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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제자 양성과 문학적 사랑방을 겸해 문을 연 부악문원. |
▶ 초·중·고 시절 참 많이도 이사 다닌 것 같다. 행적을 좀 정리해달라.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혜화동으로 옮긴다. 두 살 때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홀로 월북해버렸다. 집안은 풍비박산. 1950년대 우리 모자(母子)는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닌 ‘유형(流刑)가족’이었다. 어머니 친정인 영천시 금호읍 섬돌, 이듬해 고향인 영양으로 피신, 7세 때 다시 귀향한다. 안동 중앙국민학교에 입학, 2년 살다가 다시 상경. 서울 종암국민학교 3학년으로 입학, 4학년 때 밀양국민학교를 졸업. 밀양중을 6개월 다니다가 다시 고향행. 그렇게 10여 년 ‘김삿갓’처럼 헤맨다. 어머니는 피해망상증을 앓았다. 시골은 가급적 피했다. 무법천지인 거기서 잡히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 도시서 잡혀야 재판이 가능했다. 주민등록증이 없던 시절이라 다른 도시로 가버리면 추적하기 어려웠다. 60년 대 들어 다시 고향에서 3년 있다가 상경, 또다시 안동으로 내려와 안동고를 1년 다니다가 부산 토성동에서 2년, 하단에서 3년 살았다. 자연 내 학적부는 누더기였다.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한다. 8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빨갱이 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기를 써고 보수논객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더러는 언론이 원해서 때로는 자청해서 정치에 대한 견해를 밝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진보진영이 자신에게 가장 경계하고 싫어하는 보수꼴통 낙인을 찍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격앙된 어조를 갖는다. 요즘 그가 통독하는 책은 임혁백 교수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1998년 제자 양성과 문학적 사랑방을 겸해 문을 연 부악문원. (사진 위쪽)가까운 집은 아내가 살림을 하는 안채고 멀리 보이는 집은 그의 집필실이다. |
▶ ‘기자 이문열’ 시절도 궁금하다.
“1978년 대구로 내려갔다. 수성구 범어동 경신고 부근에 집을 마련하고 대구고시학원 강사로 뛰면서 돈을 벌었다. 그즈음부터 대학교 졸업장이 중시됐다. 매일신문 기자직에 응시하려고 하니 대학 중퇴가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인사과에 냉소적인 전화를 했다. 학력의 ‘력’ 자가 힘력(力) 자인지 역사 역(歷) 자인지 물었다. ‘힘력 자라고 하면 한번 도전하겠지만 그게 아니면 포기하겠다’고 하니 한번 응시해보라 해서 쳤다. 나이 때문에 외근기자보다 내근 편집부를 택했다. 이미 문학에 접신된 처지였다. 짬이 나면 조사부에 가서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77년에 이어 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필력을 알아본 동아일보 측 모 인사가 내게 러브콜을 했다. 모든 것은 내정돼 있었고 형식상 최종 면접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서울대 중퇴가 말썽이었다. 몇몇 면접관이 중퇴를 ‘데모’와 결부시키는 것 같았다. 언론통폐합 시절이라서 모두 몸을 사렸다. 면접관에게 벌컥 화를 내고 대구로 와버렸다. 기자의 삶이 구차스러웠다. 지역 신문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체면이 아닌 것 같아 사표를 썼다. 대구서 2년간 더 빈둥거리다가 84년 상경했다.”
▶ 전후 사정을 보면 소설가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소설가밖에 될 게 없었던 것 같다.
“등단 이듬해인가, 어떤 잡지사가 마련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과의 대담 때다. 그때 왜 소설을 쓰는지 여쭈어 보았다. ‘그걸 왜 내가 대답해야 하나?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몇 세기나 존속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가치를 승인받고 존속되어온 소설이란 문화적 제도를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한가.’ 솔직히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 뒤 얼마간 나는 ‘왜 문학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곧잘 그 말을 인용했다. 하지만 마흔을 넘기면서 ‘소극적 선택’과 ‘사인성(私人性)’이란 입장을 취한다. 문학이 더 좋아서가 아니라 덜 싫었고, 난파한 내 삶의 바다에서 가장 헤엄쳐 가기 좋은 곳에 우연히 있었던 ‘돌섬’ 같은 것이었다는 게 ‘소극적 선택’의 골자다. 또 문학은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으뜸가는 독자로 삼는 사적 행위라는 것이 ‘사인성’의 논리다. 10년을 그 말로 버텨냈다. 그런데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보니 그 답이 궁색해 보여 ‘공리적 실용론’을 갖게 된다. 문학은 소극적 선택으로 가 닿을 수 있는 우연의 섬이 아니며 사인성만으로는 결코 온전하게 영위될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다.”
▶ 소설 ‘시인’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것 같더라. 소설 중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가끔 김삿갓(김병연)의 삶이 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김병연은 자기 조부 김익순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장원급제한다. 선천부사였던 조부는 홍경래의 난 때 홍경래한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에 의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 그 사실을 안 김병연이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나도 월북한 아버지를 지우려고 소설로 방황의 세월을 보냈는데 그 소회를 적은 게 내 소설이라 보면 된다. 시인은 그리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스웨덴 등 11개국에서 재판 이상 찍은 걸로 안다. 가장 아끼는 소설이면서 가장 안 팔린 소설이기도 하다.”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빨갱이 가족’ 낙인 찍혀
80년대 되어서야 벗어나
궁핍한 시대의 전업 작가
먹고살려고 삼국지 냈다
이문열 작품 뭐 읽었냐고
물었는데
삼국지라고 하면 제일 황당
등단 후 21종 90여권 출간
이문열 문학관이란 것 없어
부악문원과 광산문학관은
개인 창작실·서재·사랑방
▶ 집필실 벽에 고향집을 스케치한 액자가 보이는데 고향의 옛 흔적은 어떤 건가.
“1986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란 소설을 발표했다. 그 시절 고향집 마당 한편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 어릴 때 앉은뱅이 썰매를 타던 기억, 담 밑에 수북하게 핀 해당화가 자주 생각난다.”
▶ 요즘 유명 작가를 위한 문학관이 많이 생긴다. 살아 있는 작가를 위한 문학관, 어째 좀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관련된 오보가 참 많다. 부악문원과 고향의 광산문학관을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문학관’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재차 밝히는 바이지만 우리나라엔 이문열 문학관이 없다. 그냥 개인 창작실이고 개인 서재고 후배를 위한 소설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부악문원과 광산문학관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돈 한 푼 지원 받은 것이 없다. 98년 부악문원을 열어 기수별 5~6명을 받아 5기를 운영하다가 홍위병 파문 이후부터 제자를 양성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머물던 창작 객사동에는 현재 창작 레지던스 사업 일환으로 정부 지원금을 받는 사람들이 들어와 자율적으로 공부한다.”
▶ 문단에서 이문열 문학을 어떻게 평가할 것 같은가. 조사해보니 79년 오늘의 작가상, 82년 동인문학상, 87년 이상문학상, 92년 현대문학상, 2009년 대한민국 예술상 등 매머드 문학상을 무려 11개나 받았던데.
“얼마 전 보도를 보니까 우리 시대 과평가된 작가로 이문열을 꼽았더라. 평단은 날 과평가해 준 적이 없다. 85년 이후 이문열에 대한 평론 가운데 나를 인정하는 것과 까고 부정하는 것은 2대 8 정도인 것 같다.”
▶ 삼국지가 엄청나게 팔렸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게 이문열 문학에 있어 옥에 티라는 비판도 있다.
“부인하고 싶지 않다. 우린 궁핍한 시대를 겪었다. 전업작가로 살 수 없었다. 최인호 선배 정도나 겨우 살 수 있었을까. 다들 신문 연재로 연명했다. 글쓰기 외의 부업을 가져야 할 운명이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내가 쓴 모든 책보다 번역한 삼국지가 더 많이 팔렸다’는 일본 한 작가의 말에 자극받아 삼국지 번역에 나선다. 마침 민음사 박맹호 사장도 해보라 해서 일생의 부업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문열 작품 뭐 읽었어요?’ 하고 묻는데 ‘삼국지 읽었다’ 하면 제일 황당하더라. 삼국지와 달리 초한지는 번역한 것이라기보다 내가 창작형으로 꾸민 것이다. ‘연의(演義)’한 것이다.”
▶ 아무튼 후배들에게 ‘전업작가가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모델이 된 것 같다.
“신문연재료 100만원 할 때 나는 200만원 높이고, 200만원 할 때 500만원을 불렀다. 돈이 어려울 때는 아니었지만 후배들을 위해 그랬다. 우리 언론은 작가를 배려하지 못하고 공짜로 인터뷰 현장으로 마구 불러낸다. 그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당당하게 인터뷰료까지 요구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안 챙기면 안 되겠더라.”
▶ 노벨문학상을 받고 싶지 않은가.
“달라고 할 만한 염치가 없다. 내가 뭐 징역을 한 번 갔나, 자유화·민주화에 개입하길 했나,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대신 나한테 선택이 가능하다면 노벨상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내는 것이다. 솔직히 노벨상과 나는 코드가 안 맞다. 그 상은 문학에 주는 게 아니니 착각 말라. 문학을 통해서 인류의 자유정신, 민주화에 이바지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인데, 문학을 잘 해서 장사 잘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 없다.
▶지금까지 몇 권 정도 팔리고 몇 권의 책을 발간했는가.
“2천800여만권을 판 것으로 보도 됐더라.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삼국지만 2천만권 이상 팔렸고, 여타 판매량을 합산하면 족히 4천만권 이상은 될 것 같다. 1977년 등단 이후 지금까지 21종 50여권의 장편소설, 60여편의 중단편, 세계문학명작산책 10권, 수필집 3권, 이집트 역사기행 등 90여권의 책을 남겼다.”
첫댓글 선진 8개국 성금 모금
하여'
싸이코 아키히토!
싸이코 아-베!
선량한 일본 평화주의
시민들을 위하여 세계적인 석학! 학자의
양심에 따라!
"싸이코 아-베의
정신분석" 해부와 선진
지도자의 도덕성, 인성 자질부족에 관한 책을,
이 시대에 꼭 쓰셔야 합니다!
이 문열 선배님 꼐서 책을 출판 하시고!
노벨 문학상 수상 하세요!
4개국 어로 출판될수
있도록 기원 합니다!
가미가제 자살 특공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탈출하는
싸이코 아-베의 결단을 기다려 봅니다!
싸이코 아-베 나라
가미가제 우리나라에 가장 피해를 많이준
자살 특공 비행기!
가미가제 를 접수해
와야 합니다!
산산 수수 전전!
이 문열 작가님! 선배님!!
사랑 합니다!
이 문열 작가님 꼐선
안동고 명예 졸업생 으로
졸업장 을 수여 받으셨습니다!
명예 졸업장 수여
받으실때 사진이
안동고 총동 카-페에
보존 되었는데 한번 찿아
보겠습니다!
선배님 주소좀 남겨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주소 확인 전화'
통화 하였습니다!"
다음카페
안동고 중퇴 44년 만에 이문열씨 명예졸업장 [중앙일보] http://m.cafe.daum.net/angoour/7P4B/9?svc=cafeapp
안동고(21회)
사랑이 많으신 김 형두!
동기가 올린 기사입니다!
싸이코 아-베 광기어린
거짖증언!
다음카페
이 문열 작가님! 선배님!! "싸이코 아-베 정신분석" 책한귄 써 주세요! http://m.cafe.daum.net/napseel/Ibj3/3277?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