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7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히브리서 10:11-14
마가복음 13:1-8
성전을 다시 세우라!
마가복음 13장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면서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였으니,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이 예수를 정말로 죽이고 싶었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 대목이 아니더라도 예수의 말을 듣고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고 싶어 한 경우가 여러 번 성서에 나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 일변도였습니다. 그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자,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를 찾아와 소위 “검증”을 다각도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에게 던진 예수의 말은 그들을 부끄럽게 했고, 분노하게 했고, 결국 살의를 품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이 예언은 주후 70년에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로마군대의 공격으로 헤롯이 지은 성전이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성전붕괴의 예언이 성취되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 보다, 성전붕괴를 언급한 예수의 속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언급하고 싶었던 것은, 거대한 돌을 깎아서 만든 웅장한 건축물이 무너진다는 상징어 속에 숨겨진 유대교의 실상이 아니었을까요?
함께 봉독한 서신서 히브리서 10장 말씀은 예수에 대한 탁월한 정의를 담은 성경입니다.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는 최초의 고백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분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단 한번만 드리는 것으로써, 우리를 모든 죄책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유대교 제사장들과는 정반대 모습의 제사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유대교와 그 종교지도자들에 맞서서 유대교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종교로 거듭나게 만드는 일에 목숨을 던진 것입니다. 그것으로 히브리서는 예수를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전붕괴예언은 예루살렘 성전의 물리적인 파괴보다 더 깊은 속뜻을 담고 있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종교는 반드시 망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진 껍데기의 종교행위는 그 종교의 진정성을 담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에게 지기 힘든 멍에만 씌우는 종교가 될 뿐이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나이든 제사장이 제사드릴 제물에 모여드는 쥐 때문에 고민하다가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서 키우며 제사드릴 때마다 제단 다리에 고양이를 묶어두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쥐가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나이든 제사장이 죽고 젊은 제사장이 부임해서 똑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그만 그 고양이도 늙어서 죽었습니다. 쥐들도 고양이가 무서웠던지 더 이상 제사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젊은 제사장은 시장에 가서 고양이를 한 마리 사다가 제단에 묶어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꼭 그래야만 제사가 시작되는 줄 알았던 것이지요.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것입니다.
이런 종교행위가 누적되고, 어떤 의도와 더불어 강요되기 시작하면,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미신이 되어서 그 종교의 본래적인 정신을 말살시킵니다. 누가 그랬는가하면, 예수 시대의 유대교가 그랬고, 종교개혁 시대의 그리스도교가 그랬고, 혹시 오늘날 우리도 그런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진심으로 유대교의 멸망을 원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을 휘둘러 내어 쫓은 성전정화사건도 형식에 함몰된 종교성을 살려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에 나오는,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과 비교하면, 형식은 그 안에 본질을 내포할 때에만 의미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504년 전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이유도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의 방향을 찾아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발표한 95개 논제는 오늘 우리에게 “면죄부 반박문”으로만 기억되지만, 95개 논제를 찾아서 읽어보면, 교회를 향한 루터의 사랑과 인내가 흘러넘칩니다.
제사 한 번 드렸다고 내 속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 것처럼, 면죄부 한 장이 죄책을 사할 수는 없다는 진심을 담은 것이 95개 논제인데, 그 첫 번째 논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신자의 일생이 회개의 삶이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그는 인생이 회개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회개와 용서를 어떤 외적인 형식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면증 발행과 구매행위 사이에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고 루터는 말합니다. 파는 자나 사는 자나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이 담긴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예수의 멍에를 지고 그 멍에로 자기 인생의 짐을 지고 잘 버티게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생의 짐에 탐욕의 짐까지 더 지고가게 하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한 교회가 아니며, 그곳에서는 복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루터의 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모임인 <한국루터학회>에서 한국기독교루터회의 요청으로 95개 논제를 “현재화”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오늘날 우리가 회개할 것이 많이 보이더군요. 신학자에게도, 목회자에게도, 그리고 일반 교인에게도 복음이 담긴 신앙과 자기 욕심이 담긴 신앙을 구별해야한다는 루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2절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제자가 예수께 말합니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성전을 지은 돌의 규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건축방식으로 종교본산의 위용을 자랑하려한 것이 먹혀들어간 것입니다. 13장 1-2절은 장소를 올리브 산위로 옮긴 이후인 3절 이하와 연결이 됩니다. 이번엔 멀리 산에서 성전을 내려다보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가 예수께 묻습니다. “성전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 언제 일어날 일이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형식에 사로잡혀있습니다. 한 번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인 성전을 보고 그 위용에 감탄 한 듯이 말했다면, 이제 다른 제자들은 어마어마한 저 건축물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말에 놀라서 다시 한 번 예수께 그 때가 언제인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질문자의 의중과 전혀 상관없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로 계속 이어져 나갑니다. 전쟁과 전쟁이 이어지고,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서로 맞서고, 지진과 기근이 도처에서 발생한다고 주님은 대답합니다.
종말의 현상에 관한 예수님의 어록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조금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2000년 동안의 시간동안 인류는 한두 번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역사를 책으로 써야할 정도로 많은 전쟁을 벌였고, 지금도 전쟁과 테러가 벌어집니다. 지진과 기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환경 문제로 인한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들도 가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인류는 여전히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예수의 종말예언에 우리가 점점 더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2000년 전 종말의 예언을 들은 제자들도 같은 느낌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느낌이 중요한 이유는, 성전파괴로 시작한 종말이야기 속에 그 시대 종교의 역할에 대한 깊은 암시가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언에 담긴 의미는 정신이 사라진 껍데기 종교의 출현이 종말의 시작이고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지난 2000년 간 인류가 벌인 모든 전쟁에 종교는 깊이 관여했습니다. 종교 간의 전쟁도, 서로 다른 종교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같은 종교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차치하고라도, 기독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했다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한국 땅의 기독교 전래 역사는 가톨릭 230년 개신교 130년입니다. 서구의 교회는 물론이고, 아시아의 기독교역사와 비교해도 우리의 역사는 매우 짧은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130년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이 땅의 기독교는 매우 복잡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해방, 분단과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된 대립의 역사 한 복판에 기독교와 교회가 서있었습니다. 감람산 위에 앉아서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시는 예수의 눈으로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의 역사를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19는 교회가 그동안 지켜온 종교생활의 형식을 파괴하였습니다. 모이는 교회가 모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의 위력 앞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모임장소인 예배당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예배의 형식들, 그리고 친교의 방식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식과 모임에 집착하는 교회는 반사회적이라는 비판과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를 보면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예수께서 제자에게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13:2)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적인 성전파괴 이전에 그 제자의 생각에 대한 경고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건물이 한국교회라면, 그 의미는 130년 동안 성장에 몰두해서, 교인수와 교회재정과, 예배당 규모에 집착했던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다 한국교회라는 단어로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반성해보자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이야기하다가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2000년 이상이나 지속되는 종말이야기 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찾아야합니다. 예수가 가르치는 종말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다는 현재적 종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선포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는 그날이 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함께 하시며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협력하라는 요청입니다. 사람들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예언을 들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협력하여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의 원래 직업은 목수라고 합니다. 원문을 보면 “테크톤”인데, 직역하면 석수입니다. 우리는 집을 나무로 지어서 목수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돌로 집을 짓기 때문에 석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직업은 집짓는 자입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 성전을 보면서 “무너진다.”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조금 확장하면, “헐고 다시 짓겠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집짓는 자가 보기에 저 건물은 곧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집짓는 자인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무너진다.”라고 표현 한 것은 유대교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데, 여전히 유대교 울타리 안에 갇힌 것이 안타까워서, 제발 그 장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오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그 길을 따라서 달려 나오라는 것입니다. 길이 없다면 가고 싶어도 못가고, 달려야할 사람이 없으면 그 길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신앙도 형식에 갇혀있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열어놓은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자신은 제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진리와 지유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길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절망보다는 희망을 주옵소서.
주님, 우리가 당신의 멍에를 메고 우리 인생의 짐을 지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동안 우리 속에 기쁨이 넘치게 인도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