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면천(沔川)은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면천면 일대를 지칭하던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혜산군(槥山郡)이라 불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혜성군(槥城郡)으로 개칭하였고, 당진현(唐津縣)·여읍현(餘邑縣)·신평현(新平縣)을 관할하였고 혜성군은 웅주(熊州: 公州)의 영현으로 개편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운주(運州: 洪州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가 1106년(예종 1)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293년(충렬왕 19)에는 면주(沔州)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23)에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개칭되었다. 별호로 마산(馬山)·해종(海宗)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면천군은 당진군(唐津郡)으로 폐합되었다. 1917년 면천군의 일부였던 마암면이 면천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성씨의 역사
면천박씨(沔川朴氏) 시조 박득의(朴得宜)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의 원손(遠孫)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승(大丞)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박술희(朴述熙)는 고려 초에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으로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득의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면천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박씨원류사보(朴氏原流史譜)》에 의하면 박술희는 어려서부터 호협하고 용맹스러워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으로 있다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웠으며 936년(태조 19) 후백제 정벌 때는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진격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태조는 죽을 때 그를 내전(內殿)으로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주며 태자 혜종을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후손들은 박술희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신기(神騎),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박주(朴住)를 중조(中祖)로 하고 면천(沔川)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박계(朴桂)를 시조로 하기도 한다.
《朝鮮氏族統譜》에서는 박술희를, 《韓國人의 族譜》에서는 박득의를 시조로 본다.
학생공파(學生公派), 사복공파(司僕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학생공여익파(學生公汝益派), 생원공여익파(生員公汝益派), 생원공정파(生員公挺派), 소위공파(昭威公派), 어모공파(禦侮公派), 중화파(中和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주요 세거지
경기도 웅진군
황해도 벽성군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 내동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면천박씨는 1,241가구 총 3,98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