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산에서 적오산성까지
산행 겸 답사길에 나선다. 전에 몇 차례 와본 곳이지만,올 수록 새롭다.
대중교통에 의지하다보니, 편리한 점도 있지만, 그에 따른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나선 길,
자운대 입구가 종점인것도 모른 채 둔산경찰서 앞 정류장에서 급히 올라탔던 904번 시내버스.
자운대 입구에서 운전기사가 내리라는 말에 당황해서는 택시를 잡아타고 내린 곳은 대전둘레길 7구간 입구인 공군아파트 측면이다. 수운교 천단 관람은 생략하고 곧바로 등산길로 접어든다. 수운교에 얽힌 수 많은 이야기들은 접어둔다.
금병산은 수운교를 떠나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절에 주산이 있듯이 수운교의 주산은 금병산이기 때문이다.
왜 수운교가 생겨났으며, 시대적 배경과 민족신앙의 성격, 유형, 주요 신도들과 숯골로 불리우는 탄동의 기도도량은 이제는 군사시설지로 탈바꿈하고 군사 교육훈련의 요람지가 되었다. 그래도 평안도 출신의 신자들의 영향은 저변에 맥맥히 흐르고 있으니, 숯골 냉면 속에 서려있는가 직조공장 기계소리에 남아있는가? 계룡산과 10승지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참화속에서 정감록이라도 믿고싶어 하는 민심이반과 조선 말의 세도정치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 끝에 오는 조선왕조의 멸망과 일제의 침탈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민초들의 한서린 사연이 서려있는 곳, 한줄기 우리 역사의 장이 응축된 곳이다.
12폭 병풍을 연상시키는 금병산은 뜻이 다른 한자로도 쓰인 것을 발견한다.
병풍의 동쪽 끝자락에 붉은 자라가 엎드린 듯 동쪽 계족산을 바라보는 적오산이 있다.
열두봉 봉우리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 금병산 능선길은 산책길이라고나 할까. 탄탄대로 수준의 순진한 오솔길 모양새다.
용바우고개는 이상하게도 산 봉우리에 있고 그 아래 산성이 있는 적오산과의 사이에는 또 다른 고개 서낭당고개가 있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 눈이 부시다. 그나마 초록빛 신록으로 위안을 삼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남쪽의 시원한 한밭벌 전망에 더위를 식혀본다.
적오산성에서 다시 찾아본 옛성터의 자취, 북벽, 우물지, 수구지, 인근의 성벽과 서문지 길을 둘러보고는 정상의 각자시도 찾아본다. 남문지로 내려오다 안내판도 다시 보고는 대전디자인고등학교길로 하산한다.
다 내려오다 보니 왼쪽으로 채석장 같은 곳에서 눈밝은 지기 하나가 가보잔다.
적오산신 제단과 석장승이 있다. 뜻밖의 만남이다.
점심 때가 흠씬 지난지라 숯골 냉면집에 들려 흘린 땀을 평양냉면으로 식힌다.
수운교와 숯골 냉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 자운대 내 공군대학 아파트 서편에 있는 대전둘레산길 7구간 입구>
<노루봉까지 올라가기가 어렵지만 그 다음부터는 룰루랄라하면서 가는 길이다.
멀리는 거칠메기재도 보이고 그 너머 어두우니 동네에는 안산산성도 있고, 북쪽 멀리 금강 너머에는 세종특별자치시도 보인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들, 360여 미터 높이의 산봉우리를 지나 드디어 정상이라는 곳에 이른다. 전망이 좋다.
금병산 한자 표기가 다르다. 높이 372 미터의 봉우리이다.>
<수운교본부에서 설치한 운수봉 표석도 있고.>
<자운대 쪽, 대전시 한밭벌 사방을 조망해본다.>
<금병산(382 미터) 유래 설명도 읽어보본다, 동쪽 옥련봉서부터 서쪽 창덕봉까지의 12봉 이름도 있다.
수운교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열두 산봉우리들이 옹위한다는 데, 불교의 12지신상을 떠오르게 하고. >
< 기념사진도 찍어둔다.>
<용바위고개, 해발 348 미터이다. 왜 이리 높은 봉우리에 고개가 있단 말인가?>
<전설을 간직한 고갯마루>
<보덕봉으로 가는 길, 구룡리로해서 금강수계로 이어지는 지름길인지, 이정표로 보면 중요한 고갯길인가 보다.>
<열 두 봉우리의 처음 시작인 옥련봉 표지석>
<제일 옥련봉 옆의 정자에 앉아 간식 겸 목을 축이면서 전망을 즐긴다.>
<서낭당고개 이정표>
(서낭당고개에서 적오산성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다시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동쪽의 적오산 전경 : 옥련봉에서 서낭당고개로 내려오는 도중에>
<서낭당 고개의 이정표에 따르면 산성까지는 아직 0.37km가 남아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산높이가 안내도와 실제 표석과 다르다.>
<적오산성의 북문지에서, 북벽과 성혈(성혈) 보기>
<초여름 더위에 헐떡거리며 오르니 드디어 나타나는 북문지 입구다. 적오산성 문지 중에 가장 분명한 곳이다.>
<1000년을 넘겨 남아있는 성터를 마주하는 감회가 새롭다.>
<문지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지 같은 평평한 곳에 운동시설이 설치되어있다. 성혈바위가 가운데 보인다.
경고 사격안내판 뒤편으로 성벽 상태가 온전한 북벽이 있슴을 성지기가 일러준다.>
<,북문지 안에 있는 이정표>
<북벽 찾아보기:뱀조심>
<산지기도 내려온다.>
<풍화되어서인지 금방이라도 가루가 될 것 같은 질감의 성돌에는 바위이끼만이 무성하다.>
<측면을 통해서 안도 들여다 본다.백제 때 것인지, 아니면 후대의 것인지..>
<성벽위에서는 성지기가 무언가를 찾아보고>
<성혈(星穴)로 보이는 바위,대략 8개 정도의 구멍이 보인다.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상징하는 것인지..>
<우물을 찾아서>
< 숲을 헤치면서 회곽도를 따라 내려가면 나타나는 옛우물이 여전히 싱싱하다.>
<성지기는 수구를 찾아보자고 하는 데 흔적도 찾기 어렵고 대신 온전한 성벽만 본다.>
<(아마도 재밑)마을로 통하는 서문지 길을 찾아본다>
<헬기장이 있는 동편:건물지로 보인다는 곳. 예전의 감시초소는 사라지고, 그 근처에 북벽이가장 잘 남아있는데 하면서
지난번 본 곳이라 지나친다.>
< 적오산 정상의 바위 무더기 : 말바위 전설을 안고 있는 바위 부스러기 그 아래에서 각자된 시를 찾아본다.>
< 힘들게 찾아낸 애각 시 :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그나마 읽기가 어렵다>
(* 인터넷에서 찾아본 싯귀
赤鰲隨溪(적오수계) 적오산 물길 따라 芳里春風(방리춘풍) 방현 마을에 봄바람 부네
靑柳連城(청류연성) 푸른 버들 성벽따라 늘어있고 係馬於枝(계마어지) 준마는 나무에 매어 있네.)
적오(붉은 자라)는 적오산을 뜻하고 방리(향기로운 고을)는 재밑 마을인 방현(坊峴:방고개)를 가리키는 것 같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어서 각자해놓은 것인지... 읍지 제영편에 수록된 것인지...)
<무너진 성벽을 돌아보고는 내려간다.>
<남벽아래의 적오산성 안내판>
(적오의 한자가 붉은 자라의 뜻이 아닌 붉은 가마귀의 뜻인 적오산성으로 표기되어있다. 조선시대 표기를 따르고 있다.
백제시대의 소비포현이 통일 신라시대 때는 적오현, 고려와 조선에서는 덕진현으로 불려졌으니까)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는 대전디자인고교 길로 내려온다.>
<채석장으로 여겨졌던 곳: 현수막이 보이고...>
<무슨 석산제를 지내다니?.. 석산이라는 이름으로 봐서 한때 채석장이었던 모양, 지금은 석산제로 보존되고 있지만...
그 많은 성돌들은 어데서 어떻게 구해서 쌓았을까?>
<신체로 보이는 돌장승를 모시고 제를 올린다는데..>
<적오산성과 관련된 오랜 풍습은 아닌지 아닌지...>
(*산성과 관련된 지형과 지명, 민속, 전설, 실물들이 통합적으로 엮여지면서 자꾸만 의문은 생겨나고 돌아서는 산성 답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