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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6c4FC1kZNbI&t=22s
2022년 3월 13일(주일) 약 2:14~26 믿음의 산 증거를 보이라
뉴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에서 뉴욕 아들집에 놀러온 노부부가 한국 슈퍼마켓에서 [순참기름] 이라는 제품을 사서 먹었더니 ‘가짜’였습니다. 한국 시골에서 직접 짜서 만들어 먹던 그 진짜의 맛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부부는 자신들이 한국에서 직접 참기름을 짜서 이곳 뉴욕에 와서 장사를 하면 엄청난 돈을 벌겠다고 포부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가 진짜 참기름을 짰습니다. 미국에 가져와 가게에서는 팔 수 없어 주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참기름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진짜 순 참기름"
엄청나게 팔릴 줄 알았던 그 참기름은 팔리지 않아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먹어 본 사람들이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든 것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가짜에 적응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짜가 진짜를 이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가짜 신앙인이 많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췄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야고보는 자신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노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노라고 하면서 도 믿는 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자들을 경고하면서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빙자한 거짓, 하나님을 빙자한 거짓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짜가 진짜같이 활보하는 세상입니다.
본 단락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에 대해서 강조한다. 야고보 사도가 본 서신을 쓰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말에 있어서는 믿는 자의 요소를 갖추었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믿는 자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야고보는 구원과 행위는 관계없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잘못된 삶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의 잘못된 믿음에 경각심을 주고자 한다.
1. 가짜 믿음(14~18절)
1) 유익을 주지 못하는 믿음(14~17절) 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도전한다. 이 구절은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이 자신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노라 고백을 하면서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산 증거가 전혀 없다면 구원에 있어서 그 믿음이 유익된 것이 되겠겠느냐?라고 야고보는 도전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가짜 믿음의 예로 15~17절을 들고 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에게 행함이 없이 가짜로 믿는 자들이 하는 세 가지 ‘위로의 말’을 예로 들고 있다. 15절, 16절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베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에게 행함이 없이 가짜로 믿는 자들이 하는 세 가지 ‘위로의 말은 바로 16절에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가 그것이다.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을 도와주지도 않고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벌리는 것은 위선이요, 공허한 것이며, 사랑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고 한다. 즉 이런 믿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도 이 가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마 25장에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은 양과 염소를 나누듯 모든 사람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십니다. 오른편에 선 자들은 영원히 복을 받을 자들이며 그들에게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외로울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고, 병들었을 때와 갇혔을 때 찾아와 주었다” 마치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 것 아닌가요? 하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하지 않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주를 향한 믿음은 주님과 형제를 향한 사랑의 수고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는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일 때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않고, 병들었을 때와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 주님께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항변합니다. 그 항변에 주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야고보가 예를 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나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의 공허한 위로의 말은 불필요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31절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화려한 자주색옷과 스스로 의로운체 하는 흰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하며 즐기며 호화롭게 삽니다. 사람들이 그의 집 대문에 나사로라는 거지를 데려다 놓곤 했는데, 그는 온몸이 부스럼투성이였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허기를 채우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부스럼을 핥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죽어서 심한 고통을 받게 되고,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 곁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부자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면서 하나님주신 재물을 자신의 육적인 일에만 사용했고, 가난한 형제를 외면하면서 살았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을 줄만 믿었지만, 행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2) 귀신들의 믿음(18~19절) 두 번째 야고보가 제시한 가짜 믿음은 귀신들의 믿음입니다. 귀신들은 본래 천사들이었으나 지위를 지키지 않은 죄로 벌을 받아 하늘에서 쫓겨났고, 흑암에 갇히어 있도록 제재를 받고 있다. 귀신들은 일찍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였기에, 하나님은 한분임을 고백한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귀신들의 믿음을 책망합니다.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교리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진리는 아니다. 귀신도 그 정도는 알고 믿지만,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다만 떨게 할 뿐이다. 떨기만 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귀신의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사랑함도 없이 두려워하기만 하는 자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두려워 떨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즐거워하며 예배하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시2:11).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예배하고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입니다. 귀신의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혹 나는 이런 신앙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2. 참된 믿음(20~25절)
거짓된 믿음과는 반대로 야고보는 이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예를 들어 구원받을 참된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21~24절)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에 의롭게 된 것은 그의 ‘믿음’때문이라고 하고, 야고보는 그의 행위로 인해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21절). 21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지요. 바울의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행함은 구원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했다(창15:6). 그저 구원얻는 데는 믿음만 있으면 되고 행함은 필요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를 뒤집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제단에 드린 행함에 있다고 한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절) 마태복음 7장 16절 이하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과나무 묘목을 사다가 그의 밭에 심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결실할 때가 되어 가보니 배가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입니까? 배나무입니까? 혹시 그 나무가 원래는 사과나무인데, 단지 농부가 잘못 가꾸어서 배나무가 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열린 그 나무는 사과나무가 아니라 배나무입니다. 이 정도는 유치원 다니는 꼬마 아이들도 아는 일반 상식입니다. 당연히 사과나무는 사과를, 배나무는 배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야고보의 주장도 이와 같습니다. 만약 그가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도 그 믿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쌩뚱맞은 명령에도 순종하여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순종의 열매로 자신의 믿음이 살아있다고 하는 증거를 내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2) 라합의 믿음(25절) 야고보는 아브라함에 이어서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이스라엘의 승리를 믿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으니라”(롬10:17)의 대표적인 인물이 라합인 셈이죠. 그 믿음은 마침내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행동으로 표현되었고(수2:1~24),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이후에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여 여리고 백성들이 멸망당하는 와중에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수6:21~25). 물론 자신 뿐 아니라 그 말에 순종한 친척들도 살리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라합은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다윗의 조부가 되는 오벳을 낳았습니다. 즉 멸망당할 가나안 족속의 기생이었던 라합이 다윗의 4대 선조 할머니로 다윗의 조상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로서 그 족보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이 그렇게 선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라합의 믿음에서 나온 선한 행실은 그녀의 믿음이 산 믿음임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다시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도 우리가 갖고 있다고 증거하는 믿음이 그런 선한 행실로 인해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3. 결론(26절)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이 얼마나 쓸데없는가를 보여주며, 26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몸’에 비유한다. 영혼이 떠난 몸은 죽은 몸이다. 생명이 다한 몸이다. 죽은 몸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면서 말씀에 근거한 선한 행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말씀에 대한 순종과 같은 행함, 예배참석,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 표현, 변화된 인격이 없다면, 그가 말하는 자칭 믿음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야고보가 말하는 ‘선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나 도덕적인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믿지 않는 분들도 할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선한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행위, 믿음의 결과로 당연히 그의 삶 속에 드러나야 하는 자연스러운 열매와 같은 것이다. 그당시나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자들과 지식적인 믿음만 가진 자들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야고보 사도의 경고는 코로나 정국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참된 믿음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 이신 줄 알고 떠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 열매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늘 방해하고 거짓말하는 데, 하물며 아예 말씀에 대한 실천의 반응 없이, 입술로만 하는 고백이 어떻게 참 믿음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내 믿음의 산 증거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