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톺아보기] 시편 136편, 26번의 감사
민요 같은 가요들은 자연발생적이라 구전되는 특징이 있고 가사도 지방마다 붙이고 싶은 내용들이 있으면 중간중간에 바꾸어 부를 수 있는 점에서 유연성도 있지요. 더구나 흥을 돋우는 후렴구가 있어 노래를 매기는 자와 대중을 엮어주는 연대성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한국 민요에 등장하는 유명한 ‘후렴구’들 가운데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쾌지나 칭칭 나네’ ‘옹헤야, 어절씨구 옹헤야, 에헤 에헤 옹헤야’ 등이 있지요. 듣기만 해도 신이 나고 정겹습니다.
대체로 후렴구는 특별한 뜻이 없어도 발음하기 좋고, 리듬감이 있어 부를수록 노래는 감칠맛을 더합니다. 매기는 사람(혹은 선소리꾼의 선창)이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후렴구를 후창으로 하여 노래를 주고받습니다. 이때 후렴구는 매기는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도 하고, 다음 가사를 생각하도록 여유도 줍니다. 후창자들이 하는 후렴구는 집단적 신명을 고조시키기도 하며 선창자의 소리에 동조의 뜻을 표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렇게 흥겹게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놀이나 일을 하면 상호 연대감이 생기고 일의 효율성도 높아집니다.
시편 136편은 마치 우리나라의 민요처럼 모든 절(節)마다 후렴구를 두어 주거니 받거니 하며 교송으로 부르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창자가 전반을 노래하면 회중이 후반을 후렴구로 받아 노래합니다. 익명의 저자는 시편 136편의 본문 내용을 26절로 구성하여 26번을 모두 후렴구로 노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시편은 세상 창조 때부터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의 길고 긴 역사를 노래하고 있어 역사시편으로 분류됩니다. 노래로 불러지는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더 깊이 각인될 수 있습니다.
시편 136편의 반복되는 후렴구는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입니다. 26구절마다 이 후렴구가 한 번씩 등장하니 모두 26번 반복되는 것입니다. 매구절의 전반부는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놀라우신 업적을 26가지 표현으로 다양하게 노래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영원하신 자애’ 때문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시편 136편에 나타나는 히브리어 ‘호두(’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찬양하다’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감사하다’, ‘고백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고대 신앙 고백, 즉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고백’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감사하다’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시편에 나타나는 ‘감사’는 공동체 전체의 공통 체험에 그 기반을 둔 것으로,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의 믿음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편 136편은 어느 저자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느님 ‘찬양’과는 구별되는 공동체적 찬송이기에 ‘감사’로 옮기는 것이 내용에 더 부합된다고 생각됩니다.
시편 136편에는 26개의 감사할 이유가 나옵니다. 감사함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감사의 내용은 사물이나 어떤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시편이 하느님께 감사한 첫 번째 이유는 천지창조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하느님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세상 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 ‘신들의 신’이라고 표현됩니다. 히브리어는 최상급 표현이 따로 없기에 같은 단어를 반복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단어를 나열하여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왕 중의 왕’,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반복을 통하여 ‘최고’라는 최상급의 의미를 표현합니다.
감사의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역사(歷史)를 섭리하고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이룩하신 구원업적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 탈출 사건, 갈대 바다를 건넌 체험은 그들에게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최고의 영적 체험 사건이었습니다. 더불어 광야 40년 동안의 수많은 불평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결같이 인도하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마지막 감사의 이유는 자신들이 쓸모없고 비천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선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 시편에 나타난 26가지의 굵직굵직한 일에 대한 감사는 허구나 허상 또는 민담이나 신화가 아닌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기억되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시편 136편은 ‘감사 찬송’으로 시작하여 ‘감사’로 끝을 맺습니다. 거듭 반복하여 드리는 ‘감사’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하느님께 대한 불신으로 고난의 길을 걸었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반복하여 올리게 되는 후렴구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한결같은 자애와 사랑이 감사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곧 시편 136편은 ‘그분이 좋은 분’, ‘그분의 자비가 영원’하신 존재이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최인호 작가는 어느 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소망으로 시작되지만 감사로 완성된다. 시작만 있으되 끝이 없는 미완성의 기도를 우리는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미완성일 때가 많습니다. 간절함으로, 애절함으로 시작하지만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것에 대한 감사는 쉽게 놓치고 맙니다. 시편 136편을 음미하며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언제나 감사의 기도로 마무리되고 완성되면 좋겠습니다.
[월간빛, 2022년 10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