓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고죽이 경성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게 되자 홍낭이 영흥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은 저물고 궂은비마저 내리는 속에서 그를 그리는 나머지 이 노래와 함께 버들가지를 보냈다고 한다.
산촌에 밤이 드니
산촌에 밤이 드니 먼딋 개 즈져온다.
시비를 열고 보니 하늘이 챠고 달이로다.
뎌 개야 공산 잠든 달을 즈져 므삼하리오
천금(千錦, 생몰미상) 조선시대 기생. 한밤중에 고요한 산촌의 하늘에는 차갑게 느껴지는 달이 휘영청 밝고, 어디선가 멀리서 개가 짖어대는 소리만이 산골을 울린다. 초장의 '산촌'이나 중장의 '달' 그리고 종장의 '공산'과 '개가 짖는 소리'등은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층 자아내고 결국 '므삼하리오'에는 임을 기다리는 마음을 자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평양 기생에게 홀린 상인 이야기다. 전라도 전주의 한 상인이 배에 생강을 싣고 평양으로 떠났다가 평양 기생에게 홀려 생강을 몽땅 날리고 기생에게 쫓겨났다. 이런 허망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원간사마목(遠看似馬目) 멀리서 보니 말눈깔 같고
근시여농창(近視如濃瘡) 가까이서 보니 고름주머니 같네.
양협무일치(兩頰無一齒) 두 볼에는 이가 하나도 없는데
능식일선강(能食一船薑) 배 한 척에 실은 생강을 죄다 먹어 치웠네.
생강 한 배를 싣고 와서 얻은 돈이 바닥이 났으니, 돈이 나올 구멍은 깜깜했다. 재물을 말끔히 빼앗기고 기생집에서 쫓겨난 생강장수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돈 떨어지자 임 떨어진 생강장수였다. 집에 돌아갈 노자까지 떨어진 장사꾼은 길가 목롯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잔을 들이키면서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아무리 뉘우쳐 보았자 행차 뒤의 나발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얻어 들은 지식으로 이렇게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