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후의 개혁정승 번암 채제공蔡濟恭
임진년의 왜란과 병자년의 호란에 의해 국토는 더욱더 황폐화해져 갔다.
임진왜란 이전, 170만결에 달하던 토지가 임진왜란 이후에 54만결로 줄어들어 백성들은 더욱더 도탄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임진년 이전 끝없는 부와 영예를 누리던 양반사회도 급격한 사회의 변화 속에 큰 타격을 받았고 조금씩 그 벽이 허물어져 갔다.
이러한 정세 속에 시대는 안정을 되찾아 이루게 하는 영웅의 출현을 애타게 요구하였다.
그 시대의 요구에 합당하게 인조, 효종대를 거치면서 숙종때에 이르러 조선사회는 그런대로안정을 되찾았고 영조와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오래만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부흥의 꽃을 활짝 피었다.
영.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학문의 연구와 관심이 집중되었으며조선왕조 개창 이후 줄기차게 억압받았던 서얼출신들또한 출사의 변모를 꾀하였다.
백성들 또한 암울했던 침체기를 벗어나 비전이 꿈틀거리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생업에 종사하였다.
그 결과 돈을 가진 평민[요호부민:饒戶富民]들 우후죽순처럼 나타났고 정승, 재상등을 지낸 양반계급이 붕괴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아울러 서얼출신들도 벼슬길이 열려 조정의 주요기관에서 공무를 맡아 보아 신분에 얽매여 있었던 조선의 낡은 틀에 금이 갔다.
즉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평등한 시대가 조금씩 열려 가는 것이었다.이것은 영조와 정조가 의도했던 바이다.
특히 정조임금은 성왕정치聖王政治를 근본으로 하여 대대손손 특권을 누리며 전횡을 일삼는 사대부들을 멀리하고 오직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분별만 하고자 하였다.
어릴적부터 학문에 뛰어난 정조임금은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새로운 문물의 유입에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면서 낡고 썩어빠진 조선의 묵은 의식을 타파하는 개혁을 이루어 탕탕평평蕩蕩平平한 땅의 이치를 좇아 군주의 도리로 핍박받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누구나 모두 함께 공존하여 잘 사는 선경세계를 건설하자는 원대한 목표를 정하였다.
그것이 진정한 정조의 사상이었고 그 맥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사도세자 또한 아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수구세력 노론의 공세에 의해 억울하게 뒤주 안에 갇혀 굶어죽었고정조는 어린시절에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점차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마음 속으로 갈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가 못다한 그 개혁의 꿈을 반드시 실현코자 하였다.
개혁을 이루는 과정을 펴는 과정으로서 즉위하자마자 노론의 주벽이었던 외가 풍산홍씨 가문을 가격하고 외척의 간섭을 방지하였다.
또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전횡을 일삼는 사대부들에게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사대부들은 부와 권력으로서 임금과 적이 되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더욱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에 급급하였다.
이들을 노론벽파僻派라 하며 반면, 정조의 정책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시파時派라고 한다.
그에 고심한 정조는 왕법을 바로세우고 왕권강화를 꾀하였으며 자신의 스승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더불어 나라의 앞날에 대해 걱정과 고민을 아끼지 않는 많은 남인의 선비들을 기용하려 하였다.
번암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정조의 사상에 부합하여 정치적인 동지가 되었다.
특히 번암 채제공은 정조가 세손시절때부터 사부로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던 왕사王師였다.
번암은 본관이 평강平康이며, 자는 백규伯規이다.
그의 부친은 중추부지사 채응일蔡膺一 공이다.
약산 오광운 선생과 국포 강박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번암은 1735년[영조11년]에 15세의 나이로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 문과정시를 통해 승문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번암은 영조의 특명에 의해 탕평책을 시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어 예문관 사관이 되었다.
번암은 그때부터 정통적인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나 1751년 중인신분을 가진 사람의 묘소를 빼앗았다는 탄핵에 의해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는 균역법 운영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충청도에서 암행어사로 활약하였고 1755년에는 나주괴서사건을 조사하는 문사랑으로 활동한 후 부승지 등을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1758년 도승지가 되어 왕명출납을 맡았고 병.호.예조등의 판서등을 중앙행정직을 두루 거친 후 1772년부터 당시 세손인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세손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는 비참한 사건은 1762년 임오년에 이루어졌고, 그 사건을 일컫어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번암은 사도세자가 생전시, 사도세자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많은 변론을 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는 왕명을 내리자 끝까지 반대하며 철회시켰다.
그리하여 정조로서는 번암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고 든든한 후원자이자 존경스러운 스승이었다.
번암은 세손의 스승이 된 후,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서 경제활동을 관할하며 주도하였다.
1776년 영조가 83세의 보령으로 승하하고 그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가 되어 본격적인 사도세자의 복수와 노론벽파의 제거에 힘을 기울였다.
번암은 노론벽파를 엄혹하게 추달하였고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세도가 홍국영또한 탄핵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임금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권력을 쥐고 전횡을 일삼던 노론벽파가 타격을 받아 주춤하였지만 쉽게 물러설 노론벽파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인을 비롯한 온건 노론시파와 소론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여 어느정도 당쟁이 해소되었고 노론벽파또한 기세가 살아있었다.
그래서 곧 번암은 홍국영의 몰락에 영향을 받아 노론벽파에게 홍국영의 동류로 몰려 탄핵을 당하여 8년동안 서울 명덕산에서 칩거생활을 했다.
번암은 8년의 칩거생활 속에서도 학문연구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앞으로의 붕당정치의 타파와 노론벽파의 세력을 저지하는 정책을 구상하였다.
8년후인 1788년 정조의 특명으로 인해 우의정직을 제수받아 8년의 칩거생활을 마무리하였다.
번암은 우의정 직을 제수받은 후 '6조진언'을 정조에게 올렸다.
그 기본골자는 임금이 황극의 도리를 다하여 나라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 6조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남인세력과 함께 더욱더 개혁정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때에 정약용, 박제가, 이가환, 류득공, 이덕무 등이 발탁되어 정조의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들은 모두 학문이 뛰어난 지식인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급격히 문화가 발전하고 융성해졌다.
게다가 소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존중화사대주의를 주창하는 노론에 비해 나라의 역사를 재정비하고 다듬어 자주적인 민족의식또한 고취시켜 나갔다.
또한 번암은 1790년 좌의정에 올랐는데 영의정과 우의정이 궐석이어서 2년동안 독상체제를 유지하였다.
그에 따라 정권의 비중이 번암에게 쏠렸으며 번암은 더욱더 개혁정책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특히 번암은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매매를 허용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하였다.
당시 시전상인들은 노론벽파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노론벽파의 보호를 받았는데신해통공으로 하여 노론벽파는 시전상인들의 후원이 차단되었고 시전상인들또한 노론벽파의 보호가 희미해졌다.
번암은 평소부터 상공업을 장려하여 시장을 자유화하여 나라에 부를 쌓아야 한다라는 자신의 소신을 정책적으로 실현해 나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791년, 엉뚱하게 남인 출신의 윤지충이라는 선비가 천주교인으로서 모친상을 당한 후 모친의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는 사건이 터져 남인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더욱이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의 인척이었다.
대저 남인들은 천주교를 천주학이라 하여 학문으로 한 범주로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학문으로 연구하였으나 일부는 종교적인 신념을 가져 신앙하기도 하였다.
윤지충은 종교적인 신념을 가져 천주교를 신앙한 선비이다.
이 사건이 터지나 윤리강상을 저버린 일이라 하여 온 전국에서 들끓었으며 그 결과는 남인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그러자 정조는 채제공에게 영의정에 임명하면서 더욱더 개혁정치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였다.
당시 번암 채제공은 수원성 축성의 감독으로 수원에 가 있는 상태에서 영의정 교지를 받들었다.
그러나 번암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정권의 대세를 다시 잡으려고 노력한 정조의 기대와 이상은 막강한 노론벽파의 파상공세로 번번이 좌절되었다.
번암 또한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이었으며, 정조와 번암이 꿈꿨던 개혁의 열매는 점점 힘이 떨어져 멀어만 갔다.
번암은 1798년 결국 정계에서 은퇴를 했고 1799년 80세를 향년으로 별세하였다.
정계은퇴후 그는 끊임없이 노론벽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의 배려와 보호로 안온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으나 1800년 정조마저 승하한 후, 정순왕후의 후원을 등에 입은 노론벽파의 탄핵으로 추탈관작되었다.
그러나 1823년 영남 남인들의 요구로 인해 신원되어졌고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번암은 영조가 가장 아꼈던 인물로서 정조에게는 많은 조언과 지지를 보내준 스승이었다.
심지어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번암을 일컫어 '번암은 진실로 사심없는 나의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 라고까지 했다.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고 애도하는 의미에서 기록한 금등을 영조에게 전해 받아정조와 함께 보관하기도 했다.
그토록 번암은 늘 사욕과 사심이 없었으며 항상 원칙과 소신으로 나라일을 받들어 집행하였다.
그리고 남인들의 영수가 되어 젋은 남인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번암또한 정조의 개혁에 동참하는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남인세력의 정신적 거두이자 정조의 영원한 스승이며 아낌없는 동지였던 번암 채제공.....
그는 세월의 모진 풍파속에서도 늘 소신과 청렴을 잃지 않았고 병든 세상을 탐욕의 무리로부터 건져 내고자 했던 조선 최후의 개혁정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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