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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주석
포도원에 있는 일군 (마태복음 20:1-16)
포도원에 있는 일군에 대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
Ⅰ.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1절). dispensation─즉 복음시대의 통치의 방법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 나라의 법들은 비유로 감싸여져 있지 않고 산상설교에서와 같이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신비적인 것들은 이곳과 마태복음 13장에서와 같이 비유 가운데, 성예식 가운데 전달되고 있다. 기독교의 의무는 그 개념보다 더 잘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그 의무보다도 더 잘 설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비유가 의도하는 바이다.
Ⅱ. 특별히 우리들에게 그가 앞장의 끝 부분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신 하늘 나라에 관한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 비유는 그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 진리에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있으므로 더욱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복음시대의 통치에 있어서 유대인을 거절하고 이방인을 부르신 것보다 더 큰 신비가 없다. 사도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있다(엡 3:3-6). 즉 이방인들은 동료 상속자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통치 이상으로 유대인들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이 비유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먼저 포도원에로 불리움을 받아야 하며, 또한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에 응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마침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들은 이것을 받아야만 하며 또한 유대인들과 동일한 특권과 권리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즉 그들은 유대인들, 심지어 그들 중에서 믿었던 자들까지도 이유 없이 멸시하려고 했던 "성도들과 함께 한 동료 시민"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비유는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1.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다. 이것은 우리의 성경 중에 있는 내용들이 이 비유의 목적으로 제시한 위대한 진리이다.
2. 나중에 시작하고 종교적으로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한 자들이, 종종 하나님의 축복에 의하여, 더 일찍 들어가고 위대한 약속을 받은 자들보다 지식과 은혜와 유용성에 보다 더 훌륭하게 도달하게 된다. 구시는 아히마아스보다 더 일찍 출발하였지만 아히마아스는 "평야 길"을 택하였으므로 구시를 앞서고 있다. 요한은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는 더욱 더 용기를 가져 "먼저 그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비유가 제자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적당한 때에 열심히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하여 자만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열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바라보도록 하였으며 또한 앞으로 전진하고 참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훌륭한 출발은 아무런 유익도 없게 될 것이다. "처음"인 것처럼 보여지던 자가 "나중"이 될 것이다. 종종 최근에 그 생활을 회개한 자들이 앞지르게 될 때가 있다. 바울은 "만삭되어 태어나지 못한 자"와 같았으나 "사도들 중의 최고 된 자보다 뒤지지" 않았으며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을 능가하였다. 이 비유와 탕자의 비유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는데, 방탕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의 탕자는 방탕하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에게는 매우 소중한 자였다. "처음과 나중은 똑 같다."
3. "보상"은 성도들에게 그들의 회심의 때를 따라서가 아닌, 은혜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준비한 것을 따라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즉 선임권(seniority)에 의해서가 아닌(창 43:33), "그리스도의 온전함의 장성한 분량에 의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시대의 처음에 "중생하여" 그를 뒤따른 사도들에게 큰 영광을 약속하셨다(마 9:28). 그러나 지금 세상 끝에서도 동일하게 그에 대하여 충성된 자는 동일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함께 그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계 2:8-3:21). 나중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은 자들은 초대시대의 순교자들이나 고백자들(비록 그들이 더욱 칭송을 받는다 할지라도)과 동일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 충성된 사역자들은 초대 교부들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가지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일군들과의 "계약"과 또한 그들과의 "계산"이다.
(1) 여기에는 일군들(품군들)과 더불어 맺은 "계약"이 기록되어 있다(1-7절).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구별 될 수 있다.
[1] 누가 그들을 고용하였는가?
"집주인"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집주인이며,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또한 그를 섬기는 자"이다. 집주인이신 그는 해야 할 일들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종들을 거느리고 계신다. 그는 하늘과 땅에 큰 가족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름이 붙여지고(엡 3:15) 또한 그는 그것을 소유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일군들을 고용하신 것은 그가 그들이나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만일 우리가 의롭다면 그에게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마치 인자하고 관용스러운 집주인과 같이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여 그들을 게으름과 가난에서 구출하며 또한 그들이 일한 대가를 받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하도록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어디에서 고용되었는가?
그들이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고용되기까지 "종일토록(6절) 놀면서(3절)있었던 시장"에서 고용되었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사람의 영혼은 어떤 봉사나 다른 일에 고용될 준비를 갖추고서 있다. 사람의 영혼은(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일하도록 창조되었으며, 또한 "불법의 종"이든지 "의의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롬 6:19). 마귀는 시험함으로써 "돼지를 먹이기"위해 그의 들판으로 "품꾼들을 고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복음으로써 아름다운 일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고용하고" 있다.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수 24:15). "오늘날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둘째,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에 고용될 때까지 우리는 종일토록 놀면서 서 있다. 죄지은 상태는 사탄에게 고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게으름의 상태"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죄인들은 일할 것이 없으며, 목적도 없으며, 그들에게 세상에서 하도록 맡겨진 일이 없으며, 잘 계산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다.
셋째, 복음적인 부르심은 "시장에서 놀면서 있는"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시장은 "집합 장소"이며, 거기에서 "지혜가 부르짖고 있다"(마 1:20, 21). 시장은 유희의 장소이며, 거기에서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다"(마 11:16). 복음은 우리를 허무한 데서부터 중요한 것에로 부르고 있다. 시장은 용무가 있는 장소이며, 시끄럽고 분주한 곳이다. 우리는 그 장소에서 물러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 시장에서 어서 나오라."
[3] 그들은 무슨 일을 하도록 고용되었는가?
그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고용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자.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포도원이다. 그는 그 포도원을 심고 물주고 울타리를 둘렀다. 그 열매는 그의 존귀와 칭찬이 되어야만 한다.
둘째, 우리는 모두 이 포도원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종교의 사역은 가지를 자르고, 손질하고, 파고, 물주고, 울타리를 두르고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 포도원 일이다. 우리는 각각 지켜야 할 우리의 포도원, 즉 우리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으로써 그를 위하여 보존되고 손질되어야만 한다.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게으르거나 빈둥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일군"이 되어 일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만"한다. 하나님은 일에는 사소한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게으른 자는 지옥으로 내려간다. 하늘로 올라가려는 자는 분주해야만 한다.
[4] 그들의 임금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약속하고 있다.
첫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있다(2절). 로마의 한 데나리온은 한화로 약 2천여 원이 되는데, 하루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돈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 것의 보상이 "행위"나 "빚"으로 말미암지 않으며(아니 그것은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롬 4:4), 또한 우리들의 봉사와 하늘의 영광 사이에는 어떤 조화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아니,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하였을 때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우리들 앞에 보상이 놓여져 있으며, 또한 그것은 충분한 보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둘째, "상담하게 줄 것을" 약속하고 있다(4-7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에게 한 봉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체를 하지 않으실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에 대한 상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의의 면류관"이다.
[5] 그들은 얼마 동안 고용되고 있는가? "하루 동안"이다. 인생의 시간은 한 날이며, 그때에 우리는 세상에로 "우리를 보내신 자의 일들을 행해야만 한다." 그것은 짧은 시간이다. 보상은 영원하지만, 그 일은 단지 "하루" 동안뿐이다. 사람은 "품 군 같이 그날을 마치게 된다"고 말해진다(욥 14:6).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적으며, 또한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재촉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신속하고 부지런하게 우리의 일을 행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우리의 날이 다 가버렸는데도 우리의 위대한 일이 다 행해지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영원히 버림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단지 "하루" 동안만 일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들의 어려움과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종이 간절하게 바라는 어둠"은 우리에게 휴식을 안겨다 줄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일의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욥 7:2). 믿음을 굳게 잡고 잡시 동안만 참으라.
[6] 일군들이 고용된 그 날의 몇몇 시간들에 대해 유의되고 있다. 사도들은 복음 시대의 "제 일시"와 "제 삼시"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사명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임무는 유대인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약 "제 육시"와 "제 구시"에 그들은 동일한 심부름을 나가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으며, "처음에는 유대에 있는 자들"에게, 그 다음으로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제 십일시"에 그들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사역과 특권에 참예하도록 그들을 불렀으며 또한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그리스도에게로 개심이 몇 년의 생명의 기간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한 대개 그렇게 적용한다. 보편적인 부르심은 포도원에 와서 일하는 데 차별이 없다. 우리가 부르심을 따라 나아올 때에 그 부르심은 효과적이 된다.
첫째, 어떤 사람은 그들이 매우 어릴 때에 포도원에 부르심을 받고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착수하고 있다. 즉 아침 일찍이 포도원에로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들의 여유 있는 한 세월들은 은혜 받기에 지장이 없었으며 또한 그들의 창조자를 기억하는 데 알맞았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정결함을 입었으며" 따라서 위대한 자이다(눅 1:15).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이에 참여하였다. 오바댜는 "어릴 때부터 주님을 경외하였다." 이러한 여행을 가려고 하는 자들은 때를 맞추어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은 중간 시기에 구원을 받도록 인도되고 있다. "제 삼시, 제 육시 또는 제 구시 때에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신적인 은혜의 능력은 그들이 바울과 같이 자신들의 쾌락과 세상적인 추구 가운데 처해 있을 때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의 회심에서 크게 확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들을 위한 일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는 잘못하여 그릇 치는 시간이 전혀 없으시다. 누구든지 "모두가 훌륭한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날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애의 지나간 때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너희도 역시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나님께서는 고용되기를 바라는 자들을 결코 되돌려 보내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할 곳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일생을 거의 다 보내고 한 시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제 십일시"에 늙은 나이로 포도원에 고용되고 있다. 제십이 시에 고용되는 사람은 없다. 생명이 다 하였을 때 기호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동안 소망도 있다."
1. 늙은(오래된) 죄인들을 "위한"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성실하게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는 너무 늦지는 않다. 또한,
2. 늙은(오래된) 죄인들에게도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 전능하신 은혜가 행하기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구스인의 피부색과 표범의 얼룩무늬를 바꿀 수 있다." 즉 게으른 습관에 물든 사람들에게도 일을 시킬 수 있으시다. 니고데모는 "그가 늙었지만 다시 거듭날 수 있으며" 또한 "늙은 사람도 더러운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함으로써 그들이 늙을 때까지 자신들의 회개를 연기하도록 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 사람들이 "제 십일시에 포도원으로 보냄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누구도 그들을 고용하거나 또는 그들을 고용하겠다고 제의한 일이 없다. 이방인들은 "제 십일시"에 왔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전에 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이 "제 삼시나 제 육시에"에 전해졌지만 이를 거절하고 반대한 자들은 제 십일시에 이 사람들이 말한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 그들을 제 구시나 제 십일시에 고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실망케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지금은 받을 만한 때"임을 기억하게 하자. "만일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은 "오늘"이 되어야만 한다.
(2) 여기에는 일군들과 계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계산이 행해진 때는 언제였는가? "저물었을 때" 일반적으로 하는 것처럼 일군들은 불리워져 계산을 받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저녁 시간은 계산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계산은 우리의 생애의 저녁에 행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충성된 일군들은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때까지 연기가 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인내로써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연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규칙, 즉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신 24:15)를 준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충성된 일군인 바울이 떠날 때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그 보상은 전적으로 부활의 아침까지 연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저녁에 일반적인 계산이 행해지게 될 것이며, 그 때에 "각 사람은 육체에 행해진 일들을 따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시간이 끝나고 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세상이 끝나게 될 때 보상하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때에 주인은 일군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임금을 줄 것이다. 사역자들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포도원으로 부르며, 사망은 그들의 데나리온을 받도록 포도원에서부터 그들을 불러내고 계시다. 포도원으로 부른 것이 효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 부르심이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들이 보상하기 위한 부르심을 받기까지는 보상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휴식과 보상을 위한 하나님의 때를 인내함으로 기다려야만 한다. 즉 우리의 주님의 시간에 가야만 한다. "심판 날에 마지막 나팔이 일군들을 부를 것이다"(살전 4:16).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말하기를, "그 때에 당신은 부를 것이요, 나는 응답하리라"고 할 것이다. 일군들을 부를 때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부르게 될 것이다.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을 맨 나중에 놓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실망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맨 처음에 부르는 것이다. "심판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지만 "세상 끝날(그 날의 제 십일시)이 올 때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끌어 올려지게 될 것이다." 먽 선임권(seniority)에 의해 먼저 주어지지 않게 될 것이며 각 사람은 "마지막 날에 그 자신의 신분대로 서게 될" 것이다.
[2] 어떻게 계산되었는가? 거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보편적인 지불(9, 10절). "그들은 각각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선행을 꾸준히 계속하며 영광과 명예와 썩지 아니할 것을 찾는 자는 그들의 일의 가치대로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대로 틀림없이 "영원하신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롬 2:7). 하늘에서 영광이 정도는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 완전한 행복이 될 것이다. 동서로부터 오기 때문에 늦어진 자들, 즉 "큰 길가와 사거리 길에서 온' 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동일한 잔치에 "앉게 될 것이다"(마 8:11). 하늘에서 모든 그릇은 비록 그 그릇들이 똑같이 크거나 기능이 일정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아구에까지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다. 장차 그 즐거움이 분배될 때에는 마치 만나를 모으던 때와 같이 많이 모은 자는 더욱 지나치게 모으지 않고 작게 모은 자는 부족 되게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출 16:18). 그리스도께서 이적적으로 먹이신 자들은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이 모두 먹고 배가 불렀다." 하루 일 중에서 열 시간을 일하지 않은 자에게도 하루 종일의 임금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보상을 '빛"으로가 아닌, "은혜'와 "절대 주권"으로써 분배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가장 훌륭한 일군이나 또한 즉각 시작한 자들도 그들의 시간에 공백기가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채워지지 못하므로 그들은 실제로 포도원에서 12시간 중에서 한 시간을 가까스로 일한 것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신실하게 행해진 일들이 비록 결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눅 17:7, 8 과 13:37 비교)
둘째, 균등하게 분배한 것에 불만을 토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변명. 이 상황은 비유를 꾸미는 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목적은 분명히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다.
여기에 보면,
1. 불만을 토로함(11, 12절). "그들은 선한 집주인을 원망하였다." 하늘에서는 어떤 불평이나 원망이 없으며 또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범죄요 불행이며, 하늘에는 그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동안 하늘과 하늘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종종 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인정된 사실을 보고 자극이 되어 일어난 질투심을 나타내고 있다. 탕자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이 그들을 그의 동생을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비난을 했으며 또한 그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관용에 개해 원망하였다. 이 일군들이 그들의 주인과 다투고 시비를 한 것은 그들이 충분히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탕자의 큰형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선한 봉사에 대하여 자만을 하였다. "우리는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었나이다." 그것이 내세운 변명이었다. 죄인들은 "불 가운데서 수고한다"(합 2:13)고 말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더욱 극심하게 태양 가운데서 수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풀무 불 속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 날의 더위 가운데서 수고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으며" 또한 그것도 서늘한 때에 하였다. 그렇지만 "다신은 그들을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새로 불리움을 받은 이방인들은 메시야의 왕국을 기대하면서 구약 교회의 포도원에서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 아래 오랫동안 수고한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 왕국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은 적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공적들을 과소평가하고 우리 자신의 공적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암시를 하신 것은 아마도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보여지는데,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버린" 사실에 대해 자만하지 않도록 하셨다. 즉 그와 나머지 제자들이 이와 같이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었으므로 마땅히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고통을 당한 자가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저지하거나 또는 그것으로 인한 공적을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는 짓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가 "사도 중의 으뜸"이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지극히 작은 성도들보다 더 못한" 자임을 인정하였다.
2. 그 불만은 일축되고 말았다. 집주인은 이 악의에 찬 추측에 대한 응답으로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불평하는 자는 주인이 그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불평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13, 14절). 여기에서 주인은 자신의 공의를 주장하고 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주인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따질 때는 부드러운 말과 확고한 논거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보다 못한 자가 불평을 하고 성을 낸다면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감정을 돋구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해야만 한다.
[1] 하나님이 잘못을 저지를 수 없으시다는 것은 너무도 확고한 진리이다. 이것은 왕들 중의 왕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사도 바울은 그러한 생각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 3:5, 6). 그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불평을 잠잠케 하실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든지 또는 우리들에게서 물러가신다고 할지라도 그는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시다.
[2]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거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베푸신 호의이며 우리들에게 불의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대한 자비이며 우리에게 대한 불의는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흠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은혜를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값없는 은혜이므로 자랑하는 것은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도 값없는 은혜이므로 불평하는 것도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입은 닫히게 되고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케 될 것이다."
그가 잘못한 것이 없음을 불평하는 자에게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에게 계약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만일 네가 계약한 조항을 실천하였다면 잘못했다고 외칠 이유가 없다. 너는 우리가 계약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지만 그는 은혜스럽게 그 자신의 약속에 의해 빚진 자가 되기를 기뻐하신다. 이를 의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종종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첫째, 세상에 속한 속인(俗人)들은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데나리온에 대해 동의를 하였다. 그들은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았으며(시 17:14), 이러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상급"(마 6:2, 5)과 "자신들의 위로"(눅 6:24), "자신들의 좋은 것들"(눅 16:25)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영적이고도 영원한 축복에서부터 버림을 받고 잘리움을 당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으시다. 그들은 그들이 택한 것을 가지고 있으며, 한 데나리온에 동의를 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이 택한 것이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결론적인 말이다.
둘째, 순종하는 성도들은 저 제상에서의 그들의 데나리온데 대해 하나님에게 동의를 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동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너는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그렇게 하였다. 너는 가서 세상에 동의하려고 하느냐? 너는 하늘나라를 네 몫으로 네 전부로 취하며 또한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전혀 취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느냐? 너는 피조물 가운데 있는 행복을 찾으려고 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네 행복의 부족한 것을 메꾸려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주인은,
1. 그를 그의 계약에 잡아 메고 있다(14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만일 우리가 그것을 빚이나 절대 소유권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무서운 말이 될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부를 수 있는 것만을 가진 채로 버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완전히 버림을 받은 자가 된다. 만일 최고의 피조물이 자기 소유인 것만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가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우리가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것을 취하며, 또한 감사하도록 하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점에 있어서 더 잘 대우를 해 준다면 우리가 무익한 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데나리온을 줄 때 우리가 받을 것보다 더 잘 대우를 해 주시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처사에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불평할 이유가 없다).
2. 주인은 그에게 그가 시기하였던 자들이 그와 똑같이 품삯을 받게 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계시다. "나는 나중 온 이 사람에게는 너와 같이 주리라. 나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실 때, 그의 목적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불평을 잠잠케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그를 돌릴 수 있겠는가?"
(1) 그는 주인과 더불어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준 것은 절대적으로 그 자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15절). 주인은 앞서 그의 공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는 자신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자.
[1]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소유자이시다. 그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은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 무제한적이다.
[2] 그러므로 그는 기쁘신 뜻대로 그의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 뜻대로 그것을 하려는 것은 합당치 아니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지신 것은 그 자신의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를 다음과 같은 일에서 정당화시킬 것이다.
첫째, 그의 섭리의 모든 처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과 또한 우리가 잘못 낭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리실 때 우리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그 자신의 것에 대하여 행하셨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불만을 누그러뜨려야만 한다. Abslulit, sed et-즉 그는 그것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그가 준 것이었다. 의존되어 있는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의 통치자인 하나님에게 논쟁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섭리 가운데서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은혜의 수단들과 은혜의 성령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뜻에는 계획이 있으며 또한 임의적으로 행해진 것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도 마침내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현명하게 행해진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님이시며 또한 "그의 뜻대로 자신의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불평하는 자와 반대자들을 충분히 잠잠케 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이 그의 손안에 있다. 우리는 그에게 따지거나 그와 더불어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
(2) 그는 그의 동료를 시기하거나 또한 비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 동료가 보다 일찍이 포도원에 오지 않았다고 불평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일찍 부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이 동료에게 하루 종일의 품삯을 준 데 대하여 불평할 자격이 없다. 그때에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면서 보내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1] 시기(envy) 의 본질. 그것은 약한 눈이다. 눈은 종종 이 죄의 출입구가 된다. "사울은 다윗이 크게 행함을 보고 그를 주목하였다"(삼상 18:9, 15). 다른 사람의 선에 대하여 불쾌감을 가지며 또한 그들이 해를 입기를 바라는 것은 악한 눈이다. 누가 그 보다 더 큰 악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악한 눈은 우리들에게 대한 곤고이며, 하나님께 대한 분노이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악의이다. 그 속에는 즐거움이나 유익이나 영광이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유일한 악"이다.
[2] 그것의 악화. "그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이다." 시기는 선이시며 선을 행하시며 선행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전혀 합당치 못한 죄이다. 아니,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대요 거역이다. 그 죄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며 그가 행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다. 그 죄는 동시에 두 개의 큰 계명을 직접적으로 범하는 죄이다. 즉 우리가 그 뜻을 따라야만 하는 하나님에게 대한 사랑과 또한 그 부요를 즐거워해야 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범하는 죄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사악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빙자하여 더 극심한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이 비유를 말하게 된 구절(마 19:30)을 인용하면서 이 비유에 대한 적용이 기록되어 있다(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복음의 왕국이 처음 세워진 지금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이 유대인 개종자들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출발을 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자만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
1. 그들은 신앙 고백에 있어서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뒤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비록 신앙 고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있다고 할지라도 지식과 은혜와 거룩함에 있어서 그들보다 오히려 뒤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방교회, 아직도 "시장에서 놀며" 서 있는 이방세계는 유대인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저명하고 유용한 기독자들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더 탁월하게 될 것이다(사 54:1). 주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 옛 시대에 교회가 이전 교회보다 더 풍성하고 번창하였다는 사실을 누가 아는가? 초대시대의 기독교가 우리가 살고 잇는 타락과 찾아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거룩한 종교의 순수성과 능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일군들"이 교회의 "날"의 "제 십일 시에," 즉 빌라델비아 시대(역주: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연대별로 적용한 것)에 포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때에 성령의 역사가 지금까지의 어떤 시대보다 더 충만하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 그들은 마지막 때에 위선자로 발견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마 12:14). 그것은 그 때에도 진리였지만 지금에도 역시 참된 진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부르심으로 청함을 받지만 구원적인 선택으로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자는 "때가 차매"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롬 8:30), 따라서 우리의 효과적인 소명을 확신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택하심을 굳게(벧후 1:10)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소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있지만"거절하고 있다(잠 1:24). 아니,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그에게서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호 11:2, 7). 이것을 보면 그들이 선택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택하심을 입은 자는 얻을 것이기"(롬 11:7)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단지 "부르심"만을 얻은 많은 기독자들에 비하면 "택하심을 받은" 기독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부르심의 모래 위에가 아닌, 영원한 선택의 반석 위에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세워야만 한다. 우리는 허울만의 기독자로 보여지거나 실제적으로 기독자가 되기에 부족한 자가 될까봐 두려워해야만 한다. 아니, 우리가 흠이 있는 기독자로 발견되거나 그로 말미암아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기독자가 될까봐 두려워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예고하심 (마태복음 20:17-19)
여기에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예고하신 것들이다. 그는 지금 유월절을 지키고, 또한 위대한 유월절이신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이 두 가지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즉 거기에서 "유월절은 지켜야만 하며"(신 12:5), 또한 거기에서 선지자는 죽임을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러한 송사에 있어서 재판관이었던 산헤드린 대 공의회가 있었기 때문이다(눅 13:33).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이 예언의 은밀성. "그는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셨다." 이것은 그들에게 "어두운 데서" 말씀되었지만 후에 "빛 가운데서 말할 수"(마 10:27)있었던 일들 중의 하나였다. 주님께서는 친구와 같은 그들과 은밀한 교제를 가졌으며 특히 여기에서도 그러하였다. 그것은 매우 힘든 말씀이었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그들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장차 그와 함께 즉각적으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므로 미리 경고를 받아 미리 무장할 수 있도록 그들이 이 일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만 하였다. 그 일이 대중들에게 말해지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1. 왜냐하면 그에게 냉담하였던 자들이 말을 듣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거치는 장애물은 그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며 더 이상 그를 따르게 하지 않을 것이다.
2. 왜냐하면 그에게 대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는 이를 듣고 그를 방어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은 "민요를 일으키게 될"(마 26:5)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 일을 미리 말씀하셨더라면 그러한 민요가 일어난 것은 그의 책임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의 나라의 순수성과 완전히 불일치가 되며, 또한 그는 그의 고난을 방해하려고 하는 그 어떤 일도 결코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대화는 회당이나 집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행하는 "길 도중"에서 있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길을 가거나 여행할 때 "아름답고 교훈적"인 대화를 가질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신 16:7 참조).
Ⅱ. 예언 그 자체(18, 19절).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 말씀은 그가 이전에 한두 번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반복에 불과하다(마 16:21; 17:22, 23). 이것은 그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고민거리가 무엇이며 또한 그의 마음이 그의 고난의 사역에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그를 불안케 하지는 않았다. 그때에 그는 그것을 피하시려고 하고 또한 그것을 피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그를 기대와 소망으로 부풀게 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이 세상과 무덤 사이에서 직면하게 될 우리의 죽음과 고난에 대하여 종종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유익하다. 이와 같이 하여 그것들과 더욱 친근케 함으로써 그들은 덜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매일 죽는 한 방법이요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지는 한 방법이며, 또한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매일 말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대화를 한층 더 빠르게 확실하고 낫게 해 줄 것이다.
2.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그의 고난에 대하여 이전의 어느 때 보다도 더 특별하게 예고하고 계시다. 그는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마 16:21)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는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할 것이라"(마 17:22)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저희가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들은 무서운 일들이며 또한 그것들에 대한 확실한 통찰력이 평범한 결심을 충분히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그에 관하여 미리 예언되었듯이, 사 42:4) "그는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고난을 더욱 분명하게 내다보면 볼수록 그는 더욱 즐겁게 그 고난을 당하려고 나아가셨다. 그는 자기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는 이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여기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그들이 그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계시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사형에 처할 권세가 없었으며 또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십자가형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사악함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를 죽이는 데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손을 잡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에 의해 그들을 화목케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엡 2:16).
3. 앞서와 같이 여기에서 그는 그의 죽음과 고난을 그의 부활과 영광에 연관시켜 말씀하고 계시다.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1) 그의 고난을 스스로 용기 있게 다짐하며 또한 즐겁게 그것들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는 즐거움으로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를 참으셨다." 그는 자신이 살아나게 될 것과 삼일만에 빨리 살아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는 곧장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요 13:32). 그 보상은 확실할 뿐만 아니라 매우 가까이 있다.
(2)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용기가 좌절되고 크게 두려워하게 될 그의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으며 또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3) "현세의 모든 고난" 가운데 놓여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을 바라보게 하며 또한 현재의 고난을 가볍게 하고 잠시 동안 받게 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릇된 야망을 바로 잡아 주심 (마태복음 20:20-28)
여기에는 먼저 두 제자가 그리스도에게 요구한 것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요구의 동기가 잘못된 것임을 교정해 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20-23절). 세배대의 아들들은 야고보와 요한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처음 반열에 속한 제자 중 두 제자이다. 베드로와 그 두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총애하는 제자들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였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종종 책망을 받은 제자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자를 가장 많이 책망을 하신다(계 3:19).
Ⅰ. 여기에는 그들이 주님에게 요구한 야망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을 그의 나라에서 한 사람은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20, 21절). 비록 그가 현재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그들이 그의 나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종종 그들에게 고난과 자기 부정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위엄과 권세를 가진 현세적인 나라를 여전히 기대하였다는 것은 실로 무지한 소치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고관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이 나라에 고용되기를 원하지 않고 단지 명예만을 얻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 상상적인 나라에서 그리스도에 버금가고 그 외의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를 그들은 원하였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앞서 하신 대화의 맨 나중의 말씀, 즉 "내가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이 이러한 요구를 하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의 부활이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따라서 적당한 때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결심하였다. 또는 그것을 일찍 말함으로써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을 그들은 이와 같이 악용하였으며 또한 이것으로 의기양양해졌다. 어떤 사람은 위로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릇된 목적으로 사용해 버릴 때가 있다. 이는 마치 나쁜 위 속에 있는 음식물이 담즙(bile)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은 그러한 요구가 그들의 어머니의 요구요 그들의 요구가 아닌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어머니를 내세워 이것을 말하도록 계획을 꾸민다. 비록 교만한 사람들이 스스로 좋은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실행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겸손의 모양"(골 2:18) 밖에 나타내지를 못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마태복음 27장 61절과 마가복음 15장 40절과를 비교해 본다면 살로메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녀는 글로바나 알패오의 딸이거나 또는 우리 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친 사촌지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를 섬겼던 여자들 중의 하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녀가 그에 대해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요구를 거절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를 대언자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는 아도니야가 솔로몬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를 했을 때 밧세바로 하여금 그에게 말하도록 한 것과 같다. 마땅히 그들의 야심을 저지했어야 할 그들의 어머니가 오히려 이와 같이 그들의 야망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실로 그녀의 약점이었다. 현명하고 선한 자들은 나쁜 일에 끼어 들어서는 안 된다. 은혜스러운 요구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관심을 가진 자들의 기도를 원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하는 친구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청해야만 하며 그것을 참된 호의로 여겨야만 한다. 그들은 일반적인 약속, 즉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이 아닌 추측으로써 그가 "어떤 것"을 그들을 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의 어머니를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구하면 주실 것이라"는 약속에는 우리의 요구에 대한 자격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즉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잘못 구하기"때문이다(약 4:3).
2. 그 요구의 밑바탕에는 그들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만심, 즉 그들의 형제들에게 대한 오만한 멸시와 명예와 승진에 대한 교만한 야망이 있었다. 교만은 우리 앞에 흔히 놓여져 있는 죄이며, 또한 그것을 제거하기는 매우 어렵다. 은혜와 거룩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낫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거룩한 야망이다. 그러나 위엄과 권위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되려고 하는 것은 죄스러운 야망이다. 네가 지금 너의 주인이 능욕과 채찍질과 못 박히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너는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 45:5).
Ⅱ. 그리스도께서 이 요구에 대하여 그녀가 아닌 그녀를 데리고 온 아들들에게 대답하셨다(22, 23절).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고 할지라고 그 응답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응답은 매우 온유하시다. 그들은 야망의 결점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의 정신으로 그들을 돌이키셨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주님께서는 그들의 간구의 무지성과 결점에 대하여 어떻게 책망하셨는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1) 그들은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었던 나라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세적인 나라를 꿈꾸었다. 그들은 그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소경이 색깔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 우리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영광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장성한 어른이 되었을 때에 대해 미리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완전함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에 우리는 이러한 철부지 없는 환상들을 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즐거워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약속되어 있는 좋은 것만을 구할 수 있다(딛 1:2).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보거나 들을 수 없다.
(2) 그들은 그 나라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전혀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전혀 몰랐다). 그들은 무엇을 구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구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수단들을 간과하였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모아 놓으신 것을 산산조각이 나게 하였다.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모두 버렸고, 또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녔을 때 그들의 모든 봉사와 고난은 이미 끝냈으며 이제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물어 볼 때라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면류관과 월계관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이미 승부가 나버렸으며, 이제는 보병들과 함께 뛰어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들은 현재 눈앞에 있는 가나안에 대해서 꿈꾸고 있었으며, 요단강의 큰 물결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는 모두 "값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을 "벗어 던져버린 것"처럼 "자만"하기가 쉽다.
[2] 우리는 면류관을 쓰고 영광을 구하면서도 그곳에 이르는 길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참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다.
2.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들의 요구의 허영심과 야망을 저지하셨는가? 그들은 고관이 되어 그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될 것을 공상하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며 또한 그들의 영광의 어두운 면을 보여 주고 계시다.
(1)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이를 소홀히 여기고 있는 그들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들은 면류관과 상급을 열심히 찾았기 때문에 준비도 없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곳에서 이르는 험악한 길로 마구 뛰어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어려운 난관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주님께서는 이 난관들에 관하여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22절). "너희는 글 나라에서 제일가는 명예직을 얻을 수 있는 후보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너희는 너희의 일을 다 수행했을 때에야만 어떤 큰 일들을 가질 수 있다는 데 대하여 말을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끝까지 그것에 대해 지속할 수 있느냐? 진지하게 그 문제들을 생각해 보라." 이 두 제자는 언젠가 그들이 분을 내었을 때,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였는가를 알지 못하였다(눅 9:55). 이제 그들이 야망에 부풀어 있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을 보시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잔을 마시는 것"이며 "세례를 받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이러한 묘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괴로움이 많게 될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쓴 잔 임이 예상되고 있다. 즉 그것은 쓴 쑥과 쓸개즙을 마시는 것이다(시 11:6). 그것은 실로 무서운 잔이지만 사악한 자의 잔의 소득인 불과 유황의 잔은 아니다(시 11:6). 그것은 세례임이 예상되고 있다. 즉 고통의 물로 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물 속에 잠기게 되고, 그 물들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다(욘 2:5). 다른 사람들은 물을 뿌림으로 받게 된다. 둘 다 세례이다. 어떤 사람은 대홍수 가운데서 그 속에 빠지게 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빗발치는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보기에 흉한 정도로 젖게 된다. 그러나
2. 이러한 가운데서도 "위로는 넘치게 된다." 그것은 잔에 불과 하며, 큰 바다가 아니다. 그것은 한 모금에 불과하며 아마도 쓰디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밑창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손에 있는 잔이다(요 18:11). 그것은 섞은 것이 가득한 잔이다(시 75:8). 그것은 세례에 불과하다. 만일 잠긴다 해도 빠져 죽지는 않는다. 당황을 하지만 실망을 하지 않게 된다. 세례는 우리가 계약과 교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의식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그러하다(겔 20:37; 사 48:10). 세례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의 외적이고 가시적(visible)인 표식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빌 1:29).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신 것과 똑 같은 잔을 마시는 것이며 또한 그가 세례를 받으신 것과 똑같은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고난을 받고 계시며, 다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1. 주님께서 장차 이러한 잔(요 18:11), 아니 시냇물(시 110:7)을 마실 것이며, 또한 깊숙이 즐거움으로 마실 것이라는 사실은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즉 그는 장차 이러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며 그것을 자진하여 받으려고 하셨다(눅 12:50). 그가 평범한 죄인과 같이 물로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 것은 실로 위대한 겸손이었다. 더욱이 평범하지 못한 행악자와 같이 피로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위대한 겸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죄있는 육체의 형상을 입으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다."
2. 그들이 단지 그리스도에게 쓴잔으로 서약을 하며 "그의 고난에 참예자"가 되며 "그 고난들의 남은 것을 채운다"는 사실은 고난받는 기독자들에게 위로가 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한 마음으로 무장을 해야만 하며 "진 밖에서 그에게로 나가야만" 한다.
셋째, 우리가 종종 이 잔을 마시거나 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리는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즐겁게 고난을 받으며 또한 최악의 경우에도 여전히 우리의 순결을 붙잡을 수가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고난에 함께 참예 할 수 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그를 신임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을 놓아주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쓴잔을 마시고 피의 세례를 받으려는 마음이 있는가? 종교는 만일 그것이 어떤 것에 가치가 있다면 모든 것에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고난받을 가치가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앉아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그를 위해 죽는 것에 대한 값어치를 계산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조건하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를 물어보도록 하자.
[2] 그들은 얼마나 담대하게 약속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들은 그의 우편과 좌편에 앉은 것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결코 시험을 받지 않게 되기를 원하였다. 조금 앞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이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 그들은 "주여 당신의 능력과 은혜로써 우리는 할 수 있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할 수 없나이다"라고 훌륭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과신함으로써 베드로가 빠졌던 것과 똑 같은 시험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범하기 쉬운 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이와 같이 담대하게 약속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는 자가 대개 가장 큰 확신을 가지는 법이다.
[3] 그들의 고난에 대해 얼마나 분명하게 여기에 예언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라(23절). "너희는 과연 내 잔을 마실 것이다." 특별히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는 것과 같은 고난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예견되는 고난을 한결 쉽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며 또한 우리가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기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이르는 우리의 길을 되도록 서두르게 하기 위하여 가장 최악의 때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마실 것이다." 즉 너희는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서 맨 처음으로 피의 잔을 마셨다(행 12:2). 요한은 비록 나중에 침상에서 죽었지만 교회사가들의 말을 신임한다면 그는 종종 이 쓴잔을 마셨다. 예를 들면 그가 밧모섬으로 추방되었을 때(행 1:9)나 (교회사가의 말처럼) 그가 에베소에서 끓는 기름 가마에 내던져졌으나 기적적으로 구출된 때에 그러하였다. 그는 다른 나머지 제자들처럼 종종 죽음 가운데 있었다. 그는 잔을 취하였고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2)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영과의 어두운 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난을 즐거움으로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의 나라에 있을 처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리는 세상에서의 가장 큰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이다. 거기에서 누가 더 나은가는 그것을 알려고 의도하는 자에게 어떤 암시가 주어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재의 연약성은 침착하게 이러한 것을 깨달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것을 구하거나 알 필요가 없다.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하늘나라에도 영광의 정도는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최고의 자리인 그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될 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2] 미래의 영광과 그 정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속에서 의도되고 예비 되고 있다. 보편적인 구원자보다 특별한 영예는 정해져 있다. 즉 모든 일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와 영과에 있어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엡 4:13)
[3]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매입하신 열매들을 분배함에 있어서 정확하게 의 아버지가 의도하신 분량대로 실행하고 계시다. "그것이 예비 된 자들 이외에는(그렇게도 읽을 수 있다) 나의 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생을 줄 수 있는 오직 유일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 영생은 "그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요 17:2)주어진다. 그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지금 "내가 약속할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이미 정해지고 협의된 일이며 아버지와 아들은 이 일에 있어서 견해가 완전히 일치되고 있다.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그러한 것을 찾고 갈망하는 자들에게 내가 줄 것이 아니라 겸손과 자기 부정에 의해 그것을 예비한 자들에게 줄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다른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에 분개한 사실에 대해 책망하시고 교훈 하심. 그는 그들의 모든 소행을 참으셨다. 그들은 지식과 은혜 면에서 매우 연약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태도에 대하여 참으셨다.
1. 열 제자들이 불쾌하게 여김(24절). "열 제자가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이는 그들이 앞장서려고 원했기(그것은 그들의 죄였고 그리스도께서 불쾌히 여기신 것이었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 두 제자들"보다 더 앞장서려고(이것은 그들에 대한 비난이었다) 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분개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죄가 그들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욕설을 한 사람을 고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욕설하거나 비난할 경우에만 해당되며, 그가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제자들은 비록 그들도 야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니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 때문에" 그 형제의 야심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은 흔히 자신도 그러한 죄를 허락하고 또 그 가운데 빠지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성을 낸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교만하고 탐욕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야심이나 또는 으뜸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형제들 가운데 불화를 조성하고 분노와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투었다는 기사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분쟁의 소지가 그 밑바탕에 도사리고 있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저지하셨는데, 그 방법은 그들을 책망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해야 할 것을 교훈 함으로써 행해졌으며 실로 그 방법이야말로 고상한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이전에도 바로 이러한 죄를 책망하셨으며(마 18:3), 그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질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이러한 죄에 빠져들었지만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온화하게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지극하신 온후함과 친근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성을 내시면서 그들에게 자기 앞에서 사라져버릴 것을 명령하지는 않으셨으며, 오히려 사랑스럽게 그 앞으로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는 "그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심으로" 가르치시기에 합당하고, 우리가 그에게서 초청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하실 내용은 두 제자와 나머지 열 제자에게 똑같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함께 모으려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은 현세적인 나라에서 누구나 통치권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물었지만 실제로는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을 위해 이러한 통치권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시다. 왜냐하면,
(1) 그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같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방인들, 아니 이방인들의 집권자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교주의가 기독자에게 합당치 않은 것처럼 권력은 사역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몇 가지로 살펴 본다면,
[1] 이방인의 집권자들의 방법은 어떤 것인가?(2절) 그것은 즉 그들이 백성들과 또한(만일 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지배권을 가진다면) 서로 서로에 대하여 "통치권과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권세를 떠받들고 있으며 또한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통치권과 권세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추구하고 자만하는 가장 큰 일들이다. 그들은 지배권을 가지려고 하며, 모든 사람을 그들 앞으로 모으려 하며, 또한 모든 사람을 그에게 복종시키려 하며, 모든 곡식단이 그들에게 절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라"고 소리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느부갓네살 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이 일에 있어서 사도들과 사역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향은 어떤 것인가?
첫째,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다. 영적인 나라의 조직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너희는 이 나라의 백성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수고하고 고난을 받아야만 하며, 그들에게 통치권이나 권세를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벧전 5:3), 그들을 위해 수고를 하도록 하라." 이것은 폭력이나 권력의 남용을 금지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집권자들이 법적으로 행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권세를 주장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다. 교만한 사람(선한 사람일지라도)이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허세를 부리지 않고 선보다는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님은 이를 완전히 교리에서 추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다. 바울은 스스로 어떤 사람의 신앙에 대해 지배권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고후 1:24).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의 위엄과 허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합당치 못한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권력과 영예가 교회에 의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착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다."
둘째,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으뜸이 되는 요소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고, 여기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계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 즉 으뜸이 되려고 하는 자, 실제로 그렇게 되려고 하고 또한 마지막 때에 그러한 자로 발견되려고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 즉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절).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의무는 서로의 덕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서로 섬기는 일이다. 이것은 겸손과 유용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서로를 위하여 사랑의 천한 직분에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며 또한 "서로에게 순복하며"(벧전 5:5; 롬 5:21),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며"(롬 14:19), 선을 위하여 "이웃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롬 15:2).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을 보라.
2. 이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위엄이다. 크고 으뜸이 되는 방법은 겸손하고 봉사적이 되는 일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존경을 받으며, 또한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자들에 의해 그렇게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엄을 나타내며 절대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이 땅의 위인들의 이름들과 같이 높고 강한 이름으로 존귀하게 된 자들이 아니라, 가장 겸손하고 자기 부정을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가 지혜롭게 되려고 하는 자는 바보가 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으뜸이 되려고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의 위대한 본보기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며,"(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그의 일에 꾸준히 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으뜸이 아닌가? 비록 그는 자신을 "적은 자들보다 더 적은 자"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쾌히 그를 "위대한"사도라고 부르지 않는가?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 바울을 안중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삭이 되지 못하여 난자"(고전 15:8)이기 때문이다. 사도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아이였을 뿐만 아니라 유복자였다. 그러나 그는 큰 사도가 되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의 아버지가 예비해 놓으신 가장 최고의 명예는 그것을 구한 야고보의 차지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하기 바로 전에 하나님의 섭리는 야고보를 잘리우도록 명하시고(행 12:2), 열두 제자의 모임 속에 사도 바울이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했던 것 같다.
(2) 그들은 주님 자신과 같이 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셨던 것과 같이 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상태는 겸손의 상태이며 그 면류관과 영광은 미래의 상태에서 그들을 위해 예비 되었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인 것"을 생각하도록 하라(28절).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앞서 언급하신 두 가지 일, 즉 겸손과 유용성의 한 본보기로 자신을 그의 제자들에게 제시하였다.
[1]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이러한 겸손과 비하의 본보기가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섬기려고"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을 때, 즉 그의 전권대사가 사람이 자녀들에게 오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섬김을 받으셔야만 하며 또한 그의 인격과 성품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고 나타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는 풍채도 없으셨으며, 많은 종들을 거느리지도 않으셨으며, 존귀의 옷을 입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종의 형체"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그의 겸손이 한 부분이었던 가난한 사람처럼 섬김을 받으셨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 섬겼던 자들"(눅 8:2, 3)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위대한 사람처럼 섬김을 받지는 않으셨다. 그는 위엄을 갖추신 적도 없으시며 식사 때에 수종을 받으신 적도 없으셨다. 그는 언젠가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그의 발을 씻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오셨다. 그는 병든 자의 종이 되셨다. 일찍이 종이 주인의 뒤에 서서 그 요구를 시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종과 같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준비하였다. 또한 그들을 봉사하는 일에 고심하였다. 그는 계속적으로 이 일에 정진하셨으며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음식과 휴식을 전폐하셨다.
[2]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러한 긍휼과 유용성의 본보기가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하셨다. 그는 종과 같이 사셨으며 또한 선행을 베푸시면서 두루 다니셨다. 그러나 그는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가장 위대한 선행을 베푸셨다. 그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것이 첫째 되는 목적이었다. 이방인들의 야심적인 집권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자신의 영예를 위한 대속물로 삼아 버리며 또한 아마도 그들 자신의 오락에 대한 희생 제물로도 삼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의 백성들의 피는 그에게 고귀한 것이며 또한 그는 그것을 낭비하지 않고 있다(시 72:14). 오히려 그는 자신의 영예와 목숨을 그의 백성들을 위한 대속물로 제공하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목숨을 대속물로 버리셨다. 우리의 목숨들은 죄로 말미암아 신적인 공의의 손에 빼앗겼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출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범죄자가 되셨고 저주를 받으셨다." 또한 "우리를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 대신에" 죽으셨다(행 20:28; 벧전 1:18, 19).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위한 모두에게 효력 있는 대속물 이셨다. 만일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셨다면, 의심하는 사람은 "왜 나를 위해서가 아닌가"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영혼이 수고한 그의 씨이다(사 53:10, 11). 그들은 지금 작은 무리로밖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함께 모여올 때에는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으뜸 되기를 노력해서는 안 될 이유는 십자가가 우리의 군기이며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우리의 목숨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할 이유이며 또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목숨을 형제를 위해 내버리기를"(요일 3:16)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사역자들은 바울이 했던 것처럼 영혼을 위하여 봉사하고 고난받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앞장을 서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비하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닮으려고 애쓰며 노력해야만 한다.
소경을 눈뜨게 하심 (마태복음 20:29-34)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난한 소경 거지가 치유함을 받은 사실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청원함(29,30절).
1. 그 상황이 주목할 만하다. 이 일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일어났다. 저주 가운데서 재건되었던 그 열성적인 장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축복을 남겨 두셨다. 왜냐하면 그는 반역자를 위한 은사들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 일은 "그를 좇던 큰 무리들" 앞에서 행해졌다. 그리스도는 비록 호화스러운 자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청중들을 거느리셨으며 비록 당당한 모습을 갖추시지는 못하셨지만 그들에게 선행을 베푸셨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이 무리들은 여러 혼합된 무리였다. 어떤 사람은 떡을 먹으려고,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꿈꾸고 있었던 현세적인 통치를 기대하면서 그를 따랐다. 그러나 자신들이 할 임무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적을 행함으로써 그의 교훈을 확증하였다. 만일 그들이 그것들에 의해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두 소경은 그들의 요구에 있어서 일치하였다. 왜냐하면 합심하는 기도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마 18:19). 이 함께 고통 당하는 자들은 함께 청원하는 자들이었다. 동일한 시련 가운데서 동료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동일한 간구에서도 동반자가 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동일한 재난이나 또는 몸과 마음의 연약성 가운데 고통 당하는 자들이 서로의 열심을 일깨우고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해 똑같이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유익하다.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간구자들을 위한 풍성한 자비가 있다. 이 소경들은 흔히 소경 거지들이 하는 것처럼 "길가에 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출입하시는 곳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그는 그를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다니시는 길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들었다." 비록 그들은 소경이었지만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보고 듣는 것은 배우는 감각기관(the learning senses)이다. 그 중에 하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실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의 결핍은 다른 것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소경이면서 귀머거리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본보기라고 말해 왔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여러 수단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소경들은 청각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눈이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들었을 때 그들은 누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지 않고 즉각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현재의 기회를 활용하거나 지금 손안에 있는 돈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을 한번 놓치게 되면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경들은 그렇게 하였으며 지혜롭게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여리고에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 받을 만한 때이다."
2. 그 청원의 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였다(31절). 이 청원에서 우리는 4가지의 모범적인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마음의 눈은 진리와 의무와 중대한 문제에 대해 밝게 떠 있었다.
(1) 여기에서 기도의 지속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열심 있는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싸늘한 소원은 거절당할 수밖에 없다. 설득될 수 있는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 자는 의무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들은 잠잠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열심의 시냇물은 중단이 될 때 더욱 높이 불어날 것이다. 이것이 기도로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비를 받기에 더 합당한 자로 만든다. 왜냐하면 자비를 구하면 구할수록 그것은 더욱 보상이 되고 감사함으로 인정이 되기 때문이다.
(2) 기도의 겸허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즉 그들은 그 긍휼이 어떤 것이라고 구체화하거나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말하거나 더욱이 자신들의 공로를 진술하지 않고 다만 그의 기쁘신 대로 중보자의 긍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즐거움으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긍휼을 베푸소서." 그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은이나 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다만 긍휼, 긍휼만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긍휼 하심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히 4:16; 시 130:7) 우리의 마음이 목표하는 바가 되어야만 한다.
(3) 기도의 믿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께 붙인 명칭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애원과 비슷한 것이었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을 명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고백하였다. 분명히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고전 12:3). 이와 같이 그들은 기도함으로써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용기를 얻었으며, 다윗의 자손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용기를 얻었으며, 즉 많은 긍휼과 자비 특히 가난하고 빈곤한 자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미리 예언된 메시야(시 72:12, 13)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용기를 얻었다. 기도 가운데서 메시야의 은혜와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특별히 유익이 있다. 즉 그가 돕고 구원하며 간구 하시는 다윗의 자손임을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유익이 있다.
(4) 실망하지 않고 계속하는 기도의 인내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무리들"은 시끄럽고 버릇없는 것처럼 "그들을 꾸짖고, 잠잠 하라"고 하였으며, 그 주님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아마도 주님은 맨 처음엔 그들에게 유의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보여진다. 기도로써 그리스도로 따를 때 우리는 안팎으로부터 장애물과 여러 가지 실망된 일들을 만나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하며 또한 우리를 잠잠 하라고 하는 여러 가지 들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각오해야만 한다. 신앙과 열심, 인내와 오래 참음이 연단 되기 위하여 이러한 책망들을 인정되고 있다. 이 가련한 소경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책망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문에 있는 참되고 진지한 거지들은 대개 거짓과 위선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서 극심한 책망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떼어버림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긍휼을 구하고 있는 그대야말로 아첨을 하거나 나약한 동정을 꾀할 때는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만 한다." 즉 끝까지 기도해야만 한다(눅 18:1). 다시 말하면 굳게 결심하고 기도를 계속해야만 하며 반대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Ⅱ. 그들의 청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무리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격려하였다. 만일 주님이 무리들보다 더 친절하시거나 온유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슬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책망을 받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자들을 특별한 호의로써 후원해 주시기를 좋아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겸손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시거나 돌보는 일을 배제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1.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부르셨다"(32절).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도중이었으며, 또한 거기에서 그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서둘러 가셔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소경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서 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서둘러 행하려고 할 때에라도 우리는 선을 행하기 위하여 기꺼이 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을 부르셨다." 이는 그가 멀리서 그들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일을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행하시며 또한 연약하면서도 자발적인 병자들과 간구자들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들에게 황금으로 된 홀(忽)을 내미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 끝을 잡기 위해 나아 오라고 명령하신다.
2. 주님께서는 더욱이 그들의 처지를 질문하셨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1) 매우 정중한 제언. "내가 여기에 있다. 너희가 가지고 싶은 것을 내게 말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할 것인가? 그는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으며 또한 기꺼이 하실 수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 이 제언과 연관된 조건. 그것은 매우 쉽고 합리적인 것으로써, 즉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시기를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이를 충분히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일반적인 사람에게 자선을 구하는 것처럼 하는가 또는 메시야에게서 치료를 구하는 것처럼 하는가를 알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매사에 기도나 간구로 그에게 우리의 요구를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갈구리를 가지고 해안에 배를 매어 둔 어부는 그것으로 해안을 배에로 끌어당기지 않고 배를 해안으로 끌어당긴다. 이와 같이 기도에서 우리는 자비를 우리들에게로 끌어당기지 않고 우리를 자비에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누구에게 요구해 보지 않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그에게 즉시 알렸다. 우리는 우리 몸의 결점과 고통을 즉시 느낄 수 있으며 쉽게 말할 수 있다. Ubi dolor, ubi digitus─즉 손가락은 신속하게 아픈 곳을 가리킨다. 오, 우리가 영적인 질병에 대해 걱정하며 그것에 대해 아프다고 하며 특별히 우리의 영적인 소경에 대해 한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주여,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으면서도 그들은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요 9:41).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어두움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즉시로 오직 유일하게 안약을 가지고 계신 그에게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요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주님께서는 그들을 낫게 해 주셨다. 그가 그들에게 자기를 찾으라고 격려를 하실 때 그는 "헛되이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가 행하신 것은,
(1) 그의 긍휼의 본보기였다. "예수께서는 저희를 민망히 여기셨다." 불행은 자비의 대상이다. 가난하고 소경 된 자는 "곤고하고 가련하며"(계 3:17) 또한 동정의 대상이 된다.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빛과 시각을 주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이다(78, 79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이러한 불행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하며 우리의 영혼을 그에게 접근시켜야 한다.
(2) 그의 능력은 본보기였다. "눈을 만드신 자가 그것을 고치지 못하겠느냐?" 그렇다. 그는 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쉽게 하였다. 그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셨다. "곧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입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으셨는가를 보여 주었다. 즉 그 목적은 영적으로 소경 된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시며, "그들을 흑암에서 빛 가운데로 돌이키시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소경들은 시력을 되찼았을 때 "그를 따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누구든지 눈을 가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다. 그는 먼저 그의 은혜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그를 따르게 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그에게서 배우기 위하여 그를 쫓았으며 또한 그의 증인, 목격자로서 그와 그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그를 쫓았다. 영적인 광명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우리 주시요,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꾸준히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