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잡기의 어려움
임병식 rbs1144@daum.net
세상을 살면서 보면 신경 쓸 것도 많다. 무엇이 잘못되면 그만큼 시간 낭비도 하게 되지만 정신적 고통도 겪게 된다. 한데 이것은 자기 잘못으로 인한 것도 있지만, 자기가 아닌 남의 잘못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고통도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지만, 우리 속담에는 ‘자기 칼이지만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꺼내기가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어디까지나 자기 것이지만 점유상태가 자기를 떠나있으면 찾아오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그러한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거나 은밀한 것, 남의 손에 의해서 조작된 것은 난감한 일일 것이다.
근자에 상황은 다르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과 관련하여 전 정부에서 통계 숫자를 조작했다는 의심으로, 연일 시끄럽다. 2019년 기준으로 집값이 50%가 뛰었는데, 국토부 장관이 고작 11%가 올랐을 뿐이라고 호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수치를 들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집값만큼은 임기 내 확실하게 잡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감사를 진행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귀결될지 자못 궁금하다. 문득,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떠오른 것이 있다. 일선 행정의 잘못으로 한 가족이 고통을 받은 일이 생각난다.
때는 1980년 초로.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을에서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잠은 관사에서 자고 식사는 어느 가정집에서 하고 있었다. 얼마간 낯을 익힐 무렵, 주인아저씨가 내게 딸의 신상 문제를 문의해 왔다. 딸이 어떤 자의 일방적인 혼인신고로 인해 호적이 정리되어 선이 들어와도 결혼을 못 시키고 있다는 거였다. 전에 딸이 잠시 사귄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일방적으로 혼인신고를 해버린 바람에 호적을 바로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하도 어이가 없어 내가,
“그래,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단 말씀입니까?”
하니 되돌아온 말이 갑갑하고 맥 빠진 것이었다.
“어떡합니까. 힘도 없는데. 법원에 소송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가진 돈도 없고.”
그래서 말했다.
“그래도 그대로 있다니요. 읍장님은 만나보셨어요?” 하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했다.
그 말에 나는 화가 끓어올랐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해결을 해 주지는 못했다. 나의 업무 소관도 아닐뿐더러 곧바로 장기 교육받으러 갔고 교육을 마치자 곧바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다니. 이것은 호적을 담당하는 직원의 불찰이었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혼인서류에 서명한 것을 받아주어야 하는 데도 그렇지 않은 서류를 받아준 것이다. 이는 크게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이었다.
역사에 보면 이런 황당무계한 사건이 왕가에서도 일어난 일이 있다. 전례보다도 더한 것으로 소위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이다. 이 사건은 1394년 (태종 3년)에 발생했다. 1390년(공양왕 2년)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자 정적인 윤이, 이호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거짓을 고하였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후손이며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태조실록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실어버렸다. 이것은 1589년이 되기까지 200년 동안 바로 잡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조정에서는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달라고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마치 자기 칼이지만 남의 칼집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 사실은 그간 캄캄하게 모르고 있었는데, 밝혀진 계기가 있었다. 명나라에서 조선 연안민이 노략질을 한다고 압송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던 것이었다.
내용에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 성계’라고 적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명에서는 이성계를 무시하고 조선을 복속까지 시키려고 했다. 더구나 이인임은 고려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와는 정적이었으므로 왕실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잡은 임금이 선조였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선조가 이이 등이 줄기차게 종계를 바로 잡을 것을 주창했으나 마땅히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일개 역관 홍순언이 묵은 숙원을 풀어낸 것이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온다. 어느 해 역관인 그가 명나라로 사신 길에 오르던 중 통주를 지나다가 안타까운 상황을 접했다. 부모를 병으로 잃고 가난하게 살다 유곽에 팔린 한 소녀를 만난 것이다. 딱한 사정을 듣고 가지고 있던 돈 300냥을 털어 부모님 장례를 지내도록 해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해가 흘렀다. 그는 다시 통신사로 명나라를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큰 중책을 떠맡았다. 왕실의 숙원인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해결하고 오라는 어명이었다. 홍순언은 군권을 쥔 병부상서 석성(石星 1537~1599)을 찾아갔다. 문안을 드리는데 이때 부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전에 자기기 지참한 돈을 몽땅 털어 장례를 치르게 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석성의 후처가 되어 있었다.
홍순언은 부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지난한 숙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석성에게 장례를 치러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석성은 그 후 몇 가지 실정으로 인해 처형을 당했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석담은 조선에 망명하여 수양군으로 봉해지고 해주 석 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렇듯 한번 잘못된 일은 고치기가 지난한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궁금해지는 일이 있다. 그 밥집 따님의 신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송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게라도 하여 바로 잡았을까. 하나, 바로 잡기는 했다고 해도 호적부상 신상기록에는 그 사실까지 기재되어 있을 것이니 개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저런 것을 생각하면 세상을 사는 동안 매사를 조심하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운전도 나만 잘해서는 아니 되듯, 문제는 늘 나 아닌 다른 상대방으로 인하여 빚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2022)
첫댓글 옛 사건을 통해 바로잡기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해주시니 설득력이 배가된 느낌입니다 제가 시 호적계장으로 일했던 시절엔 업무수행 중 발견된 호적신고 착오 처리 등에 대해서는 사실을 밝혀 법원에 요청하면 법원의 직권으로 바로잡는 제도가 있었는데 아마 요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출생신고한 이름과 호적상 이름이 다르다며 항의한 시민이 있었는데 법원에 가서 출생신고서를 찾아본 결과 당초 신고를 잘못했더군요 호적관련 신고서는 오랫동안 법원에 보관하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가 신청하면 당시 신고서류를 열람할 수 있어 그것을 근거로 정정을 요구하거나 소송을 할 수 있지요
실무를 담당하신 이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손쉬운 방법이 있었네요.
그런데 당시 처녀 아버지는 몇차례 항의도 하고 읍소도 했던 모양인데 소송을 하여
바로 잡아야한다는 말에 자포지기를 한 상태더군요.
나중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2023년 푸른솔문학 여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