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신경림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 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중톳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끝발 나던 금광시절 요리집 얘기 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여니레째 비가 쏟아져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술이 얼큰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
국수내기 나이롱뻥을 치고는
비닐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텅 빈 공사장을 올라가본다
물 구경 나온 아낙들은 우릴 피해
녹슨 트럭터 뒤에 가 숨고
그 유월에 아들을 잃은 밥집 할머니가
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
서형은 바람기 있는 여편네 걱정을 하고
박서방은 끝내 못 사준 딸년의
살이 비치는 그 양말 타령을 늘어 놓는다.
한차례 장마가 끝나가는가? 하긴 요즘 세상 지구온난화의 변덕 때문인지 장마란 단어마져 퇴색되어 간다고 했다.
여름철 날씨란게 당장은 비는 오지 않아도 흐리다 언제 내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상되는 단어는 폭우와 강풍 그리고 혹서...
어릴적에도 여름엔 비가 자주왔었다. 점심먹고 뒷산에 소풀어 놓으면 여지없이 소나기가 내렸다. 그게 여름의 상징이었고, 그래도 요즘처럼 갑자기 내린 비로 옷젖을 걱정은 덜했다.
그때도 소나기는 짖굿은 개구장이였다. 서편 하늘이 시커멓더니 산을 넘어 비구름이 금새 시야를 가려왔다.
친구들과 놀이하다, 냇가에서 멱을 감다, 학교를 다녀와 뒷산언덕에서 소에게 풀을 먹일때도 여전히 그랬다.
그때면 어른들은 도룡이와 삿갓을 쓰고 일을 하셨고, 검정 고무신의 아이들은 들판을 뛰놀며,그냥 통비를 즐겨 맞았다. 그깟 삼배 옷(상의를 등지게라 불렀었다. 옷을 등에 진다고?) 젖어본들 대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적 비오는 날의 불편함은 집안에 갇힌다는 것, 책보따리가 젖는다는 것, 안개끼어 풀어놓은 소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들이었다.
장꼬방(장독대)곁에 시집간 누나가 심은 빨간 칸나꽃 피고, 고추잠자리 날면 빗줄기 보다 바람의 위력이 드세어졌다. 점차 강해지는 비바람, 그게 태풍이었다.
사라호 태풍의 추억, 영문 모르고 새벽에 일어나 골목을 나서니 동네에서 제일 큰 감나무의 굵은 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보릿고개, 이때쯤 감은 굵어지고, 떫은 맛나는 것들을 옹기속에 재와 함께 넣어두면 단맛으로 변해갔다.
배고픈 어린시절 그때의 기억은 강한 태풍에 들판에 쓰러진 벼보다 부러진 감나무에 달린 감이 더 오래 남는다.
문득 신경림 시인의 시를 보니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자판을 두들긴다.
날궂이 화투놀이, 퀴퀴한 개평 돼지비계 냄새, 국수내기 나이롱뻥,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녹슨 트렉터, 바람기 있는 여편네, 살이 비치는 앙말...
비오는 날이면 사랑방에 모여 새끼꼬며 막걸리 마시던 농촌마을의 풍경, 명절끝에 이어지는 화투놀이 누군가는 보름이 오기전에 한해 머슴살이 새경몫을 잃었고, 좋아하던 친구는 객지로 나간후 집이 여러채라고 소문났다.
쌓이는 추억보다 잊혀져가는 기억이 많은 나이, 구름사이로 얼굴 내민 햇살을 바라보며, 가물거리는 어린시절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10여년전 요즘처럼 심사가 뒤틀린 날 이 글을 썼나보다. 그때도 그랬을까? ㅎㅎ
[돼지가 죽은 집에서]
돼지가 죽은 집에서
칠면조와 팔색조들이 모였다.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는 여럿이다.
나는 놈, 뛰는 놈, 기는 놈
세상의 온갖 몰골은 다 있다.
세치 혀도 모자라 온몸으로
혼란, 불신, 불안이란
세상 그림을 다 그려댄다.
돼지가 죽은 집에서
그와 그는 입을 닫았다.
돼지의 죽음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한몸에 또 다른 머리됨이 싫어서였다.
한파속의 드러나 앉은집
찢겨나간 문풍지 그 고리를 당긴들
그 무슨 온기를 느낄 것인가?
그저 묵묵히 죽은 돼지의
영혼이나 살펴봄이 옳은 듯 했다.
* 희망과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첫댓글 (댓글 올김)
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저는 잘모르겠지만 이런 글을 쓸수있다는건 천재적 재능 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