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中道)수행을 가르친 뜻
심신을 편안케 하되 긴장 속 명상
양극단 떠난 중도가 바른 수행 길
부처님이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머물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이십억 비구도 사위성 사림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밤을 새우며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좀처럼 공부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십억 비구는 실망하여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내가 으뜸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좀처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를 버리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부모님이 계시는 집은 재물도 풍족하니
보시의 공덕을 짓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어느 날 이십억 비구의 이 같은 생각을 알고
조용히 그를 불러 상담했다.
“그대는 집에 있을 때 무엇을 잘 했는가?”
“거문고 연주를 잘 했습니다.”
“거문고를 연주할 때 줄을 조이면 소리가 잘 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조이면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소리가 나던가?”
“너무 줄을 너무 조이지도 않고
느슨하게도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렇다. 이십억아.
정진도 너무 과하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마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거문고 줄을 고르듯이
때를 분별하고 중도를 취하여 공부하되 방일하지 말라.”
이십억 비구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중아함〈사문이십억경(沙門二十億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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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도 수행자시절 한때 지독한 고행을 한 적이 있다.
<수행본기경〉에 의하면 그때 부처님은
‘하루에 쌀 몇 알과 참깨 몇 알로 연명했다.
옷은 겨우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렇게 한두 해를 지나니
살가죽으로 뼈를 싸놓은 인형과 같았다.
뱃가죽은 등뼈에 맞닿고,
갈비뼈는 기와 벗겨진 집의 서까래처럼 앙상했고,
눈동자는 깊은 우물에 비친 별과 같았고,
머리털은 한데 엉키어 새둥우리 같았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육신을 번뇌와 죄악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래서 육신을 괴롭힘으로써 죄업을 소멸하려고
고행수도를 했다.
부처님도 이 전통에 따라 고행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을 괴롭힌다고 번뇌와 죄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쾌락을 통해 고통을 잊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술도 과음하면 속을 쓰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쾌락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쾌락적 생활을 통해
쾌락이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택한 것은 쾌락도 고행도 아닌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수행이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하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명상을 했다.
이것이 뒷날 제자들에게 가르친 팔정도(八正道)의 길이었다.
중도를 길은 이렇게
‘양극단을 떠난 가운데 길(離邊處中)’이다.
이 중도의 길이야말로 ‘바른 수행의 길(中卽正)’이다.
그런데 이십억 비구는 중도수행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공부에 성과가 없었다.
부처님은 그것을 타일렀다.
아직도 불교의 수행을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이 중도수행을 가르친 의미를
조용히 되새겨볼 일이다.
홍사성/ 불교평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