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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국민소통운동본부 CCCC|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대한 국민<가족>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소망합니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동서남북 소통행정<소통정치>를 하실 줄 압니다. <<미래창조과학기술부 소관 주관하에>>.
나에게 의식주 문제를 담당한 분이 누구인지를 아시나요 ?<부모형제처자> 나의 건강 생명 사랑의 주관자 누구인지 아시나요?<조물주=창조주 하나님>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C C C C -
평택 소통 김 평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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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SEPTEMBER
9월.
September란 원래는 7월
(sept=seven)이었는데
‘줄리어스 시저’의 July와
‘아우구스투스’의 August가
앞에 들어갔기 때문에 차
례가 밀려서 9월이 되었다.
가을의 개막이다.
9월을 여는 기도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때에도
이슬같은 은혜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사합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복음으로
어떤 슬픔 속에서도 희락의 복음으로
어떤 질고 속에서도 치료의 복음으로
9월처럼 찾아오시는 주님
우리들의 지친 삶에
백로(白露)의 아침과 추분(秋分)의 밤을 주시듯
은혜의 아침과 사랑의 밤을 주셨습니다
학교마다 새학기를 시작하듯
우리도 주님과 새학기를 시작하게 하시고
밤으로는 그 하늘도 바라보게 하시고
낮으로는 저 들판도 바라보게 하소서
6.25로 빼앗겼던 하늘에
다시 펄럭일 깃발을 올린 9.28의 그 하늘
그 하늘처럼 소중한 9월의 하루 하루를
꽃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밝게 아름답게
별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높게 그윽하게
새하늘 새땅의 새벽별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월 : 자, 9월이다!
서늘한 가을이 될 것이다. 맑고 조용한 푸른 하늘이 열려 올 것이다.
들마다 오곡백과가 익어 황금으로 빚나고 거둬들이는 풍요로운 꿈의 계절이 올 것이다.
바람 끝도 2,3일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별로 장마다운 장마도 없이 한달내 가물로 타고 찌고 뒤체기던 태양도 이젠 어쩌는 수 없이 열을 떨구고 대낮에는 한결 카랑카랑한 금빛으로 변하여 간다.
비록 노염이 아직 남아 계속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름의 마지막 고비에 헐떡거리는 숨결에 지나지 않는다.
여름의 미련(未練)은 무심코 떠 오른 담백한 구름 쪽이나 저녁 때 일어나는 서늘한 매미 소리, 길가에 핀 「코스모스」의 하늘한 흔들림 따위로도 쉽게 바위어 나갈 수 있다.
봄의 꽃으로부터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키워 익히고 풍족하게 성취한 여름은 이제 거둬 들이는 가을을 위해 길을 비켜 서야 한다.
그러나 가을은 별이나 해의 것은 아니다. 가을은 지상(地上)의 것이고 우리 자신의 것이다.
들이나 과수원에 충만하는 성숙(成熟)은 우리가 뿌린 씨앗에서 이룩된 것이고 씨를 뿌린 자는 그 씨를 거두어야 한다.
그래서 가을은 차차 익어 가고 강산이 가장 아름다운 물감으로 칠해질 단풍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법석대고 지루하던 여름의 「바캉스」로부터 돌아와 이제 막 집뜰과 책상 머리에 앉게 되었다.
9월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하고 내일의 설계를 하는 때이다.
9월의 탄생석 : 청옥(靑玉 ; sapphire). 대용석은 청금석(靑金石). 중세 때는 사욕을 물리치고 고결한 사상을 가진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진리․성실․견고한 의지를 상징하며, 행복을 지킨다고 한다. 청금석은 배반자의 힘을 약화, 격심한 논쟁을 냉각시켜 가해자를 말살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1월 1일.
9월 2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2장 전문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렘5:5, 눅19:14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72:8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110:5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요5:23
② 잠언 2장 전문
○ 지혜를 구하는 자의 유익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시90:12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마13:44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9.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잠8:20
10.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잠14:33, 잠22:18
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잠4:6, 잠6:22
12.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잠28:26
13.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14.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15.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
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17.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18.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말2:15
19.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잠5:6
20.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1.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오늘의 샘터
① 강우규 의사의 유언 : 1920년 11월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김.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 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② 노천명, <사슴>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오늘의 역사
① 군정(軍政) 실시(1945) : 광복 후에 바로 독립이 되고 정부가 수립될 것을 믿었던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38선이라는 국경 아닌 군사적 경계선이 생기고 남한에는 미군,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여 각기 군정을 실시하였다.
북한의 소련군은 그의 앞잡이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 독재 정책으로 북한민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남한의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여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였으므로 우익, 좌익할 것 없이 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한 때 그 수는 50여개에 달하였다.
⇨9월 8일.
⇨9월 11일.
⇨9월 12일.
⇨9월 20일.
② 강우규 의사 의거(1919) :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쯤.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막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해 마차로 갈아타는 순간, 갑자기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군중 속에서 날아온 폭탄 1개가 마차 주변에서 폭발한 것이다.
사이토는 화를 면했지만 주위에 있던 일본인 37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그중 경찰과 일본인 기자 2명은 이때의 상처로 목숨을 잃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뜻밖에 강우규(姜宇奎)란 이름의 64세 노인이었다.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며 이듬해 북간도로 이주해 교육사업에 진력하던 중 1919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영국제 폭탄 1개를 구입해 서울로 잠입했다.
마침 사이토의 부임소식을 들은 강 의사는 폭탄을 허리춤에 차고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거사 직후 현장을 빠져나와 이집저집 숨어다니던 중 9월 17일 친일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돼 이듬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1월 29일.
③ 산중일기(山中日記 ; 山居日記) : 춘원 이광수의 수필집 <돌베게> 속의 ‘산중일기’는 1946.9.2 경기도 양주군 광릉 근처에 있는 봉선사에 들어가 수도하던 때의 글이다.
9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의 일기로 되어 있다.
⇨6월 23일.
④ 박열, 일천황 암살 음모로 피검(1923) : ⇨1월17일.
⑤ 연합군최고사령부, 미국-소련 양군의 한반도분할점령책 발표(1945) : 1945년 9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국분할점령을 발표했다.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내리고 침공한 소련군은 이미 북한에 진주해 있었고 미군은 9월 8일 남한에 진주하였다.
미 국무성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8월10일 연합군측에 항복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미 국무성 육해군합동조정위원회(SWNCC)는 8월 13일 포츠담회담에 의거 38도선 분할점령안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그날로 소련에 통보했고 소련도 즉각 수용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점령 합의는 7월 26일 포츠담회담에서 미소간에 이미 밀약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점점 짙어가던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들이 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정상들은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 한국의 독립 확인, 앞으로의 전후(戰後) 처리 등에 대한 원칙을 담은 선언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류와 일본 국민에게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했다.
곧바로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소련마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연합국에 통보했다.
일부 장교가 항복을 거부하며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역사의 물결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이 전파를 타고 한국과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한국의 광복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그날 항복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 공식 서명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도쿄(東京) 만 요코하마(橫濱)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 선상에서 이뤄졌다.
당시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일본인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상이었다.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광복은 8월 15일이었지만 공식적인 문서상의 광복은 9월 2일이 되는 셈.
그런데 이 자리에서 놀라운 소식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점령한다”는 내용의 분할점령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독립이 곧 한국의 분단이 되어 버린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에 따라 9월 8일 한국에 미군이 들어왔다.
다음 날인 9월 9일, 서울의 조선총독부 중앙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이 미군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한 번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곧바로 총독부 건물(1996년 철거)에서 일장기가 내려갔다.
63년 전, 광복의 환희에서 분단의 비극으로 뒤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보름 남짓. 그렇게 긴박했던 1945년의 8월과 9월은 영욕(榮辱)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2008)
⑥ 안중근 의사 동상 제막(1974) : ⇨12월 15일
⑦ V.J. 데이(Victory in Japan Day) : 1) 제2차 대전의 대 일본 승전 기념일.
미국은 1945.9.2(항복문서 조인일).
영국은 1945.8.15을 가리킨다.
제2 차 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미국 군함 미조리호 함상에서 미국․영국 등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는 문서에 조인했다.
⇨8월 15일.
2)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연합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하고 소련에 조건부 항복 중재를 요청했다.
소련이 시간만 보내며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는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곧 소련마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천황궁에서 열린 어전(御前)회의는 천황제 존속을 조건으로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연합국에 알렸다.
연합국은 이 조건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일부 장교단이 항복을 거부하며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전역에 울려퍼졌다.
패전과 항복의 조곡(弔哭)이었다.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이 남았지만 아무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아 난항을 겪었다.
결국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장관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외교관이었다.
마침내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태평양전쟁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김정형).
3) 1945년 오늘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하는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연합군 대표는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
일본대표는 우메즈 대장과 시게미스 외무장관.
두 사람의 서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났다.
항복 후 연합군의 통치를 받은 일본은 우리 나라의 6.25전쟁을 경제부흥의 발판으로 삼고 1951년 9월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다.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1945) : 1945년 오늘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하는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연합군 대표는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
일본대표는 우메즈 대장과 시게미스 외무장관.
두 사람의 서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났다.
항복 후 연합군의 통치를 받은 일본은 우리 나라의 6.25전쟁을 경제부흥의 발판으로 삼고 1951년 9월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다.
⑧ 학도호국단 발단식(1975) :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핑계로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설치 발대식을 하게 된다.
병영국가가 되면서 교육은 명백하게 정치에 종속되게 된다.
무엇보다 일제의 학도병 제도를 본따면서 박정희 정권은 일제의 잔재 정권임을 노출한다.
⑨ 비전향 장기수 63명 북한으로 송환(2000) : 2000년 오늘 오전 비전향장기수 63명이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들은 간첩으로 남파된 후 붙잡혔거나 빨치산,인민군 등으로 활동하다 검거돼 짧게는 15년부터 길게는 45년까지 장기복역한 사람들로 대부분 70살 이상의 고령자들이었다.
북한은 이날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등 5백여 명이 나와 이들을 맞이한 데 이어 평양 도착 후에도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다.
이에 앞서 납북자가족모임과 전몰군경유가족회 등은 임진각과 통일대교 남단 등에서 납북자 국군포로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⑩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요약]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이 즉위한 1494년 12월 25일부터 폐위된 1506년 9월 2일까지 약 12년간의 실록.
구분 실록
저자 일기청(日記廳)
시대 1507년(중종 2)
[본문] 활자본.
63권 46책.
연산군이 죽은 직후인 1506년(중종 1) 11월에 일기청(日記廳)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임명되면서 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1월 김감이 박경(朴耕)암살사건에 관련되어 유배됨으로써 편찬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1507년(중종 2) 6월 성희안(成希顔)을 총재관, 신용개(申用漑) ·김전(金銓)을 도청당상(都廳堂上), 김봉(金崶) ·성세순(成世純) ·성세명(成世明) ·조계상(曺繼商)을 각방당상(各房堂上)에 임명하고 작업을 재개하여 동 4년 9월에 완성하였다.
일기의 체재는 대개 한 달을 한 권으로 하고, 기사가 적은 달은 합하여 한 권으로 만들었는데,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 12월 25일로 그 달의 기사가 9장에 불과하나 한 권으로 한 것이 예외이다.
제1권의 초두에는 각항 1자씩을 낮춘 7항의 글로 연산군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는 항을 가는 일이 없이 날이 바뀌거나 기사가 바뀔 때마다 그 앞에 아표를 붙이고 있으며, 사관의 평도 후기의 실록과 같이 별항으로 각항 1자 낮추어 적는 일 없이 그대로 해당 기사의 말미에 쓰고 있다.
(두산백과사전.2009.5.31)
⑪ 레바논 내전 휴전 합의(1986) : 내전 11년째를 맞은 레바논 !
1986년 오늘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기독교도 민병대와 회교도 사이에 휴전이 합의됐다.
그러나 이 휴전 합의는 곧바로 유명무실해지고 양측 사이의 테러와 국지전이 계속된다.
결국 4년 뒤인 1990년에야 기독교 민병대가 정부군의 대규모 포격에 항복하고 같은 해 12월 기독교와 회교도 등 각 분파의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이 출범함으로써 내전이 종식된다.
레바논은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데 이어 1946년 프랑스군이 완전히 철수했지만 그 이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75년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기독교도 우파 '팔랑헤당'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게릴라 기지를 습격하고 팔레스타인인이 탄 버스에 테러를 가한 것이 도화선이 돼 레바논 전역이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⑫ 미국 인종차별 반대 시위(1966) : 1966년 오늘 미국 시카고 근교의 시세로(Cicero) 마을 !
흑인 수백 명이 흑인거주지역의 확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다.
경찰의 호위 속에 펼쳐진 평화적 시위였지만 일부 흑인들은 병과 계란을 던지기도 한다.
이날 시위는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다.
이 당시 시카고와 주변 지역은 인종에 따라 주거지역을 제한하는 차별정책이 심해 흑인들의 큰 반발을 샀다.
⑬ 장칭 중국 특사, 알바니아서 귀국(1966) :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 장칭(江靑) !
1966년 이맘 때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공산 알바니아를 특사 자격으로 방문하고 귀국한다.
장칭은 린뱌오와 함께 문화대혁명을 이끌고 홍위병을 진두지휘해 중국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장칭은 10년 뒤인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권력을 잃고 이른바 '4인방 사건'으로 체포된다.
1981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형으로 감형돼 복역하다 1983년 옥사한다.
⑭ 제2차 세계대전 발발(1939) : 1939년 오늘 !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릅니다.
영국 총리 네임 챔벌린은 잔인한 적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영국국민들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나흘전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진격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독일에 최후 통첩을 보냅니다.
폴란드에 대한 모든 공격행위를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방위조약을 이행하기 위해 폴란드를 적극 지원할 것을 통보합니다.
독일은 예상대로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합니다.
영국은 즉각 독일 봉쇄를 선언하고 거리에는 징집 벽보가 붙습니다.
프랑스도 전군 동원령을 내리고 서부전선 방어를 강화합니다.
⑮ 미국 독립전쟁 종식(1783) : 1783년 미국 독립전쟁을 끝내는 파리의 평화 협정 체결 현장 !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 13개주가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영국 국왕을 대신한 오스왈드 대표와 식민지측의 프랭클린 등이 대표로 나선 파리평화협정 !
파리평화협정으로 미국은 당시 13개주의 독립을 보장받습니다.
미국의 국경을 서쪽으로는 미시시피강, 북으로는 캐나다,남으로는 플로리다를 경계로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써 시작됩니다.
⑯ 경이의 해(Annus Mirabilis) :「존 드라이든」이 그 시의 제목으로 붙인 말.
재해가 잇따라 일어났던 영국에서의 1666년을 가리킨다.
전부터 이따금 있었던 페스트가 런던 시내에 크게 번져, 9월의 절정에 올랐을 때는 하루에 7천 명의 사망자를 냈다.
12월 9일의 보고에 의하면 이 해에 페스트로 사망 매장된 자는 6만 8천 5백 96명에 이른다.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이 페스트가 아직 그치기도 전인 9월 2일 오전 3시경이었다.
대단치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는데 뜻밖에 3주야를 계속 불길이 번져, 『런던교가 떨어진다.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하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상징적인 성 바울 사원을 재건하는 등 런던시를 부흥시키는 데 큰 공이 있었던 것은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토파 렌」이었다.
⇨8월 9일.
⑰ 베트남 여객기 추락 65명 숨져(1997) : 1997년 오늘 !
승객과 승무원 66명을 태운 베트남항공 815편이 캄보디아 프놈펜 국제공항에 추락합니다.
이 사고로 한국인 승객 24명을 포함해 65명이 숨집니다.
사고기는 베트남 호치민을 출발해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향하던 중 악천후를 만났습니다.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첫 착륙에 실패한 뒤 두번째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에서 10km쯤 떨어진 지점에 추락합니다.
사고를 당한 한국인들중엔 캄보디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려던 대학생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⑱ 미국, 이라크 공습(1996) : 미국은 1996년 오늘 이라크 방공 시설에 대한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국의 공격은 이라크군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반군 거점을 침공한데 대한 보복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크루즈 미사일 공격은 오전 10시부터 45분간 계속됩니다.
미사일 공습으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과 군 방공지휘통제시설 레이다 기지등이 피해를 입습니다.
바그다드에서는 크루즈 미사일이 떨어지기에 앞서 공습경고 사이렌이 울렸고 곧이어 대공포화가 하늘을 향해 불을 뿜습니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라크 국영TV방송을 통해 서방측이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은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⑲ 영국 카레이서 세계기록 경신(1935) : 1935년 오늘 !
미국 유타주의 한 자동차 경기장 !
세계적인 카 레이서가 새로운 자동차 속도기록을 수립할지에 관심이 모아집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투기 조종사였던 말콤 캠벨 !
캠벨은 시속 301마일을 기록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속 3백 마일대를 돌파합니다.
1924년부터 11년동안 아홉차례에 걸쳐 세계 자동차 공식기록을 경신한 말콤 캠벨 !
1939년에는 보트를 타고 시속 141마일이 세계기록을 세우기도 합니다.
⑳ 남아공 베르워르 총리 취임(1958)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헨드릭 베르워르 !
스트레이덤 총리의 사망으로 1958년 오늘 새로운 총리로 취임합니다.
인종차별정책의 강력한 신봉자 베르워르는 1966년 취임 8년만에 의회 회의실 안에서 모잠비크 청년에게 살해됩니다.
㉑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1945) : 1930년 창당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독립동맹회(비에트민)"가 호지민을 수뇌로 결 성,2차 세계대전 발발,일본군 북부베트남 진주 등 정치적 급변속에 1945년 제2차대전 종료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이용,1945년 9월 2일 호지민이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㉒ 영국 런던대화재(1666) : 런던에 큰 화재가 난 것은 1666년 9월 2일이었다.
런던 브리지 옆의 한 빵집 부엌에서 일어난 화재는 마침 강하게 불던 바람을 타고 옆으로 옆으로 번지면서 4일간이나 계속되어 당시 인구 50만이었던 런던 중심부 일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가옥소실 13,200호 성바오로 성당 등 93개 교회 소실, 피해액 1,000만파운드.
****1666년 9월 2일 일요일 밤, '한 제과점'에서 시작된 화재로 약 400 에이커(1.6㎢)의 면적이 화염으로 황폐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인트 폴 성당을 비롯한 87개 교회와 1만 3천 여 채의 가옥이 전소되었으며, 9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화재 발생 첫날, 한 교회 야간 경비원이 '화염'을 목격하고 신속히 런던 시청에 신고했다.
잠자리에서 신고를 접한 런던 시장 토마스 불러드워스(Thomas Bloodworth) 경이 "여자들이 오줌 한 번 갈기면 될 것을 가지고!"라는 신경질적인 답변과 함께 이를 묵살함으로써, 초기 화재 진압의 기회를 놓쳤다.
런던 대 화재 기간 동안, 시민들은 도시 외각에 설치된 야외 캠프에서 생활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으며, 각종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국왕 찰스 2세는 런던 시민에게 식량과 구호 물자 공급을 약속하며, 특히 치안 파괴를 노린 '적국의 방화'와 같은 음모 설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 사건은 영국의 '화재 보험'과 전문 소방대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화재 다음 해인 1667년 한 치과 의사가 런던에 개인 화재보험회사를 설립 한 것을 시작으로, 1680년까지 자체 소방대를 갖춘 회사들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보험회사 소방 활동은 보험 가입 고객만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인 것이었다.
영국 최초로 런던에 공공 소방대가 설립된 것은 런던 대 화재 사건 이후 2백년이 지난 1866년의 일이었다(2008.히스피아).
㉓ 악티움 해전(B.C 31) :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
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 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㉔ 프랑스 9월 학살 : 1792.9.2부터 7일 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반혁명파(反革命派) 죄인의 학살 사건.
동년 8월 10일의 인민 봉기에 의해 튀일리 궁을 습격한 코뮌은 루이 16세를 「당플」탑(塔)에 유폐함으로써 왕정을 전복하기에 이르렀다.
「8월 10일 혁명」의 주인공은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뒤의 몽타뉴 파(산악파)가 혁명의 고취자였다.
㉕ 몽둥이 정책 :‘평화를 위해 큰 몽둥이가 필요합니다.’
1902년 9월2일, 미네소타 축제에 참석한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연설이다.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외교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원전은 ‘멀리 가려면 부드러운 말(언어)과 큰 몽둥이를 준비하라’는 서아프리카 속담. 광범위한 독서로 속담에서 우화ㆍ논문까지 자유자재로 끌어다 쓴 루스벨트다운 인용이었으나 연설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실권이 거의 없는 부통령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발언이 나온 지 12일 만에 매킨지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루스벨트는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을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루스벨트는 특히 중남미에 군함을 보내 스페인과 영국ㆍ독일의 영향과 간섭을 받던 쿠바와 베네수엘라ㆍ도미니카를 미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켰다.
파나마 운하도 마찬가지.
루스벨트는 큰 돈을 요구하는 콜롬비아 정부를 배제하고 반란군을 지원해 파나마 공화국을 독립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으로 운하계약을 맺었다.
떠오르는 미국의 힘을 과시하려 최신 전함 16척을 건조해 흰색으로 칠한 후 ‘대백함대’라는 이름을 붙여 세계일주 항해도 강행했다.
루스벨트는 아프리카 속담과 달리 ‘부드러운 언행’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무연탄노조의 대파업을 몽둥이(군대)를 동원해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광부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용자의 양보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기업집중에도 몽둥이를 휘둘렀다.
‘세계의 경찰국가, 미국’의 출발점격인 몽둥이 정책은 외국과 기득권층을 향했던 셈이다.
요즘 재등장하는 분위기인 한국의 몽둥이는 어디를 겨냥하고 있을까.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㉖ 세계 첫 탱크 등장(1916) :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오늘 영국이 제작한 세계 최초의 탱크 '마크 원 Mark-1'이 선보인다.
마크 원 탱크는 기관총과 대포를 장착했지만 속도는 겨우 시속 6km !
보병이 걷는 속도에 맞췄다.
이날 첫 선을 보인 마크 원은 13일 뒤인 9월 15일 '솜므(Somme) 전투'에 투입된다.
㉗ 불타는 애틀랜타 :‘포격과 방화, 약탈의 애틀랜타.
거대한 목조건물이 불타 쓰러지는 사이로 마차는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왔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이다.
여주인공 스칼릿 오하라로 분장한 비비언 리가 애틀랜타를 탈출하는 이 장면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할 것일까.
그렇다.
공격하는 북군의 포격과 철수하는 남군의 물자소각으로 폐허로 변하는 애틀랜타의 현실을 영상에 담았다.
남군이 빠져나간 다음날인 1864년 9월2일 애틀랜타를 점령한 북군의 지휘관은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 5월부터 병력 우세를 발판 삼아 진군을 시작한 셔먼은 애틀랜타에 당도하기까지 크고 작은 16차례의 전투에서 백중세를 기록했으나 갈수록 악명을 떨쳤다.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셔먼은 철도에서 목장, 면화밭, 대형 건물에 이르기까지 남부의 전쟁수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파괴하고 불태웠다. 셔먼이 지나간 자리는 1990년대에 이르러야 복구가 완료될 만큼 잿더미로 변했다.
남부의 증오가 얼마나 깊었는지, 평양 군민들의 공격으로 불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소식이 알려졌을 때 애틀랜타에서는 ‘원수를 대신 갚았다’는 말이 돌았다.
2차대전 중에는 남부 출신 기갑병이 셔먼의 이름을 딴 M-4셔먼 전차의 탑승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셔먼이 초토화한 애틀랜타 점령은 미국의 역사를 바꿨다.
지지부진한 전황 때문에 재선 여부가 불투명했던 링컨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고 남부와의 휴전 논의가 사라졌다.
세계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후 미군 총사령관에 지명돼 미국 최초의 4성 장군 계급까지 받은 셔먼은 자신의 이론을 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다.
셔먼의 병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차별 포격과 초토화를 통한 충격과 공포.’
(인터넷한국일보,2009)
㉘ 기타 오늘의 역사
1882 민영익 공사, 미국에 한국선교 청원
1906 드레스덴서 범게르만회의(제1회) 개최
1906 간디, 반영운동으로 비폭력투쟁 제창
1911 일본-중국간 경봉철도 연장에 관한 협약 조인
191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구성, 제1회 총회를 개최함
1916 경북노회 분립.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경남노회를 분립할 것을 허락받음.
1919 미 공산당 시카고서 창립
1920 소련 바크서 제1회 동방민족대회 개최(37민족 대표 참가)
1933 이탈리아-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35 미국본토에 최악의 태풍 내습. 350여명 사망
1945 일본 연합군총사령부(GHQ) 육해군 해체와 군수생산을 중지 하는 지령1호 발표
1945 동경에 GHO(연합군사령부) 설치
1945 경남노회 교회재건 및 노회 복구 선언
1946 소년 노동법 제정
1947 미주(美洲) 19개국, 미주 상호원조조약 조인 (리오조약)
1948 미군정, 경찰권 이양
1949 중국 중경에 대화재 1,700명 사망
1957 정부, 말레이지아 연방 정식 승인
1962 소련-쿠바 군사경제원조 협정 조인
1980 전두환 대통령 새 내각 구성
1980 남덕우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1 미, 중성자탄 생산 개시
1983 구소련, KAL기 격추 시인
1987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내한
1989 제30회 국제기능올림픽 폐막. 한국 8연패
1992 니카라과 해변마을에 지진으로 인한 해일로 1백여명 사망
1993 국내최초 다목적 경비행기 '창공91호' 개발
1994 구소련군 독일주군 마감
1998 스위스 여객기 대서양에 추락, 탑승객 229명 전원사망
1999 북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효 주장하며 서해 해상군사 분계선 선포
2000 신선호 전 율산그룹 회장, 복합건물타운 '센트럴시티' 완 공으로 재기
오늘의 인물
① 안중근(安重根 ; 1879.9.2 - 1910.3.26) : 구 한국 말의 의사. 황해도 신천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14세 때 천주교 신자가 됨.
1905년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1907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적. 이후 각처에서 다대한 성과를 거두다가 1909년 10월에 우리 나라 침략의 주도적 인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하르빈에서 만나기로 한 것을 기회로 안중근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10월 26일 하르빈역에 닿아 일본 사람을 가장하고 경계망을 뚫은 후 권총으로 그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뒤에 여순(旅順) 감옥에 수감, 다음 해 3월 26일 상오 열시 사형을 당하였다.
1962.3.1 대한 민국 건국 훈장 중장을 받았다.
⇨12월 15일.
② 노천명(盧天命 ; 1912.9.2 - 1957.12.10) : ⇨ 6월 16일.
⇨8월 20일.
노천명은 고독과 애수가 깃든 작품으로 유명한 시인이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1935년 <시원> 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이 실려 있는 시집 <산호림 珊瑚林>을 펴냈으며, 같은 해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 체호프의 <앵화원>에 출연했다.
1945년 2번째 시집 <창변 窓邊>을 발표했는데, 첫 시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독과 애수가 짙은 시를 주로 실었다.
6․25전쟁 중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부역했다는 이유로 9․28수복 때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을 모아 <별을 쳐다보며>(1953)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 실린 총 40편의 시 중 21편이 옥중시로, 그 가운데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등을 통해 현실에 대한 혐오감과 심한 고독감을 표현했다.
이후 그녀는 일관되게 자기중심적인 내면세계로 빠져드는 경향의 시를 발표했다.
1958년 <유월의 언덕>이 포함된 유작시집 <사슴의 노래>가 출판되었다.
수필집에 <산딸기>(1948)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서간문독본>(1955) 등을 출간했다.
③ 유건호(柳建浩 ; 1922.1.24 ~ 1998.9.2) : 언론인.
조선일보사 부사장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을 지냄.
유씨는 조선일보 40년 근무, 최장수 사회부장(10년)이란 보기 드문 기록을 가진 언론인이었다.
그는 경복중,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일전쟁에 참가했다가 부대를 탈출, 광복군에 편입한 후 고국땅을 밟았다.
1946년 조선일보 속간 후, 방응모 사장이 발탁,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초년 기자시절에는 정치부에서 중앙청과 경무대를 출입했으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나자 종군기자로 취재, 필명을 얻었다.
2년 만에 사회부차장, 다시 4개월 후 부장으로 승진했다.
입사 3년이 채 안 돼 27세의 사회부장이 된 셈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그는 부산분실장으로 부임했다.
1962년,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편집국장을 맡았고, 조선일보 상무-전무-부사장(발행인 겸 인쇄인)을 거쳤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헌법개정심의위원, 대한체육회 이사,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 감사,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유씨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 스타일로 남들과 다투거나 등을 진 적도 없고, 불편한 심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일도 없었다고 주위에선 말한다.
옥한흠(玉漢欽 ; 1938.12.5 ~ 2010.9.2) : 경상남도 거제 생.
대한민국의 개신교 목사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이다.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로 재직하다 2010년 9월 2일 오전 8시 43분 폐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소천(召天)하였다.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유산은 제자훈련이다.
목차 [숨기기]
1 약력
2 저서
3 참조
4 바깥 링크
약력 [편집]
성균관대학교 문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박사 및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소유하고 있다.
1978년부터 2003년까지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였으며, 2004년부터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로 시무하였다.
1998년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의 연합 단체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았다.
저서 [편집]
평신도를 깨운다(국제제자훈련원 1984)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국제제자훈련원 2001)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국제제자훈련원 2004)
********“우리 가슴에 별이 되어”: 권택명 /사랑의교회 장로·시인
나침반이라는 뜻을 지닌 컴패스
일본식 작명으로 곤파스가 된 태풍이
밤새 강풍과 폭우로 한반도를 두드리고 지나간 다음날 아침
2010년 9월 2일 오전 8시 43분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의 나침반인
옥한흠 목사님을 평안 가운데
당신의 영원한 나라로 데려가셨습니다.
밤새 세차게 몰아친 폭풍은
2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참혹하게
외아들의 생명을 저희들의 목숨 대신 거두시던 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진동하게 하시며
애통해 하시던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
그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의교회와 온 세계 신실한 주의 종들이 무릎 꿇어
좀더 이 땅에 함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했으나
인간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뜻은
목사님이 고통스런 육신의 멍에를 벗으시고
아름답고 빛나는 하늘나라에서 쉬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실 일이 많고
이 땅에서는 목사님의 인자하신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는 아쉬움에
남은 저희는 한없이 슬프고 섭섭하지만
모든 것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감사로 받습니다.
식민 통치 하의 척박한 한반도 남녘 땅 거제도 한촌에서 태어나
세계대전과 해방과 분단과 동족상잔과
학생혁명과 군사혁명과 민주화운동 등
숱한 질곡의 민족사를 온 몸으로 통과하며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예수 오직 복음에 사로잡혀 달려오신
72년의 생애,
그 생애를 통해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를 깨워오신
긴 세월뿐만 아니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의 기적 같은 25일간
목사님은 무언의 메시지를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잠시 의식을 찾으셨을 때
장남 성호 형제가 손바닥에 써 보인 글자,
“아빠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 있으세요?” 라는 물음에
힘들게 쓰신 대답,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성호 형제는 목사님이 알고 그리워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이 생명보다 또한 가족보다 사랑했던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들어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그 사랑 받고 저희가 자랐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으신 그 헌신으로 오늘 사랑의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너머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있습니다.
옥 한 흠,
범상치 않은 이름 그대로
한없이 흠 많은 옥이라고 겸손해 하시고
그러나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흠이 한 개도 없는 옥으로 만드셨다고
예수님만 한없이 자랑하시던 분,
때로는 자애로운 아버지로
때로는 추상 같은 스승으로
잠 자는 평신도를 깨워 동역자의 반열에 세우고
큰 스승이신 예수님 닮게 하려 진액을 쏟으신 분,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눈에 보이게 해주시려 전력투구하신 참 스승,
목사님을 이 한국 땅에 보내주시고
잠시라도 저희와 한 시대 한 공간을 공유하게 하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저희와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시는 분
사랑하는 옥 목사님
목사님이 계셔서 저희는 행복했습니다.
한국교회의 큰 별
개신교계의 큰 어른
한국교회 거목
이 시대 목회자의 사표
한국교회의 영적 멘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
한국교회 영성의 나침반
목회자들의 역할 모델
설교의 모범 답안인 탁월한 설교자,
목사님의 소천을 전한 이 땅 언론들의 보도입니다.
지금 소박한 빈소와 영정 사진 속에서
사춘기 소년처럼 조금은 수줍어하시는 모습으로
저희를 보고 계시는 목사님,
평소 과대 포장되는 걸 싫어하시고
당신이 이 땅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상 받는 것이 아닌가
항상 자책하시던 목사님께는
어쩌면 부담스런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한 영혼을 변화시켜
작은 예수로 살게 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신 분
제자훈련의 광인
오직 은혜에 감사하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신 분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게 늘 마음이 가 있던 분
자신은 쇠하고 주님은 흥하시기를 갈망하신 분
이런 것들이 목사님의 진솔하신 모습이었음을 저희는 압니다.
아니,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즐겨 부르시며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하게
오직 예수님과 그 몸 되신 교회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전도자,
선한 싸움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이 시대의 사도 바울 같은 목회자.
아니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양들을 한없이 사랑한 예수님 닮은 선한 목자요
항상 자신을 성찰하며 진지한 고뇌로 시대를 깨운 선지자적 목회자
바로 그것이겠지요.
그러나 목사님,
오늘은 이 땅에 남아 있는 저희를 위해
세상의 이 모든 헌사(獻詞)들을 용납해주십시오.
이 모든 췌언(贅言)들을 관용해주십시오.
저희도 그렇게 살도록 다짐하는 하나의 표징이 되게
그냥 둬주십시오.
나중 나중 저희 역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이런 평가를 받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라는 표적으로 새겨놓게 하십시오.
옥한흠 목사님!
“한국교회의 큰 별이 졌다”고 합니다.
큰 별이셨던 목사님은 지신 것이 아니라
다만 저희 모두의 가슴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희 모두의 마음속에서 크나큰 그리움의 흔적으로
주님과 함께, 저희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십시오.”
항상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려던 그 말씀
새벽 종소리처럼 저희를 깨울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목사님 !
그리우실 사모님과 자녀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손녀들
그 간의 세상 고통 걱정 근심 염려 다 내려 놓으시고
그토록 사랑하고 사모하셨던 주님 품 안에서
주님 주신 영광의 면류관 쓰시고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이 땅의 남은 사역은
선후배 동역자들과
부족하지만 목사님께서 씨 뿌리고 키워 놓으신
남은 저희들이 이어가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세상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고아처럼 남겨두지 아니 하시겠다 하신 그 약속처럼
목사님께서도 주님 곁에서
이 땅에 남은 사랑하는 사모님과 가족과
저희와 또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응원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 떠나시며
제자들에게 하나 되라 당부하신 말씀처럼
목사님의 평생 소망이셨던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치를 위해 성원해주십시오.
사랑하는 목사님, 목사님을 천국으로 먼저 보내드리며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의 손을 모읍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지금 천상에서는 옥 목사님을 맞이하신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을 칭찬하시며 기뻐하시는 잔칫날이오나
지상에서 쉽지 않은 작별을 아쉬워하는 저희를 위로하여주소서.
큰 지도자를 먼저 떠나 보낸 한국교회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그리고 목사님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는
이 짧게 지나가는 시간에
잠시만의 눈물을 허락하소서.
감사의 눈물 아픔의 눈물 이별의 눈물 기약의 눈물
그리고 비아 돌로로사의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하신 말씀처럼
이제 저희를 위해 울지 않게 하시고
옥 목사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가난한 이웃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울게 하시고
무엇보다 온 땅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울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 모두 어느 날엔가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과 옥 목사님을 뵈올 때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만남의 기쁨만이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④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 1783.9.8 ~ 1872.9.2) : ⇨9월 8일.
덴마크의 시인․종교가․역사가.
우드비 출생.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덴마크의 부흥에 기여한 농민 교육자이다.
코펜하겐대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북구 신화(北歐神話) Nordens mythologi》(1808)를 써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영국으로 여행하여 영국 국민의 자유와 실제 생활에 깊은 감명을 느끼게 되면서 라틴적․인문주의적 학교교육을 청소년들의 생명을 위축시키는 '죽음의 교육'이라고 공격하고, 일하는 국민을 위한 '생활학교'를 주장하여, 이를 즉각 설립하라고 나라에 호소하였다.
조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예부터 전하는 민족정신과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하여 국민부흥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특히 1864년의 패전 후 그의 제창으로 전국에 설립된 국민대학(국민고등학교라고도 한다)에서 교육을 받은 농촌 청년은 패전에 잇따른 농업 위기를 극복하여 세계적 농업국, 평화적인 문화국가 건설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국부(國父)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전집 10권이 있다.
⑤ 쿠베르탱(Pierre, baron de Coubertin ; 1863.1.1 - 1937.9.
2) : 1894년 근대 올림픽 대회를 창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프랑스의 교육자.
올림픽 대회는 중단된 지 약 1,500년 만에 그의 공로로 부활되었다.
쿠베르탱의 집안은 대대로 군인집안이었으나 그는 가문의 전통을 깨고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육방법 모색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그리스를 방문하여 마침 고대 올림픽 경기 발상지의 발굴현장을 보게 되었다.
1892년 그의 도움으로 조직된 프랑스의 체육단체인 운동경기연맹이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근대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2년 후 파리에서 열린 국제체육회담에서 만장일치로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쿠베르탱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를 창설하여 1896~1925년에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신체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프랑스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체육에 관해 많은 저서를 썼고, 올림픽기를 고안했다.
⑥ 오스트발트 출생(1853) : ⇨4월 4일.
⑦ 장지동(張之洞 ; 1837.9.2 ~ 1909.10.4) : 중국 청말 정치가. 허베이성[河北省] 난피[南皮]출생.
186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여러 관로(官路)를 거쳐 양광(兩廣)총독 ·호광(湖廣)총독을 지내고, 1907년 군기대신(軍機大臣)의 요직에 취임하여 이홍장(李鴻章)과 어깨를 겨루는 실력자가 되었다.
총독시대에 광둥[廣東] 해군과 우창[武昌] 육군을 서양식 편제로 바꾸고, 광둥 ·우창 ·한커우[漢口]에 병기창과 조병창 및 방적 ·제사공장 등을 세웠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양철창(漢陽鐵廠)과 핑샹[萍鄕]탄광이 유명하다.
또한 외국차관으로 징한[京漢]철도를 건설하여 근대 이후 중국 관료자본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사상으로는 보수파에 속하여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였을 때 이를 탄압하였다.
저서에 《장문양공전집(張文襄公全集)》이 있다.
⑧ 기타 오늘의 인물 ⑨⑩⑪⑫⑬⑭⑮
0595 요안네스4세 사망.6세기에 있었던 기독론 논쟁에서 정통파와 그리스도 단성론파간의 신학적 분쟁을 중재함.
1677 바이스만 출생.독일 루터교도.그는 뛰어난 설교자였고 당대에 상당히 칭송되던 몇몇 찬송가의 작사자였다.
1726 하워드 출생.영국의 박애주의자.사회개혁자.그는 감옥개혁가 로서 그의 생애를 시작함.
1804 랑 출생.벨기에의 역사가 및 신학자.그는 학식있는 사람으로 서 그의 동포들에 의해서 크게 존경받았다.
1813 프랑스 장군 모로 사망
1820 멀린스 출생.영국의 회중파 선교사.1842년에 런던선교회에 가 입하여 목사가 된 후에 인도로 떠났다.
1850 시인 유진 필드 출생
1869 자동차 머플러--총포 소음장치 발명 하이램 맥심 출생
1890 이순기 출생.장로교 장로,독립운동가,청년운동가,수난자.함흥 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함.
1898 장정심 출생.기독교인 여류시인,전도사.호는 호란.1929년 감 리교협성신학교 졸업(5회).많은 시를 발표함.
1918 작가 앨런 드러리 출생
1948 우주비행사 크리스타 맥콜리프 출생
1952 테니스선수 지미 코너스 출생
1964 제1차 대전 영웅 미국의 알빈 요크 사망
1996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 사망
오늘의 샘터
① 강우규 의사의 유언 : 1920년 11월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김.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 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② 노천명, <사슴>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③④⑤⑥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