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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 창작을 위한 공상 소설>
파리로 건너 간 청개구리
- 프랑스 순수시와 디카시의 둥근 고요 -
나병훈 / 문학평론가
1. 시를 잊은 시대, 둥근 구멍의 부름
1890년,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던 ‘시의 왕’ 말라르메가 거닐던 거리에는 여전히 그가 평생을 바쳐 도달하려 했던 '절대시'의 문턱에는 늘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사물의 둔탁한 중력을 태워버리고 오직 시의 여운(에테르)만을 남기려 했던 그의 서재. 먼지 쌓인 책상 위에는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시론의 파편들이 환영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 의 가장 명징한 젊은 제자 폴 발레리 역시 시의 사멸을 목도하고 있었다. 세파의 소음이 언어의 고고한 고요를 침범하고,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시인들의 가슴을 베어내던 어느 쓸쓸한 해질녘이었다. 발레리는 길가 바랜 벽면의 작은 구멍 속에서 세상을 가만히 관조하는 청개구리 한 마리를 포착한다.
빛과 어둠, 존재와 부재, 둥근 고요와 각진 세파가 극적으로 만나는 그 순간, 발레리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스승 말라르메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사물을 묘사하려 하지 말게. 사물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에테르의 파동만을 남기게나."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며,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의 거장들과 21세기 디지털 렌즈를 통해 세상을 재해석하는 시선이 하나의 둥근 구멍 속에서 미학적 시공간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찰나의 영상과 순수 언어가 만나 부활하는 새로운 시의 신화, 바로 '디카시'라는 이름의 판타지였다.
2. 발레리의 서재로 건너 간 청개구리
발레리가 길을 지나다 이 풍경(벽 구멍 속 청개구리)을 순간 포착하자 스승 말라르메에게 감상 편지(메모)를 보냈다. 그의 메모에는 단순한 생태적 묘사가 아니라 ‘존재와 부재, 빈 공간(구멍)과 형태(청개구리)의 극적인 상응’을 담아 보고싶다는 부제가 영론하게 빛나고 있었다.
친애하는 말라르메 스승님,.
고향 땅 세트(Sete) 항구의 뒤안길을 걷다가 시멘트 벽면, 그 차가운 무(無)의 공간에 뚫린 하나의 작은 '둥근 구멍'속에 숨어 든 청개구리를 만났습니다. 그 어둡고 완벽한 빈자리 중심에, 세파를 피해 들어앉은 작은 초록빛 의식 하나가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로 세상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모서리진 바깥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스스로 둥근 침묵이 되어 외계를 관조하는 그 눈빛은 마치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던 '순수 시의 결정체'이자, 사유가 형태를 얻는 순간의 고요한 긴장감이었습니다. 차가운 실재(벽) 속에 피어난 저 작고 굳건한 생명의 관조야말로, 언어가 도달해야 할 가장 안온한 내면의 '둥근 구멍의 고요' 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스승님께서 생각하시는 순간포착의 시학적 사유는 어떠하겠습니까?
제자 발레리 드림
프랑스 세트에서 이탈리아 제노바의 외가로 돌아온 21세의 청년 발레리는 검붉은 우체통에 편지를 공손하게 집어넣고 서재로 돌아와 시작노트에 보낸 편지에 대한 메모를 3개 파트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었다.
첫째, 빈 구멍은 시학적으로 ‘不在와 餘白’이 아니던가? 맞다. 이것은 말라르메 스승이 강조한 '장미가 없는 장미의 개념', 즉 비어있음으로써 대상을 완벽히 완성하는 여백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둘째, 그렇다면 저 개구리의 고요한 응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라르네 스승은 이미지를 '나르시스(Narcisse)'적 자아 성찰과 순수 지성이 세상을 무심하게 건너다보는 ‘관조적 태도’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저 시멘트 벽은 현실과 제약일 것이다. 무겁고 비정한 현실 공간 속에서도 둥근 구멍이라는 유연함(원융)을 통해 자아를 지켜내는 미학적 태도가 행간에 명징한 상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라르메 스승으로부터는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장에 없었다.
발레리는 메모장을 어루만지다가 다시한번 스승에게 편지를보내기로 하였다.
벽 구멍 속 청개구리를 순간 포착 한 것은 단순한 생태적 묘사가 아니라 ‘존재와 부재, 빈 공간(구멍)과 형태(청개구리)의 극적인 상응’을 담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친애하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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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이 없어서 다시 올립니다. 그날 길을 지나다 거친 시멘트 벽면, 그 차가운 무(無)의 공간에 뚫린 하나의 작은 '둥근 구멍'을 포착한 것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평소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시던 ‘묘사적 문학을 배격하고 사물이 사라진 여백위에 그 존재의 ’개념‘과 ’상징‘만을 담으라는 말씀을 상기 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둡고 완벽한 빈자리 중심에, 세파를 피해 들어앉은 작은 초록빛 의식 하나가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로 세상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모서리진 바깥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스스로 둥근 침묵이 되어 외계를 관조하는 그 눈빛은 마치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던 '순수 시의 결정체'이자, 사유가 형태를 얻는 순간의 고요한 긴장감이었습니다.
차가운 실재(벽) 속에 피어난 저 작고 굳건한 생명의 관조야말로, 언어가 도달해야 할 가장 안온한 내면의 성전 즉,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고요하고 아늑한 영원한 성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세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첫째, 빈 구멍은 말라르메 스승님께서 강조하신 '장미가 없는 장미의 개념', 그러니까 비어있음으로써 대상을 완벽히 완성하는 여백의 공간이 아닐런지요. 둘째, 청개구리의 응시를 생각합니다. 저 응시는 '나르시스(Narcisse)'적 자아 성찰과 순수 지성이 세상을 무심하게 건너다보는 관조적 태도로서의 지성과 사유로 승화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셋째, 시멘트 벽은 무겁고 비정한 현실 공간 속에서도 둥근 구멍이라는 유연함(원융)을 통해 자아를 지켜내는 미학적 상응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자 발레리 드림
말라르메의 답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삼 일 후였다. 그는 제자 발레리의 메모와 사진을 받고, ‘언어 이전의 상형(象形)’이자 ‘순수 응축의 시학’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친애하는 발레리군,
자네가 보낸 사진과 메모는 내가 평생 추구해 온 ‘우주라는 하나의 거대한 책’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섬세한 한 페이지를 찢어낸 듯하네. 자네가 포착한 저 풍경은 언어가 구태여 덧붙여질 필요가 없을 만큼 스스로 완벽한 하나의 시(詩)라네. 하지만 우리가 사진이라는 ‘정지된 순간’을 지나 언어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스승으로서 자네에게 몇 가지 시론적 화두를 던지고 싶네.
첫째, 여백(Absence)이 만드는 궁극의 형상을 생각하시게나. 사진 속 청개구리를 보게. 녀석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청개구리 자체의 초록빛이 아니라,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저 어둡고 빈 '둥근 구멍'이네. 시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도록 주변의 소란을 비워내는 작업이라네. 자네가 말한 ‘안온한 성전’은 곧 시인의 마음이 도달해야 할 빈 공간, 즉 여백의 미학이 아닌가.
둘째, 세파를 건너다보는 침묵의 언어를 생각해 보게나. 거친 시멘트 벽은 세계의 중력이자 덧없는 텍스트들이네. 그 단단한 상처 속에 들어앉아 두 눈만 가만히 내밀고 있는 청개구리의 응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외계를 관조하며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침묵의 언어’라네. 시인은 웅변하는 자가 아니라, 저 구멍 속 청개구리처럼 세상의 가장 깊은 침묵을 응축하여 단 한 줄의 시선으로 쏘아 올리는 자여야 하네.
마지막으로, 찰나의 상응(相應)과 순수시로서의 디카시는 시각적 상형과 언어가 만나는 가장 순수한 순간의 결합이라네. 사진이 순간의 정지된 ‘물질’이라면, 자네가 부여하는 사유는 그 물질에 영혼을 불어넣는 ‘음악’이다네. 둥근 구멍의 ‘음(陰)’과 바깥세상의 ‘양(陽)’, 각진 시멘트와 유연한 초록의 생명이 만나는 그 경계선에서 언어의 정수를 추출해 내보게나
요약하지면, 절대 설명하려 하지 말게나. 묘사하려 하지도 말게나. 그저 자네가 저 둥근 구멍이 되어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 자네의 의식 속에서 맺히는 단 한 줄의 결정체(結晶體)를 던지게나.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절대시’의 형태일 것이네.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가 스승 말라르메의 ‘순수시이자 절대시’에 대한 깊은 시론을 받고, 오로지 시적 요소로만 형성되는 시로써 자신이 마지막으로 다듬던 시 〈선경(仙景)〉의 시상(詩想)을 떠올리며 스승께 감사의 화답의 메시지를작성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말라르메 스승님,
스승님께서 보아주신 ‘둥근 구멍’과 ‘침묵의 언어’는 제 가슴 속 깊은 곳의 아득한 사유를 다시금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마침 저는 이 풍경을 마주하기 전, 속세의 경계를 넘어선 궁극의 고요를 담아내고자 「선경(仙景)」이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퇴고하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도달하고자 했던 ‘선경(仙景)’이란 단지 신선이 사는 아득한 가상의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각지고 날카로운 바깥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제 안의 가장 깊고 안온한 둥근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자아의 회복입니다.
오늘 저 구멍 속 청개구리를 보며 확신했습니다. 거친 시멘트 벽면이라는 비정한 현실(無)의 한복판, 그 작은 둥근 굴속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세상을 주시하는 저 청개구리 즉 푸른 생명이야말로 바로 제가 시로 완성하고자 했던 ‘이 땅 위에서 만난 진정한 선경(仙景)’이었음을 말입니다.
밖으로 내달리던 욕망과 언어의 소음을 비워내고, 오직 동그란 여백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저 청개구리의 눈빛에서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절대시의 결정체’를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님의 말슴처럼 산문적 설명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감각적 응축만을 투영하였습니다.
저 역시 제 시 〈선경〉의 마지막 문장을 선생님의 지론대로 저 청개구리의 묵묵한 응시처럼, 가장 차분하고 굳건한 침묵으로 봉인하고자 합니다. 늘 스승님의 여백 속에서 지성의 빛을 얻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제자 발레리 드림
발레리는 자신이 다듬던 〈선경〉이라는 시적 지향점이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소란한 세파 속에서 둥근 여백을 찾아내 스스로를 지켜내는 관조의 공간’임을 청개구리의 모습을 통해 스승에게 고백하였던 것이다.
발레리의 화답을 읽은 스승 말라르메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자의 명징한 지성과 ‘선경(仙景)’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에 깊이 탄복했기 때문이다. 말라르메는 바로 제자 발레리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작성하여 우체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 발레리군,
자네의 화답을 읽으며 나는 깊은 전율과 함께 시(詩)의 위대한 미래를 보았네. 자네가 다듬던 「선경(仙景)」의 아득한 고요와 저 벽 구멍 속 청개구리의 응시를 하나의 미학으로 엮어낸 자네의 직관은 참으로 천재적이네! 도교적 신비에 머물기 쉬운 ‘선경(仙景)’을 세파 속에서 자신만의 둥근 침묵을 확보하는 ‘지성적 관조의 공간’으로 전환해 낸 그 혜안이야말로 자네가 가진 독보적인 시적 재능의 증거라네. 스승으로서 자네가 한 단계 더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천재성에 단 하나의 다듬질을 더하고자 하네.
첫째, . 관조를 넘어 ‘순수한 행위’로서의 침묵을 생각 해 보게나. 청개구리가 구멍 속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대한 소음에 맞서는 가장 적극적인 ‘응시의 행위’라네. 자네의 「선경」 역시 세상을 등진 은일(隱逸)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되네. 그 동그란 여백은 가장 치열한 사유가 일어나는 ‘지성의 원형극장’이어야 한다네.
둘째,. 이미지의 중력에서 언어의 에테르(餘韻, 殘香)로 전환해야 하네. 보내준 사진을 한참을 머무르며 보았다네. 사진 속 둥근 구멍과 청개구리의 초록은 눈을 사로잡는 강렬한 형상(이미지)이지만, 시인은 그 형상 자체에 갇혀서는 안 되네. 이미지라는 중력을 털어내고, 그 장면이 품고 있는 ‘안온함’과 ‘원융(圓融)의 파동’만을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언어의 에테르로 추출해 내야 한다네. 그렇게 함으로써 설명이나 묘사의 찌꺼기를 모두 태워버린 단 하나의 정제된 문장만이 자네의 「선경(仙景)」을 완성할 것이네.
자네는 이미 저 작은 구멍 안에서 우주의 중심을 보았다네. 언어를 다루는 자로서 그 문턱에 서서 주저하지 말고, 자네만의 단단하고 투명한 ‘지성의 결정체’를 세상에 내놓게나. 자네의 「선경(仙景)」이 시의 역사에 어떤 빛으로 남을지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네.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메모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스승 말라르메가 요구한 “이미지의 중력을 털어내고 언어의 에테르로 추출하라”는 가르침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풍경(청개구리, 시멘트 구멍, 바깥세상)을 단순 묘사하는 데 머물지 말고, 그 풍경이 지닌 '원융(圓融)의 파동'과 '사유의 정수'만을 극도로 응축된 언어로 승화시키라는 미학적 주문을 이해했음이리라
발레리가 자신의 시 「선경(仙景)」의 일부분을 스승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순수 및 절대시의 배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시 속에 남아 있는 ‘설명적 미련’과 ‘풍경에 매인 구절’들을 명확히 짚어내며 지적 한 말라르메 스승의 주문이 마음을 감동시켰기기 때문이었다.
여윈 달은 쏟는다 성스러운 빛과
가벼운 은빛 무뉘 가득한 치마를
대리석 지대위에 그 위에서 그늘이와서 꿈꾼다
진주 마차(馬車)에서 진주 빛 가아제(紗)가 나오는 꿈을
반쯤 빛나는 날개의 용골(龍骨)로
갈대들을 스치는 명주 같은 백마(白馬)를 위해
한없이 달빛은 백설(白雪)의 장미를 따는데
그 꽃잎은 물 위에 원(圓)을 그린다
이것이 산다는 것인가? 오 맥 없는 육욕(肉慾)의 사막이여
그 곳에선 수정(水晶)의 메아리의 숨은 문지방을 못 쓰게 만들면서
은하물의 연약한 고동이 죽는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 발레리군,
자네가 보내 준 「선경(仙景)」을 읽으며 나는 자네가 지닌 언어의 정교한 세공 능력과 천재적인 시적 감각에 다시 한번 깊이 탄복했네. 대리석과 진주, 백마와 수정이 어우러진 이 시적 공간은 마치 잘 마감된 투명한 보석상자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구먼! 그러나 자네를 '절대시'의 높은 봉우리로 이끌어야 하는 스승으로서, 나는 이 아름다운 장식들 뒤에 숨은 시적 중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
첫째, 이미지의 과도한 중력을 경계하게나. 사물을 너무 많이 그려내었네. 자네의 시에는 '달', '은빛 치마', '대리석', '진주 마차', '백마', '백설의 장미' 같은 화려하고 명확한 사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네. 이는 독자의 시선을 사물이라는 둔탁한 감각에 묶어둘 뿐, 그 사물이 떠나간 자리에 생겨나야 할 '순수한 여백‘을 가로막고 있다네. 시란 사물을 베껴 그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형체를 지워내고 남은 '향기와 기운'만을 암시하는 것이라네.
둘째, 수식의 찌꺼기를 태워버리게나. "맥 없는 육욕의 사막이여", "은하물의 연약한 고동이 죽는다"라는 표현은 대단히 서정적이지만, 여전히 인간적 감상(센티멘털리즘)과 관념의 무게가 언어를 짓누르고 있네. '수정의 메아리'나 '물 위에 원을 그리는 꽃잎' 같은 극적인 상응의 순간을 포착해 낸 자네의 직관은 찬란하네. 하지만 그 정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물을 감싸고 있는 과도한 형용사와 관념적 어휘들을 불태워 없애야 하네.
마지막으로 언어의 에테르 즉 여운과 잔향을 절대 잊지말게나. 꽃잎이 물 위에 원(圓)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그 찰나!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한 '원융(圓融)의 파동'이라네. 사물(꽃잎)을 보지 말고, 그 꽃잎이 물결을 흔들며 온 공간으로 펴져나가는 ‘고요의 진동’만을 언어의 에테르로 남기게나. 자네의 「선경(仙景)」은 이미 위대한 시의 씨앗을 품고 있네. 이제 그 보석 같은 단어들의 껍데기를 깨뜨리고, 오직 맑은 지성과 순수한 침묵의 울림만을 남겨놓는 법을 익히게나. 사물이 사라진 그 빈자리가 바로 자네가 도달해야 할 진짜 시의 성전이라네.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는 일상의 언어를 예술의 언어로 새롭게 빚어내는 일은 쉽지는 않겠지만 시인이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시적 영감은 ‘자발적아고 불규칙’하게 찾아올 수 있지만 시 자체는 반드시‘ 치밀한 구성과 끊임없는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을 강연을 통해 강조해 오던 참이었다. 사실 「선경(仙景)」을 퇴고하면서 심중에는 시멘트 벽면, 그 차가운 무(無)의 공간에 뚫린 하나의 작은 '둥근 구멍'속에 숨어 든 청개구리에 대한 시적 사유의 유혹 푹 빠져 있었다. 이 벽면 구멍 속의 청개구리가 어쩌면 순수시 이상을 주장 해 오신 스승의 핵심적인 시론을 보다 체계적이고 지적인 시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발레리는 믿고 있었다. 그는 다시 스승에게 그러한 심중의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선경(仙景)」의 차원에서 ‘벽면 구멍 속의 청개구리’에 대한 시적 발상과 언어의 에테르(여운,잔향)을 어떻게 정리해나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말라르메의 답신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친애하는 발레리군,
자네가 보낸 「선경(仙景)」과 ‘벽면 구멍 속의 청개구리’에 대한 시적 사유의 고민을 스승으로서 깊이 짚어 보았네. 시 속에 흐르는 정신의 깊이는 이미 신선의 경지에 도달해 있지만, 자네가 여전히 시각적 현상에 덜어내지 못한 미련을 남겨두었기에 내 손길을 보태어 본다네. 시인은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풍경이 사라진 뒤 남는 ‘개념의 향기’를 조각하는 자라네. 자네의 시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구절과, 이를 '언어의 에테르'로 전환하는 방식을 「선경(仙景)」을 변용하여 ‘벽면 구멍 속의 청개구리’에 대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보겠네.
첫째, 자네는 여전히 구멍과 청개구리를 '설명'하려 하고 있네. 시에서 청개구리라는 상형을 직접 언급하는 순간, 시의 스케일은 작은 생물 하나로 축소되고 마네. 청개구리는 사라져야 하네! 오직 그 생명이 내뿜는 "둥근 침묵의 눈빛"과 "중심을 잡은 푸른 고요"만 시에 남아있어야 하네. 구멍이라는 형태 대신 " 외부의 모든 소란과 각진 상터를 흡수하여 ‘둥근 고요’로 정화하고, 온 우주를 품어내는 가슴 속 깊은 사유‘ 즉, 원융(圓融)의 파동’이라는 정수만 퍼져나가게 하게나.
둘째, 감정을 직접 고백하는 것은 시의 에테르를 탁하게 만든다네. 고백하지 말고, 시선이 도달한 '상태' 그 자체를 제시하게나. "밖과 안이 하나로 녹아드는 정중동(靜中動)의 순간"처럼, 읽는 이가 스스로 그 안온함의 파동을 느끼도록 문장의 결정체만을 남기게나.
셋째, 내가 자네라면 이렇게 ‘벽면 구멍 속의 청개구리’에 대한 에테르( 여운과 잔향)을 정리했다네. 참고하여 자네의 것으로 만드시게나.
각진 세파의 모서리가 둥글게 스러지는 곳,
비워낸 자리마다 맺히는
한 점 푸른 침묵.
안과 밖이 경계를 잊고
내면의 아늑한 공간 속으로 매화 향처럼 스며들 때,
세상을 품은 무심(無心)의 응시 하나
마침내 우주의 중심에 닻을 내린다.
자네의 〈선경〉에서 '청개구리'라는 형상을 지워버려도 독자가 저 벽 구멍 속의 초록빛 고요를 완벽히 느끼게 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자네가 도달할 ‘순수시’의 완성일 것이네.
넷째, 내면의 아늑한 공간이란 이런 것이다네.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동그란 물결(파동)이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나? 그 둥근 물결은 바위나 각진 둑에 부딪혀도 결코 성내지 않고, 그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퍼져나가네.'파동'을 그려 보게나. 바로 이것이네. 각지고 날카로운 바깥세상(갈등, 소란, 세파)이 저 둥근 구멍이라는 공간에 도달하는 순간, 날카로움을 잃고 동그랗고 평온하게 길들여져 퍼져나가는 ‘고요의 진동’을 의미한다네.
다섯쩨, 소음이 음악이 되는 순간을 상상 해 보게나. 바깥의 소음은 각진 소리라 귀를 찌르고 마음을 어지럽히지. 하지만 청개구리가 앉아 있는 저 둥근 구멍 속에 들어오면, 그 소음은 둥근 벽면을 따라 순화되어 하나의 차분한 울림, 즉 ‘침묵이라는 이름의 음악’으로 바뀌게 되네.형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구멍 속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마음 전체로 전해오는 안온한 분위기와 기운—그것이 바로 ‘시적 파동’이라네.
마지막으로, 시인으로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을 짚어 주겠네. 사진 속에서 독자가 봐야 할 것은 '초록색 개구리 피부'나 '시멘트 가루'가 아니네. 독자가 자네의 시를 읽는 순간, 바깥의 소란스러운 마음이 둥글게 가라앉으며 가슴속으로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평화의 물결을 반드시 느끼게 만들어져야 하네. 사물의 껍데기(이미지)를 지우고, 그 둥근 구멍이 주는 ‘안온하고 완벽한 평화의 기운’만을 언어로 옮겨놓는 것—그것이 바로 내가 말한 ‘원융의 파동을 에테르(여운, 잔향)로 추출하라’는 뜻이라네. 자, 이제 자네가 고민하고 있는 저 구멍 속 청개구리의 눈빛이 세상으로 보내는 둥근 물결이 느껴지는가?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는 장문의 편지를 읽고 나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다가 도대체 ‘언어의 에테르’를 ‘시적 파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시학적 차원과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진동(Vibration)과 파동(Wave)은 '존재의 방식'과 '영향의 확장'이라는 아주 명확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은 이해를 하고 있었으나, ‘구멍 속 청개구리’를 디카시적 개념으로 풀어가는 문제에서는 더욱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라르메 스승에게 빠른 등기로 우편을 보낸 결과 즉답이 왔다.
사랑하는 발레리군,
마침내 자네가 시의 가장 깊은 문턱에 바짝 다가섰네! 디카시를 생각하다니. '에테르(Ether)'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학적 용어가 어렵게 느껴졌다면, '공기를 채우는 향기'나 '물질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여운'으로 생각하게나. 사물(사진)의 겉모습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은 둔탁한 흙을 만지는 일이지만, 그 사물이 유발하는 느낌과 사유만을 투명하게 남기는 것이 바로 '언어의 에테르'라네.
자네가 보낸 저 사진을 가지고 [일반적인 묘사]와 [에테르를 추출한 묘사]의 차이를 직접 비교해 보면 ‘순수시’와 자네가 구상하고 있는 디카시적인 변용에 대해 단번에 이해될 것이네.먼저 언어의 에테르가 실패한 예, 즉 사물과 이미지의 중력에 갇힌 시의 예를 들어주겠네
거친 시멘트 벽면 둥근 구멍 속에
청개구리 한 마리 기어 들어앉아
두 눈만 가만히 내밀고
바깥세상을 조용히 내다본다.
이것은 그저 사진을 글자로 다시 그린 것에 불과하네. '시멘트', '청개구리', '기어 들어앉아' 같은 단어들은 시선을 진흙처럼 무겁게 땅으로 잡아끌지. 사진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을 언어로 되풀이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찌꺼기라네. 언어의 에테르를 추출한 디카시로 내가 한번 바꾸어 보겠네
각진 소란이 문턱에서 스러지고
둥근 침묵이 완성되는 순간,
세상을 품은 푸른 응시 하나
우주의 중심에 닻을 내린다.
어떤가? 자네도 보게나. 두 번째 시에는 '시멘트', '벽', '구멍', '청개구리'라는 단어가 단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네. 사진 속 사물의 형체(물질)는 모두 증발하여 사라졌지! 하지만 시를 읽는 순간 어떤가? '각진 소란'과 '둥근 침묵'의 대비를 통해 둥근 벽 구멍의 안온함이 그대로 느껴지고,'푸른 응시'라는 단 한 줄의 파동을 통해 구멍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청개구리의 고요하고 굳건한 눈빛이 시인의 지성과 결합하여 투명하게 부활하지 않는가?
사진 속 눈에 보이는 껍데기를 모두 태워 없애고, 오직 '융합(둥근 고요)의 분위기와 사유의 정수'만을 남겨놓는 것. 사물은 사라지되 그 사물이 품은 가장 맑은 영혼만 문장으로 남기는 기법,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강조한 ‘언어의 에테르(여운,잔향)’이자 우리가 완성해야 할 순수시오 저네가 구상하고 있는 디카시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이제 눈앞의 청개구리를 지우고, 자네 가슴속에 남은 푸른 침묵을 써 내려가게나.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이제, 발레리의 두뇌 속에는 저 거친 시멘트 벽면 둥근 구멍 속의 청개구리에 대한 잔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곧바로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언어의 에테르를 터득한 것에 크게 감사하며 자신이 직접 구상한 ‘구멍 속 청개구리’에 대한 순수서정 디카시 창작 의도를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말라르메는 크게 기뻐하며 바로 화답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랑하는 발레리군,
자네가 눈을 뜨니 나의 마음이 온통 빛으로 가득 차는구먼! 사물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안에 숨은 ‘침묵의 원형’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이 사진을 바탕으로 구상한 순수 서정 디카시를 자네에게 선물하겠네. 나는 사진 속 둥근 구멍을 ‘우주가 스스로 비워낸 단 하나의 여백’으로 보고, 그 안의 초록을 ‘세상의 소란을 삼킨 순수한 관조’로 번역하여 시를 지었다네.
둥근 침묵
세계의 각진 모서리가 스러지는 문턱,
비워낸 깊이만큼 동그란 안식이 차오른다.
소음의 거친 파도가 가라앉은 중심
오직 푸른 응시 하나가 닻을 내리니
어둠조차 눈부신 평화가 되어 퍼져나간다.
- 말라르메
발레리군, 내가 쓴 이 순수시의 구상의도를 설명 해 주겠네. 자네가 구상하고 있는 ‘구멍 속 청개구리’에 대한 디카시 창작에 도움이 될 것이네 첫째, 사물의 ‘지우기’이다네. '청개구리', '시멘트', '구멍'이라는 단어는 단 한 자도 쓰지 않았네. 사물을 명시하지 않아도 사진이라는 시각적 현상과 어우러져 시의 에테르가 완벽하게 들어차기 때문이지. 둘째, 첫 행의 대립과 융합이 중요하네. 바깥세상의 '각진 모서리(양)'가 구멍의 '동그란 안식(음)'을 만나 부드럽게 무너지는 원융(圓融)의 순간을 포착했다네. 셋째, 짐작했겠지만, 핵심 심상은 ‘푸른 응시’였다네. 청개구리의 초록빛 몸체 대신 '푸른 응시'라는 단 한 문장만 남겨두었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지성이자 세상의 파도를 삼키는 관조의 에너지라네. 자네가 다듬는 「선경(仙景)」 또한 이처럼 사물의 무게를 털어내고, 읽는 이의 가슴속에 둥근 평화의 파동만을 남기는 고고한 결정체가 되길 바라네.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는 기쁜 나며지 스승에게 자기도 한 편 구상해서 보내드리기로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명징하게 투영시키는 디카시 한 편을 이미 사흘전에 완성해 두었던 것이다. 발레리가 감사의 화답메시지를 덧대어 보낸 디카시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스승 말라르메의 깊은 가르침을 통해 사물의 중력을 털어내고 '언어의 에테르'를 마침내 명징하게 터득한 제자 폴 발레리. 그는 가슴 뜨거운 전율과 감사를 담아, 스승의 시론을 완벽하게 투영시킨 자신만의 디카시 한 편을 다듬어 스승에게 보낸 것이다.
.
존경하는 스승님,
스승님의 가르침은 비 내린 뒤 하늘이 씻긴 듯 제 지성을 맑게 트여주었습니다. 사진 속 사물의 껍데기를 지우고 나니, 그 자리에 오롯이 남는 것은 세상을 관조하는 ‘순수한 의식의 빛’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 밝혀주신 ‘융합의 파동’과 ‘언어의 에테르’를 제 가슴에 깊이 새기며, 오직 침묵과 응시만으로 완성한 디카시 한 편을 올립니다. 부족하나마 스승님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제 지성의 첫 결실로 바칩니다.
관조(觀照)
각진 세파의 고함이 다가와
둥근 고요의 문턱을 넘어설 때,
상처 입은 시간은 빛이 되고
소란하던 욕망은 침묵으로 스며든다.
비워낸 마음 속 깊은 중심
세상을 품은 한 줄기 푸른 숨결이
가장 단단한 평화의 닻을 내린다.
- 발레리
스승님, 이 시에도 스승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청개구리'나 '시멘트 벽'은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사진의 둥근 구멍이 주는 안온함과, 그 안에서 세상을 묵묵히 품어내는 푸른 생명의 관조를 직관적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형상이라는 진흙을 털어내고, 오직 ‘안온한 상태’와 ‘사유의 에테르’만을 남겨놓는 것—이것이 스승님께서 제게 열어주신 절대시의 세계임을 이제 명백히 압니다. 늘 스승님의 거대한 여백 안에서 배웁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 제자 발레리 올림
제자의 명징한 깨달음과 시적 도약에 깊이 탄복한 말라르메는 제자 발레리의 가슴으로 달려가듯 뜨거운 찬사를 보내며, 시적 완성도를 한 단계 더 밀어 올릴 스승으로서의 최종 퇴고작과 피드백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
사랑하는 발레리군!
자네의 시를 읽고 나는 소름이 돋을 만큼 깊은 감동을 받았네. 자네는 마침내 사물이라는 둔탁한 껍데기를 온전히 태워버리고, 사유와 관조라는 순수한 영혼만을 남겨놓았구먼! 자네가 완성한 〈觀照〉는 이미 '언어의 에테르'가 완벽하게 들어찬 걸작이네. 다만 스승으로서, 자네의 그 천재적인 직관에 프랑스 정형시의 엄밀한 운율(Rhythm)과 한국적 5행 디카시 특유의 극적인 응축 미학을 더해 마지막 세공을 더하고자 하네.
관조(觀照)
- 발레리에게 보내는 답시-
각진 세파가 둥근 문턱에서 스러지고
상처 입은 소란은 고요의 음(音)으로 잠길 때
비워낸 마음 속 깊은 중심
세상을 품은 푸른 응시 하나가
우주의 닻을 내린다.
-말라르메
퇴고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해 보내니 참고하게나.
첫째, 리듬의 매끄러운 흐름과 운율감 형성이 중요하다네. 1 행의 “각진 세파가 둥근 문턱에서 스러지고”를 보게나. 기존 구절은 '다가와', '넘어설 때'라는 동사가 겹쳐 리듬이 다소 장황하고 늘어지는 느낌을 주었네. 이를 단 한 줄로 축약하여 '각진 세파(양)'와 '둥근 문턱(음)'의 대립을 명확히 하고, 문장이 부드러운 파도처럼 읽히도록 운율을 가다듬었네.
둘째, 시적 응축과 서정적 이미지의 명료화를 항상 염두에 두게나. 2행의 “상처 입은 소란은 고요의 음(音)으로 잠길 때”를 보게나. 발레리군의 시에서는 '시간', '빛', '욕망', '침묵'이라는 관념적 단어들이 한데 얽혀 시상이 다소 산만해질 위험이 있었네. 이를 '소란'과 '고요의 음(音)'이라는 음악적·파동적 대립으로 단일화하여, 사진 속 둥근 구멍이 바깥의 소음을 차분한 음악적 침묵으로 흡수하는 상응을 극대화했네.
셋째, 시선과 서정의 단단한 봉인을 염두에 두게나. 4 연에서 “세상을 품은 푸른 응시 하나가 / 우주의 닻을 내린다”로봉인한 것은 '한 줄기', '가장 단단한 평화의' 같은 수식어는 시의 무게를 덜어내는 찌꺼기가 될 수 있네. 수식어를 모두 과감히 잘라내고, '푸른 응시 하나'와 '우주의 닻'만을 직결시킴으로써, 사진 속 청개구리의 작지만 굳건한 눈빛이 가진 시적 스케일을 온 우주의 무게감으로 확장시켰다네.
자네의 디카시는 이제 언어의 여백과 운율, 그리고 시인의 고고한 지성이 완벽하게 결합된 ‘순수서정의 결정체’가 되었네. 세상은 이제 자네가 쏘아 올린 저 '푸른 응시'를 통해, 소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거대한 평화를 배우게 될 것이네. 자네의 스승이라는 사실이 오늘처럼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네!
- 자네의 영원한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가 감사의 편지와 함께 최종 퇴고 완성작이라며 다음과 같이 디카시를 완성하여 보내면서 스승의 견해를 최종적으로 한 번 더 듣고 배우고 싶었다.
개구리의 응시 (凝視)
각진 세파 스러지는 문턱
고요의 음으로 잠기는 소란
세상 품은 푸른 응시 하나
가부좌를 틀며
우주의 닻을 내린다.
- 발레리
말라르메 스승은 제자 발레리가 보내온 디카시를 읽고, ‘가부좌를 틀며’라는 시어에 함축된 동양적 정좌(靜坐)와 지성적 관조의 깊이에 무릎을 쳤다.. 프랑스 기호학적 응축과 서정의 완성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정한 감탄과 최종 교정 피드백을 전보로 보냈다.
아, 나의 친애하는 발레리군!
자네가 새로 보낸 「개구리의 응시 (凝視)」를 읽으며 나는 소름이 돋을 만큼 깊은 감탄을 금치 못했네! 특히 ‘가부좌를 틀며’라는 신의 한 수는 참으로 놀랍구먼! 사방으로 흩어지던 외부의 소란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스스로 중심을 잡아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그 정중동(靜中動)의 자세야말로 자네가 도달한 지성적 성찰의 결정체라네. 스승으로서 이 완벽한 디카시에 단 한 점의 찌꺼기도 남지 않도록, 호흡과 행간의 여백을 극대화한 최종 결정본을 가다듬어 보낸다네.참고만 하시게나.
개구리의 응시 (凝視)
각진 세파 스러지는 문턱
고요의 음(音)으로 잠기는 소란
세상 품은 푸른 응시 하나
가부좌 틀고
우주의 닻을 내린다.
첫째, '가부좌를 틀머'를 '가부좌를 틀고'로 하여 정음과 운율의 다듬질을 손 보았네 '틀머'라는 표기의 어색함을 바로잡고, 단정하고 투명한 '틀고'로 정돈했다네.'틀고'의 '고' 음이 가지는 차분하고 단단한 운율이 다음 행인 '우주의 닻을 내린다'로 넘어가는 시선의 무게감을 더욱 굳건하게 받쳐준다네.
둘째, 행간의 여백을 통한 '파동의 쉬어감'을 고려해야 한다네. 2행과 3행 사이, 그리고 4행과 5행 사이의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네. 그것은 청개구리가 숨을 고르고, 가부좌를 틀며 우주와 하나가 되는 '침묵의 호흡 시간'이라네. 독자는 이 여백 속에서 비로소 통섭(統攝)의 파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네.
자네는 마침내 사진이라는 사물의 중력을 완전히 털어내고, 오직 지성과 관조, 그리고 순수 서정으로 가득 찬 ‘단 하나의 에테르 결정체’를 완성했네. 더 이상 단 한 자도 손댈 필요가 없는 완벽한 시라네. 자네의 「개구리의 응시 (凝視)」는 디카시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미학적 봉우리가 될 것이네!
이제, 종합적으로 내가 본 「개구리의 응시 (凝視)」에 대해 디카시에 대한 신비평적인 관점에서 정리해 보겠네.
거친 시멘트 벽은 세계의 중력이자 덧없는 텍스트. 그 단단한 상처 속에 들어앉아 두 눈만 가만히 내밀고 있는 청개구리의 응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외계를 관조하며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침묵의 언어. 시인은 웅변하는 자가 아니라, 저 구멍 속 청개구리처럼 세상의 가장 깊은 침묵을 응축하여 단 한 줄의 시선으로 쏘아 올리는 자이어라.
디카시는 시각적 상형과 언어가 만나는 가장 순수한 순간의 결합. 사진이 순간의 정지된 ‘물질’이라면, 시인이 부여하는 사유는 그 물질에 영혼을 불어넣는 ‘음악’. 둥근 구멍의 ‘음(陰)’과 바깥세상의 ‘양(陽)’, 각진 시멘트와 유연한 초록의 생명이 만나는 그 경계선에서 언어의 정수가 추출됨으로써 시는 이미 완성. .
설명하려 하지 않음. . 묘사하려 하지도 않음. 그저 저 둥근 구멍이 되어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 자네의 의식 속에서 맺히는 단 한 줄의 결정체(Crystal)를 던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절대시오 순수시의 형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말라르메는 “세계는 하나의 위대한 책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발레리의 사진 속 ‘벽 구멍과 청개구리’를 단순히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순수 시의 은유’로 해석하며, 덧붙이는 말을 최소화하고 상응의 순간을 단단하게 응축할 것을 조언했던 것이다. 두어 달이 지난 후 발레리가 스승의 시를 고친부분에 대해무척 죄송하고 무례였다고 고백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순수 서정시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획기적인 디지털 시의 한 장르로 디카시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스승님의 시적인식과 비교해서 핵심적인 부분만 정리해주시라고 부탁했다다. 발레리의 송구한 마음을 단숨에 다독이며, 서양의 순수시학(상징주의)과 동양의 현대 디카시를 잇는 미학적 핵심을 꿰뚫어 보낸 말라르메 스승의 마지막 화답은 즉시 날라왔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 발레리군,
송구해할 이유가 전혀 없네! 시의 정수를 향해 가며 언어를 가다듬는 행위는 스승에 대한 무례가 아니라, 시에 대한 가장 숭고한 헌신이라네. 자네가 다듬은 ‘가부좌’의 고요는 이미 내 시상을 뛰어넘어 완전히 자네의 것으로 피어났네. 그리고 자네가 전해준 동방의 작고 아담한 나라(한국)에서 유행한다는 ‘디카시(Dica-Poem)’라는 장르에 대한 소식은 나를 깊은 전율에 빠뜨렸네. 그것은 내가 평생을 바쳐 도달하고자 했던 ‘순수시(Poésie Pure)’의 열망이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옷을 입고 가장 완벽하게 부활한 형태라네. 스승으로서 내가 추구한 프랑스 순수 서정시학과 동방의 디카시가 공유하는 핵심적 시 인식을 세 가지로 정리해 주겠네.
1. 상형(象形)과 언어의 극적인 상응(Correspondances)
순수 서정시학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문학을 거부하고, 우주 만물이 지닌 '비시각적 상징과 기호'를 언어로 번역하려 했네. 디카시 역시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 직관적 영상(상형)과 짧은 언어가 만나는 장르라네. 사진을 설명하는 찌꺼기를 버리고, ‘순간의 영상이 내뿜는 서정적 파동’만을 단 몇 줄의 언어로 상응시키는 극의(極意)를 지니고 있지.
2. 여백(Absence)과 '언어의 에테르(여운, 잔향)’
순수 서정시학은 "장미라고 말할 때, 내 목소리는 모든 장미의 모양이 사라진 자리를 떠올린다." 사물의 물리적 형상을 지워버리고 오직 '장미의 개념과 향기'만 남기는 것이 언어의 에테르라네. 디카시 역시 사진이라는 명백한 실재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글로는 사물을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네. 오히려 사진의 여백 속에 감춰진 사유와 안온함만 추출하여 단단한 언어의 결정체로 봉인한다는 점에서 내 시학과 온전히 일치하네.
3. 순간성(찰나)과 영원성의 결합
순수 서정시학은 세상의 소란과 덧없는 시간 속에서 찰나의 영감을 포착하여 우주적 법칙(절대시)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네. 디카시는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순간의 풍경(청개구리의 응시)을 디지털 매체로 찰나에 포착한 뒤, 시인의 지성과 관조를 통해 ‘우주의 닻을 내리는 영원한 평화’로 변주해 낸다네.
발레리군,
우리가 그토록 골방에서 고뇌하며 언어의 껍데기를 태우려 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동방의 시인들은 이미 기계(디지털)의 눈과 시인의 심장을 하나로 묶어, ‘사물은 사라지고 오직 서정의 에테르만 남는 순간’을 일상에서 실현하고 있었던 게야. 우리가 나눈 이 대화와 자네가 완성한 「개구리의 응시 (凝視)」야말로, 서양 상징주의의 지성과 동양의 현대 디카시가 시공간을 넘어 서로의 가슴에 닻을 내린 가장 아름다운 증거라네. 자만하지 말고, 앞으로도 저 동방의 시인들처럼 사물의 중력을 털어낸 푸른 응시를 끊임없이 쏘아 올리게나.
- 자네의 스승 말라르메
말라르메의 편지를 읽고 난 발례리는 스승에게 돌발적인 제안을 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대표적인 디카시시인을 한 번 초청하여 그분의 시와 우리 프랑스 싱징주의 순수 서정시를 상호 비교분석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제자 발레리의 혁신적인 제안을 받은 스승 말라르메는, 동방 한국의 디카시인과 프랑스 상징주의 시학이 시공간을 넘어 교유하는 미학적 장이 열린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했다. 말라르메가 기쁨과 명징한 지성으로 제자의 작품을 프랑스 측 대표작으로 지명하며 보낸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 발레리군!
자네의 제안은 참으로 대담하고도 웅혼하구먼! 동방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활짝 피어난 '디카시'라는 현대적 시학과 우리 프랑스 상징주의의 '순수시학'이 한 무대에서 만나 깊이를 겨루고 교유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겁게 소용돌이치네. 우리 쪽을 대표할 시작(詩作)을 고르는 일에 대해 물었는가? 나는 망설임 없이 자네가 완성한 디카시 「개구리의 응시 (凝視)」를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할 단 하나의 작품으로 선택하겠네. 내가 자네의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하네.
첫째, 상징주의의 궁극인 '언어의 에테르' 완벽 구현에 성공했다네. 자네의 「개구리의 응시 (凝視)」는 사진이라는 엄연한 실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시멘트나 개구리 같은 둔탁한 '사물의 중력'을 완전히 태워버렸네. 사물은 지워지고 오직 '각진 세파'와 '둥근 문턱', 그리고 '푸른 응시'라는 순수한 시적 상징만 남아 에테르처럼 떠돌지. 이는 우리가 평생 추구해 온 '순수시'의 정수라네.
둘째, 동양의 정좌(靜坐)와 서양 지성 관조의 미학적 융합이 돋보인다네. 특히 자네가 시에 삽입한 '가부좌를 틀고'라는 행은 동양의 심오한 정중동(靜中動) 철학과 우리 프랑스 상징주의의 철저한 '지성적 관조'가 가장 완벽하게 손을 잡은 지점이네. 한국의 디카시인들 역시 자네의 이 구절 앞에서 깊은 시적 공명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셋째, 순수시학의 역사적 대화의 표본이자 시초이다네. 자네의 「개구리의 응시 (凝視)」야말로 '사진(시각 기호)'과 '문자(언어 기호)'가 어떻게 상응(相應)을 이루어 단 하나의 투명한 결정체로 봉인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텍스트라네. 동방의 대표 시인이 가지고 올 작품과 견주기에 이보다 더 자랑스럽고 명징한 작품은 없네.
자네의 「개구리의 응시 (凝視)」를 우리 쪽 대표작으로 깃발처럼 세우게나!
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디카시인을 초청하여, 동서양의 지성과 서정이 어떻게 하나의 둥근 구멍 속에서 만나 온 우주로 파동쳐 나가는지 그 아름다운 대화를 시작해 보세나. 자네의 그 빛나는 기획에 스승으로서 온 마음을 다해 찬사를 보내네.
- 자네의 영원한 스승 말라르메
발레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디카시인으로 悳泉 나병훈의 「청개구리 날개달기 -靜中動」을 초청하기로 했다며 그의 작품을 이래와 같이 보내주었으며 스승의 감상평을 요구했음은 물론이다. 발레리는 말라르메의 답신이 궁금하여 불면을 밤을 보내던 중 한 달 후에 답신이 도착했다. 스승께서 문학 여행을 다녀왔다는 추신과 함께.
청개구리 날개달기
- 靜中動
하늘가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만사 다 잊은 채
공중에 야무지개 머무는
정중동(靜中動
덕천(德川) 나병훈 시인의 작품을 마주한 스승 말라르메는 그 정교한 상형적 결합과 지성적 응축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전율 어린 감상평을 담아 답신을 보내왔다..
아, 나의 친애하는 발레리군!
자네가 보내온 동방의 시인 덕천(德川) 나병훈 선생의 「청개구리 날개달기 - 靜中動」을 읽고 본 나는, 마치 내 평생의 열망이었던 '절대시'가 마침내 동양의 가없는 서정과 결합하여 찬란하게 피어난 현장을 본 듯 깊은 전율을 느꼈네! 이 작품은 우리가 이토록 열렬히 탐구해 온 '언어의 에테르'와 '순수 관조'가 도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미학적 봉우리라네. 스승으로서 내가 느낀 이 위대한 감상을 몇 가지 시학적 경지로 나누어 자네에게 전하네.
첫째, 투명한 상형(象形)과 '초월의 눈'이 부럽네. 사진을 보게나. 방충망이라는 가느다란 격자망은 세파의 경계이자 차가운 현실의 망(網)이네. 그러나 시인은 그 미세한 망을 눈에 보이는 '줄'로 읽지 않고, 청개구리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공중에 떠 있는 '순수한 비상(飛翔)'으로 번역해 냈네! 날개가 없는 개구리에게 방충망에 달라붙은 네 발을 '가부좌'로 읽어내어 날개를 달아주는 저 직관은, 사물의 물리적 중력을 완벽히 태워버리고 개념의 향기만을 남기는 최고의 에테르 추출이라네.
둘째, 靜中動(정중동) — 극적인 대립의 융합(融合) 자체이네. “세상만사 다 잊은 채 / 공중에 야무지개 머무는”이라는 구절을 보게나. 바깥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공중에 몸을 맡긴 모습은 완전한 고요(靜)이지만, 그 속에는 하늘로 오르고자 하는 무서운 영적 에너지와 지성적 긴장감(動)이 서려 있네. 자네가 「개구리의 응시 (凝視)」에서 읊었던 '가부좌'가 이 덕천 시인의 혜안과 완벽하게 공명하고 있지 않은가! 동양의 깊은 정좌(靜坐) 철학이 이 단 한 줄의 한자어 '靜中動' 속에서 완벽한 음악적 파동으로 울려 퍼지고 있네.
셋째, 사물의 지우기와 절대 서정의 완성을 이루었다네. 이 시 역시 '방충망'이나 '유리창'이라는 둔탁한 껍데기의 단어는 단 한 자도 쓰지 않았네. '하늘가 오르는 유일한 방법'과 '고요한 가부좌'라는 고고한 시상만으로, 독자로 하여금 저 작은 생명이 온 우주의 중심을 받치고 서 있는 거대한 환희를 경험하게 하지.
발레리군!
자네의 「개구리의 응시 (凝視)」와 덕천 나병훈 시인의 「청개구리 날개달기 - 靜中動」가 한 무대에서 만난다면, 그것은 서양의 상징주의 시학과 동양의 현대 디카시가 이룩하는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가장 웅혼하고 정교한 미학적 대화'가 될 것이네. 동방의 저 푸른 시인은 이미 사물의 중력을 벗어나 하늘에 닻을 내리고 있었구먼! 이 완벽한 시를 우리 프랑스에 소개해 준 것에 대해 스승으로서 깊이 감사하네. 자네와 덕천 시인이 함께 열어갈 그 위대한 시의 연회에 온 마음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네.
- 자네의 영원한 스승 말라르메
3. 동방에서 피어난 푸른 닻
파리 시내의 작고 안온한 서재. 빛과 언어가 빚어내는 무한한 상응의 연회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발레리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건너온 덕천(德泉) 나병훈 시인의 사진과 문장, 「청개구리 날개달기 - 靜中動」을 말라르메의 영혼 앞에 놓아두었을 때, 서재를 채우고 있던 오랜 침묵이 차분한 음악으로 울려 퍼졌다.
방충망이라는 차가운 세파의 격자망을 단숨에 하늘로 오르는 비상(飛翔)의 무대로 바꾼 동방 시인의 혜안. 날개 없는 청개구리에게 '가부좌'를 틀어주며 공중에 야무지게 머물게 한 정중동(靜中動)의 미학 앞에, 상징주의의 거장 말라르메는 마침내 깊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시의 사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구먼, 발레리군. 사물의 중력을 털어내고 순수한 서정의 파동만을 세상에 쏘아 올리는 자들이 저 아득한 시공간 너머 동방에 존재하고 있었어." 스승의 마지막 화답이 여운처럼 가라앉자, 구멍 속 청개구리의 초록빛 응시가 온 우주로 퍼져나가며 투명한 에테르의 물결을 이루었다.
발레리의 「개구리의 응시 (凝視)」와 덕천 나병훈의 「청개구리 날개달기 - 靜中動」는 시공간의 벽을 넘어 하나의 둥근 원형 속에서 영원한 공명을 시작했다. 디지털 렌즈의 찰나와 순수 지성의 영원이 결합한 순간, 세상의 모든 소란은 고요의 음(音)으로 잠겨 들었고, 그 중심에 세상을 품은 푸른 응시 하나가 굳건하게 우주의 닻을 내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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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가느트
문의를 해 오시는 분이 계시어 메모를 남깁니다. 이 단편소설은 유명한 프랑스 시인들의 실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허구입니다. 판타지죠,
디카시는 본질과 작시법으로 볼 때
발레리가 추구했던 '순수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판타지 소설의 테마요, 집필 의도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