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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사모
선선한 산들 바람이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어루만져 주는 어느 화창한 봄날의 산등성이. 일반인들에게 쉽게 눈이 띌 것 같지 않은 깊은 골짜기 한 가운데 고풍스럽고 널찍한 정자 한 채와 테니스장 두 개쯤은 될 법한 공터가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이제 막 흐드러진 파란 잎들로 치장한 아름드리 장송들이 산바람을 맞으며 한가로이 흔들거리고 있었고 정자 뒤 좀 더 깊은 곳에는 위로부터 오밀조밀한 암벽을 따라 투명한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리며 청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듯 평온하고 그림 같은 주변 풍광과는 달리 어딘지 어색하고 부조화한 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정자위에 있는 한 남자였다. 그는 마치 어느 명장의 수채화에 누군가 실수로 찍은 얼룩처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갓집에나 어울릴 법한 검정 양복에 같은 계통의 넥타이 그리고 새하얀 와이셔츠를 꽤 진중하게 차려 입고 머리는 기름을 바른 듯 단정하게 빗어 넘겨 정성을 기울인 모습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의 표정과 태도였다. 이런 경치 좋은 자연의 품에 안기게 되면 누구라도 지었을 법한 여유 있고 평온한 표정이 아니라 무엇에 쫓기는 듯 그리고 꽤나 사무적인 긴장되고 신중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여러 장의 서류들을 챙기느라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누군가가 우연히 보았다면 다니던 회사에 불만을 품은 회사원이 그 회사의 기밀을 빼내 경쟁사에 몰래 넘길 요량으로 수작을 꾸미는 것을 틀림없이 상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정리한 서류들을 한편으로 치우고 잠시 한숨 돌리며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순간 어디선가 자동차 한 대가 요란한 엔진 음을 울리며 공터로 들어왔다. 이 외진 첩첩산중을 어떻게 용케 올라왔는지 차는 온 차체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내린 것은 예상과는 달리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도 이 산중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즐기기 위한 여유롭고 편안한 복장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처음 남자만큼 격식을 제대로 갖춘 복장은 아니었지만 남자들과 여자 모두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은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화려하다거나 첨단의 유행을 걷는 멋진 복장들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전혀 정장을 안 입던 사람들이 예전에 장만해 둔 한물 간 정장을 특별한 날에 입은 듯한 어색함이 깃든 그런 모습이었다. 또한 그들의 얼굴도 얼마간 굳어있는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으며 분명 그저 한가로이 놀러온 모습은 아닌 듯했다.
일행은 정자위에 있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짧은 목례를 하고는 악수를 했다. 그러나 그런 만남 뒤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생각되는 반가운 미소가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무겁고 긴장된 표정은 내내 그들 사이에 계속되었다. 여자가 속삭이듯 혼자말로 ‘ 여긴 정말 경치가 아름다워요’ 라고 한 것만이 어느 정도 이 정갈한 산 풍경과 일치하는 태도였다. 그들은 정자에 올라 나란히 등받이에 기대어 편안히 앉았다. 그런 편안한 외견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엔 이상하리만치 무거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후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이번에는 제법 주변과 어울리는 등산복 차림으로 아래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힘겨운 듯 기지개를 쭉 한 번 켜고는 정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도 먼저 온 일행들을 향해 가볍게 목 인사를 하고는 말없이 정자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이상한 회합의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 먼저 온 일행들도 그에게 가볍게 목례만 할 뿐 그다지 반갑게 맞이하거나 어떤 대화도 없었다. 너무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처음 남자가 등산복을 입은 남자에게 걸어 올라오느라 힘들지 않았냐고 물은 것이 유일한 대화였다.
미리 시간이 약속이나 된 듯 이런 식으로 한 명 두 명 연이어 사람들이 같은 장소로 모여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로 올라왔지만 일부는 걸어서 온 이도 있었다. 또한 혼자 온 이도 있었고 모여서 온 이도 있었다. 한 명의 나이 지긋한 노인은 몸이 몹시 불편한 듯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어느덧 인원수가 열네 명이 되었을 때 이윽고 사람의 발길은 끊겼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모였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 다양한 연령이라는 점이었다. 적게는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부터 60이상은 되었을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또한 정장을 점잖게 차려입은 모습으로부터 편한 트레이닝 복장의 차림까지 도무지 그들 사이에 무언가 통일된 조화로운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행이 모두 정자위에 빙 둘러앉자 이윽고 처음 남자가 일어서 좌중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 드디어 우리 회원님들이 모두 참석하신 것 같군요. 그럼 이제부터 제 10회 죽사모 모임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오시는데 어려움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 모임의 특성상 이렇게 외진 곳에서밖에 할 수 없음을 모두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난달에 먼저 가신 우리 모임의 최초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을 역임하신 고 이수영 회장님에 대한 묵념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수영 회장님은 자신이 남긴 전 재산 이천만원을 우리 모임을 위해 기부하셨으며 가시면서도 우리 모임이 앞으로 더욱 더 번창할 수 있도록 힘써달라며 당부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묵념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동 묵념!”
남자의 말이 끝나자 일행은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잠시 후 남자의 “바로“라는 구령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 그럼 다음 순서로 신입 회원님 소개가 있겠습니다. 정은영 회원님 잠시 일어서 주시죠.”
남자의 말에 따라 한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수수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어딘지 조용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그녀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만나게 돼서 반갑다는 짤막한 인사말만을 남긴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남자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 정은영 회원님은 작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생활을 해 오셨습니다. 슬하에 자녀는 없으시고 우연히 저희 사이트에 접속하셨다가 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우리 모임에 대한 안내를 받으시고 기꺼이 이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환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자는 잠시 진행을 끊고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었군요. 이곳까지 오시느라 다들 시장하실 텐데 다음 순서를 진행하기 전에 일단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겠군요. 그럼 총무이신 윤창섭 회원님이 준비된 도시락을 나누어 드리겠으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총무로 호명된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차에서 커다란 박스를 들고 와 그 안에서 도시락을 꺼내 일행들에게 돌렸다. 일행은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들고 각자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그들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같은 모임의 친밀한 관계라기보다는 각자의 세계에 안주해 어떤 목적을 향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같이 온 동행인들과 간간이 한두 마디 별 뜻 없는 얘기를 주고받을 뿐 이런 아늑한 자연 환경 속에서 나올 법한 즐겁고 명랑한 대화 소리는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진행자는 소화를 위해 얼마간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제야 일행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나름대로 자연의 향취를 음미하려는 듯 자유롭게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은 처음 무거운 기색 그대로였다.
얼마 후 휴식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남자의 외침이 공터에 울리자 일행은 다시 정자위로 모여 들었다. 남자는 진행을 이어 나갔다.
“ 다음은 저희 모임의 회비 모금액과 지출 내역에 대한 공지를 해 드리겠습니다. 일일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어려워 인쇄물을 나누어 드리고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아까 혼자서 정리한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지출 내역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각자 읽어 보시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현 잔액이 삼천 오백만원 정도이며 이는 전 회장님과 일부 먼저 가신 선배님들의 기부금 덕분에 대폭 늘어났으며 앞으로 저희 모임의 임원진이 누가 되든지 간에 이 돈을 고인들의 유지에 따라 더욱 알차고 우리 모임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사용할 것을 이 자리에서 각자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일행은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자, 이제 본격적으로 본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말을 한 후 남자의 표정은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었으며 좌중도 찬물을 끼얹은 듯 엄숙하고 조용해졌다. 남자는 자신의 뒤에 놓여 있던 작은 반투명 플라스틱 상자 하나를 들어 정자 한 가운데에 옮겨 놓았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작은 접혀진 종이쪽지들이 들어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 자 이 상자 안에는 1에서 13까지 신입 회원을 제외하고 저를 포함한 나머지 회원 수만큼 숫자가 적힌 접힌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처음 온 신입 회원은 당일 행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상자를 확인하고 추첨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총무님이 저를 포함한 모든 회원들에게 똑같은 숫자의 번호표를 나누어 드릴 겁니다. 그런 다음 상자 안에서 한 장을 뽑아 그와 일치하는 번호표를 가지신 분이 오늘 있을 행사 의식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신입 회원 외에는 모두 아실 줄 압니다. 본래 돌아가면서 추첨을 하게 되어 있으나 오늘은 신입 회원님이 계시니 추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은영 회원님이 나와서 상자안의 종이쪽지들이 1에서 13까지 맞게 되어 있는지 확인하시고 한 장을 뽑아주십쇼.”
남자의 말이 끝나자 정은영이라는 여자가 조심스럽게 상자 쪽으로 다가가 일일이 종이들을 펴서 확인했다. 다 확인하고는 맞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남자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고 잠시 상자 안에서 손을 젓더니 쪽지 한 장을 뽑아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일행들의 눈은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타오르는 듯했다. 정은영이 작은 목소리로 거기에 쓰인 번호를 읽었다.
“ 9번입니다.”
그러자 남자가 외쳤다.
“ 9번, 9번 누구십니까? 저는 아니군요.”
동시에 좌중 일부에서 ‘후’ 나 ‘휴’ 하는 한숨 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안도의 한숨도 실망의 한숨도 아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탄식이었다.
곧이어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번호표를 들어 9번임을 확인시키고는 진행자에게 넘겼다. 그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로 머리가 많이 벗겨진 왠지 피곤하고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진행자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 아, 김상곤 회원님이 오늘 있을 의식의 주인공이 되셨군요.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 네...”
김상곤이라는 남자는 입가에 약간의 냉소적이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띠우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 김상곤 회원님은 올해 50세로 두 번의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자살 시도도 할 만큼 혼란스럽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 전 회장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저희 모임에 가입하신 지 6개월째 되셨습니다. 드디어 오늘 저희 의식의 주인공이 되셨군요. 부디 굳은 마음으로 잘 견디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총무님은 의식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총무라고 불렸던 사나이가 자기 차로 가더니 한 묶음의 둘둘 말아놓은 기다란 동아줄을 꺼내어 어깨에 짊어지고는 정자 뒤쪽 큰 나무가 무성한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키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장송 한 그루의 단단해 보이는 가지에 동아줄을 풀어 한 자락을 던져 걸고는 밑으로 잡아끌어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줄이 팽팽하게 결렸는지 확인하려는 듯 한번 체중을 실어 당겨보고는 다시 정자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중에 진행자는 김상곤이라는 남자에게 종이 한 장과 팬을 주며 말했다.
“ 자, 그럼 김상곤 회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을 이 종이위에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 길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상곤이라는 남자는 주저주저하며 종이를 받아들고는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 막간을 이용해서 지난 번 모임에 우리 곁을 떠나신 고 이수영 회장님이 남기고 가신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며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정은영 회원님이 한 번 읽어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따라 정은영이라는 여자가 다시 일어나 종이 한 장을 받아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 친애하는 우리 죽사모 회원 여러분, 우린 모두 각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살아온 공통된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막다른 상황 속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힘을 합쳐 일일이 개개인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린 모두 같은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린 서로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될 수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은 될 수 있겠죠. 우리는 결코 우리의 선택을 찬양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선택이 우리의 생의 일부분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이 광활한 우주의 어느 연장선 위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드넓은 세상에서 우리가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깊이 믿으며 앞으로 모쪼록 회원님들의 생애가 더욱 빛으로 충만하고 모임을 통해 깊은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여자의 낭독이 끝나자 좌중은 간간이 힘없는 박수 소리가 흘러 나왔다. 진행자는 여자를 들여보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 자, 그럼 김상곤 회원님 다 되셨나요?”
“ 네. 다 됐습니다.”
말을 하고는 김상곤이라는 남자는 그가 작성한 서류를 진행자에게 넘겼다. 진행자는 그것을 접어 양복 안쪽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말했다.
“ 그럼 이제 김상곤 회원님의 의식을 치를 시간이군요. 모두 일어나 뒤쪽으로 올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일행은 진행자의 인도에 따라 총무가 동아줄 매듭을 설치해 놓은 장송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곳은 무성한 나뭇잎들이 햇빛을 굴절하여 잎 사이로 간간이 약간의 빛만이 새어 들어올 뿐 대체로 어둠침침하였다. 가끔씩 등산객들이 지나가는 오솔길과도 꽤 떨어진 곳이어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기 어려울 듯했다. 진행하던 남자가 앞서 가다가 동아줄이 걸려있는 나무 앞에 서자 일행도 그 주변에 천천히 둘러섰다. 정은영이라는 여자는 동그랗게 매듭지어진 동아줄 고리를 보자 갑자기 어떤 무서운 상상을 떠올렸는지 놀란 표정이 되었다.
“ 자, 그럼 김상곤 회원님 앞으로 나오시죠.”
진행자의 말에 따라 남자가 걸어 나와 동아줄과 거의 수직으로 섰다. 이어 진행자는 총무와 또 다른 남자 회원에게 김상곤의 양옆에 서게 했다. 그런 다음 그에게 말했다.
“ 마음의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김상곤은 대답 없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가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조만간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김상곤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 자, 그럼 시작합시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 김상곤의 양옆에 있던 두 남자가 그의 다리를 하나씩 양팔로 감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김상곤의 머리는 동아줄의 고리 매듭에 거의 닿았다. 진행자가 김상곤의 얼굴을 또렷이 바라보며 턱짓을 하자 그는 두 팔로 고리를 잡고 자기의 목에 걸었다. 그와 동시에 다리를 잡고 지탱하고 있던 두 남자가 그로부터 떨어져서는 매듭이 안 져있는 반대쪽 동아줄을 잡고 당겼다. 동아줄에 목이 조여진 그는 처음에는 버텨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이내 답답해졌는지 두 손으로 줄을 감쌌다. 그리곤 뭔가 소리라도 지르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으나 목이 막혀 숨쉬기가 곤란한 듯 켁켁 소리만 낼 뿐이었다. 급기야는 두 발을 허공에서 연거푸 휘저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것도 잠시 결국 남자는 팔도 다리도 꺾어진 나뭇가지마냥 축 늘어뜨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정은영과 일부 회원은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감싸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정은영은 몹시 충격을 받은 듯 구토가 나오려는 입을 막고 밑에 있는 나무 하나에 의지해 몸을 지탱했다. 개중에는 가톨릭 신자인 듯 성호를 긋는 사람도 있었고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행자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숙연한 자세를 취하곤 다시 일행을 향해 등을 돌렸다.
“ 이제 의식은 끝났습니다. 뒷일은 총무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다시 정자로 가시죠.”
일행은 직전의 끔찍한 광경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현장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막막한 표정으로 허망하게 매달려 있는 사체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총무와 한 남자가 천천히 밧줄을 풀어 김상곤의 주검을 땅으로 내려뜨렸다.
정자로 돌아온 사람들은 방금 전의 일을 애써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듯 태연하려 했지만 그들이 받은 충격은 쉽게 얼굴에서 가시지 않았다. 몇몇은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은 듯 비교적 담담했지만 경험이 부족한 일부 회원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신입 회원인 정은영은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기 힘든 듯 줄곧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진행자의 말이 이어졌다.
“ 자, 이제 조금 진정들 하시고 김상곤 회원님이 천국에 가셨기를 모두 기원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의 처지가 될 테니까요. 그럼 김상곤 회원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긴 글을 제가 한 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웃옷 품속에서 김상곤이 적어 준 종이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 저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 저는 이 생의 마지막 선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려 합니다. 저와 동변상련의 심정을 가지신 여러분, 제가 가는 마지막 이 길이 여태까지의 제 삶보다 외롭지 않음을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모쪼록 다음 생에서나마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제 유해는 그저 아무 곳에나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쇼. 어떤 표식이나 흔적도 없이요. 감사합니다.”
진행자가 글을 다 읽자 좌중은 일종의 안도와 위안의 분위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당사자의 소탈한 고백 때문이었으리라. 읽기를 마친 남자는 종이를 접어 다시 품에 넣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 이제 오늘의 행사를 마무리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이 외진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도 많았고 김상곤 회원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보시느라 힘드셨을 줄 압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모임은 언제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모든 것은 여러분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실 수 있으며 강제 규정은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다만 탈퇴하시더라도 남아 있는 회원님들을 위해 모임의 기밀은 외부에 누설하지 않고 지켜 주십사 하는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모쪼록 다음 모임까지 잘 지내시길 바라고 이만 행사를 마치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천천히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서로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 무거운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공터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양새나 나이, 돌아가는 방식은 왔던 만큼이나 제각각이었으나 굳고 생각에 잠긴 표정만큼은 약속이나 한 듯 일치했다. 그 사이 총무와 한 남자는 김상곤의 주검을 들것으로 옮겨 차에 실었다. 그들도 진행자와 짧은 인사를 마친 후 어디론가 차를 몰고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진행자와 아직도 좀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정은영 뿐이었다. 진행자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자신의 차로 같이 내려날 것을 권했다. 혼자서 걸어 올라온 그녀는 남자의 말을 따라 그의 차에 올라탔다. 남자는 차를 몰아 마지막으로 공터를 떠났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고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정은영은 차 안에서도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굳은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 챈 남자가 말했다.
“ 아직도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시죠? 처음엔 충격이 심하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이만 한두 번 경험이 쌓이다 보면 충격이 좀 덜해지긴 합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우리 회원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가는 것이니 그런 점에서 위안을 삼는 거죠.”
정은영은 그의 말에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무언가 궁금한 점이 어려 있는 듯 호기심이 울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 죽은 분의 사체는 어떻게 되는 거죠?”
남자는 그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편한 방식으로요. 그건 총무가 알아서 하죠. 어딘가에 묻을 수도 있고 화장한 후 바다에 뿌려질 수도 있죠. 우리 모임은 어렵사리 그런 시설도 갖추었죠. 불가피한 일이었지만요.”
“ 사체를 유기하는 건 불법 아닌가요?”
남자는 그 질문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 우린 어디까지나 고인의 뜻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런 의미로 유서도 받아놓는 것이구요. 안 그러면 우린 모두 범죄자가 되겠죠. 우리 모임은 어디까지나 우리만의 세상입니다. 외부 세계와는 동 떨어진 우리들만의 세상이요.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되죠. 우린 모두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들이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대화보다도 많은 의미를 함축한 침묵인 듯 했다. 정은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쪽 분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오늘 사망한 분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는 건가요?”
“ 네, 그런 셈이죠.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안 그럴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거의가 이 모임에 참석하셨던 분들은 계속 나오시더군요. 한두 명을 빼고는요. 저도 물론 마찬가지고요. 저도 벌써 이 모임에 참가한지 6개월이 되었군요. 헌데 아직 제 차례가 오질 않는군요.”
정은영은 의아함과 동정이 섞인 눈길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 당신은 왜?”
“ 저요?”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대답했다.
“ 모든 사람에게 나름대로 죽고 싶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사랑했던 가족 때문입니다.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었어요. 아내와 딸아이요. 그 후론 자꾸 죽고 싶은 생각만 들더군요. 전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죽는다는 것은 병원에 있는 말기 환자들만의 일이고 보통의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었죠.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생동하는 자연의 한 가운데, 신의 손길이 머무는 끝에 곧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차가 산비탈을 내려와 좀 더 널찍한 길에 접하자 남자는 운전에 주의하려는 듯 좌우를 살핀 후 차를 진입시키고 말을 이었다.
“ 저도 자살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살을 비겁한 자들의 현실 도피로 보는 경향이 있죠.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면 못 살 것도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죠. 예전엔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생의 막다른 곳에 이른 사람의 정신의 우울함과 피폐함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겁니다. 밥을 먹는다고 해서 곧 해결되지 않는 그런 정신의 황폐함 말입니다.”
정은영은 남자의 말하는 모습을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침울해졌다. 어차피 그녀도 같은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남아있는 궁금한 점을 떠올렸다.
“ 그럼 모임 한 번에 추첨을 통해 한 명씩 죽는 건 규정인가요?”
“ 네, 그건 모임 초기부터 불변의 규정입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한 규정이지요.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자살에 대해 재고해 보라는 취지입니다.”
“ 그럼 추첨을 받고서도 죽지 않을 수도 있나요?”
“ 그럴 순 없습니다. 죽기 싫으면 추첨에 참여하지 말아야죠. 일단 추첨이 된 이상 그날 의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차는 어느새 큰 길을 따라 인적이 흔한 산 밑에 다다랐다. 길가에는 몇몇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봄을 맞아 한껏 화려하게 치장을 한 녹음과 야생화들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동떨어진 어떤 아픈 감정을 지닌 두 사람의 차는 주저 없이 길 위를 내달렸다. 잠시 동안의 서먹한 침묵을 깨고 남자가 말했다.
“ 댁이 어디시죠?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아니에요. 버스 타고 가면 되요. 중간에 세워주세요.”
정은영은 남자의 연이은 권유에도 한사코 자신이 알아서 가기를 고집했다. 사실 아까부터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그녀는 아까의 충격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창밖의 경치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 그런데 누가 지었는지 모임 이름을 그럴 듯하게 잘 지은 것 같아요. 죽사모라...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말 저도 죽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그건 그저 모임의 단순한 회화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정말 죽음을 사랑하라는 뜻은 아니고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뜻은 될 수 있겠죠.”
정은영은 잠시 남자의 옆모습을 흘낏 바라보았다. 평범한 이목구비, 어디서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이웃 같은 다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물지 않을 상처를 그녀는 읽을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은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자신의 상처도 읽을 수 있었다. 촘촘하게 짜인 쇠 그물같이 단단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의 굴레... 정은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자 어느새 차는 그녀가 목표로 했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남자가 말했다.
“ 여기가 맞으시죠?”
“ 네, 맞아요.”
정은영은 약간의 안타까움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여태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을지 어떨 진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모임 관련한 연락은 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네, 그쪽 분도 잘 지내세요. 저도 또 뵐 수 있을지 어떨 진 모르겠지만요.”
정은영은 차에서 내린 후 정류장에 서서 남자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은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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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 죄송합니다.... 워낙 올만에 글을 올려서리 규정을 몰랐네여..... 바루 수정하겠슴돠....
잘 읽었습니다. 좀더 발전시키면 중편이나 장편으로도 좋겠네요. ㅎ
감사합니다,,,, 잘 읽어주셨다니... 근데 내용이 좀 그렇져?? ㅋ
잘 읽었습니다. 믹스커피님도 말씀하셨지만, 완결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의 프롤로그처럼 느껴지네요. 당초 여기까지를 의도하고 쓰신 글인가요?
아...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다음 내용은 없습니다 ㅋ. 걍 읽는 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ㅋ. 여자는 다음 번 모임에 참석할까요? 안 할까요?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