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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온 유적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답사 코스 전체가 고구려인들이 다녔던 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서 지역을 답사하는 것은 곧 고구려를 이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지역의 환경과 생태, 사람들의 생활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려를 아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한국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고구려 서쪽 경계를 요하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요서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했습니다.
서기 48년 모본왕이 상곡, 어양, 우북평을 거쳐 후한의 태원까지 공격을 감행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군이 요양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태원까지 약 1,200~1,500㎞ 정도를 달려야 합니다. 태원까지 공격하려면 요서 지역에 고구려군을 도울 세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후한서』 <채융전(蔡肜傳)>에 서기 49년 선비족 이종(異種)인 만리(滿離) 집단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다가 요동군에 투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과 맞물려 B.C 9년 유리명왕이 부분노를 앞세워 선비족을 제압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주목됩니다. 고구려는 유목민인 선비족과 함께 요서 일대를 무대로 활동했기에, 태원까지 습격이 가능했습니다.
부분노가 제압한 선비족은 유목생활에서 쫓겨나 산으로 들어간 선비족 잔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거주지를 요하 동쪽 천산산맥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초기 고구려가 소국이며, 환인, 집안이 고구려 초기 중심지였던 만큼, 고구려가 제압한 선비족도 환인에서 멀지 않은 동쪽일 것이라는 추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리 집단이 고구려의 태원 정벌에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유목민인 선비족이 광범위하게 이동한 것처럼, 고구려도 초기에는 이동성이 강한 집단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고구려의 건국 세력들은 부여에서 말을 타고 이동해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고구려의 초기 활동 무대는 여러 가지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다만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므로, 일단은 기존설을 따르며, 유리명왕 시기에 고구려가 요서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모본왕 시기 고구려가 태원까지 공격한 것은 확실하며, 고구려가 선비족과 연합하여 요서지역 활동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볼 수 있습니다.
B.C 3세기 연나라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요서지역의 땅을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고조선 사람들 대부분이 다 요동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없으며, 연나라의 요서지배가 철저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요서 지역에도 고조선의 후예들이 여러 작은 세력을 이루며 연(燕) - 진(秦) - 한(漢) 시기에도 존재했고, 고구려 초기 고구려와 힘을 합쳐 후한의 변경을 공격하는 예맥(濊貊)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기 55년 태조대왕 3년에 고구려가 요서 10성을 쌓아 한나라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합니다. 이때 요서 10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중국측 사료에서는 추가로 입증할 자료가 없어, 현재로서는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서기 111년~122년 사이에는 고구려는 활발하게 후한의 유주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가 공격한 것은 요동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후한이 만리장성 남쪽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북경)의 군대까지 동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북경 인근 지역에서 군대가 차출될 정도로, 고구려군의 활동 무대는 요서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약탈을 통해 후한의 변방민을 빼앗아 왔고, 후한은 이들을 돌려받기 위해 1인당 베 40필을 주기도 했습니다.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낸 세력은 오환, 선비족입니다. 특히 모용선비족은 고구려의 오랜 경쟁자였습니다. 모용선비가 급성장을 하자, 고구려, 단선비, 우문선비, 진(晉)나라가 319년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棘城)을 공격했으나, 전략 실패로 철군합니다. 극성은 극성은 영주 동남 170리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 대릉하 주변의 의현(義縣) 또는 금주 일대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 고구려의 극성 공격이 실패하면서, 도리어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에게 모욕을 당합니다.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광개토태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요서지역을 2곳으로 분리해서 보겠습니다. 하나는 요서 중북부 초원지대입니다. 이곳에는 거란, 해, 지두우 등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또 다른 곳은 요서 남부 즉 의무려산맥 남쪽 대릉하를 중심으로 한 조양, 의현, 금주 지역 등 농경이 가능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전연, 후연 등이 성장했습니다. 고구려는 먼저 요서 중부의 거란족부터 공략합니다.
『삼국사기』 소수림왕 8년(378년) 거란이 북쪽 변경 지역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고구려가 거란과 최초로 만난 기록입니다. 부락(部落)이란 농경보다는 유목 내지는 어업 및 수렵에 보다 의존도가 높은 생활을 하며 추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집단을 가리킵니다. 말갈부락, 양맥부락, 숙신부락 등이 그것으로, 거란 역시 부락 단위로 생활하는 집단입니다. 거란족은 흉노와 오환, 선비족이 각기 유럽과 만리장성 이남으로 떠난 후 비어있는 서요하 중상류일대에 자리 잡고 성장했습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동쪽으로 고구려, 서북쪽으로 유목제국, 남쪽으로 중원세력과 만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 2년(392)에 거란을 쳐 남녀 500명 사로잡고, 고구려에서 잡혀갔던 1만 명의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달래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광개토태왕이 즉위 후 가장 먼저 거란을 정벌하고 고구려인을 되찾아 온 것은 백성들의 지지를 먼저 확보하려는 의지로 보입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영락 5년(395)에 광개토대왕이 비려(裨麗)가 노략질을 그치지지 않으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여,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소금강(鹽水)에 이르러 3개 부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와 말, 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 북풍 등을 거쳐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한 후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은 정벌 대상에 대한 종합적인 결과를 정리해 쓴 글입니다. 거란 정벌은 한 차례가 아닌 수년에 걸친 결과로, 395년에 일단 마무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려는 거란족의 하나인 필혈부(匹絜部)로 추정되고 있지만, 거란에 대한 이칭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군의 원정로에 대해 서영수와 서길수는 요양에서 북진을 거쳐 의무려산(富山)을 넘고, 노노아호(努魯兒虎) 산맥을 넘어 시나무렌강 상류인 염수까지 진격했다고 보았습니다. 다분히 후연을 견제하면서, 거란을 공격한 코스로 보인다. 고구려 거란 공격은 이 코스 외에도 심양 또는 철령에서 푸신시를 지나 오한기, 홍산 등지로 진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營)은 거란인의 가옥인 천막으로 구성된 마을을 의미합니다. 이때 고구려에서 소와 말, 양 등을 무수히 빼앗습니다. 유목민이 가진 가축들은 중요한 자원입니다. 소는 농사에, 말은 전투용으로, 양은 식량으로 사용됩니다. 광개토태왕은 백성 약탈에 대한 복수와 민심 획득, 자원 확보, 그리고 전략적 위치 확보를 통한 후연 공격의 발판 마련이라는 거란 정벌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 다음 정벌을 준비합니다.
고구려의 경쟁자인 후연은 고구려가 5만 대군으로 남해안 원정(가야, 왜 공격)을 한 틈을 타서, 요동을 공격해 남소성 등을 함락시킵니다. 그러자 고구려는 반격에 나서 402년 5월 후연의 수도 용성에서 가까운 숙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404년에는 후연의 연군(燕郡)을 공격합니다. 405년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후연왕인 모용희는 다음해 2월에 느닷없이 거란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거란을 공격하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음을 꺼리어 돌아가려 하다가, 중무장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로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후연군은 무려 3천 여리나 행군하여 말과 병사들이 피로하여 얼어 죽는 자가 길에 즐비했으며,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되돌아갑니다.
『자치통감』에 등장하는 405~406년 기록은 많은 것을 숨긴 기록입니다. 후연이 거란을 공격한 것은, 당시 거란이 고구려의 부용세력이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라고 하겠고, 후연군이 3천여 리나 방황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거란 연합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후연이 거란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고, 그 공격에서 실패한 후연은 407년 7월에 모용희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후연은 멸망합니다.
1976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서는 광개토태왕의 부하인 진이 거느리는 13태수가 등장합니다. 연군, 범양, 어양, 상곡, 광령, 대군, 북평, 요서,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대방) 태수가 그것입니다. 연군, 범양, 어양, 상곡, 대군, 북평 등은 모두 현재의 하북성, 북경 일대의 지명들입니다. 진은 408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북한학계는 고구려가 370년 전진이 멸망할 때 북경 일대까지 진격하여, 376년까지 유주 지역을 지배했다고 하고, 이인철은 407년 7월부터 408년까지 지배했다고 보고 있다.
370년대 고구려가 유주 지역으로 진출했다는 북한 학계 주장은 관련 사료가 거의 없어, 크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또한 이인철의 주장은 유주자사 진이 408년에 죽기 직전까지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밖에 덕흥리 무덤에 관한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광개토태왕의 부하로 유주자사 진이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무덤 벽화에 13태수의 인사를 받는 장면을 그린 것은, 실제로 그 지역을 다스렸기에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덕흥리 무덤 안 그의 초상화 앞에는 돌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후손들이 그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 제사를 지낸 흔적입니다. 학계 일각에서는 유주자사 진이 모용진이란 자라고 보려고 하지만, 유주자사 진과 모용진은 생몰연대와 활동 무대가 다릅니다. 자신의 생전 업적을 과장했다는 주장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후손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그의 업적을 늘 보면서 조상을 기리는 벽화를 거짓으로 그렸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주자사 진은 자손들이 더욱 번창해 제후 반열에 오르는 것을 소망한 고구려의 충신입니다. 그가 망명객이고, 망명하기 전에 유주를 다스린 것으로 보려는 주장도 고구려가 설마 유주를 다스렸을까? 에 대한 의심에 나온 주장일뿐입니다. 그가 유주를 다스린 시점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로 봐야 합니다. 덕흥리벽화무덤 앞방 동벽에는 유주자사 진이 계(薊) 현령의 인도를 받아 수레를 타고 행차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계는 지금의 북경입니다. 고구려가 4세기말~5세기 초 북경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광개토태왕릉비문』 영락 17년조(407년)조는 고구려가 5만 대군으로 동원해 여러 방면으로 적을 참살하여 괴멸시킨 거대한 승리를 기록하고 있으나, 그 대상이 지워져 있습니다. 영락 17년조 정벌 대상을 백제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지만, 분명 그 대상은 후연입니다. 『비문』에 등장하는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은 정복 대상에 대한 최종 결과를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407년은 후연이 멸망한 해로, 고구려의 최종 승리가 확정된 해입니다. 광개토태왕이 생전에 가장 많이 공격하고, 가장 큰 승리를 거둔 대상인 후연 정벌 기록이 『비문』에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은 후손들이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내러 갈 때 반드시 한번을 읽고 가는 글로 보아야 합니다. 조상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태왕비의 설립 목적을 잊고서, 후연 정벌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현대인의 관점이 지나치게 투영된 것입니다. 고구려인이 광개토태왕비를 굳이 무덤 곁에 세운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가 당대에 후연의 잔당을 의식해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도 잘못입니다. 광개토태왕비는 1만 년 후에 보라고 설립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잘못된 선입견은 우리는 요하를 건너는 것이 어렵다고 보지만, 우리가 아닌 타자 대부분을 중국이란 용어로 통일하고, 그들은 무소불위의 능력으로 북경에서 요하 건너 대동강까지 단숨에 달려올 수 있다고 착각하는 점입니다. 보급로, 운송능력 등은 모두 고려하지 않고 중국이란 상상의 집단을 거대하게만 봅니다. 반면 고조선, 고구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합니다. 만리장성 이남 지금의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산시성, 섬서성 등에 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농경민으로 말타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반면 수렵의 비중이 높았던 고구려 사람들은 말을 타기에 익숙합니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훨씬 이동이 빠르고 장거리를 손쉽게 갈 수 있습니다. 조양, 홍산을 비롯한 요서지역은 고구려인의 활동무대였습니다. 우리가 요서 지역을 탐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지역에 가서, 과연 이곳이 고려인이 활동할 수 없는 공간인지, 고구려인의 주 활동무대인지 직접 보고 느껴야 합니다.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할 때 요양-심양-북진-조양으로 이어지는 공격 방향 외에, 철령-푸신 –오한기-홍산-조양으로 이어지는 의무려산 북쪽 루트, 요동반도 남쪽에서 해안을 따라 금주, 진황도 등에 상륙하여 공격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후연을 공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후연을 멸망시킨 후, 고구려인의 후예인 고운(高雲)의 북연을 속국으로 삼아, 중원지역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는 북위와의 완충지대로 삼았습니다.
고구려는 모용선비가 한족(漢族)과 어울리며 한족화 되는 것을 크게 경계합니다. 고구려의 요서 지역 지배는 전략적 위치에 있는 거란족 통제와, 중원세력의 동방지역 진출 억제, 그러면서도 중원세력과 교류 지속이란 3가지 정책적 목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