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이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장마 집중호우가 쏟아져 많은 수해를 입었습니다. 외국에서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대형 산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이란에서는 기온이 섭씨 66.7도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해수면 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면서 이상고온 현상이 더 심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극한 더위에 온열질환자도 속출하고 있는데, 유럽에서만 지난해 약 6만여명이 온열질환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 위험도는 낮아졌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환자가 하루에 삼만명 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질서가 깨어진 결과입니다. 인간이 깨뜨렸습니다. 그 결과 자연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한 젊은 남성이 한낮에 길을 가던 행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흉기 공격을 가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습니다. 학교폭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학생과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폭력과 갑질이 다반사가 된 오늘의 우리 현실입니다. 오직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며, 영적, 도덕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도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탄식이 절로 나오는 현실입니다.
8장 22절부터 보면 바울은,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23절에 보면,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탄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탄식‘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근심이나 원망 따위로 한탄하여 숨을 내쉰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자연 재해는 자연의 탄식인지도 모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속량을 받는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데, 그러나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깨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참으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까지 인내하며 탄식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탄식은 인간이나 피조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도 탄식하신다고 바울은 말씀하였습니다. 26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탄식하신다는 말씀이 원망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가슴을 졸이며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스위스의 의사였던 폴 트루니에가 쓴 책 가운데 <강자와 약자>, The Strong and The Weak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곧잘 강자와 약자로 분류합니다. 이 사람이 강한가, 약한가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한 자에게는 비굴해지고, 약한 자 앞에서는 교만해집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힘을 기르려고 애쓰고, 그 힘에 의존하여 살아가려 합니다. 무술을 익히기도 합니다. 힘있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경쟁에 이기려고 애를 씁니다. 힘이란 결국 소유에 있고 권력에 있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권력의 지위에 올랐다 해도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힘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기운이 빠지고 병이 드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폴 트루니에는 결국 강한 자와 약한 자가 따로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약함을 알고 그 약함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약자와, 자신의 약함을 모른 채스스로 강한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약자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면,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었는데, 이 가시가 자신에게서 떠나가게 하여 주시기를, 세 번이나 주님께 간절히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응답하셨다고 하면 간구를 그대로 들어주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는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가시를 내 몸에 허락하신 것은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자만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리고, 결과적으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었으니, 나는 내 약함을 감사하고, 크게 기뻐하고,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그래서 오히려 나의 약함을 자랑하고, 나의 약함 가운데 능력을 부어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도 바울은 우리의 약함을 전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가는데, 이 구원과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약합니다.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이 힘이 들고, 그날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또,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그 빌 바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 엉뚱한 것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는 힘이 부족합니다. 기도함으로 오늘을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야 하는데,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으니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고, 신앙생활에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도 실망하고, 의심하고, 기도생활도 시들해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무엇을 빌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참고 기다림에 있어서도 연약해서, 그래서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의 희망은 오직 성령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도우십니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도우시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쉬난틸람바노마이)는 ‘다른 사람의 곁에서 손을 잡아 준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요청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동사가 쓰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였는데, 마리아는 언니를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에, 언니인 마르다가 분주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참 눈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기분이 상해서 예수님께 “마리아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가 약해져 있을 때에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곁에 오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내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무더운 짐을 함께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보혜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 제자들을 위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은 지킬 보(保)자와 은혜 혜(惠)자를 씁니다. 지킬 보자는 ‘지킨다’, ‘편안하게 한다’.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은혜 혜자는 ‘은혜를 베푼다’,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의미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돕는 이’라는 뜻입니다. 카운슬러처럼, 변호사처럼, 곁에서 돕는 이, 위로자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고, 우리를 붙잡아주고 위로하시는 방법이 ‘간구’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또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성령은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위대한 구원 계획에 따라서 활동하시는데,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한 사역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분명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신비입니다. 그 뜻을 잘 몰라서 당황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뜻 대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한 성령의 중요한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탄식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성령께서도 우리들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위로이며 구원에 대한 보증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듯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흔히 어머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연약한 우리들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사랑은 마치도 못난 자식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성령의 탄식과 사랑과 연민을 품고 연약한 이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 속에는 고난이나 연약함이나 실패도 들어있습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를 것 같은 그런 조건이나 상황조차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계명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여야 하고, 그렇다면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뜻과 욕심만 챙기려 하는 것은 결코 주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갈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동격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수 있습니다. 나의 환경이 너무나 힘겹고 고달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 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강한 자가 되고자 애를 쓰고, 강한 자로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마치도 스스로 강한 자인 척하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우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할지라도 때때로 넘어지고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며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사역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을 지키고 주를 위해 헌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워할 때, 말없이 우리 곁에 오셔서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면서, 마땅히 빌 바도 알지 못할 때,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부모님, 그리고 가족들과 교우들이 있어, 그 기도의 응답으로 내가 힘을 얻고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그와 같은 탄식과 기도가 연약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다시 일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권능과 은사를 주시며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주인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승천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성령 충만한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말씀을 읽으며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을 얻는 길입니다. 그렇게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며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넘치며, 주어진 사명들을 제대로 감당하며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연약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셨습니까? 우리 앞에 무거운 짐이 가로막혀 있습니까? 그 짐을 옮기기에 너무나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우십니까? 우리가 연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시며 또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사랑과 그의 도우심 가운데 성령을 좇아 살아가며 복음의 빚진 자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