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데드 마스크 (2003년 10월)
(주인님이 하도 글 쓰라고 협박 하기에....
전에 독일 Bonn 에 있는 베토벤 기념관에 갔을 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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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주말 아침, 본의 베토벤 생가를 찾았다. 날씨는 공기를 충분히 주입한
타이어처럼 팽팽했다.
빛바랜 작은 건물의 마룻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걱대었으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그 때 그 모습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철거위기에 처한 건물 두 채를 12명의 본 시민이 취득하여 기념관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작은 방의 유리장 안에는 베토벤의 비올라가 놓여있고 첫 번째 오케스트라
작품중 하나인 <기사의 발레> 악보가 비치되어 있었다.
황제가 베토벤에게 선물로 하사한 현악기가 벽에 걸려 있었고
생전에 그의 손가락이 얹혔을 피아노가 곱게 보관되어 있었다.
마룻바닥에 맑은 음들이 숨죽이고 누워있어 손만 내밀면
한꺼번에 튀어 일어날 것 같았다.
초등학교 하교하는 길. 담쟁이넝쿨이 멋있던 적산가옥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곡.
울타리 가득 샛노란 개나리와 나는 동시에 음률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먹물 같은 어둠이 골목을 야금야금
먹어 버려야 일어나곤 했다.
결혼하여 정신의 허기를 채우려 했음인지, 서둘러 어린 딸에게 크고
호사스런 피아노를 사 주었다.
늦은 퇴근 시간에 대문 너머로 들리던 아이가 치는 아름답고 경쾌한 곡은
그 적산가옥의 골목길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열 한 살의 작은 나를 불러오곤 했다.
그러나 딸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다시 피아노 의자 위에 앉지 않았다.
열한번 째 방 중앙의 유리장 안에는 42세 때의 베토벤의 라이프 마스크와
56세 때의 데드 마스크가 석고로 떠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삶과 죽음이 나란히 누워 서로를 과시하는 것처럼.
생전의 마스크는 깊고 예리한 눈매와 꽉 다문 입술이 지적이고 활기에 차 있었다.
생전에 불태웠던 불굴의 의지가 스며있었고 그의 숨결이 느껴질듯이 따뜻했다.
그러나 사후의 마스크는 안 보았어야 옳았다. 그의 얼굴에는 축축한 죽음의 그늘이
섬뜩하게 배어있었다. 들을 수 없는 치명적인 조건에서 음악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그의 얼굴은 한이 맺힌 듯하고 스산하여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얼마나 힘들게 자신과 사투를 벌였으면 저렇게 변하였을까 안쓰럽기까지 했다.
지난 여름 숲에서 그렇게 씨근덕씨근덕 울어대던 매미의 허물 몇 개를 주웠던 일이
생각났다. 작고 얇은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깡그리 벗어놓은 허물들이 섬세하고 귀여웠다.
베란다 화분에 빈 심지로 꽂혀 있는 죽은 난의 마른 줄기들도 안쓰러움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유독 인간의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늘은 오싹하고 축축하다.
사랑하는 이들과 정을 떼라는 신의 배려인 것 같다.
그러나 벗어두고 떠날 내 허물은 깔끔하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기에.
축축한 생가에서 죽음의 우울이 온몸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을 때
갑자기 무겁고 눅눅함을 찢으며 낭랑한 웃음소리가 달려들었다.
고개를 반짝 쳐들고 아버지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작은 사내아이의
햇솜 같은 얼굴에 어둑하고 음침하던 공간이 말갛게 빛났다.
베토벤은 빈으로 옮겨 사교계에서 명성을 얻어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았으나
호사다마라 할지, 귓병이 시작되면서 결국 청력을 잃는다.
그러나 그는 외계와 차단된 소리의 어둠속에서 혼이 담긴 불굴의 정신으로
작품세계에 빠져든다.
그의 창작기 중 말기에 속하는 12년 동안 귓병은 더욱 심해져 보청기도
도움이 되지 않아 필담으로만 대화를 했다.
작곡가로서 청력을 잃은 게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가.
그러나 그는 <제 9교향곡>, <장엄 미사곡>을 잇달아 내놓았다.
청중의 박수 소리도 못 듣는 자신의 연주회에서 언제나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병세가 악화되어 1827년 3월 26일 저녁 천둥과 폭우 속에서 56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이곳에는 대사관에 다니던 큰아들이 번역한 한국어 팜플렛이 비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12개의 방을 설명서와 대조해가며 꼼꼼히 둘러 볼 수 있었다.
밖에 나오니 억겁을 돌아 나온 듯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했다.
머리속의 잡풀을 걷어내 듯 그 자리에 서서 시원한 공기를 가슴이
뻐근하도록 들여 마셨다.
라인강가 베토벤 음악당 정원에 있는 조각 난 시멘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인화하여 보니 희한하게도 베토벤의 흉상이었다.
이 신기한 입체 조각상은 로댕의 제자가 만든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일상의 편지들,
초상화와 유품, 악보와 흉상, 악기와 주옥같은 작품들은 12개의 방에 꽉 차 있었다.
그의 생애를 뚫고 지나간 수많은 유품들을 꼼꼼하게 보관한 것을 보면서
그들이 베토벤을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2003년 10월 어느 날.
첫댓글 선배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요? 안부도 자주 못드리고 죄송합니다. 늘 잔잔하게 다가와 가슴을 울리는 선배님의 글, 다시한번 읽으며.. 살며시 흔적 남기고 갑니다. 이제 희망같은 봄이 오려나 봅니다. 언제나 건강하시옵기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 보다 진한 감동으로 느껴지는 시내님의 기행담 고맙습니다. ㅎㅎ
하려고 하는 사람에겐 길이 있고 희망이 있음을 다시한번 베토벤을 아니 시내님의 글을 보면서 깨닫고 갑니다.
난정씨 오셨구나. 요즘 사는 것이 시들해져 게으름을 피우는데 주인장에게 쫓겨날까봐 써놨던 글 퍼왔어요. 늘 내건강 챙겨주시는 난정씨 마음 아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보고싶다~ 사파이어님. 자꾸 미안해질라고 하네요. 무엇이 바쁜지 글만 읽고보고 후딱 나가는 인색한 제 글에 끝까지 따라다니며 관심보여주
시는 님에게 늘 감사드려요.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