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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의 황홀
박 완 서
열쇠로 대문을 따기 전에 먼저 우편함에 손을 넣어보았다. 밖에서 우편함에 손을 넣을 때마다 알이 큰 가짜 비취 반지가 거치적댔다. 그 조그만 장애 때문에 그 밑에 뭐가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일순 타는 갈망으로 변했다. 나는 허둥대며 손에 든 걸 반지 낀 손으로 옮겨들면서 다른 한 손을 우편함 속 깊숙이 밀어넣었다. 조급하게 끄집어낸 건 숯불갈비집 신장개업 광고와 네 절로 접은 갱지(更紙)였다. 그것 역시 보나마나 광고지겠지만 접은 모양이 봉투에 들어가기 알맞은 편지 모양이어서 반사적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며 펴들었다. 파출부 안내란 큰 글씨 밑에 작은 글씨로 일일제, 시간제, 격일제, 각종 심부름, 요리사, 환자 구완, 산모 산구완, 다시 조금 큰 글씨로 기타 뭐든지 전화 한 통으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전화번호가 나와 있었다. 나는 숯불갈비집 광고와 함께 구겨버리려다 말고 다시 네 절로 곱게 접어 핸드백에 넣었다. 뭐든지 도와주겠다는 말이 구겨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의 예닐곱 발짝 거리는 그래도 괜찮지만 현관문을 열 생각을 하면 무서웠다.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백 년 묵은 먼지가 피어오르듯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냄새 때문이었다. 뼛속까지 시리게 음습한 그 곰팡내는 책이나 벽지가 썩는 듯도 했고 묵은 쌀이나 마른 반찬이 변질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양지바르고 구석구석 정돈이 잘된 집 안을 몽땅 한바탕 뒤엎어도 그런 것들을 찾아낼 순 없었다. 집 안과 차단된 지하실까지 샅샅이 뒤져도 하다못해 말라비틀어진 새앙쥐 시체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온종일 헛된 수고 끝에 기진해서 잠시 쉬는 사이에 깨달음처럼 문득 그 냄새가 무엇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냄새였다. 내가 떨구고 간 나의 체취가 빈집에 괴어서 온종일 썩어가는 음습한 냄새였다. 젊음에 의해 희석되거나 중화될 길이 막힌 채 괴어 썩어가는 늙은이 냄새는 맡을 때마다 새롭게 섬뜩하고 고약했다. 어쩌면 안방에서 나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고부터 그 냄새는 고약할 뿐만이 아니라 무서웠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로 인해 기뻐하거나 괴로워할 사람도, 내가 사랑하거나 미워할 사람도 없는 집구석에서 말이다. 먹고 마시고 숨쉬고 소리내는 나의 인기척을 타인에 의해 확인시킬 수도, 타인의 인기척을 감지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의심스러울수록 안방 아랫목에서 나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는 짙어만 갔다.
강북의 서쪽 끝에 있는 주박사 병원에서 강남의 동쪽 변두리에 있는 내 집까지는 갈아타는 데 소요되는 시간 빼고도 좌석버스로 꼬박 시간 반이 걸렸다. 그 동안이 별로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시끌시끌한 인기척 때문이기도 했지만 딸의 책상에 앉아서 딸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겠거니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딸이 떠난지는 석 달이 넘지만 딸의 방은 딸이 쓰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존돼 있었다. 그러나 옷장을 열면 허드레옷 몇 가지뿐 텅 비어 있어서 흠칫 놀라곤 했지만 책상만은 안 그랬다. 카세트테이프, 연극이나 미전의 펨플릿, 잗다란 마스코트 열쇠고리, 머리핀, 편지, 볼펜, 수첩 따위로 서랍마다 가득 차 있는 게 딸이 있을 때와 똑같았다. 딸의 편지는 번번이 내가 기다리고 바라는 것만큼 길지도 간절하지도 않았지만 딸의 손때 묻은 책상 앞에 앉아 곰곰이 읽음으로써 의례적인 편지가 채워주지 못한 허전함을 채울 수가 있었다.
나는 담 너머로 내 집 마당을 망연히 넘보다가 지나가던 야쿠르트 아줌마가 나를 수상쩍게 되돌아보는 걸 느끼고 황급히 집 앞을 물러났다. 집 앞은 골목이나 한길이 아니라 시뻘건 공터였다. 공터 끄트머리엔 토건회사의 야적장이어서 몇 아름은 되게 큰 수도관, 하수도관, 철근, 빈 드럼통 등이 쌓여 있고 그런 자재를 관리하는 사무실 가건물이 두 채 기역자 모양으로 서 있었다. 공터의 한편은 동회 교회 이발소가 섞인 상가인데 한산하고 촌스러운 폼이 인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어느 읍 소재지의 한 귀퉁이를 연상시켰다. 나는 공터에 남아 있는 나무그늘에 앉았다. 여름내 남자 노인들이 화투도 치고 장기도 두던 나무그늘이라 야적장에서 주워온 널빤지 보도블록 등이 흩어져 있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날카로운 환성을 지르며 수도관 속을 다람쥐처럼 민첩하게 들락거리는 게 보였다. 엄청나게 커 보이는 관이었지만 지름이 아이들 키에는 못 미쳐 아이들은 몸을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포복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지금 하고 있는 놀이는 숨바꼭질일까, 기차놀이일까? 아이들이 감쪽같이 보이지 않았다. 길
게 이어진 관 중간쯤 전혀 및이 안 드는 깜깜한 어둠 속에 모여서 몸을 관처럼 둥글게 오그리고 어둠을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만 나이에는 대낮의 어듐이 짜릿짜릿한 쾌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 시골 마을 상듯도가의 어듐이 떠올랐다. 상둣도가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곳에 있었다. 아이들은 그 집을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서로 겁을 주고 있었다. 여름날 동구밖 개울에서 미역을 감다가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지독한 소나기였다. 빗방울도 굵었지만 천지가 곧 개벽을 할 것처럼 흉흉하고 아득했다. 우리 또래는 뜻 모를 비명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먼저 달리던 큰 아이가 상둣도가 앞에서 멈춰 서더니 그 안에서 비를 긋자고 말했다. 혼자라면 비에 떠내려가는 한이 있어도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 여럿이서 눈치 보는 사이에 별안간 못된 장난만큼이나 재미있어졌다. 우리는 킬킬대며 상듯도가 안으로 들어갔다. 큰 아이가 널빤지 문을 닫자 그 안은 오밤중처럼 캄캄해졌다. 우리는 올빼미처럼 눈을 크게 프드고 서로의 눅진눅진한 몸을 비비며 모여 앉았다.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큰 아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귀신 얘기는 싫어. 제일 작은 아이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그까짓 귀신 얘기, 큰 아이가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큰 아이가 그때 해준 재미있는 얘기란 아기가 어떻게 생겨나나 하는 얘기였다. 이상한 것은 내가 그걸 안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나 그전에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그 사실을 얻어들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깜깜한 부분이다. 딴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의 기억은 어슴푸레한 박명에 덮인 부분, 쨍쨍한 밝음 속에 지겹도록 뚜렷이 떠오르는 부분, 가물가물 곧 잊혀질 듯 몽릉한 부분 사이를 전혀 생각해낼 수 없는 깜깜한 부분이 단절시키고 있어 마치 밤과 낮의 끝없는 되풀이처럼 보였다. 그 사실을 그때 처음 안 건 아니었지만 그 사실에 수치감과 혐오감과 함께 짜릿한 죄악의 예감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뿐 아니라 그 자리의 모든 아이가 그랬음직하다. 그 사실을 소곤소곤 말한 큰 아이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눈빛은 우리 또래의 눈빛하곤 달랐다. 어른들의 나쁜 짓에 대해 우리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갑자기 어른처럼 굴었지만 미처 어른만큼 교활하지 못해 적나라하게 나쁜 아이로 보였다. 나는 그 아이가 싫어서 진저리가 쳐졌다. 귀신 얘기는 싫다고 말한 작은 아이가 별안간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큰 아이가 바보같이 왜 우냐고 구박했지만 나는 작은 아이가 우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작은 아이의 눅눅하고 시척지근한 몸뚱이를 꼭 껴안고 연방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달랬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 그때의 고약한 기억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나의 삼남매에게 성교육을 따로 시키지 않았다. 그런 건 안 가르쳐도 저절로 알게 돼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내가 상듯도가에서 큰 아이한테 노골적으르 듣기 전서부터 알고 있었듯이 언제 누구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그 부드러운 암흑 속에 인생의 중요한 인식의 출발이 숨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수도관 속에 숨은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골탕 먹이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더군다나 깜깜한 곳에 모여 있을 때 몇몇이 집단적으로 혹은 한 아이가 단독으로 돌연 악마 같은 가해자가 되는 수가 있다. 관 속에서 꼭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아이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작은 아이를 내 품에 꼭 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큰 아이들이 널 못살게 굴던? 어떻게? 저런 저런 고얀 놈들 같으니라구. 아가야, 잊어버려라. 그건 네가 못된 꿈을 꾼 거야. 자아 할머니가 이렇게 꼭 안아줄 게 잊어버리고 편히 쉬렴. 이렇게 달래가지고 될 수 있으면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 아이를 식탁에 앉히고 날름대는 가스불 위에서 온갖 맛난 걸 지지고 볶고 싶었다. 포식한 그 아이를 가슴에 품고 고른 숨소리를 즐기려는데 아이들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수도관은 야적장으로 트럭이 드나드는 포장도로까지 뻗어 있었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 빛을 찾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침 녹슨 철근을 싣고 출발하려고 궁둥이를 트는 트럭을 향해 오라잇 오라잇 하면서 손짓을 하고 있던 노란 모자 쓴 남자가 난데없이 수도관에서 튀어나온 아이들한테 발을 구르며 욕을 했다. 이 새끼들, 죽고 싶어! 아이들이 팔을 프로펠러처럼 휘저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애들이 빠르게 가까워 왔다. 꼭 나를 향해서 뛰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애들의 맹렬한 속도와 넘치는 힘이 부럽고 슬며시 겁도 났다. 곧장 내 가슴으로 뛰어들 경우 아이의 체중과 기운을 감당 못 해 벌렁 뒤로 나자빠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곧 아이들의 체온과 숨결과 체중과 부대끼며 땅바닥에 뒹굴 생각을 하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면서 몸뚱이 마디마디에서 상쾌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살맛인지 몰랐다. 나는 가슴을 펴고 팔을 둥글고 크게 벌렸다. 그리고 속으로 으스댔다. 자아 얼마든지 덤벼보렴. 이 할미 기운도 만만치 않을걸. 그러나 첫째로 달려오던 큰 아이는 나를 거들떠도 안 보고 쓴살같이 주택가로 달려갔다. 둘째도 셋째도…… 쿄래비까지 그렇게 내 곁을 스쳐만 갔다.
그러면 그렇지, 남의 자식이 무슨 소용이람. 그렇지만 이 늙은일 너무 얕보지 말아. 나에게도 느이들만한 손자가 자그만치 넷이나 있단다. 나는 쓸쓸하고 허전했지만 아직도 으스대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어서 이렇게 내 손자들 생각을 하려 들었다. 나에게 손자가 넷이나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도 안아본 적이 없었다. 웃고 우는 목소리를 들은 적도, 기고 걸음마하는 움직임을 본 적도 없었다. 그애들은 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 시민권이 있겠군요.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친척 조카며느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나는 살아 움직이는 그애들을 내 오관으로 느낀 적은 없지만 그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큰아들도 둘째
아들도 편지할 때마다 제 자식들의 사진을 동봉하는 걸 잊은 적이 없었다. 손자들은 순종 한국 사람인 즈이 에미 애비를 닮아서 어디에다 갖다놓아도 한국 사람임을 부정 못 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국 시민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순종 한국 사람이라는 것밖에 그애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나는 그애들의 버릇도 목소리도 냄새도 알지 못했다. 살아 움직이는 그애들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사진으로 박힌 아이들 얼굴이란 분유통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손자를 안고 싶다고 하소연하고 싶었으나 참고 있었다. 그건 내 마지막 카드여서 결정적인 순간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또 섣불리 그런 하소연을 했다간 비디오테이프를 부쳐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 정도가 내 아들들의 효도의 한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국 유학 떠날 당시의 아들 생각이 났다. 그때 내 아들은 참으로 보기 좋은 젊은이였다. 훤칠하고 늠름하고 야심만만했다. 미국 유학은 그애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예정된 거였다. 자기가 대학에서 전공하고 싶은 분야는 미국 한번 안 갔다 오고는 끗발이 없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유학은 모든 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그애는 거뜬히 해냈다. 노후를 궁색하지 않게 지낼 만큼 영감이 남겨놓은 재산을 한 귀퉁이 헐어줄 각오쯤 하고 있었건만 장학금까지 받게 되어 내 돈은 한푼도 축내지 않고 유학을 가게 되니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내 보기에 내 아들의 출세와 성공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애가 금의환향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흥분해서 가슴을 울렁거리느라 떠날 때 미처 섭섭해할 새도 없었다. 이 년 만에 아들은 결혼하기 위해 돌아왔다. 학문에 전념하려면 가정을 갖는 게 유리하다고 했다. 건강한 젊은이의 정열이란 학문 쪽으로만 외곬으로 다스리기엔 벅차리란 걸 이해 못 할 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생을 같이할 반려를 구하는 일을 한두 달 사이에 해치워야 된다는 건 좀 마음에 걸렸다. 우리 집안의 개혼(開婚)이었다. 사랑이 무르익은 꽂다운 결혼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 어려운 미국 유학길도 남보다 쉽게 찾아낸 것처럼 배우자도 쉽게 구했고 결혼식도 간략하게 올릴 것을 주장했다. 너무 일사천리로 돼가는 걸 탐탁잖아하니까 친척들은 너무 복이 좋아 생트집을 잡는다고, 되레 나를 나무랐다. 나는 워낙 복 좋다는 말에 약했다. 남보기에 좋아 보이는 복을 들까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장가를 들고 겨우 삼 일 만에 제 색시와 함께 미국으로 가버린 아들은 그후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아들도 마찬가지였다. 형과 다른 건 연애하던 처녀와 식을 올리고 처음부터 같이 갔다는 것 뿐이었다. 따라서 작은아들은 한 번도 집에 돌아올 필요가 없었다. 둘 다 공부는 벌써 끝마쳤고 큰애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작은애는 아주 이민 간 처가의 장사를 거들고 있었다. 왜 안 돌아오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자식 낳고 눌러앉고 나서 처음 몇 년 동안만 해도 편지마다 변명처럼 마땅한 자리만 있으면 언제든지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비쳤었다. 도대체 어떤 자리가 내 자식에게 마땅한 자리인지, 나는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방석이나 비단보료에 높이 앉혀주길 바라지 않는 한 그애들이 미국에서 종사하고 있는 회사 월급쟁이나 가게 지배인 정도의 일자리를 이 나라에서 못 구할 것 같지가 않았다. 아이들이 하나씩 더 생기자 그나마의 희망적인 말도 안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눌러살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나는 너무 일찍 삶의 목표를 아이들한테 이양해버린 아들들한테 분노를 느꼈다. 그럼 나는 뭐니? 너희들만 자식 있냐? 나도 자식 있다. 너희들이 자식한테 기대하는 걸 나도 내 자식한테 바라면 좀 안 되냐? 이렇게 원색적으로 싸우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그 무렵부터 나는 미국을 ‘그놈의 나라’ 라고 불렀다. 그놈의 나라 탓을 할 때마다 딸이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그놈의 나라는 땅덩이도 엄청 크고, 없는 거 없이 자원도 많고, 인종도 오만 가지 인종이 다 섞여 산다는데 뭣 하러 내 아들을 붙들고 안 놓아준다냐?”
“엄마도, 그놈의 나라가 오빠들을 붙드는 게 아니라 오빠들이 그놈의 나라에 빌붙는 거라우.”
이렇게 핀잔을 줄 적도 있었지만 살뜰한 위로도 잊지 않았다.
“엄마, 오빠들은 그놈의 나라에서 자알들 살라고 그래요. 아무 데서나 잘만 살면 그만이지 뭐. 엄마는 내가 자알 모실 테니까 오빠들 생각은 조금씩 잊어버리세요.”
“시집은 안 가구?”
“시집가면 못 모시나 뭐. 모시는 걸 꼭 한 집에서 산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여건이 허락하면 한 집에서 모셔도 되지만 이웃에서 사는 것도 좋잖아요. 요샌 아이들도 다 그렇게 모신대요. 엄만 제가 아들 못지않게 모실 테니 두고 보시라니까요.”
이렇게 선선한 딸이었지만, 서른이 내일모레가 될 때까지 마땅한 혼처가 안 나서자 은근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도심의 구옥을 팔고 변두리로 집을 구할 때, 이 동네를 마음에 들어하면서 앞으로 땅값도 제일 많이 오를 거라고 점친 딸의 뜻에 두말없이 동의한 것은 모시겠다는 말을 은근히 믿고 이왕이면 제 마음에 드는 동네서 같이 살든지 이웃해 살고자 해서였다. 그렇게 믿던 딸도 방학 때 색시 구하러 나온 미국 유학생과 맞선 본 게 인연이 닿아 즈이 오라비보다 더 휘딱휘딱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예식을 치르고 신혼여행도 생략하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꼭 돌아오마고 했지만 편지가 뜸해지는 속도가 즈이 오라비들하고 맞먹는 걸로 봐서 아이만 하나 생기면 주저 물러앉을 게 뻔했다.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그놈의 나라에서 살겠다는 걸 누가 말리랴. 어떻게 된 게, 자식 위하는 일이라면 조상 신주단지로 불쏘시개를 하겠다고 해도 오냐오냐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너도 나도 아이들을 위해 차마 못 떠나는 그놈의 나라에선 아이들을 은소반에 받쳐 기르는 걸까, 금소반에 받들어 기르는 걸까? 온종일 노깡 속에서 숨바꼭질하다 해질녘에 노가다한테 욕 얻어먹고, 집으로 쫓겨나서 어른들한테 종아리 맞고, 숙제하는 둥 마는 둥 잔다고 해서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이 을씨년스럽거나 불행하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더 잘 기르고 싶으면 아파트에 살면서 어린이 놀이터에서만 놀리고, 아니 놀 새 없이 학교 갔다 온 즉시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학원으로 마구 조리를 돌리면 될 것을 꼭 그놈의 나라에서 길러야만 아이들을 더 위할 수 있다니, 늙은이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운 얘기였다.
텅 빈 공터를, 보자기에 싼 것을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로 치마꼬리를 살짝 잠은 젊은 새댁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복 입은 옷 매무새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엉덩이를 약간 휘두르는 걸음걸이가 한복엔 안 어울렸지만 처넛적엔 줄창 양장만 했을 테니 나무랄 게 못 됐다: 머리를 억지로 올려서 드러난 목고개가 애잔했다. 보자기에 싼 게 둥근 쟁반에다 그릇들을 받친 모양인 걸로 봐서 음식을 해 나르는 게 분명했다. 새댁이 음식을 해 나른다면 한 동네 사는 시부모나 친정부모한테일 테지. 오밀조밀한 그릇에 든 게 무슨 별식일까. 가서 한번 어루만져주고 싶게 기특하기도 했고 그런 재미를 보는 늙은이들한테 샘이 나서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쯧쯧 본건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치마저고리 감이 화학섬유인지 자꾸만 다리에 휘감겨 새댁은 몇 발짝 가다 말고 그걸 잡아떼어 내리느라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버선도 미끄덩대는 나일론 버선에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샘이 나서 그런지 그녀의 격을 조금씩 떨어프드리고 싶어졌다. 노란 바탕에 다홍빛 꽃그림이 흩뿌려진 치마저고리 감도 과히 눈에 차지 않았다. 그게 집요하게 휘감기면서 허벅지와 사타구니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보기에 민망했다. 여자가 주택가 쪽으로 가지 않고 상가 쪽으로 꼬부라지더니 식료품가게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 창엔 ‘장미다방’ 이라고 씌어 있었다. 언젠가는 창문을 잘못 닫아 미장방다로 보여 딸하고 같이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 연구하느라 애를 먹던 곳이었다. 여염집 새댁이 아니라 다방의 얼굴마담이
었다고 생각하자 이미 사라진 고운 한복이 한층 을씨년스러워졌다. 여자가 나타난 방향으로 봐서 야적장 사무실에 차를 날라다주고 오는 모양이었다. 커피 다섯 잔. 꼭 마담이 가져와야 돼. 알았지? 딴 애 시키면 국물도 없으니까 그런 줄 알아. 이랬겠지. 그리하여 담배꽁초 우려낸 것 같은 맛없는 커피를 사먹어주는 본전 빼고도 남을 만큼 게걸스럽게 여자의 몸을 더듬었겠지. 눈뿐 아니라 손을 뻗쳐 여자의 토실한 허벅지를 만진 놈팡이도 있었을 거야. 뉘 집 딸인지 기를 땐 고이 길러 시집가서 잘살기 바라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었을까만 조실부모했거나 제가 좋아 철 없을 때 실수를 해서 그만 저 꼴이 되고 말았을 테지. 쯧쯧, 온종일 서 있자니 다리는 또 얼마나 아플 것이며 이 변두리 다방의 손님인들 야적장 노가다 수준밖에 더 될라구. 나는 신들린 것처럼 끝도 없이 그 여자에 대한 동정을 계속했다. 야적장 사무실에서 노란 모자를 쓴 사내들이 대여섯 명 몰려나왔다. 하나같이 우락부락 건장해 보였다. 그들이 일제히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좀전에 저희들끼리 눈으로 손으로 더듬은 여자 얘기를 하는 것 같진 않게 듣기 좋은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여자에게 탐욕스러웠던 것은 그들보다 내가 아니었을까. 여자를 미친 듯이 탐욕스럽게 더듬은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의 굶주린 동정심이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면서 나는 빠르게 비참해졌다.
어깨를 툭 치며 나뭇잎이 떨어졌다. 자지러지도록 곱게 물든 나뭇잎이었다. 우러른 나무는 잎이 반도 못 남아 엉성했다. 발밑에도 낙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어깨를 친 낙엽처럼 곱지 않고 칙칙해선지 전혀 의식을 못 하고 있었다. 꽤 큰 거목인데 무슨 나무인지 한동안 생각나지 않았다. 나무껍질을 자세히 보고서야 그게 벚나무였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봄 그 나무는 참으로 당당했었다. 우리집 마루에서 곧바르 바라보이던 그 나무를 잊다니. 그 변두리 집으로 이사 와서 처음 맞는 봄이었다. 그 나무가 꽃 피기 전에도 그 나무가 거기 있다는 걸 몰랐었다. 마루에 나서면 보이는 건 황량한 공터와 그 끄트머리의 야적장뿐이어서 마치 타의에 의해 예까지 밀려난 양 서글프고 심란했더랬다. 공터와 특히 야적장이 꼴 보기 싫어 겨우내 마루 커튼을 변변히 연 적이 없었다. 어느덧 긴 겨울이 가고 퀴퀴한 겨울 냄새를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자주 창문을 열어야 할 만큼 날씨가 풀리고 해가 길어졌다. 대기에도 봄기운이 완연해졌건만 눈이 녹아 속살을 드러낸 빈터의 황량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엷은 꽃구름을 두른 한 그루 나무가 땅 속에서 솟은 것처럼 느닷없이 그 한가운데 나타났다. 어머, 저기 벚꽃나무가 있었네. 딸도 그것을 처음 본 듯 이렇게 환성을 질렀다. 엷은 꽃구름은 불과 일 주일 만에 활짝 피어났다. 어찌나 미친 듯이 피어나던지 야적장을 드나드는 중기차 때문에 딱딱한 불모의 땅이 된 공터에 묻혔던 봄의 정령이 돌파구를 만나 아우성치며 분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그루 나무가 공터를 가득 채웠다. 이제 마루에 서면 공터는 없고 만개한 벚나무만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피어났듯이 어느 날 갑자기 지기 시작했다. 벚꽃은 지면서도 공터뿐 아니라 대기를 온통 채웠다. 그것은 낙화가 아니라 광분이었다. 내 시야를 아무리 부풀려도 미처 낙화의 영토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난분분한 낙화에 홀린 몽릉한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얘야, 난 이 집에서 죽는 날까지 살고 싶구나.”
그러나 꽃이 진 다음날부터 우리는 그 나무를 기억하지 못했다. 꽃이 지자 나무까지 없어지고 공터만 남았다. 그것은 바로 올봄의 일이고 딸은 올여름에 떠났다. 집엔 나 혼자 남았다. 딸은 이 황량한 서울 끄트머리 동네에다 나를 팽개쳐놓고 혼자만 떠났다. 혼자 남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자식들이 아주 잊어버리기 전에 슬찍 그애들의 어깨라도 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철저한 필부(匹婦)로 살아서 비록 산 자취는 없다고 하나 예전 같으면 천수를 누렸다 할 환갑을 넘긴 나이니 오래 살았달 수 있고 산 날이 오래니 죽을 날이 어찌 가깝지 않으랴. 사람이 몽매하여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몰라서 그렇지, 내 조그만 육신 첩첩한 갈피 어디멘가에선 이미 죽음의 예비가 시작됐으리라. 그걸 찾아내야만 했다. 고혈압, 간경화, 신부전, 암(癌)……어느 것이라도 무방했지만 될 수 있으면 죽음이 가장 확실한 암을 앓고 싶었다. 에미가 육 개월이나 일 년 안에 죽을 게 확실하다는데 안 와볼 자식이 있을까.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목숨을 다해 암으로 피어나고 싶었다. 독버섯처럼 진하고 아름다운 암으로 피어나고 싶었다. 오직 그것밖에 할 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병들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시난고난 기운과 밥맛이 줄고 거울에 비친 얼굴에도 병색이 완연해지기 시작했다. 덜컥 앓아눕기 전에 그 암의 꼬투리가 내 몸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 그게 내 생명력을 마지막까지 잠식할 시기는 언제쯤이 될는지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것으로 내 자식들의 편안한 망각을 두드릴 시기는 차후에 결정한다 하더라도 우선 그것을 갖고 있고 싶었다. 그것을 내 자식들의 망각을 언제든지 열 수 있는 열쇠처럼 어루만지고 싶었다.
내 집과 주박사 병원은 행정구역상 같은 서울이다뿐 거리상으로나 교통상으로나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주박사는 큰아들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대학에서 과가 달라졌지만 여전히 집에까지 드나들던 무난한 친구였다. 아들이 미국 갈 때 주박사는 아직 레지던트였지만 그때부터 나의 주치의를 자처하면서 딴건 몰라도 어머니 건강만큼은 제가 책임지겠노라고 장담했었다. 아들의 편지에도 편찮으시기 전에 미리 주박사한테 건강진단 받아보시란 인사말이 종종 들어 있곤 했다. 구러나 실제로 주박사 병원을 찾아가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박사도 일 년에 한 번 전화로 세배 올린다고 얼렁뚱땅 너스레를 떠는 게 고작이지 들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딴 병원 신세 진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
다. 한 번도 안 아팠다고는 할 수 없어도 약국에서 해열제나 소화제 몇 알 사다 먹으면 거뜬해졌으니 무병했던 셈이다. 사소한 일로 신세 안 지긴 참 잘한 일이었다. 엄살이 심한 늙은이란 선입관이 들면 죽을병도 또 엄살떠는 걸로 지레짐작해버릴 수도 있을 게 아닌가. 처음으로 주박사 병원에 가는 날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옷도 가라앉은 회색 옷을 입었다. 그건 딸까지 보내고 부쩍 늙은 얼굴에 걸맞았고 또 병자다웠다. 주박사 병원은 생각보다 크고 주박사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몸이 나고 권위가 있어 보였다. 형석아, 형석아, 하면서 아들하고 똑같이 흉허물 없이 반기고 먹이고 나무라던 먹성 좋고 익살 잘 떨던 젊은이가 아니었다. 십여 년 만이었다. 전화로는 똑떨어지게 하던 해라가 잘 되지 않았다. 주박사라고 하다가 자네라고 하다가 존댓말을 하다가 하게를 하다가 어쩔 줄을 몰랐다. 주박사는 거만한 건지 그런 데 무관심한 건지 말씀 낮추세요, 소리 한마디를 안 했다. 내 아들도 저렇게 변했을까. 십여 년의 세월이 에미가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그 훤칠하고 늠름한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분하고 원통했다.
“자넨 크게 성공했네그려.”
“뮐요, 어머니는 조금도 안 늙으셨어요. 고대로세요.”
“머리가 하얗다네. 염색을 해서 그렇지 파파할머니라네.”
“원 어머님도, 혈색도 좋으시고 아주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몸이 안 좋다고 전화로 미리 귀띔을 하고 왔건만도 괘씸하게도 주박사는 시침을 떼고 있었다.
“건강한 게 다 뭔가. 요샌 영 몸이 말을 안 듣는다네. 오래 못 살 것 같아. 진찰해보면 알겠지만 암만 해도…….”
“암만 해도 암 같으신 게 아녜요?”
주박사가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얼핏 그 옛날 익살떨 때의 모습이 비쳤지만 그때보다 훨씬 밉상이어서 비웃는 것 같았다.
“그, 그걸 어떻게 벌써 알았나?”
“아, 이래 봬도 박사 아닙니까? 그건 농담이고요, 어머니, 요샌 암 노이로제 환자가 진짜 암환자보다 훨씬 더 많거든요.”
“진찰도 해보기 전에 꾀병 취급이군. 실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죄송합니다.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신데요?”
“지딱지딱 아프면 좋게, 그 병이 어디 처음부터 아픈 데가 있는 병인가?”
“어머니 혼자서 그렇게 단정을 하지 마시고 자각증상을 말씀하시라니까요.”
주박사가 더이상 노인의 망령기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이 냉정하고 데면데면하게 말했다. 어딘지 조금은 남아 있던 형석이의 모습이 싹 자취를 감추자 나는 낯설음을 감당 못 해 울상이 되었다.
“자각증상이요?”
나는 먼저 왼손을 왼쪽 젖가슴 밑에다 대면서 말했다. 여기 심장이 있다는 걸 느낀다네. 아주 자주 그게 힘겹게 헐떡이고 있다는 걸 느낀다네. 전엔 그걸 느낀 적이 없었는데. 그걸 느낀다는 건 거기가 아픈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네. 또 명치에 손을 대고 말했다. 여기 위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네. 조금만 시장해도 쓰리고 조금만 뵐 먹어도 가쁘고, 여기 위가 있다는 걸 시시때때로 느껴야 한다는 건 지딱지딱 아픈 것보다 더 괴롭다네.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이 속에 허파가 있다는 걸 느낀다네. 환기가 제대로 안 되는 좁아터진 방처럼 답답하거든. 또 배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이 속에 창자가 있다는 걸 느낀다네. 아무리 배가 고플 때도 그 속은 가득 괴어 있는 것처럼 더부룩하고 답답하다네. 그뿐인 줄 아나. 다리팔의 뼈마디 하나하나를 다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네. 마디마디가 쑤시거나 아픈 건 아니지만 녹슨 것처럼 뼉뻑한 데가 있는가 하면 죄어줘야 할 것처럼 힐렁한 데도 있어서 그 여러 마디들이 제각기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네. 신경 얘기가 났으니 말인데……
“어머니, 잠깐이요. 종합진찰을 받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정밀하게요. 좀 괴로우시더라도 참으실 수 있겠죠?”
주박사가 사무적으로 데면데면하게 내 말의 중동을 끊었다. 그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긴 귀담아들어봤댔자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한창 나이였다. 나도 젊은 나이와 한창 나이를 겪었듯이 오장육부와 뼈마디의 기능이 왕성하고 서로 조화로울 때는 아무도 그것들을 각각 느낄 수가 없다. 다만 그것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완벽하게 화합해서 만들어내는 쾌적한 힘, 싱싱한 의욕, 빛나는 욕망, 아름다운 꿈, 진진한 살맛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주박사가 바로 그런 나이라는 데 나는 질투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좀더 나이 지긋한 의사를 찾아갈걸 하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먼 데까지 주박사 병원을 찾은 건 아들의 친구니까 믿거라 하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좀더 용의주도한 늙은이였다. 내가 죽을병 들었다고 내 입으로 자식들한테 통고하고 싶지 않았다. 주박사가 알리자고 해도 나는 한사코 말리는 시늉을 할 작정이었다. 암만 해도 나만 알고 있는 게 마음 편하겠네. 늙으면 죽는 게 누구나 당하
는 사람의 운명 인데 만리타향에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자식들을 불러들일 게 뭐 있겠나. 다행히 자네가 있고 병원비 할 만한 돈도 있으니 그애들 뇰래킬 거 없네. 이렇게 의젓하게 굴 작정 이었다. 그렇다고 안 알릴 주박사가 아니었다. 나에겐 몰래 알릴 게 빤했다. 주치의가 직접 알리는 에미의 사망 예고를 믿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으며 달려오지 않을 자식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그 정도나마 품위 있게 나의 죽을병을 앓고 싶었다. 그건 나의 마지막 허영이었다.
정밀한 종합진찰이란 게 시작되었다. 주박사는 나에게 손끝 하나 안 대고 더 젊은 의사, 간호사, 기사한테로 넘겨주었다. 주박사가 내 가슴에 청진기 한 번을 안 댔다는 게 나를 몹시 서운하게 했다. 엑스레이, 심전계, 초음파, 내시경 등 각종 의료기기가 내 몸을 샅샅이 훑었다. 그중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것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공모하고 나의 참을성을 실험하려는 사람들 같았다. 인정머리가 없을 뿐 아니라 잔혹 취미마저 있어보였다. 볼에 살이 많은 간호사가 내 피를 뽑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진한 피를 대롱이 굵은 주사기로 듬뿍 뽑는 걸 지켜보면서 아찔하니 현기증이 왔다. 그만두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혀가 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괜찮아졌지만 일순 죽음의 차가운 촉수가 이마를 스친 것처럼 느꼈다. 꿈꾸던 죽음보다 현실로 다가온 죽음은 훨씬 낯설고 무서웠다. 각종 기계를 부착하고 기계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죽느니 차라리 안 죽고 싶었다. 오늘 종합진찰 결과를 알러 가기까지 이틀 동안 문득문득 그 진한 피가 떠오를 때마다 아까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 심술궂은 간호사가 일부러 그렇게 많이 뺐을 것 같고 그만큼 목숨이 줄어들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죽을 병에 대한 염원이 줄거나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도, 뭣 하러 또 그 먼 걸음을 하셨어요. 전화로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주박사는 종합진찰 결과를 알러 간 나에게 이렇게 핀잔 먼저 주었다. 사형선고도 전화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둔탁함에 나는 고통에 가까운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내 몸에 아무 이상이 없고 아주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백세 장수하실 테니 염려 말라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벚나무의 앙상한 그늘이 부드럽게 번지면서, 땅거미지듯이 공터를 스멀스멀 뒤덮기 시작했다. 야적장 가건물의 액자만한 창에서도 주황빛 불빛이 비쳤다. 바람이 비질하듯이 낙엽을 한 군데로 몰아붙이면서 치맛자락을 부풀렸다. 어디론지 한없이 표표히 날아갈 것 같아 나무둥치를 잡았다. 거기 그렇게 있음의 부질없음이 목 놓아 울고 싶게 서러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샅샅이 휘젓고도 내 몸 갈피에서 죽을병의 꼬투리를 못 찾아낸 걸 믿을 수 없는 나머지 병원 전체를 불신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주박사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꾀병 앓기도 힘든 세상입죠. 그 소리가 나에겐 마치 기계의 역성을 드는 것처럼 들려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아직도 그 모욕감이 예민한 상처처럼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꾀병이라는 말에서 그리움 같은 걸 느꼈다. 한때 안타깝고 집요하게 꾀병을 앓고 싶어해서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엔 아득한 지난날, 늙음이 생전 나하고 상관있을 성싶지 않게 싱그럽고 앳된 날들을 스치고 지나간 한 귀여운 노인의 모습이 배어 있었다.
나에겐 한 할아버지에 두 분의 할머니가 계셨다. 아버지를 낳아주신 친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별명 ‘화초 할머니’ 는 한 남편을 모시고 살면서도 서로 의가 좋았다. 적어도 남 보기엔 그랬다. 친할머니는 우리들을 지성껏 업어기르고, 장 담그고 고추장 담그고 버선 깁는 일을 했고, 화초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업 눈을 뜨게 해 읍내에 정미소랑 싸전을 차리는 데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어 가산을 일으켰다. 내가 철나고 우리집은 부자 소리 들으며 살았지만 그전엔 겨우겨우 사는 집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하조면에서 술집을 하던 과부와 눈이 맞아 딴살림을 차렸을 때도 친할머니는 투기라는 걸 몰라 배알도 없다느니 등신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풍신 좋고 풍
류 좋아하는 할아버지에게 친할머니는 우리 보기에도 너무 걸맞지 않았다. 얼굴이 몹시 얽은 박색에다 키는 작고 평생 일밖에 몰라서 그런지 손발은 커서 상스러워 보였다. 자신에 비해 영감님이 늘 과람했던지 첩을 얻자 토라지기는커녕 좋아하더라고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하조댁을 얻고부터 집안이 불 일어나듯 늘어나자 일가 문중과 동네 사람들은 하조댁보다는 할머니를 칭송했다. 본댁 마음이 가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니 애물인 첩도 복덩이로 변하는 것 좀 보라는 말로 투기나 일삼는 여편네들을 나무랐다고도 한다. 할아버지의 사업이 읍내에서 기반을 잡자 할머니는 하조댁을 집으로 불러들이자고 할아버지한테 간곡하게 소청했다. 큰마누라 노릇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조댁을 늙도록 장사판으로 내돌리는 게 안쓰러우니 이제 그만 편안히 지내게 하고 싶다는 할머니의 간청을 할아버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본마누라한테 비록 살뜰한 정은 없었지만 그 정도의 믿음은 줄창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였다. 우린 하조댁을 친할머니와 구별하기 위해 하조 할머니라고 부르다가 곧 화초 할머니로 부르게 되었다. 하조댁이 들어오자 집 안이 갑자기 색스럽고 향기로운 화초가 가득 찬 것처럼 부드럽고 화려해졌다. 친할머니는 여전히 몽당치마를 입고 일만 했다. 화초 할머니는 자주 고름을 길게 늘이고, 남치마 밑으로 외씨 같은 버선발이 보일락 말락 아장아장 걸어다니면서 주로 할아버지 시중을 들고 남는 시간은 우리들을 귀애해주었다. 친할머니가 벽장에 감춘 약과나 다식 같은 귀한 먹을 것도 화초 할머니는 아낌없이 꺼내주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졸라도 없다고 잡아떼던 것도 화초 할머니가 찾는 눈치면 얼른 내주곤 했다. 우리는 그때 자기가 인심을 잃어가며 화초 할머니만 인심을 얻게 해주는 친할머니를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학교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으레 화초 할머니가 나섰다. 시골서는 보기 드물게 예찐브게 썬 과일을 쟁반에 받쳐들고 와서 친구들을 대집해줄 때, 나는 화초 할머니가 자랑스럽고 고마운 나머지 친할머니는 어디 꼭꼭 숨어 보이지 않길 간절히 바라곤 했었다. 화초 할머니가 친구들한테 친할머니로 보였으면 해서이다. 우리 눈에도 그랬으니 할아버지가 화초 할머니한테 빠져 친할머니를 거들떠도 안 본 걸 나무랄 일도 못 된다. 그렇다고 친할머니가 화초 할머니를 집으로 불러들인 걸 후회하거나 섭섭하고 억울해서 속을 썩인 적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만약 그랬다면 집 안에 전과 다른 불화의 분위기가 감돌았으련만 전혀 그런 기미 없이 화기애애했다. 전과 달라진 거라곤 정말이지, 아름답고 향기로운 화초를 새로 들여놓은 것처럼 집 안이 부드
럽고 화려해진 게 전부였다. 명실공히 화초 할머니였다. 어느 날, 아침 잘 잡숫고 난 할아버지가 측간 다녀오다 힘없이 모로넘어지더니 중풍이라고 했다. 그 풍신 좋던 멋쟁이 할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반신을 못 쓰게 되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숟갈로 떠넣은 밥도 반은 흘렸다. 얼굴이 삐뜰어지고 입술도 휙 돌아가 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버벌댔다. 더 놀라운 건 할아버지의 마음이 달라진 거였다. 그 하기도 힘들고 알아듣기도 힘든 말로 온종일 낑낑 대서 표시한 의사가 친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친할머니가 떠넣는 죽은 흘리지도 않았고, 그후 친할머니 치마꼬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엔 앞날이 길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조강지처에게 속죄하려는 말년의 일시적인 감상이려니 했다. 그러나 중풍이란 쉽게 낫지도 쉽게 죽지도 않는 병 이어서 병석에 누운 날이 계속되는데도 할아버지의 마음은 본디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친할머니가 옆에 있어야만 편안한 얼굴을 했고 의사소통도 친할머니하고만 됐다. 어쩌다 화초 할머니가 옆에서 시중을 들려면 우선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할아버지를 화나게 했다. 그토록 입의 혀처럼 싹싹하고 날렵하던 화초 할머니가 할아버지 중풍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점점 할아버지는 화초 할머니를 꼴도 보기 싫어했다. 남치맛자락만 보여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어서 나가라고 고래고래 괴성을 질렀다. 화초 할머니는 스스로 할아버지 앞에 나서기를 삼갔다. 할아버지한테 잊혀진 화초 할머니는 더이상 집 안의 화초일 수가 없었다. 풀이 죽은 화초 할머니는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고, 그의 존재가 집 안에 밝음과 향기가 아닌 암울하고 짐스러운 그림자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화초 할머니가 아무리 놀랍게 달라졌다고 해도 친할머니가 달라진 것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친할머니는 조금도 눈치 보지 않고 실로 당당하게 할아버지의 병구완과 의사소통과 응석받는 일을 전담했다. 조금쯤은 화초 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려주었으면 싶을 만큼 친할머니의 돌연한 당당함은 어린 마음에도 무자비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할머니한테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초라하게만 보이던 무명의 무색옷에도 못생긴 얼굴의 곰보 자국에도 침범할 수 없는 기품이 서려 보였다. 친할머니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친할머니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식구들한테 잊혀진 채 겉돌던 화초 할머니가 어느 날 할아버지가 넘어지던 바로 그 측간 모퉁이에서 쓰러져 할아버지하고 똑같은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친할머니는 물론 어머니 작은어머니들한테도 재앙이 엎친 데 덮친 셈이었다. 병구완의 편의상 두 분을 한 방에 나란히 눕힐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당신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침과 음식물을 흘리고 오줌똥을 가렸다 못 가렸다 하게 된 화초 할머니가 옆에 눕자 잠시 망각했던 애틋한 정이 되살아난 듯했다. 정과 연민에 못 이겨 하루에도 몇번씩 노안에 가득 눈물이 괴곤 했다. 잣죽도 무과수도 당신이 잡숫기 전에 화초 할머니한테 먼저 드리도록 했다. 화초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더 식욕이 왕성해서 주는 대로 먹고 요강을 댈 새 없이 오줌똥을 흘리곤 했다. 친할머니는 배로 늘어난 병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고 할아버지는 화초 할머니가 남긴 턱찌끼나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따로 충분히 드리려도 막무가내였다. 중풍 걸려 나란히 누운 노부부의 금슬은 우리들의 어린 눈에도 좀 뭣해 보였다. 처음엔 지극한 연민으로 화초 할머니를 불쌍해하던 할아버지가 차츰 자신의 닮은 꼴로, 잃은 반쪽으로, 애지중지하기 시작했다. 이제 친할머니가 통역을 안 해주어도 두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온종일 버벌거렸고, 젊은 연인들처럼 온종일 손잡고 바라만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와서 창 밖에서 얼씬거리고 킬킬거릴 만큼 두 분의 지극한 행복과 이상한 금슬은 인근에 소문이 났고 또 볼 만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화초 할머니보다 스무 살이 위였다. 비록 똑같은 중풍으로 누워 있을망정 한날 한시에 죽을 순 없다는 걸 깨달은 할아버지는 어느 날 비장한 얼굴로 친할머니를 불렀다. 자식보다도 당신을 믿고 부탁하는 것이니 자기가 먼저 죽더라도 화초 할머니 공경을 자기 생전처럼 할 것, 자기 생전에 화초 할머니 몫으로 충분한 재산을 떼어줄 것 등을 부탁했고, 친할머니는 물론 그 어려운 부탁을 통역 없이 알아듣고 눈물을 흘리며 지킬 것을 맹세했다. 재산을 떼어주는 문제에 있어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들이 적지 아니 반발했지만 친할머니는 그 재산이 누구 덕으로 모은 재산인가를 깨우치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상당한 재산을 화초 할머니 몫으로 떼어준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난 지 며칠 만에 할아버지는 운명하셨다. 할아버지 삼우를 치르고야 겨우 식구들은 화초 할머니를 돌볼 만한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 동안 화초 할머니는 말끔히 중풍을 씻고 일어나 집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식구들과 일가 친척들은 혀만 내두를 뿐 감히 무슨 말을 못 하다가 그가 집 떠나자 갖은 욕들을 다 했다. 천생 첩년, 도둑년, 구미호, 천하 요물 등등. 그러나 친할머니가 나서서 점잖게 이 구구한 구설을 막았다.
“닥치거라. 하조댁만한 열녀도 없느니라. 하조댁 때문에 그 어른은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외로움을 몰랐으니 그런 열녀가 어딨겠니. 하조댁 아니면 못 할 일등 가는 병구완을 한 셈이지.”
그러나 친할머니 못 듣는 데서는 두고두고 하조댁의 요망스러움이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렸다. 아마 지금까지도 친정 쪽 동네와 친척간에 전설적인 요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하조댁이 요물이라는 걸 감히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 절묘한 꾀병이 재산만을 목적으로 했을까. 재산은 나중에 덤으로 얻었을 뿐 하조댁이야말로 온몸으로 사람 속의 깊고깊은 오지(奧地)에 뛰어들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실로 몇십 년 만에 하조댁의 꾀병을 회상하고 새로운 감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꾀병도 그쯤 되면 극치에 다다랐다 할 만했다. 뭐든지 극치에 다다르면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인가. 나는 잠시 몇십 년 전 꾀병에 황홀하게 현혹되고 있었다. 아아, 나도 그런 꾀병을 앓아봤으면. 그러나 제아무리 화초 할머니도 우리 친할머니의 도움 없이 그의 꾀병을 극치의 경지까지 몰고 갈 수는 없었으리라.
지금은 섣불리 꾀병도 앓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어쩔거나. 화초 할머니의 꾀병을 아무도 못 말렸듯이 나의 고독을 누가 말릴 것인가. 나도 내 몫의 고독을 극치까지 몰고 가보리라. 아랫목에 누워서 송장내를 풍기며 썩어가는 또하나의 나를 무서워하지 말고 직시하고 껴안으리라. 그 늙은이를 따뜻하게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멀스멀 발밑을 기던 땅거미가 비로드처럼 도타워졌다. 어느새 주택가의 그만그만한 창에 모조리 불이 켜져 우리집만 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어서 가서 우리집 식탁에도 불을 밝혀야겠다. 그리고 그 늙은이를 위해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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