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 삼랑성
전등사(傳燈寺)에는 입구를 알리는 일주문(一柱門)이 없고 절을 지키는 사천왕도 없다. 성 안에 절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삼랑성(三郎城,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성으로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안에 단단히 숨겨 놓은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강화도가 오래전 석기시대부터 번창했던 지역으로 같은 땅에 여러 역사가 겹쳐졌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 <전등사본말사지>를 살펴보면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아도하상이 처음으로 사찰을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전등사는 1600여 년을 이어온 한국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전등사로 이름이 바뀐 연유로는 왕비였다가 쫓겨나 고초를 겪었던 정화궁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세자 왕심(王諶)이 충렬왕으로 즉위하면서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딸인 원나라공주가 정비로 들어 앉아 장목왕후가 된다. 즉위 전 충렬왕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던 정화궁주는 궁 밖으로 쫓겨난다. 장목왕후는 정화궁주를 쫓아낸 이후에도 계속 모함하고 곤경에 빠뜨려 정화궁주는 시름에 찬 세월을 보내게 된다.
여몽연합군이 일본침공에 실패해 많은 병사들이 수장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화궁주는 옥등(玉燈)을 진종사에 바치는데 그 때(충렬왕 8년)부터 절 이름을 전등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장목왕후는 39세에 죽었고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다시 재회했다고 전한다. 전등(傳燈)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석가모니의 진리를 전달하는 사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등사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본도량이었으며 격동하는 현대사의 중심에서 국운을 지켜낸 사찰이었다. 강화도에는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 8점 있는데 그 중 3점이 전등사에 있다.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과 보물 179호인 약사전, 그리고 보물 393호인 범종이다. 전등사에 가려면 강화버스터미널에서 2, 3, 51, 62, 63, 64, 65, 60-5번 버스를 타고 전등사주차장에서 하차 후 걸어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주소: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세계문화유산을 만들고 지켜낸 전등사
전등사는 세계문화유산과 불가분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전등사에서 지켜낸 정족산사고본만이 유일하게 전책으로 남아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세계 최대의 단일역사서이다.
익살과 풍자 그리고 자비의 전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은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이다.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건축물이 세상에 유독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이 조각상에는 화재로 소실된 대웅보전을 다시 지을 때 사랑에 빠진 도편수 이야기가 전해 온다. 대웅보전을 짓는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서 머물렀던 도편수는 마을 주막에 드나들면서 주모를 사랑하게 된다. 결혼까지 약속하고 일하면서 번 돈을 모두 믿고 맡겼는데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는 동네 총각과 돈을 가지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라진 연인에 대한 배신감에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던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보전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처마 네 군데에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을 새겨 넣는다. 자신을 속이고 도망간 여인이 대웅보전에서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으로 나부상을 ‘참회의 나녀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 나부상은 배신녀가 아니라, 정화궁주를 쫓아낸 원나라 공주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는 대웅전을 지키는 원숭이라고도 한다.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다. 네 곳의 나부상을 잘 살펴보면 세 곳은 두 손을 올리고 벌을 받고 있는 듯 한데 하나는 한 손을 슬쩍 내리고 다른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을 지으면서 이런 재미진 해학을 숨겨놓은 조상의 여유에 미소 짓게 된다.
신화와 호국의 정기가 어린 삼랑성
천년고찰 전등사에 들어가려면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三郎城)을 지나야 한다. 삼랑성은 다른 이름으로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 부른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에 속한 600명의 군사가 갑곶돈대로 상륙하여 강화성을 점령하지만,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하여 물러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랑성의 축조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곽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려시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며 풍수설에 따라 성 안에 가궐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현종 1년(1600년)에 마니산 사고(史庫)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삼랑성 안의 사고인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도 짓게 된다. 삼랑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한 성으로 길이가 2.3km에 이르며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성문이 있다. 삼랑성 남문의 문루는 ‘종해루’이고 위쪽으로 북문과 서문이 위치하고 있다. 동문과 남문 옆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날씨 좋은 날 성곽길을 따라 산책하기 좋다. 해마다 가을이 찾아오면 삼랑성과 전등사 일원에서는 삼랑성역사문화축제가 열려 삼랑성과 전등사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재미있는 이야기 삼랑성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단군이 말했다. “나라를 지키는 성을 쌓아야 겠구나. 하지만 성을 쌓는 일은 힘든 일이라 걱정이로구나.” 이 말을 들은 세 아들은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힘으로 성을 쌓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강화 정족산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세 아들은 봉우리 하나씩을 맡아서 쌓기로 했다. 큰 바위를 주먹으로 부수고 산과 산 사이로 바위를 던져 주고 받을 수 있는 힘이 센 청년들이 모여 들었다. 청년들이 도와주자 성은 순식간에 완성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단군의 아들 세 명이 쌓은 성이라는 뜻으로 삼랑성이라고 불렀다.
출처:(인천 보물섬에서 놀자)
2024-10-0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