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없는 시대의 시 [제3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전문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는 고양이와 달이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 첫 구절인데, 이 시구는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전제한다. 달이 뜨고 고양이가 돌아오는데, 이것은 두 겹의 의미를 내포한다. 저녁이 가출한 고양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고양이가 자주 집을 나간다는 점이다. 고양이는 늘 배고픈 마음,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헐떡인다. 시인은 궁기와 배고픔 때문에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연다. 이는 처마 끝의 달을 묘사한다. 태양이 굳건한 남성의 이성이고, 그 위에 건설된 세계의 표상이라면, 달은 여성의 감성이고, 늘 변하기 쉬운 것의 표상이다. 달은 상현에서 보름에 만월로 차올랐다가 하현에는 다시 야윈다. 마치 여성의 기분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종잡을 수 없는 것과 닮았다. 고양이는 달을 품은 여성이다. 고양이가 돌아왔지만 그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게 아무것도 없다. 희고 둥근 달은 떴는데, 마음은 헛헛한 상태다. 그래서 욕망하는 자에게 빈 접시를 내밀며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이라고 한다.
예언자가 사라진 시대의 시는 어떤가?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예언자 없는 시대의 메마른 삶과 속화된 욕망이 어떻게 꿈틀거리는가를 보여준다. 이 시의 전언은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 …………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왜 아니겠는가?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그들은 항상 열등한 형제, 패배한 자들, 굶주린 자들의 벗이다. 이렇듯 곤경에 빠진 자들을 벗 삼음으로써 시인들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해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고양이의 배고픔은 실재에 대한 주림이 초래한 배고픔이다! 달은 희고 둥근 접시라는 이미지로 전화(轉化)한다. 공중에 높이 뜬 달이 희고 둥근 접시라는 이미지로 탈바꿈할 때, 두드러지는 것은 욕망하는 자의 배고픔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쓴다.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말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시에서 이미지는 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상반되는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조형해내는 기술로 나타난다. 이미지는 다른 의미를 표상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고 의미다. 의미를 머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지는 언어와 차별성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현실을 의미하지 않고 현실을 보여준다.
1930년대의 김광균은 이미지를 빚어내는 데 유독 뛰어난 시인인데, 그의 시는 이미지의 다채로운 활용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펼친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김기림은 김광균을 가리켜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라는 「외인촌」의 한 구절을 보자. “소녀들의 웃음”은 청각적인 성분을 품은 이미지인데, 시인은 이것을 “시들은 꽃다발”과 같이 아무 소리도 없는, 오직 시각적인 성분만을 품은 이미지와 병치한다. 이 병치된 두 이미지는 “흩어지다”라는 동사에서 교묘하게 교차한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만든 청각적 여운이 맞물리는 가운데 어느덧 시들은 꽃다발이라는 소리가 소거된 시각적인 이미지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기교는 시의 말미에서 다시 한 번 발휘된다.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구절에서 “종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에서 소리를 지우고 “분수”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변용되는 것이다. “분수”는 물을 뿜어 공중으로 흩뿌리는데, 공중에서 흩어지는 물방울은 그 무게를 잃고 가볍게 상승하는 이미지다. 공중에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와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분수의 물방울들이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이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을 하나로 중첩해내는 시인의 솜씨는 놀랍다.
다시 옥타비오 파스는 덧붙인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했으면’의 세계는 유사함의 비교에 의한 이미지의 세계이며 그것의 기본적인 매개체는 ‘같은’이라는 단어-이것과 저것은 같다-이다. 그러나 ‘같은’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라고. 이미지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욕망’과 ‘실재’ 사이에서 부재를 품고 자라난다.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환원하지 않는 이미지는 실재의 텅 빈 구멍 속에서 부재를 파먹으며 몸피를 키우고 증식한다. 실재 없는 실재, 죽음 뒤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끝 뒤에 새로 오는 끝들, 향락 뒤의 향락 이미지는 부재하는 것들의 춤, 향락의 잉여다. 시의 세계에서 직유는 늘 눈총을 받는 천덕꾸러기다. 직유는 아무리 좋더라도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오직 나쁜 시인들만 직유를 남발한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라고 쓰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쓴다. 좋은 시집은 빼어난 이미지들의 ‘집’이다! 좋은 시집들은 대개 좋은 이미지의 백과사전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1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