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 대하여
몽테뉴
사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른다. “자기를 주제로 글을 쓴다는 기획은 희귀하고 우수한 인물이며, 그 평이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 인물을 알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라면 허용될 것이다”라고, 분명히 그대로이며 그 점은 나도 인정한다. 직공도 보통 사람을 보기 위한 경우에는 자기의 일에서 눈도 떼려 하지 않지만 누군가 높고 유명한 사람이 마을에 도착하였다고 하면 일터도 가게도 내팽개치고 보러 간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기를 알리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방할 만한 가치를 가진 자. 그 생활과 의견이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걸맞지 않는 일이다.
케사르와 크세노폰은 자기의 위대한 행위 속에 그것을 견고한 토대로 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튼튼하게 쌓아 올릴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일기라든지 아우구스투스나 카토나 실라나 브루투스나 그 밖의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를 써 둔 기록이 있으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동상 속에서나 석상 속에서도 아끼고 연구한다. 이상의 충고는 정말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거의 조금밖에 관계가 없다.
내가 이것을 읽어 주는 것은 친구들뿐, 그것도 요구가 있을 때뿐이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 작품을 광장이나 공중 목욕탕에서 읽는 작가는 많은 것이다.
— 호라티우스 <풍자시>
나는 여기서 도시의 네거리나 교회나 광장에 상(像)을 세우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이 작품을 자랑스런 이야기로 크게 보이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 너와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 페르시우스 <풍자시>
그것은 서재의 구석에서 이웃 사람이나 육친이나 친구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이 영상 속에서 다시 나와 친하고 다시 나와 사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이야기할 마음이 생긴 것은 거기에서 말할 만한 풍부한 자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나는 그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고 쓸모 없어서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한다. 그러나 내 자신의 행위는 너무나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판단에 내놓을 만한 것은 거의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내 속에서 좋은 점을 너무나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낯을 붉히지 않고서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이렇게 나의 조상들에 대하여 그 성격, 얼굴, 태도, 일상의 이야기, 운수 등을 들려준다면 나는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주의 깊게 들을 것인가. 정말 우리들의 친구나 조상의 초상을, 그들의 의복이나 무기의 모양을 경멸하는 것은 나쁜 성격에서 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필기 도구나 인감이나 기도서나 그들이 사용했던 특수한 검(劍)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부친이 언제나 손에 쥐고 있던 기다란 채찍도 나의 거실에서 추방하지 않았다.
"부친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부친의 의복이나 반지는 자식에게 귀중한 것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신의 나라>)
그러나 만약에 내 자손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다면 나는 그들에게 멋지게 복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어 그들이 아무리 나를 염려해 주지 않는다하더라도 나는 그들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로써 내가 세상과 관계를 갖는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보다 신속하고 보다 용이하게 쓰기 위한 도구를 빌려 오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대신 내 책들의 종이는 포장지가 되어 시장에서 버터 조각들이 녹아내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고기와 올리브가 포장지의 부족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마. -마르티알리스 <풍자시>
그리고 이따금 고등어를 위하여 커다란 저고리를 내 주마. -카툴루스 <풍자시>
또한, 만약 어느 누구 한 사람 내 책을 읽는 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많은 여가를 이렇게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보내고 있는 것을 과연 시간의 낭비라고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나의 형(形)에 맞추어 이 상(像)을 만들어 나가는 동안 나의 진정한 모습을 끌어내기 위하여 몇 번이나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원형이 점점 굳어져서 저절로 어느 정도 그 형태가 정해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그리면서 나의 처음의 나보다는 분명한 색채를 띠게 된 자신을 그렸다. 내가 내 책을 만들었다고 하느니보다는 책이 나를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인 나와 동질의 것, 나만을 다룬 것, 곧 내 생활의 한 요소이다. 다른 모든 책처럼 제삼자인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거나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그리고 주의깊게 자기를 연구하는 것을 시간의 낭비라고해야 할 것인가?
사실, 단지 머리나 말로써 가끔 자기를 조사하고 고치는 데 지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의 공부·일·직업으로서 전심전력으로 그 기다란 기록을 쓰는데 힘을 다하는 사람만큼 철저하게 자기를 조사하고 통찰하지는 않는다. 가장 감미로운 쾌락은 확실히 그 사람이 내부에서만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흔적을 남기기 싫어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여지기를 싫어한다.
이 일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번거로운 생각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일까. 모든 하잘것없는 생각은 번거로운 생각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들을 그곳으로 유도하여 우리들이 자기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것은 어느 정도는 사회의 덕택이지만 대부분 자기의 힘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의 공상을 어느 정도질서와 계획에 의하여 몽상케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바람에 나부끼거나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는, 그 공상 속에 나타나는 많은 조각조각의 생각에 모습을 부여하고 그것을 기록하여 두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나는 나의 몽상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괴로워하면서도 예의와 이성 때문에 터놓고 나무라지 못했는데 과연 그것을 몇 번이나 여기에 뱉아 놓았을까. 거기에는 세상을 계몽한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詩)의 채찍,
눈 위에다 딱! 콧대에다 딱! 사고앙의 등에다 딱! - 끄레망 마로 <풍자시〉
은 생신(生身)에 보다는 종이에 새겨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게다가 나는 내 책에 유약을 입히고 지주(支柱)를 세우는 데 적당한 무엇을 표절할 수 없을까 하여 살피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다 더 주의깊게 다른 책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조금도 공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썼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공부하였다. 어느 때는 이 저자의, 또 어느 때는 저 저자의 머리나 다리를 만지거나 잡거나 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공부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의견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도 공부하지 않았다. 다만 이전부터 만들어진 의견을 원조하고 도우며 봉사하기 위하여 공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부패된 시대에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누구를 신용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크게 덕을 보지 않으며, 이 경우에 있어서도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아닌가. 도의가 썩었다는 첫째 징후는 진실의 추방인 것이다. 사실 핀다로스(기원전 5~6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가 말하고 있듯이 진실한 것이 위대한 덕의 시작이다. 그리고 플라톤이 그의 국가 통치자에게 요구한 제일의 조건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진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고 믿게 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돈이라고 하면 진짜뿐만 아니라 통용되고 있는 가짜도 그렇게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이 악덕 때문에 비난받고 있다. 사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시대 사람인 마시리아의 살비아누스는 “프랑스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과 허위의 약속을 하는 것은 악덕이 아니라 일종의 화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증언을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제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미덕인 것이다‘. 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어떤 훌륭한 수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것으로 자기를 훈련하고 단련한다. 실제로 위장(僞裝)은 오늘날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때때로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우리들 사이에 이렇게 퍼지고 있는 악덕에 대한 비난을 다른 어떤 악덕에 대한 비난보다. 더 화를 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습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우리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들에 대하여 말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고 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들이 자기가 가장 많이 물들어 있는 결점을 스스로 가장 강력하게 변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난에 대하여 분개하고 화를 냄으로써 어느 정도 그 죄를 면한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그것을 비난하는 체한다. 그리고 이(거짓말에 대한) 비난에는 비겁하고 졸렬한 마음에 대한 비난도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말한 것을 부정하는 것만큼 분명한 비겁이 또 있을까? 다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만큼 비겁한 것이 또 있을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졸렬한 짓이며 악덕이다. 옛사람 (플루타르코스를 가리킴.)은 이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묘사하여 “그것은 신을 경시함과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하는 증거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더러우며 비도덕적인 짓인가를 이보다 더충분히 표현할 수는 없다. 사실 인간에 대하여 비겁하고 신에 대하여 거만한 것 이상으로 졸렬한 짓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상호간의 이해는 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깨는 자는 사회 전체를 배반하는 자이다. 말은 우리들의 의사나 사상이 전해지는 유일한 수단이며 우리들의 마음의 대변자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서로 맺어지지도 못하고 서로 알 수도 없다. 만약 우리들을 속이는 말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교제를 끊고 우리들 사회의 모든 기반을 붕괴시켜 버린다.
새로운 인도의 어떤 국민(그 이름을 들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벌써 존재하고 있지 않다. 사실 여러 가지 이름이나 옛 토지도 분간할 수 없으리만큼 스페인 사람들에 의한 정복 후의 황폐는 전대미문의 것이었다)은 그들의 제신(諸神)에게 인간의 피를 바쳤다. 그것은 혀와 귀에서 뽑은 피였는데 말하거나 듣거나 한 거짓말에 대한 죄를
보상받으려는 것이었다. 저 그리스의 호인(리산데르를 가리킴)은 “어린이는 공기놀이로써 즐기고 어른은 말로써 즐긴다.” 라고 말하였다.
한 말을 취소하는 여러 가지 방법, 이에 관한 우리들의 명예의 법칙 그리고 이 법칙의 변천 등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내가 아는 바를 이야기 하기로 한다. 그러나 나는 만일 가능하다면 이렇게 엄밀히 말에 주의하여 신중하게 이야기하고 거기에 우리들의 명예를 거는 습관이 어느 시대에 비롯된 것인지를 알고 싶다. 그것이 옛 로마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는 없었다는 것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왕왕 그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서로 저주하면서 그 이상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의무의 법칙은 우리들의 그것과 다소 다른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케사르에게 맞대놓고 '도둑놈' 이라고 하거나 주정꾼' 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들은 그들이, 게다가 두 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장들이 얼마나 자유로이 서로 욕을 퍼붓고 있었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로써 할 뿐이었지, 그 이상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