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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역사 및 명칭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조선 도읍 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으로 여겨져 온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다. [2]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륙분지를 형성하던 곳이고, 조선 도읍 초기에는 이들 산군들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쌓였다.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3] 또한 성벽 일부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보여 준다. [2]
높이 262m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의 북악산(北嶽山),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2] 남산 공원
N서울타워
조선 시대, 남산 팔각정 옆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1961년 12월, 남산에 전파송신을 위한 75m 탑이 세워졌고,[2] 이어서 세워진 송신탑들이 봉수대의 위치를 차지했다. 1969년 12월,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남산의 현재 위치에 종합송신소를 위한 220m의 송신탑을 세울 계획을 민방협에서 발표하였다.[3] 당시 3개 민간방송의 합작 투자로 설립된 남산타워는 총 233m, 해발 고도 490m로 동양에서 가장 높다고 선전되었다.[2] 남산타워는 건축가 고 장종률씨가 설계한 작품으로 내부 시설은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1971년 12월 3일에 완공되었고, 1975년 8월까지 3층의 전망대와 방송국 송신실, 박물관, 공개홀, 기념품점 등이 들어섰다.[4] 완공 후 체신부에서 인수하여 전망대 사용을 금지하다가 1980년 10월 15일, 처음으로 일반에 개방하였고,[5] 이후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뉴스 전문 방송국 YTN이 1999년 12월, 체신공제조합으로부터 인수하였다. 2005년 4월 YTN이 CJ그룹 산하 CJ엔시티에 개·보수 계약을 맺었고, 그 해 12월 공사가 완료되어“서울타워”에서 “N서울타워”(정식 이름은 “YTN서울타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 남산케이블카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케이블카 시설 중 최초로 지어졌으며. 1962년 5월 12일에 처음 개통해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하는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다. 낮에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밤에는 대형 빌딩들이 내뿜는 환상적인 야경을 즐길 수 있다.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은 1990년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훼손된 24,180평의 지형을 복원하고 전통정원으로 꾸미면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한옥 5개동을 이전복원하였다. 서울천년 타임캡슐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서울천년 타임캡슐에 담아 남산 산자락에 묻었다.4백년후 서울 1000년에 용기 속에 든 이 시대의 문화유산을 펼쳐보게 될 것이다. 1994년 11월 29일 매설하였으며 2394년 11월 29일 개봉할 예정이다. 캡슐안에는 '94 서울의 인간과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 실물 축소 모형 마이크로 필름 Video-CD 형태로 수장하였다.
남산오르미 남산 끝자락과 케이블카를 이어주는 경사형 엘리베이터 운영개시 2달 만에 13만 명이 이용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6]
<서울성곽- 한양도성> 축성 1395년(태조 4) 한양(지금의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1396년(태조 5) 음력 1월 9일 기공식을 올리고 춘추 2회에 걸쳐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성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성의 길이는 9천 9백 70보(步 : 1보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肅淸門 : 북대문)·흥인문(興仁門 : 동대문)·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숭례문(崇禮文 : 남대문)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 : 동소문)·광희문(光熙門 : 수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 개수1422년(세종 4년)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문종 1년)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년)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순조 때의 것이다.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했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했으며,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 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부서졌다. 삼청동·성북동·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숭례문·숙정문·홍화문이 남아 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서울 한양도성길은 대체로 4코스로 나눈다. 북악산 코스(혜화문~창의문), 인왕산 코스(창의문~숭례문), 남산 코스(숭례문~장충체육관), 마지막으로 낙산 코스(장충체육관~혜화문
<안중근의사>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사상가, 독립운동가, 의병장이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1][2] 우덕순, 조도선 등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만주의 각 역 근처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저격을 준비하였으며, 체포 후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라 하였다. 구한 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에 청나라 길림성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그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의병장들의 거사에 영향을 주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남산에는 안중근 의사 관련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과 안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0년에 준공을 하여 592㎡ 규모의 석조와즙 1동을 건립하였고, 높이 3m의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웠다. 2010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옛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철거하고 3층 규모의 새 기념관을 개관했다. 대지 5,772㎡, 연면적 3,759㎡의 규모로, 지하 2층에는 강당이 있으며, 지하 1층에는 제1전시실, 추모실, 기념품 판매점이 있다. 새 기념관은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 단지동맹 등 독립운동 활동, 하얼빈 의거, 옥중투쟁과 재판, 순국, 유언 등 의사의 행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컴퓨터 터치스크린과 미라클 영상 등 IT 기술을 활용해 현장감을 살린 전시가 특징적이다. 소장품으로는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등 유묵, 〈국가안위노심초사〉 외 휘호, 안중근 의사 존영 외 사진, 〈안중근 의사 공판기〉 외 책자 등이 있다. 그 밖에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안중근 의사가 운영한 돈의학교 관련 기사,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총탄,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의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관리하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발굴 및 수집하고 있으며,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등을 개최한다.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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