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나의 일상을 뒤지다가 생각나는 대로 몇자 적어서 괴산문학지에 송고했다.
두서없는 글이지만 나의 추억이 담긴 내용이기에 복사해서 여기에 올려놓는다. =觀-
생자필멸(生者必滅)
남해에는 아우가 산다.
독일에서 여행업을 하면서 은퇴후에 살 곳을 독일마을로 정하고 미리 펜션을 마련했다. 독일 뮌헨에서 이십여년을 살고 있기에 독일마을의 펜션 이름도 뮌헨하우스라 명명했다.
겨울에는 사업차 독일에서 지내야 하는 아우 대신, 나는 임시 펜션지기로 남해를 오가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농사를 거의 마무리한 늦가을에 남해로 가면 아우가 귀국하는 봄에 청천으로 돌아오기를 4년간 계속했다.
남해에 가던 첫해 가을에 남해시장 어느 식당에서 모인 ‘남해관광협의회’에 아우를 대신해서 참석했다.
그때 해오름예술촌의 촌장인 정금호씨가 일어나서 나를 소개해 주었다.
"뮌헨하우스의 이 목사님은 화가십니다. 우리 해오름예술촌에 아라비아인들이 오아시스에서 손님들에게 차 대접하는 그림을 그려줬지요." 라면서 덧붙이기를 "사업하시는 분들이니 동그라미가 많이 들어와야 하는데, 올해도 동그라미를 많이 버시기 바랍니다.“
비록 임시이기도 하고 한시적이기도 한 남해 생활의 첫출발부터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다.
남해에는 방문할 장소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해오름예술촌이다.
폐교된 학교를 인수받은 정금호 촌장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가꿔가는 곳이었다. 옛날 학교생활의 흔적을 살려내고 돌과 나무로 만든 온갖 조각품들을 실내외에 전시하고 있었다.
아우 덕분에 남해살이를 하게 되면서 가까운 그곳도 쉽게 찾아본 것이다. 그리고 촌장이 운영하는 커피점 맞은편 건물 외벽에 벽화를 그려준 게 가까이 지내는 인연이 되었다. 요르단에서 현지인들과 가까이 지내려는 몸짓으로 여기저기 벽화를 그려준 짧은 경험은 어디를 가나 황량한 벽을 볼 때마다 모두 화폭으로 보이게 되었다.
Give & Take'라 했던가?
"목사님은 평생 커피 공짭니다!" 벽화 한 컷 그려주었더니 정 촌장은 갈 때마다 환대다. 그리고 터키에 가서 직접 배웠다는 터키식 커피를 내려줘서 마시고, 작은 은색쟁반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어느 날은 정 촌장이 기다린다는 연락이 와서 찾아갔다.
마침 남해를 방문 중인 강원도 횡성의 해오름살림학교 아트 센터장 내외를 만났다. 겨울의 강원도는 너무 춥다며 따뜻한 남해로 이사 오고싶어했다. 남해나비생태공원 못미처 내산초등학교가 폐교되어 비어있다는
정 촌장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일까 마는, artist(예술가)란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울까 라는 생각에 잠겨본다. 나도 공인받지 못했지만 그림을 쬐꼼 그릴 줄 아니 아티스트라 해도 될까?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일회성 연극임으로
해 볼 때까지, 가 볼 때까지 도전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수성페인트일망정 오늘도 흰 벽을 화폭 삼아 화필을 휘둘러 본다.
"커피 한잔하러 오시지요!" 정금호 촌장의 전화가 왔다.
그는 두 번째 터키여행을 계획 중인데, 세전(歲前)에 다녀온 첫 번째 터키여행에서 그 나라의 풍물과 문화에
푹 빠진 듯했다. 출국 전에 청이 하나 있다고 했다. 운동장 한편에 전시용으로 넓은 토끼장을 짓는 중인데
벽화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해오름예술촌 방문을 오늘내일 벼르고 있는데 날씨가 산뜻하질 않아서 미루다가 뒤늦게 찾아갔다.
토끼장 옆에 새로 꾸민 벽에 그릴 밑그림을 단색으로 스케치하며 하루를 보냈다.
며칠 만에 토끼장벽화를 마치고 여전히 청천 집으로 돌아와 지내게 되었다.
사람이 살고 죽음은 예측불가능한 신비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날 갑자기 정금호 촌장의 부음을 들었다. 그의 두 번째 터키행은 물거품이 되었다.
예술촌과 좀 떨어진 동천마을에서 홀로 지내던 그가 갑자기 통증을 느끼고 진구를 불러 병원으로 달렸지만
깨어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듯이 가깝게 지내던 이들과의 이별은
누구도 막지 못할 천명(天命)이라 할 수 있으리라. -觀-
이관수: 괴산문학 회원, 대한기독문인 회원, 활천문학 회원
(괴산문학 송고분 2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