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난 수년간 북핵 공포에 시달리는 한국의 두려움과 대미 의존감을 십분 활용했다.
한미워킹그룹과 미국 정부의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한국을 결박시킨 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 정부의 모든 노력을 출발점부터 저지시켜 왔다. 그런데 4.15총선에서 압승한 문재인 정권이 그런 미국에 저항하면서 독자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려고 하고 있다. 한미워킹그룹을 재평가하면서, 독자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시키겠다고 하자,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계획을 흘리면서 한국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북핵 공포를 다시 자극하고, 주변 강국의 군사적 위협을 슬며시 상기시켜 한국이 다시 미국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애원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말이다.
사실 미국은 한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반미감정과 반미운동을 늘 경계하고 조심해 왔다. 그러다가 2017년 9월 2일 북핵이 완성되자 한국인의 대미 의존감이 극단적으로 커지는 걸 눈여겨봤고, 중국·러시아·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면서 한국인의 미국 의존감이 더욱 커지는 것을 확인했다. 반미감정에 대해 안심하게 된 미국은 한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해도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지난 수년간 미국의 슈퍼 갑질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 가지 되새겨봐야 할 점들이 있다. 주한미군의 감축은 미국의 동북아·태평양 패권전략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미국 내에서도 반대가 크며, 미국은 한국의 이익보다 더 우선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현상 유지시키면서 이 상태로 관리하려고 할 뿐 비핵화 같은 것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탄두 수십 개를 보유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강력한 대북제재로 북한을 결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빌미로 동북아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고 한국과 일본을 통제하여 대(對)중국 통일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현재의 상태를 최선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현재 핵탄두는 미국이 6,185개, 러시아가 6,500개, 중국이 290개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비록 핵탄두는 아니지만 높은 수준의 핵능력을 지니고 있다. 동북아는 지난 수십 년간 공포스러운 핵 균형과 팽팽한 진영대결 속에서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해 왔다. 북한이 수십 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한국이 그에 대응하려고 다양한 전략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현재에도 한반도와 동북아는 좀 더 팽팽해진 공포의 균형과 진영대결이 작동하면서 위태로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을 거론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한국을 굴복시켜 다시 미국의 현상유지정책에 순응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과 공조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은 요원하다. 미국의 굴레는 한국이 공산화되는 걸 막아주는 데까지는 순기능적이었지만, 한국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동북아와 대륙으로 뻗어나가려는 데는 역기능적이다. 한국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족쇄를 느슨하게 해야 하는데 마침 미국이 먼저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고 하니 그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과 정부의 현명하고도 용감한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