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부적절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현실을 부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더라도 과거와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통속이라는 것을 지울수는 없다. 나는 그날 즉 2007년 6월 6일 현충일날, 선산휴게소에서 서울 주소지의 후진차에 전면 우측 문짝이 소생불능의 치명상을 입은 데도 불구하고, 상처입은 애마를 끌고, 천장지비인 용유동의 우복마을을 지나 이곳 쌍용계곡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베낭을 지고, 쌍용계곡안으로 걸어 가면서, 나의 오감은 송곳 끝처럼 날카로워졌다. 쌍용계곡은 백두대간 허리띠 쯤의 숨은 절경지이며, 기암괴석으로 몸치장하고, 섬섬옥수같은 하얀물줄기가 담과 소를 만드는, 그야말로 비할바 없는 선경의 지대였다. 나는 병풍을 이루는 바위벽을 쳐다보며, 물가 너럭바위에서, 잠시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시선을 계류로 떨구니, 쉬리 갈겨니 같은 피리류의 물고기들이 떼를지어 몰려오고 간다. 이때 책에서 본 한구절이 얼핏 머리를 스친다. '하나님이 먼저 주시는 것은 그분의 언어다' 는 내용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은빛 비늘을 움직이며 흐르는 산골짝 물이 하나님이 먼저 주신 언어의 일종이라는 것을 문득 생각해 본다. 저 폭포처럼 우람하게 쏟아지는 물의 포효도 그 분의 언어요. 서로 엉켜 소용돌이 치면 갈겨니 되어, 등 비늘 퍼득이며 무지개로 흘러가는 계류가 모두 그분의 언어가 아닐까. 나는 걸음을 옳겨 심원사로 걸었다. 고도가 높아 갈 수록 계곡쪽에서 핀 연노랑 꽃 물푸레 나무와 주홍꽃으로 핀 이름모를 산꽃이 시야에 석고를 붙인다. 드디어 심원폭포의 3단 물줄기가 나타나고, 흐르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흐르는 폭포가, 언어를 만든 그분의 모습처럼 환상적이다. 여기서 다시 십여분을 더 올라가서 심원사 절에 당도할 수 있었다. 요사채 앞에서 인기척을 내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심원사 터는 풍수로 짚어볼 때 명당지의 하나라 한다. 절을 휘둘러 보니, 앞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물도 그렇거니와 도장산의 산 정기가 가득 내려와 있는 절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 때 나는 추담에 서서 심원사 스님에게 보내드린 엽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현충일 절로 가서 스님을 찾아 뵙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괜히 기침을 하고 서성거려도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나는 도장산 등산 후에 다시 심원사에 들리기로 작정하고, 도장산 가는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지난 회상에 몰두해있었다. 나의 추억은 흰눈에서 시작되었다. 꼭 십여년전 1월달이었다. 삼일간 폭설이 내려 전국의 교통이 마비 되고, 차량사고가 속보로 전파를 괴롭히는 겨울이었다. 며칠지나 길이 뚫리자 나는 아내와 같이 여기 도장산 심원사를 찾아왔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 삼일의 그것도 쉬었다가 내리기도 한 눈송이에 지상의 모두를 내어주고, 속수무책으로 분잡을 떨던 인간의 무력감이 싫어 이곳을 찾았는지 모른다. 아내와 나는 미끄러운 산길을 겨우겨우 걸어 심원사에 도착하여 요사채문을 두드렸다. 그 때 비구스님이 문을 열고 맞아주면서, 방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방으로 들어가 수행으로 다듬어진 스님의 맑은 외모와 인격을 느끼면서, 녹차 대접을 잘 받았다. 그 당시 심원사 역사를 소상하게 전해 준 스님의 이야기가 뜬금없이 떠오른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 하였다는 심원사는 1958년 불타고, 1968년에 중건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여기 심원사에서 선인이 된 뛰어난 인물은 개운조사라고 한다. 그는 지금 상주시 개운동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개운조사라고 불렀는데. 그는 해탈을 이루고, 대자유를 누리는 선인이 되었다고한다. 개운조사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조사를 선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개운조사가 더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리산 묘향대로 떠날 때 자신이 주석을 단,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 초록을 심원사 천장에 숨겨놓았다고 한다. 그 후 백년이 지나고, 양성이라는 스님이 심원사에서 수도하다가 능엄경을 발견하고 그대로 필사한 다음 베낀 책을 가지고 심원사를 떠났다고 한다. 양성스님이 떠난 며칠 후 심원사에 큰불이 나서 천정에 도로 넣어 둔 능엄경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불이 1958년에 난 불인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그 외에도 많은 선인들이 심원사에 머물기도 하고, 스쳐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나간 영상에 집중된 탓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사방이 조망되는 능선에 도달해 있었다. 백두대간은 말할것도 없고, 수려하고 아름다운 산들이 자태를 은은히 드러내고 있다. 웅장함과 미려함을 다 갖춘 속리산, 저 속리산의 천황봉 비로골과 문장대 오송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쌍용계곡을 만드는터이다. 속리산 참 멋드러진 이름이다. 속리산,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면 나를 먼지 낀 속세에서 너에게로 데려 가 줄 수 있겠니. 속리산의 이름은 신라 말 최치원선생이 이 산에 들어 와서, 도불원인 원도, 산비이속 속리산 즉(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속세를 여의치 않는데, 속세는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에서 연원이 있다한다. 또 시루봉 승무산, 백악산, 형제봉 등이 조망되며, 청화산은 가까이에 편안하게 누워있다. 용유동 너머로 견훤산성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견훤산성은 천혜의 요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견훤은 본성이 이씨였다고 하는데, 황간견씨의 시조가 되었다. 견훤의 생부 이름은 아자개로 본성이 이씨라는 것에는 의혹이 간다. 작은 봉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힘이든다. 산줄기에는 신갈나무, 상수리 나무, 그리고 큰앵초, 솔나리, 큰까치 수염 등 책에서만 보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오늘 더딘 걸음으로 먼 산을 간다. 무려 세시간만에 옥녀봉에 도착했다. 옥녀는 선녀의 다른 표현이다. 선남선녀라고 하듯이 옥녀봉이 선녀라면, 도장산은 선남이라야 구색이 맞을 것이다. 곧이어 도장산 정상을 지나고, 병꽃 분홍잎으로 핀 산그늘에 앉아 김밥을 먹고 나서, 주위에 백반을 흩뿌리고,지고 온 돗자리를 깔아 한 잠을 잔다. 원래 산속에서 방어벽 없이 자는것은 금기 시 되어있지만, 나는 그날 그렇게 몇 시간을 잤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속리산 천황봉위 한뼘으로 해가 걸려있다. 시간이 어지간히 흘러간 것이다. 나는 발걸음을 서두러서 하산하였다. 오전 출발지 였던 심원사에 다가 갈 수록 해는 속리산 마루금에 걸리고, 상반신만 드러낸 석양의 노을은 오매에도 지을 수 없는 피카소 추상화를 그려놓았다. 그 그림은 너무 아름다워 풍경은 지워지고, 영감만 남는 그런것이었다. 계곡의 어둠은 순식간에 온다. 내가 심원사 요사채에서 다시 기침을 했을 때, 희미한 어둠이 서서히 산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즈음에 요사채 문이 열리고 스님 한분이 나와서 말을 건넨다. '시주님이 대구에서 오신 김찬일 거사입니까'하고. 나는 '예'하고 대답하면서 스님을 올려다 보았다. 드물게 보는 미인인 비구니 스님이었다. 우선 놀라운 것은 이렇게 깊은 산속에 어떻게 이런 미인이, 비록 스님이라고는 하지만, 생활하고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고도 저렇게 뛰어난 미를 가지고 있다니, 강물은 막아도 여자들의 화장을 막지 못한다고 하던데, 화장없이 청정한 얼굴을 한, 비구니 스님은 '요사채로 올라오시지요.' 한다. 나는 심원사에 관하여 아직도 궁금한것이 있었으므로 사양없이 등산화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형광등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비구니 스님은 차를 끊여낸다. 아마 미리 준비한 듯 하였다. 우리는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심원사에서 선술을 깨우친 선인들의 이야기와 스님께서는 선인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고 다녀 갔다는 심원사에 계시면서 실제로 선인을 보았는냐는 것이 질문내용이었다.그러나 막상 비구니 스님과 대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스님의 전력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한번 더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내가 스님의 사생활을 건드리자, 스님은, 대구에 계시는 혜선스님에게 선생님의 이력을 들었습니다. 여자학교 교감이시고, 시인이시고, 수필가이시라고요. 대구가시거던 혜선스님에게 물어보세요. 하며 벙긋 웃으신다. 나는 스님의 웃음 끝을 더이상 따라갈 수가 없었다. 스님은 이어서, 저녁공양을 준비해야 하고, 또 예불이 있다고 하신다. 나는 아차 싶어 얼른 '저도 지금 나가야 됩니다. 지금 출발해도 밤이 이슥해야 집에 도착할 겁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리고, 다음 기회에 들리겠습니다. 나는 심원사를 나섰다. 스님은 절마당에서 전송해 주신다. 어둠이 진딧물처럼 나무에 달라 붙는다. 나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전등을 켰다. 앞길이 환해지고, 방사형의 빛 따라 걸어가면서, 나는 심원사를 뒤 돌아 볼 수 없었다. 왠지 그렇게 그냥 앞만보고 가야 될 것만 같았다. 그때 문득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사가 생각났다.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정 잊을 수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년전에 가보니까, 수덕사는 관광객으로 시장판이되었다. 밤이 깊어도 사람의 왕래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 수덕사의 여승은 마냥 노래로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 전 본 비구니 스님의 깊은 눈매를 더듬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쌍용계곡의 쉬리가 갈겨니가 헤엄치고 있었다. 청룡황룡의 보급자리라고 하는 용소와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선녀담까지 내려오니, 지나가는 차량의 불켠 전조등이 보인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해 선녀담에 몸을 던진 여인네, 그 슬프고 몽환적인 전설의 여인이 심원사로 간 것일까. "사랑하고도 헤어짐이 물거품이네. 그대의 아픔 그대의 괴로움 내 눈속에 부딪쳐 피눈물되네. 기나긴 세월 당신과 함께 무지개 빛 사랑으로 살고 싶었네. 아 아 아 아 차거운 저 먼곳으로 당신을 두고 가네." 한네의 승천이라는 뮤지컬의 대사 한구절이다. 사랑은 얼마나 번뇌인가. 슬픈 사랑일 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 비구니 스님의 눈동자에 빠져 나는 또 얼마나 고통을 만들고 부수고 할 것인가. 계곡에 세워둔 차에 오르면서, 어떤 착각에서 돌아오는 나를 보았다. (끝)
| |
첫댓글 으으음~~! 일색인 스님의 전력이 궁금하셨다구요... 대구에 오셔서 알아보셨겠군요. ㅎㅎㅎ 그러나 저러나 자동차는 고치셨나요.걱정됩니다~~요. 교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