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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길가에 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피어 있는 꽃들의 이름을 아십니까? 저는 그것이 궁금해서야생화에 대한 책들을 구입해서 보고 있지만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아 구별하기가 어렵고 이름을 외우는 것이 어렵습니다.
들판에 보면 ‘푸하’라는 풀이 있습니다. 여기 마오리들이 즐겨 먹는 나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노란 꽃을 피우는데, 엉겅퀴 같기도 하고, 민들레 같기도 합니다. 한국에도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이 ‘방가지 똥’이라 합니다. 이름이 참 희안하지요.
우리는 산과 들에 피어있는 꽃을 보면서 가장 쉽게 붙이는 이름이 무엇입니까? ‘들꽃’ ‘야생화’ 혹은 ‘이름 모를 꽃’ 등등을 이름을 부릅니다. 사실은 우리가 들꽃 혹은 이름 모를 꽃으로 부르는 꽃들에게는 진짜 이름이 있습니다.
식물학자들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한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여가수의 죽음 소식을 듣습니다. 이들의 이름에는 그 부모님들의 소망을 보게 합니다. ‘최진리’ ‘구하라’ 이 이름들은 다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라는 성경말씀에서 따왔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기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9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앞에 나오는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5-8절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 즉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비굴하게 어쩔 수 없어서 굴종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요? 성부 하나님의 뜻,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므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이름 그 자체라기 보다는 ‘인격’을 말합니다. 이름을 높였다는 말은 ‘인격을 높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말한다면 2:9-11은 ‘예수님의 지극히 높아지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여졌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지극히 낮아지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하, 자기 비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고 높아지려고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 조상들부터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합니까? 사탄의 달콤한 유혹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입 안 가득히 깨물었지 않습니까? 인간의 자리, 있어야 할 자리, 자기 각성 가운데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세력이 번창해지자 어떤 일을 합니까?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생각을 가집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내가 있다” “내가 여기 살았다” “내가 이른 업적을 쌓았다”라고 알리고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명령 “온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보다는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안주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내겠다는 자기 보신과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가 앞서고, 하나님 없는 자기 존재감을 세우려고 하다가 결국은 에덴에서 추방 당하고, 온갖 고생의 길에 들어서고, 흩어지는 결말을 얻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사람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해서 정치적으로 통치하려고 했던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애굽의 바로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게 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했습니다.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파시즘 사상도 그러합니다. 혼란 속에 빠진 나라를 강력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숭배하도록 만드는 정치 사상입니다. 이탈리아의 뭇소리니,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일본 등이 그러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그러한 형태였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여러 모양으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 본성을 절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죄 속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파멸뿐만 아니라 주변을 혼란과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달랐습니다. 자기를 비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낮아졌습니다. 십자가를 졌습니다. 생명으로 충만해야 할 분께서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절대 순종 속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는 데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어 낮아지므로 이루어졌습니다. 스스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 이름을 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므로 고난 가운데 하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이미 예수님의 이름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서 ‘메시아,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방인에 의해 억압과 핍박을 받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해서 자신의 억압과 가난 그리고 핍박 속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또 예수님을 ‘인자’이십니다.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립니다. 이 이름은 그의 신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메시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인자, 사람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또 하나의 다른 이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 이름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10).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말합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1)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이 ‘주’입니다. 왜 ‘주’라는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이겠습니까?
‘주’를 헬라어로 ‘쿠리오스’입니다. 쿠리오스는 로마제국 시절에 로마 황제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충성심을 드러낼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쿠리오스 가이사’하면 ‘가이사는 주이시다’라고 가이사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쿠리오스 가이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가이사가 신성한 분이 아니라 신성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에게 ‘쿠리오스’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성도들을 잘 알고는 기독교인을 골라 처단하기 위해서 ‘쿠리오스 가이사’를 외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독교인들을 가려내어 처형시켰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쿠리오스㈜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쿠리오스, 나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 쿠리오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도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만이 아도나이 쿠리오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아침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했습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후에 의심하던 제자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2. 예수님은 통치자이시다.
주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자들이 그 이름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분의 다스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많이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갈 때에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가시다가 예수님은 지쳐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가운데 광풍이 일어나서 배를 삼키듯이 몰아세웠습니다. 제자들은 기겁을 해서 배를 저어 호수를 건너려고 했지만 한계에 부딪치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건너가자고 한 항해에 제자들은 순종하여 가는 가운데 순풍에 돛 달아가 가듯이 순항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 빠졌습니다. 살겠다고 아우성쳐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항해를 지시한 예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 가운데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고, 어찌하여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건이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항해에 광풍을 만난 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의도를 가지신 것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게 하기위해서 항해를 지시했고, 광풍을 만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케 하는 통치자임을 깨달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원치 않는 질고를 당하고, 고난 속에 있는 것도 우연하게 재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의미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극이 아닙니다. 통치자 되시는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허용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주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통치자이십니다.
3. 예수님은 심판주이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여’라고 부르는 대표적인 구절하면 요한계시록 마지막 절입니다. “주 예수여 오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입니다.
헬라어 ‘마라나타’가 성경 사본에 따라 ‘마란아 타’ 혹은 ‘마라 나타’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마라-나타’하면 our lord comes “우리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이 됩니다. 그 주님께서 오실 때에 심판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마라나-타’로 읽게 되면 our lord is here, ‘우리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라는 완료형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our lord, come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명령형입니다.
그래서 ‘마라-나타’하면 ‘주님이 오신다’는 신앙고백이 되고, ‘마라나 –타’하면 ‘주여, 어서 오소서’라는 종말론적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 주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나아가 마지막 때에 심판주로 오실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라나타, 주님이 오십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이것이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어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곳 벽에는 그들이 쓴 글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다. 단지 그의 도착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성경의 신약에서만도 재림의 약속이 318번이나 나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고대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심, 즉 나의 하나님이요 통치자요 심판주가 되심을 믿게 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1)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만 아니라 ‘모든 입’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 땅에 있는 자들, 땅 아래 있는 자들을 다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36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지 보십시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주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통치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심판하실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통치하시는 주권자로, 심판하실 재림의 주로 고백하고 찬송하므로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루터는 종교개혁자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을 시시한 분으로, 능력 없는 분으로, 종이호랑이 같은 분으로 그렇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작은 새장 속에 새를 넣어놓고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새장 속에 가둬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길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 되게 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시며, 다시 오실 재림의 심판주이십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내 주변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하십시다. 인정하십시다. 노래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