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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각/회화,작품 스크랩 17. 隋와 初唐의 서예특징은 어떠한가?
청운 추천 0 조회 14 09.12.18 1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7. 수나라와 초당의 서예특징은 어떠한가?

 

   당나라는 봉건사회 문화발전의 황금시대로, 문학과 예술의 각 영역에서 모두 전에 없는 번영의 국면을 나타냈다. 서예의 발전은 많은 별이 빛나는 극성시기로 진입했고, 국가는 분열을 벗어나 통일함에 따라 전쟁을 만나 파괴당했던 봉건경제는 회복과 진일보적인 발전을 하였다. 수나라의 서예는 이미 남북조를 종합한 경향을 나타내었고, 진(陳)나라와 수나라의 사이에 처한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은 아직 가법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안으로 주(周)나라와 제(齊)나라의 실마리를 계승하고, 밖으로 양(梁)나라와 진(陳)나라의 풍격을 받아 순박함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고 무성한 아름다움이 서로 더해져, 시대에 따라 모임이 있어 이루어졌을 따름이다. 수나라 비석의 유명한 작품은 <용장사비(龍藏寺碑)>로, 양수경이 평하여 말하기를 “평정하고 화목함이 충만한 곳은 우세남과 같고, 예쁘고 굳센 곳은 저수량과 같으며, 또한 구양순의 험준하고 가파른 자태는 없다[正平沖和處似永興, 婉麗?勁處似河南, 亦無信本險?之態].”라고 하였다. 모난 것과 둥근 것이 묘함을 겸비하여 남북이 하나의 화로에서 녹아 실로 당나라 해서의 물꼬를 열었다. 구양순과 우세남은 모두 진(陳)나라와 수나라에서 당으로 들어간 서예가로, 후인들의 대부분은 구양순과 우세남 서풍으로 수나라의 서예를 논하였다. 막우지(莫友芝)가 <용장사비>의 발문에서 말하기를 “개황(開皇, 581-600)과 대업(大業, 605-617) 연간에 이른 것이 즉 초당이다[至開皇大業間卽初唐矣].”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수나라와 초당의 서풍이 긴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서예는 위진 남북조에서 발전하여 수나라에 이르렀는데 예서는 절대적으로 적고, 전서는 이미 단절된 경향을 이루었으며, 진서ㆍ행서ㆍ초서가 세상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서풍을 이어 위로는 주나라가 서예로 가르침을 삼았던 것과 한나라가 서예로 벼슬을 취했던 것 그리고 진나라가 서학박사를 세운 전통을 계승하여, 전문적으로 서학을 세우고 굉문관(宏文館)과 숭문관(崇文館)을 열어 크게 고급 서예인재를 배양했다. 이에 조정과 재야에서 글씨를 배우는 것이 성대한 풍조가 되어 서예는 공전의 발전을 획득하고 유명한 서예가 배출과 여러 서체가 모두 갖추어진 국면을 조성했다. 전서와 예서 또한 발전이 있어 모두 유명한 서예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전서의 이양빙(李陽?)과 예서의 당나라 현종(玄宗)ㆍ서호(徐浩)ㆍ한택목(韓擇木) 등이다. 진서ㆍ행서ㆍ초서의 발전은 전보다 멀리 성행하여, 광활한 발전공간을 열었다.

   당나라 초기의 몇 황제는 서예 배우기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특히 당태종은 힘써 왕희지를 제창하여 영향이 매우 컸다. 이세민의 서예는 멀리 왕희지를 배우고 가깝게 우세남을 배워, 행서와 해서는 ‘이왕(二王)’의 풍격과 모범을 준수하였다. 위에서 행하고 아래에서 본받으니 조정과 재야에 왕희지 글씨가 유행하였고, 양무제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왕희지의 글씨를 배우는 고조가 일었으며, 이것으로부터 왕희지는 서단에서 움직이지 않는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당나라의 초기의 대서예가인 우세남은 곧바로 왕희지 7대손인 지영을 이어 왕희지 글씨의 정통이다. 구양순은 초기에 또한 왕희지에서 나와서 후에 남북조를 겸하여 융해하여 변화했고, 저수량은 왕희지에서 나오고 우세남과 구양순을 겸하였다. 이를 보면 당나라 해서의 형성과 발전은 모두 왕희지 서예와 심각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당의 서단은 우세남과 구양순이 아울러 일컬어지고, 저수량은 후에 나와 우세남과 구양순을 겸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영향이 가장 큰 3명의 서예가이다.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자는 신본(信本)이고, 일찍이 관직이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에 이르렀기 때문에 세칭 ‘구양솔경’이라 하며, 그 글씨는 ‘구체’ 혹은 ‘솔경체’라고 일컫는다. 구양순의 글씨는 처음에 왕희지의 글씨를 본받은 후에 험준함과 굳셈이 그를 뛰어넘어 초당에서 가장 창신 정신이 풍부한 서예가이다. 우세남이 구양순의 글씨를 말하기를 “종이와 붓을 가리지 않아도 모두 뜻대로 얻었다[不擇紙筆, 皆得如意].”라고 하였고, “한 시대에 뛰어나 사람들은 그 척독문자를 얻어 모두 이것을 법과 모범으로 삼았다[爲一時之絶, 人得其尺牘文字, 咸以爲楷範焉].”라고 하였다. 그의 서예는 국내외에 떨쳤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또한 다투어 구양순의 글씨를 쌍구하여 구양순의 글자를 본받아 초당에서 영향이 가장 큰 서예가이다. 구양순은 예서와 해서를 잘 썼는데, 예서는 <방언겸비(房彦謙碑)>가 있다. 해서는 예서보다 높은 성취가 있었는데, 대표작품은 <황보탄비(皇甫誕碑)>ㆍ<우공공비(虞恭公碑)>ㆍ<화도사비(化度寺碑)>ㆍ<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등으로, 모두 당나라 해서의 전범이 되는 작품으로 칭할 수 있으며 특히 만년의 정묘한 작품인 <구성궁예천명>은 가장 구양순 글씨의 풍신과 의도를 대표할 만하다. 그 글씨의 필법은 강건하고 침착하며 굳세고, 의도는 정밀하지만 관대하여 당나라 해서의 정상에 오른 작품이다. 구양순 글씨의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겸하였고, 평평하고 바른 가운데 험절함이 보이고 법도가 삼엄했으며, 북비의 풍격을 섞고 왕희지체를 들여서 험준하고 굳센 것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마치 놀란 뱀이 풀 속으로 들어가고 구름 사이에서 전기가 번쩍함과 같으며, 또한 마치 금강장사가 눈을 부릅뜸과 같고, 힘센 장사가 주먹을 휘두름과 같다[比之草裏蛇驚, 雲間電發, 金剛之瞋目, 力士之揮擧].”라고 비유했고, “삼엄하기는 마치 무기창고에 창과 같다[森森焉若武庫矛戟].”(『書斷』)라고 평했다. 그 강건한 필력과 함축적인 북방의 기운을 머금고 있어 이를 보면 북조서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후인들은 구양순 글씨를 총결한 ‘8결’과 ‘36법’으로부터 구양순 글씨의 예술규율을 도출했다. 구양순의 아들은 구양통(歐陽通)으로, 세칭 ‘소구(小歐)’라고 불렀다. 서예는 가학에서 나왔으며, 이전 사람들이 그의 대표작인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를 “법도는 삼엄하고 의도는 표일하나 함축의 정취가 적을 따름이다[矩?森嚴, 意度飄逸, 但少含蓄之趣耳].”라고 평했으니, 구양순의 글씨의 버금이라 하겠다.

   우세남(虞世南, 558-639년)의 자는 백시(伯施)이고, 관직이 비서감영흥공(秘書監永興公)에 이렀기 때문에 세칭 ‘우영흥’이라 한다. 글씨는 위진남북조가 남긴 서풍을 접하여 젊었을 때에 지영에게 글씨를 배워 묘한 그 서체를 얻었다. 한 평생 왕희지의 법도를 고수하여 둥글게 전환하고 안으로 누르며 강함과 부드러움을 안으로 함유했다.  북조 서풍에 들어가지 않아 계승은 남음이 있으나 발전은 부족하다. 우세남은 당태종의 서예선생님으로 서단에서 지위가 매우 높았고 당시 적지 않은 서예가들이 우세남의 글씨를 배웠다. 초당에 영향이 매우 큰 서예가로 구양순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그의 서풍은 마치 "두루미가 구름을 날자, 사람이 붉은 정수리를 우러러 보는 것[白鶴翔雲, 人仰丹頂]."과 같고 화목함이 충만하고 광활하며 강남의 맑고 아름다운 풍격을 보유하여 조금의 화기(火氣)도 없다. 해서의 대표작은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로, 결자는 성글고 명랑하며 살찌고 관박하다. 필법은 둥글게 전환하여 능각을 드러내지 않고, 행필은 마치 추획사와 같아 얌전하고 핍박하지 않다. 그러므로 근골을 안으로 함유하고 있어 밖은 부드러우나 안은 굳센 자태이다. 왕희지의 내엽법을 사용한 것과 위풍당당한 기개는 당나라 해서의 모범작품이 된다. 행서인 <여남공주묘지(汝南公主墓誌)> 묵적은 허하고 화목하면서 소산하여 곧바로 왕희지가 남긴 운치를 계승하였다. 우세남은 왕희지 서풍이 행해진 시대에 있으므로 우세남은 구양순을 뛰어넘는 다는 설이 있다. 육간지(陸柬之) 또한 초당의 유명한 서예가로, 그 서예는 외삼촌인 우세남에서 나왔고, 장회관은 그의 해서와 행서가 묘품에 들어갔다고 평가하였다. 서예작품은 매우 적게 유전되었으나 그의 <문부(文賦)> 묵적을 보면 그의 서풍을 알 수 있다.

   저수량(?遂良, 596-658년)의 자는 등선(登善)이고 구양순과 우세남에 비하여 40년 늦게 태어났다. 그 아버지 저량(?亮)은 18학사의 한사람이다. 저수량은 명문출신으로 시서(侍書)로부터 지위는 재보(宰輔)에 이르렀으며, 태종이 죽을 때의 고명대신으로 당태종과 고종에서 측천무후의 시대에 이르는 정치무대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글씨는 “어렸을 때 우세남을 가슴에 품었고, 자라서 왕희지를 본받았으며[少則服膺虞監, 長則祖述右軍].”(『書斷』), “아버지 친구인 구양순은 매우 그를 중시했다[父友歐陽詢甚重之].”(唐書本傳) 만년의 글씨는 우세남과 구양순의 장점을 겸하여 초당서예의 최고성취를 계승하였는데, 우세남 서예 결체의 전아하고 너그럽게 펼침이 있고 또한 구양순 필력의 굳센 장점을 겸했다. 필법에 발전한 바가 있으니 예를 들면, 제(提)ㆍ안(按)ㆍ기(起)ㆍ복(伏)의 변화와 다양한 자태는 자신만의 풍격 특징을 형성했다. 당나라 해서의 발전을 추진하여 구양순과 우세남, 안진경과 유공권에 이르는 사이에서 매우 관건적인 서예가 이다.

   저수량의 글씨는 처음에 왕희지와 우세남을 배워 높은 수준에 올라 세상에서 중시되었다. 우세남이 죽은 후, 당태종은 더불어 글씨를 논할 사람이 없어져서 위징(魏徵)을 찾아서 물어보자 위징이 추천하여 말하기를 “저수량의 글씨가 굳세어, 심히 왕희지체를 얻었다[?遂良下筆?勁, 甚得王逸少體].”라고 하였다. 그의 비교적 이른 시기의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와 <맹법사비(孟法師碑)>의 필법과 결체를 보면 용필은 비록 변화가 많으나 여전히 아직 우세남과 구양순의 풍모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만년의 <방현령비(房玄齡碑)>ㆍ<안탑성교서비(雁塔聖敎序碑)>는 이전시기에 비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어 저수량의 서예특징을 나타냈다. 그 점과 획은 파리하고 굳세면서도 포만하고, 둥글고 윤택하며 침착하면서도 험준하여 마치 인인니와 같다.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겸해 썼고, 역입하고 일으키고 그치며 제안돈좌와 기복의 변화가 있고, 리듬이 분명하며 질탕한 자태가 많다. 당나라 해서필법은 저수량에 이르러 더욱 풍부한 발전을 얻어 당나라의 규범을 형성했다. <안탑성교서>의 행필은 유창하고 조화가 자연스러우며 표일하면서도 굳세다. 결자는 너그럽고 성글며 명랑하고 단정하여 운치가 있다. 감정의 융해함은 구양순과 우세남에 비하여 충분하니, 진실로 "글자에서 금이 나오고 행간은 옥같이 윤택하며 필법은 온아하고 아름다움은 사방으로로 많다[字裏金生, 行間玉潤, 法則溫雅, 美麗多方]."라고 할 수 있다. 저수량 글씨의 새로운 서풍이 나오자 천하에서 모두가 모방하여 배웠다. 설령 저수량이 측천무후를 세우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여 폄적을 당해 죽었고, 관직과 작위를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서예의 명성은 다하지 않아 저수량을 배우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청나라 유희재(劉熙載)는 “저수량은 광대한 교화주이다[?河南爲廣大敎化主].”라고 하며 저수량의 큰 영향을 말하였다.

   저수량 글씨를 배운 명가는 당나라에 설직(薛稷)ㆍ설요(薛曜)ㆍ종소경(鍾紹京)ㆍ위서오(魏栖梧)ㆍ여향(呂向) 등이 있다. 설직은 가장 저수량 글씨의 형태와 정신을 얻어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진짜를 어지럽히는 정도에 이르러 당시에 이미 “저수량 작품을 사면 설직을 얻어 그 절도를 잃지 않는다[買?得薛, 不失其節].”라는 설이 있었다. 설직의 글씨는 용필은 섬세하고 파리하며 결자는 성글고 명랑하다. 저수량의 글씨를 계승했고 또한 북조 서예 용필인 침착하고 착실한 특징을 융합하여 파리하고 굳센 것으로 뛰어났으며, 송나라 휘종 ‘수금체(瘦金體)’의 선구가 되었다. <신행선사비(信行禪師碑)>는 설직의 대표작으로, 그는 당시에 비록 <난정서>에서 나왔다는 명예를 얻어 구양순ㆍ우세남ㆍ저수량과 더불어 4대가로 일컬어졌을지라도 끝내 저수량 글씨의 풍모를 벗어나지 못해 실로 3명의 서예가와 겨루기가 어려웠다.

   초당서단의 명가는 비록 많을지라도 구양순ㆍ우세남ㆍ저수량인 3명의 서예가가 영향이 가장 컸고, 그들은 초당서예의 최고수준을 대표하였으며, 당나라 해서규범을 형성하여 초당해서의 전형적인 예술형상을 창조하였다. 후에 안진경과 유공권의 새로운 발전은 단단하고 착실한 기초를 다져주었으니 서예발전에서 마멸될 수 없는 거대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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