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가을에 취하다
소흔 이한배
문득 진안 주천면에 있는 주천생태공원의 가을이 궁금했다. 사진을 같이하는 회원들에게 긴급 타진 전화를 하니 다음날 가는 건데도 모두 좋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5시 집에서 출발하여 용문동을 거쳐 삼성동에서 회원들을 태우고 대전나들목으로 나가는데 벌써 6시가 다 됐다. 부지런히 달려 갔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해가 막 뜨고 있었다.
이곳은 거의 매년 오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곳 중에 하나다. 호숫가에 메타세쿼이아가 군데군데 모여 빨갛게 물들고 단풍이 든 나무들이 어우러져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게다가 물안개라도 피어날라치면 그 몽환적 분위기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바람이 게으름을 피워 그때까지 깨어나지 않아 반영까지 생기면 금상첨화다. 혼자 올 때는 5시에 출발하면 6시쯤 도착하게 된다. 해가 뜨기 전에 한 바퀴 돌며 안개 속 여명을 찍고 해 뜨면 다시 한바퀴를 돌면서 아침 햇살을 찍곤 한다.
오늘은 회원들과 함께 오다 보니 늦었다. 일부러 추워지는 날을 택했는데 온도가 너무 떨어지고 바람까지 일찍 깨어나 헤살을 부리는 통에 안개와 반영이 한꺼번에 없어졌다. 그러나 그런 하자를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게 없어도 충분히 작품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떠오르는 햇볕이 투명하고 맑아 안개 낀 날과 또 다른 표정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바로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선다. 이럴 때는 일분일초가 아쉽다. 셔터만 누르면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빨리 보고 찰나의 표정들을 담아내느냐가 관건이다. 회원이 따라오든 말든 참견할 때가 아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느낌대로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바로 셔터를 눌러야 한다.
햇볕이 하도 맑고 투명해서 강렬하다. 보이는 것들이 모두 선명하고 산뜻하다. 역광, 순광, 측광 어느 광선이고 따질 필요가 없을 만큼 파스텔 색조의 단풍에서 빛이 난다. 색깔이 살아있다. 메타세쿼이아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만큼 붉은 단풍이 절정이다. 갖가지 나무들도 단풍으로 곱게 단장을 마쳤고 좀 늦은 나무는 여름에 진초록색의 무거움을 벗어 버리고 가벼워지면서 구색을 갖춘다. 봄의 연초록은 꼭 짜면 초록 물이 쪼르륵 흐를 것 같이 싱싱하다면 가을의 연초록은 가벼워지면서 건조해진다. 이렇게 햇볕이 강한 날은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무들의 실루엣도 멋지다.
이럴 때 사진에 대한 희열이랄까 오르가슴(orgasm)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런 흥분과 도취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사진을 열심히 찍으러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얼마만큼 사진 찍는데 몰입하여 희열을 느끼느냐는 건, 어쩌면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의 문제가 아니다. 카메라를 통해서 피사체와 내가 일체가 되는 순간. 오로지 그것만 존재할 뿐이다. 구도가 어떻고 무엇을 넣고 뺄 것인가 그런 현실적 문제들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오로지 직감만이 나로하여금 셔터를 누르게 한다.
정년퇴직하고 혼자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가끔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직장에 다닐 때는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거기다가 사진 실력도 별로여서 몰입도가 떨어졌다. 모든 걸 계산하고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생각을 많이 하면서 찍게 마련이었다. 또 남들은 어떻게 찍었나 서로 비교해 보면서 의견 교환도 하고 찍는다. 그런 것들이 실력향상을 위해 찍을 때는 좋은데 출사를 다녀와서 보면 거의 비슷한 사진을 내놓게 된다. 그래서 다른 시각, 다른 분위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다. 뒤 돌아 보기도 하고 카메라 위치를 바꿔도 보면서 다른 표정의 사진을 찾았다.
정년퇴직하고 나니 혼자 다닐 기회가 많아졌다. 혼자 다니니 누구와 비교해 볼 수도 없고 오로지 나의 판단과 시각으로 피사체를 보고 느끼면서 표정을 찾아내야 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까 또 다른 사진의 매력에 심취하게 되었다. 사진찍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하면 전국을 누비며 혼자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나만의 사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또 사진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컴퓨터 편집(현상)까지 내가 다 하니까 더욱 나만의 사진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배울 때는 흉내도 내보고 모방도 해보지만,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진 세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다면 얼마나 열정과 몰입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보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쾌감으로 느껴질 때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태껏 이렇게 저렇게 계산을 해보고 그것도 의심스러워 몇 컷씩 찍곤 했다. 지금도 출사 나가면 거의 그런 식으로 찍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걸 다 집어 던지고 마음 가는 대로 찍는 경우가 생긴다. 나도 모르게 피사체에 빠져들고 거기서 쾌락이랄까 커다란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오로지 피사체와 한 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용담댐을 다녀온 지가 보름이 넘는데도 아직도 그 기쁨에 빠져있다. 사실 이런 날은 사진의 문외한이라도 잘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찍으면 다 작품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재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집에 와서 보니 두어 시간 동안에 삼백여 컷을 찍었다.
한창 사진 삼매경에 빠져 찍고 있는데
“이형! 혼자만 다니지 말고 같이 좀 찍읍시다.”
같이 간 회원이 옆에 와서 말을 건넨다.
그제야 ‘아참, 나 혼자 온 게 아니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