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지금 기획전시실에서 ‘한국의 장황 특별전’(9월 2일~10월 30일)을 열고 있다. 장황(裝潢)의 의미는 책이나 서화를 꾸미는 일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인 김표영 씨와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배첩장인 홍종진 씨는 평생 글씨·그림에 종이·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고 있다. 그 중 홍 씨는 제1대 금속활자장이었던 故 오국진 선생이 목판으로 제작한 ‘서원팔경’을 탑본해 병풍으로 만들었다. 탑본은 먹물로 찍어 인쇄한 것을 말한다. 서원팔경에 대해 취재했다.
서원팔경을 아는가.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고, 팔경은 8가지 볼거리라는 뜻이다. 청주는 백제의 상당현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685년 신문왕 5년에 서원소경을 설치했다. 이후 757년 경덕왕 16년에 전국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 서원소경을 서원경으로 바꿨다. 청주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것은 고려 개국 후 940년 태조 23년.
서원팔경은 1930년대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이라는 책에 수록돼 있다. 이 책은 각 지역의 지리지이다. 이 책의 앞 장에는 “저자 이병연은 1930년까지 충남 논산에 살다 이듬해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저작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책의 맨 뒷장에는 1933년 소화8년 11월 15일 논산군 연산면 장전리에서 발행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어쨌든 서원팔경은 당시 청주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낙가산·남석교·쇠내·상당산성·철당간·망선루·와우산·봉림이 여기 속한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시민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대접을 받으며 제대로 보전된 게 몇 군데 없기 때문이다. 이 중 낙가산·상당산성·와우산은 산성이나 산이기 때문에 그대로 있지만, 쇠내·봉림은 구전돼 올뿐 없어졌다. 그리고 남석교는 땅속에 묻혔고, 철당간은 일부가 훼손됐다. 또 망선루는 우여곡절 끝에 본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서원팔경의 현재를 훑어보는 것 만으로도 안타까운 청주역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특히 일제 때 자취를 감춘 것이 많다.
제1대 금속활자장이었던 故 오국진 선생은 서원팔경을 목판으로 남겼다. 오국진 선생에게 서원팔경에 대해 처음 얘기한 사람은 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실장은 “80년대 초 한 골동품점에 갔다가 ‘조선환여승람’이라는 책을 보고 샀다. 거기서 서원팔경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것을 오국진 선생한테 보여줬더니 작품으로 만들었다”며 “팔경을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팔경은 전국적으로 다 있었다. 충북도내에도 상당히 많다. 문의팔경도 있고, 어떤 곳은 마을에도 있다. 특히 단양팔경이 유명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낙가석조’는 낙가산에서 본 저녁노을, ‘상당귀운’은 상당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이라고 해석하지만 저녁노을이나 구름 같은 것은 시적인 표현이고 낙가산, 상당산성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 제1대 금속활자장이었던 故 오국진 선생의 목판 작품을 배첩장 홍종진 씨가 탑본한 ‘서원팔경’. 지금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일제 때 없어졌거나 훼손된 것들 구체적으로 낙가산은 용암동 보살사 뒷산인데 여기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석교 견상은 총 4기 중 3기가 남아 있다. 남석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80.85m의 돌다리로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주읍성 남쪽에 위치해 이 다리를 거쳐야 읍성에 진입할 수 있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석교동 육거리시장 중심도로 지하에 묻혀 있다. 이 남석교의 남·북단 교두에는 돌로 조각된 견상 4기가 있었으나 청주대박물관 앞 야외전시장에 2기, 충북대 교정에 1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금천어화’에서 금천(金川)을 쇠내개울이라고 하는 것은 ‘역전 앞’처럼 중복되는 표현인 만큼 쇠내라고 하는 게 맞다. ‘우산목적’에서 우산(牛山)은 와우산을 줄인 말이다. 박 실장은 “사금이 많아 금천이라 불리는 금천동에는 내(川)가 흘렀다. 지금은 복개공사를 했지만 금천동 현대아파트와 탑동 현대아파트 사이에 있었다. 물이 깨끗해 고기가 많고 천렵장소로 유명했다. 그러다보니 고기잡이를 하러 온 많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동장철학’은 종종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철당간 위에 앉아있는 것은 용머리인데 어떻게 학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철당간 명문에 용두사라는 절 이름이 나오고, 현재 철당간 꼭대기에는 용머리 장식이 있다. 그래서 ‘동장철학’을 용머리 위에 앉아있는 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철당간도 당초에는 철통이 30개 였으나 지금은 20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망선루는 쥬네스 앞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헐릴 위기에 봉착하자 김태희 등 뜻있는 사람들이 자재를 사들여 육거리 제일교회 안에 복원했다. 현재는 중앙공원 안으로 옮겼다. 망선루는 우리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로 청주목 관아의 부속 누정이었다. 특히 청남학사·청신여학교·세광학교·YWCA 등이 이 곳에서 시작해 청주 근대교육의 산파로 이름이 높다. 한편 서원팔경에는 봉림이 나오는데 이 역시 일제 때 없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운천동 운천초 주변으로 추측되며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원팔경 낙가석조(落伽夕照)···낙가산에서 본 저녁노을 석교석구(石橋石狗)···남석교에 서 있는 돌 개 금천어화(金川漁火)···쇠내개울의 고기잡이 횃불 상당귀운(上黨歸雲)···상당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 동장철학(銅檣鐵鶴)···철당간 위에 앉아있는 학 선루제월(仙樓霽月)···망선루에 걸려있는 달 우산목적(牛山牧笛)···와우산 목동들의 피리소리 봉림조하(鳳林朝霞)···봉림에 자욱한 아침안개
첫댓글 실제로 접하기 어려운 것이 많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