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의 역사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매 학기, 강의 시간은 학업에 충실하며 열심히는 했다. 그러던 중 한국사, 유럽사, 미국사, 중국사 등 많기도 했던 나라들과 그 나라의 통치자들 중 유독 아쉬움이 많이 남는 왕 한 분이 계셨으니 바로 우리나라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이다. 그래서 조금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기에 많은 책들을 접하였으며 광해군을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 역대 왕 중 탁월한 감각으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폐주로 기록-인식되어야 했던 광해군 대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
광해군은 결론적으로 결국은 실패한 왕이었고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삶은 극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광해군의 삶을 비극적으로 몰아간 17세기의 초반은 역시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한번쯤은 반추해 볼 만한 역사적 교훈들을 무수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本論
1. 출생과 어린시절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혼이고 어머니는 후궁이던 공빈 김씨였다. 소년시절의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 이나 배다른 형제들에 비해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광해군이 태어나던 해인 1575년은 조정에서는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동인, 서인 나뉘게 되어 후에 붕당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임진전쟁이 발발 한 것이다. 임진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역설적이지만 광해군에게는 행운이었다. 피난길을 모색하고 있던 다급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책봉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선조는 왕위에 오른지 벌써 25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세자 책봉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은 왕비 소생의 대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출의 장자였던 임해군 마저도 성품이 너무도 거칠고 부덕하여 도저히 후사가 될 자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자인 광해군을 세우자니 그 역시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학문이 독실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드디어 1592년 5월 20일 선조는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그 순간부터 공식적인 조선의 왕으로 설 때 까지 인정받지 못한 세자로 16년, 승인되지 못한 왕으로 1년, 그렇게 17년 이라는 가시 밭 길을 걸어야만 했다. 광해군의 정통성 즉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그의 위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자의 선정은 물론 조선자체내의 일이었지만 중국황제의 고명을 받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조선국왕으로서의 자격과 권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의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독 광해군에게 있어서 만은 그가 적자도 장자도 아닌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전란이라는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부득이 하게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책봉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세자로서 전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2. 임진전쟁 중 광해군의 치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벌였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백성들에게 조정이 아직도 건재 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광해군의 활동은 임진전쟁 초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유린되었던 조선조정이 비로서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 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를 위한 국사권섭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진전쟁 종전 직후인 1600년 6월 중전 박씨가 사망하였다. 2년 후 선조는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미 왕의 마음은 광해군에게서 멀어지고 있었고 그러던 참에 선조와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14번째만의 처음으로 적통인 영창대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50세였고 인목왕후는 19세였으며 광해군은 28세였다. 광해군이 전반적으로 조정의 인망을 받고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영창 대군의 탄생은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던 그의 지위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영경 등 소북세력은 선조의 뜻을 간파하여 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고자 했다. 신경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차에 갑자기 선조가 죽고 말았다. 광해군은 선조 사망 당일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명의 예부에서는 적자도 아니오, 장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속국인 주제에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장자를 폐하고 장자를 세우는 일을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 왕위에 오른 광해군
어쨋든 선조의 죽음은 광해군에게 역설적으로 복음이었지만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과 이이첨에게도 화려한 부활의 서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해군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은인이었지만 궁극에는 광해군이 몰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기도 하다.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치가 흔들릴 때 정인홍은 목숨을 걸고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이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폐모논의를 제기하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둠으로써 반대파였던 남인과 서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궁극에는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광해군의 왕권은 정인홍과 이이첨의 협력을 받아 어느 정도 높아져 갔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은 더 높은 신권의 확보를 추구했다. 특히 이이첨이 왕권 강화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키워가고 궁극에는 그를 남용한 것이 자신뿐 아니라 정인홍과 광해군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정인홍에게 기대고 싶어했다. 광해군 자신이 전쟁당시 분조를 이끌면서 각지를 전전했듯이 정인홍 역시 의병장이 되어 나이를 무릅쓰고 일본군과 싸워 나갔기 때문이다. 두 사람사이에는 주전파로서 전쟁을 누볐던 공감대와 연대의식이 있었던 것일까...
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정인홍이 올린 상소 한 장은 광해군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가 말이다. 정인홍에게 기대고 싶어했던 광해군의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인홍은 좀처럼 광해군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 였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4. 정치가 광해군
광해군은 연립 정국을 펼쳤다.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자 했을 것이다. 연배가 지긋한 서안과 남인의 원로들이 정승으로서 광해군을 보좌하고 국정의 전반을 챙기는데 주력했다면 상대적으로 연소했던 북인들은 주로 인사권이나 언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왕권의 보위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비록 대북과 소북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의 조짐이 있었지만 적어도 광해군 4년경까지는 정파 사이의 다툼이나 대립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광해군이 연립정국의 중심에 서서 신료들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열세인 남인이나 서인들은 왕에게 기대어 북인들을 견제하려 했고 북인들은 자신들의 우세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민생안정에 힘썼다.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 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부터 전란 중에 흩어져버린 서적들을 수습하고 세로 찍어내는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서적들을 수습하여 바친 사람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한편 명나라에 들어가는 사신들에게도 거금을 들여 책을 구입해 오도록 지시했다.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용비어천가] 와 같은 서적들을 복간해 냈다. 특히 역사책을 구비하는데 기울였던 노력이 각별했다. [고려사], [국조보감] 등을 새로 찍어냈고 사신들 편에 서적을 구입해 오도록 하여 수시로 열람했다. 또한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를 뒤집어쓰고 귀양을 가 있었던 허준을 광해군은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허준이 도성을 출입하고 내의원 의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광해군의 의서에 대한 높은 관심과 허준에 대한 배려 때문에 가능했다. 광해군은 어릴적부터 잔병 치례가 많았고 즉위 이후에도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왕세자 시절 허준에게 치료를 받았다. 광해군은 누구보다 명의 허준의 기예를 아꼈고 질병이 만연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독자적인 의서에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바로 그 같은 배경에서 허준의 작업을 적극 지원했던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후 동양최고의 의서로서 추앙을 받았거니와 광해군 때 그것이 간행되었던 것은 실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가운데 유례가 없을 만큼 궁궐 등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을 새로 짓고 화려하게 꾸미는데 열심이었다.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 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전쟁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광해군은 왜 궁궐을 짓는데 그토록 집착하였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과 관련지어 생각 할 수 있다. 여러 번 거론했듯이 전쟁 중에 겪었던 간난신고, 맏아들이 아닌 상태에서 왕세자가 되었던 콤플렉스, 아버지 선조와의 미묘한 갈등, 적자 영창군의 출생과 즉위를 방해했던 유영경 일파에 공작,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승인을 미루었던 명 조정의 딴죽, 즉위 이후에도 그치지 않던 역모 사건 등등 ,,,이러저러한 경험 등을 통해 그는 소심해졌을 뿐만 아이라 운수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5. 탁월한 외교정책
은을 둘러싼 탐풍이 명나라를 휩쓸고 그 여파가 조선까지 밀려오고 있을 무렵 만주에서는 새로운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진족의 성장, 그 가운데서도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 집단의 성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여진족 왕조인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를 보통 아이신 교로씨 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이 공식적으로 후금이란 국호를 사용한 것은 1616년이었다. 금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표방하는 후금이라는 국호는 한족 왕조인 명에게 기분 나쁜 과거를 연상시키는 국호 자체만으로도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1583년경부터 주변의 여진부족들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1588년까지는 건주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광해군이 세자시절 의주에 머무는 동안 이런 저런 계기로 누르하치 집단의 사정에 대하여 감을 잡게 되었으며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중립외교를 펼친 것이다. 광해군이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에게 취했던 대응책은 기본적으로 기미책 이었다. 기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미는 소를 붙잡아 메는 고삐를 뜻하는데 기미란 본래 중국이 흉노와 같은 주변 오랑캐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 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 하면 잡지 않는 소극적인 현상 유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이야기해 봐야 쇠귀에 경 읽기이므로 잘 구슬려 평화를 유지하자는 심산이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 집단에게 유연하게 대처하여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길 피하려 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후금을 막는 대책으로서 취한 외교적 대응책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보수집을 위한 노력이었다. 정보수집에 대한 광해군의 감각은 참으로 뛰어난 것이었다.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 가운데 명을 비롯한 주변 국가의 동향을 탐지하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은 당연 광해군 일 것이다.
대륙의 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데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대 전란을 겪었던 체험이 그가 이 같은 자세를 가지는데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한 광해군은 후금과 긴장이 고조되면서부터 보안 차원에서 여러 가지 조처들을 강구했다. 조정의 중요한 결정사항을 조보에 실치 못하게 하고 변경지역에 출몰하는 여진인들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했다. 조선에 귀화하여 8도에 흩어져 살던 여진인들의 동향을 관찰하도록 하는 한편 그들이 만주 지역으로 귀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들을 통해 조선의 내부 사정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또한 광해군은 방어 대책도 강구하고 마련하였는데 국방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무기를 제작하고 확보하는 데 기울였던 노력 또한 각별했다. 화포와 화약뿐 아니라 활과 화살, 창, 검 등 재래식무기의 제작과 확보에 기울였던 노력도 각별했다. 군기시와 훈련도감에 일러 활과 화살, 창, 검, 조청등을 날짜별로 할달량을 정해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방어대책을 마련하는데 노심초사했던 광해군의 혜안은 일본에 대한 정책과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에 명은 조선에 국서를 보내 후금을 응징하는데 조선도 참여하라고 강조하고 즉각 원병을 뽑아 대기하라고 요구를 해왔다. 이에 광해군은 출병을 거부하려 애썼다. 명이 보낸 국서를 처음 보았을 때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오랫동안 명과 후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광해군이 명의 징병 요구를 거부하려고 애쓴 이유는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쟁 때문에 망가진 민생의 참상은 신물이 나도록 보았다. 임진전쟁이 끝난지 겨우 20년인데 아직 후유증을 치유해야할 시기였다. 그 와중에 장정들을 뽑고 군량에 대기 위해 세금을 다시 매기고 그것을 수천 리 바깥의 만주까지 수송할 인부도 징발해야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누르하치로부터 보복공격이라도 받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아찔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은 친선관계의 나라들이 아니었다. 명은 조선을 구해준 은혜의 나라였던 것이다. 명은 급기야 요동 경략에 임무를 띠고 온 양호를 통해 수 만명은 징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단 일 만명 이라도 파병 할 것을 거듭 제촉 하였다. 이에 광해군도 더 이상 대세를 막지 못하여 군대를 보내게 되었다. 1618년 7월 광해군은 형조참판 강홍립을 도원수에,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에 임명하여 포수 3500명, 사수 6500명 도합 1만 명을 지원케 하였다. 1619년 2월에 조. 명 연합군 47만과 후금군 6만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국 3월초에 사르호산에서 연합군은 대 패하였고 이때 강홍립의 조선군도 완전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 대로 우리의 부득이한 입장을 강조하면서 은밀히 교섭, 무조건 항복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의 중신들은 강홍립이 적에게 항복하여 신하의 절개를 잃었다하며 그 처자를 치죄 하자고 들고 일어섰다. 강홍립의 항복은 그 자신의 뜻에서가 아니고 출병전 광해군의 은밀한 부탁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광해군은 신료들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얼마 후 누루하치는 조선의 국서를 보내 조선의 출병이 부득이 함을 이해해주었고 광해군도 후금과의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좋은 표현으로 회신을 보냈다. 심지어 1619년 12월에는 후금에 막대한 물자까지 보내 주었다. 이에 누르하치는 강홍립 등 10여명을 제외한 포로 전원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르호산 싸움 직후 계속해서 심양, 요양 등지를 빼앗기면서 본토를 위협 당하게 된 명에서는 광해군의 친후금 정책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사신을 보내 조선을 감독하자는 의견이 팽배해 졌다. 이에 광해군은 병판 이정귀를 명에 보내어 사르호산 에서의 패배로 조선은 더 이상의 힘이 없음을 극력 변명하였다. 1621년에는 심양과 요양이 함락된 후 명의 모문룡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그곳을 근거로 하여 후금에게 함락된 진강, 구룡성 등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조선은 명을 공공연히 돕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고 후금의 불쾌함은 영력 하였다. 이때에도 광해군은 척화론자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정충신을 누르하치에게 보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을 변명하도록 하였다. 적어도 광해군이 치세한 동안에는 명이나 후금 어느쪽과도 정면 충돌은 없었다. 그는 명의 쇠퇴와 후금의 흥기 라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복국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외교는 우리국토의 보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후에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과 함께 한낯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들은 오로지 의리와 명분만을 앞세워 친명, 배금책으로 급선회, 후금으로 하여금 2차에 걸친 침략을 단행하도록 만든것이다.
광해군이 나름의 혜안과 외교수단을 통해 후금과 평화를 유지하고 명의 재징병을 회피하는데 성공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외교는 내장의 연장이라 했다. 광해군이 최초의 징병요구를 회피하려했던 것, 결국 명의 압력과 비변사 신료들의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원병을 보냈던 것, 1619년 조명연합군이 ‘심하전투’에서 패한 것, 이후에도 거듭되었던 명의 재징병 요구를 여러 가지 외교수단을 통해 끝내 회피한 것 등 일련의 사건들이 내정 전반에 심상치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 파장 속에서 인조반정으로 가는 조짐들이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미 광해군의 목소리가 커져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선견지명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신료들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의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아래 각 정파 사이의 역학 구도의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패전 이후 광해군은 대북파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나 있던 서인, 남인, 소북계의 인물들을 다시 불러 들였다. 위기가 닥치면 인재가 아쉬운 법이다. 일단 대북파가 아닌 인물들이 광해군의 새로운 측근으로 부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이이첨에게 식상했던 광해군은 1619년 박승종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또한 이귀를 풀러주고 최명길을 다시 등용했던 것은 광해군의 커다란 실수라고 하겠다. 두 사람 모두 1년 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렵 인조반정의 성공과 관련하여 김개똥이라는 상궁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광해군 왕세자 시절부터 줄 곧 눙에 든 이후 총애를 받았던 여인이다. 반정을 주도한 이귀와 김자점 등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개똥이와 연줄을 맺고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결단을 내리는데 문제가 생겼던 것은 김개똥의 존재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6. 반정. 그리고 폐위
광해군은 1623년 3월 서인 일파가 주도한 무력 쿠데타에 의해 폐위되었다. 광해군 정권을 전복하려는 기도는 1620년경부터 추진되었다. 무신 이서, 신경진 등이 계획을 세운 뒤 김류, 이귀, 최명길 등 문신들을 동조자로 끌어 들였다. 특히 이귀는 반정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모주로서 거사를 약속한 문신들과 무신 신경진, 구굉 등을 연결시키고 각각의 인원에게 역할을 분담시키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반정을 모의한 서인 일파는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하였다. 반정주체들은 3월 12일 새벽 창덕궁을 기습했다. 기습을 받기 직전 경호책임자인 훈련대장 이흥립은 창덕궁을 호위하고 일부 병력을 보내 창의문 바깥을 수색했다. 연서역에 모여있던 반란군은 창의문을 통과해 창덕궁 앞에 도착했다. 이때 훈련대장 이흥립은 반정군을 맞이한다. 그의 투항은 곧 반정의 성공을 알리는 것이자 광해군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약 1천명 정도의 반정군은 별 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창덕궁으로 난입했다. 이귀와 김자점을 체포하려고 모여있던 대소 신료들은 반정군의 함정소리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입직승지 이덕형 등이 다급하게 국왕의 소재를 찾는 와중에 광해군은 후원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창덕궁 담을 너머 피신했다. 젊은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이 앞에서 인도하는 초라한 형국이었다. 병력을 풀어 진압을 꽤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다급한 와중에 사복사가 위치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국신의 친척인 정담수라는 인물을 창덕궁 근처로 보내 사항을 파악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담수가 별다른 소식을 얻지 못한 채 돌아 왔다.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이 동원한 반란군은 대략 1천명 정도 였다. 병력자체가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장단부사 이서가 거느리던 400여명 외에는 오합지졸에 불과 했다. 당시 조선군 가운데 최정 예인 훈련도감 소속의 군사들과 견준다면 거사의 성공은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훈련대장 이흥립을 포섭함으로써 반정 주체들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훈련대장을 자주 갈았던 광해군의 우려가 결국 최악의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튿날 3월 13일, 반정 주체들은 병력을 풀어 광해군의 행방을 쫓았다. 결국 광해군과 그의 아들을 찾아내고 사태를 평정 한 것이다. 이어 덕수궁에 유폐되어있던 인목대비를 뵙고 그녀의 위호를 서궁에서 대비로 회복시킨 뒤 옥새를 넘겨받아 능양군을 즉위 시켰다. 그가 바로 인조인 것이다. 반정인 성공한 다음날부터 숙청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김개똥 역시 이때 처형되기에 이르른다. 정인홍도 합천에서 잡혀 올라와 처형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참으로 끈질겼던 이귀와의 악연이 정인홍의 패배로 비로서 끝나는 순간이었다. 반정 주체들은 평안도 국경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평안도 지방감사 박엽과 의주부윤 정준을 처형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바로 광해군의 의중을 받들어 대외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까지 전격적으로 처형한 것은 분명 명을 의식한 조처였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과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던 명 군 지휘관들은 이들을 처형한 것에 대해 통쾌한 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저항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대북파는 거의 전멸되다 싶이 했다. 그들이 장악했던 권력의 토대가 극히 허약함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북파 관인들은 반정주체들로부터 폐모논의에 참여 정도 등 광해군대의 정치적 행적을 심사받은 뒤 죄질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다. 처형되는 것을 겨우 면한 인물들은 대부분 투옥 되거나 유배되고 죄질이 미약한 자들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북인계 인물 가운데 6품 이상의 관직에 있으면서 폐모논의 등에 관련되었던 신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처벌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남으로서 북인은 이후 정파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반정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북파에 비해 사제 관계로 연결된 학연적 기반이 확실하고 성리학을 배운 학인 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의 견제에 밀리거나 계축옥사 등을 계기로 대북파의 토역 대상이 되어 조정에서 쫓겨남으로서 광해군과 대북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죄악이 바로 폐위의 명분이었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역시 폐모살제를 거론했다. 자신이 광해군에게 어머니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광해군이 대북파의 참소만 믿고 자신의 부친을 참살하고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였다고 질타했다. 따라서 강상 윤리회복을 위해 광해군을 폐위 한다고 선포하였다. 두 번째는 궁궐 건설 사업을 비롯하여 토목공사가 성행했던 것을 거론하였다. 10년이 넘게 계속된 궁궐 공사 때문에 수많은 민가가 헐렸으며 그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사직이 위기에 처했다고 했다. 세 번째로는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함으로서 명을 배신하였다는 것을 거론했다.
선조는 40년 동안 명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광해군은 두 마음을 품고 오랑캐에게 정성을 받쳐 재조지은을 배신하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교서에 나타난 광해군의 죄악이자 폐위명분은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서 위로는 명나라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는 만 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했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보면 어떠한 집단이든지 정변을 일으킬 때는 거창한 명분과 이념을 내세우는 법이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공부했던 사대부들이 일으켰던 인조반정의 경우에도 만찬가지 인 것이다. 반정주체들이 보기에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치적 행태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왕권 강화를 꽤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긴 하였지만 어머니 인목대바를 서궁으로 몰아내고 동생 영창군을 죽였던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궁궐 등을 짓는데 필요한 재원을 끌어대기 위해 미천한 신분의 인간들에게 조도사라는 명칭을 저어 시골로 내려보내 사대부들의 긍지를 훼손했다. 반정주체들이 보기에 광해군 시대는 분명히 말세였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반정이 성공한 이후 인조와 서인들은 새 정권 내부의 안정을 다지는데도 겨를이 없었다.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도 한번의 쿠데타가 성공 할 뻔하였으며,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권세가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했던 사람들은 방정이후에도 그것이 본래의 주인에게 반환되지 않고 반정 공신들에게 불하되는 현실에 실망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광해군대와 똑같다.’ 라는 반정주체들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이 쏟아졌다. 반정의 명분은 과연 제대로 지켜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7. 광해군의 최후
광해군은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윤씨, 그리고 폐 세자와 폐 세자빈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고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 폐 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고 만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폐 세자와 세자빈은 울타리가 쳐진 담 밑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혔는데 그의 손에서는 은덩이와 쌀밥 그리고 황해 감사에게로 가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는 즉시 광해군이 추종 세력들과 모의해서 반정 세력들을 다시 축출하려는 음모로 간주되었고 이에 죽음이 닥쳐옴을 느끼고 폐 세자 부부 스스로가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렇게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1년 반쯤 뒤에 광해군은 부인 윤씨와도 사별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죽음은 유배생활에서 얻은 화병이 원인이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를 차례로 잃은 광해군 자신도 18년의 유배생활 중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끝까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인조의 추종 세력 역시 항상 왕권에의 위협을 이유로 광해군을 죽이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태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고 1636년 청이 침공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했을 때는 그를 죽이라는 밀지까지 내렸지만 경기 수사가 이 말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죽음에서 풀려났으며, 조선이 완전히 청에 복속된 이후에는 아예 멀리 제주도로 보내졌다. 이러한 가운데도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 오히려 기이하다고 할 정도이지만 광해군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더없이 초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신을 감시하며 끌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신은 아랫방에 거처케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를 해도 전혀 이에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그 굴욕을 참고 지냈다고 한다.
광해군은 폐위된 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결국 1641년 7월 1일 제주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부음을 듣고 제주목사 이시방이 들어갔을 때는 계집종이 혼자 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왕이었지만,,,
結論
인조 반정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위리안치 된다. 그러나 연산군은 유배된 후 1년이 못되어 죽고 말지만 광해군은 무려 18년을 더 살면서 67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의 한 많은 인생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반정 세력의 무모함과 이어진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 결과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의 가족도 보고 싶었을 것이고, 전투에서 항복하게 한 강홍립도 매우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 시절에는 임진왜란을 맞아 분조를 만들어 임란 극복에 앞장섰고, 15년간의 재위 기간도 형인 임해군의 죽음, 인목대비의 유폐, 영창대군의 증살, 갖가지 역모 사건에 이은 옥사 등등 파란의 연속이었지만 왕위에서 물러나 유배생활을 한 18년 간 또한 비참하고 불운하기 그지없는 세월이었다.
폐위 이후 광해군은 왕위라고 하는 최고 권력이 얼마나 덧없고 비정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알게됐을 것이다.
청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쉽게 광해군을 사사하지는 못했을 당시의 사정도 있었겠지만.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 동안 그가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 그 스스로 권력의 허망함을 알고 모든 허망한 욕망을 버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반대로 끝까지 복위의 기회를 기다리며 허망한 꿈을 꾸었기 때문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18년의 세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현실 정치에 대한 분노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시각각으로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초연히 생활할 수 있었을까? 그가 파견한 강홍립은 만날 수 있었는지? 무척이나 아꼈던 총신 허균은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런지. 그러나 유폐되어 매일 죽음의 공포 속에서고 천수를 다한 것은 아마도 그가 펼친 정치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초연히 그리고 당당히 모든 조건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결과의 시각으로만 보면 그는 분명 패배자 였다. 왕위에 있으면서도 아무리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왕위를 빼앗긴 일차적 책임은 분명 그 자신에게 지울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몰락은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결국 왕권이 패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조 즉위이래 관행으로 이어져오던 붕당 정치의 흐름 속에서 붕당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이끄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해군이 내정에서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하여 신료들을 조정하는데 성공했더라면 그의 비극적 말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가정은 부질없는 것이다. 광해군과 그의 왕으로서의 행적은 임진전쟁이라는 대 전쟁이 낳은 시대적 산물 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광해군의 외교적 행적 속에서는 오늘의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들이 많다. 우선 명과 후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간파했던 광해군의 냉철함이고, 또한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자세 인 것이다. 주변 국가의 동향을 민감하게 살피고 연구하여 그를 바탕으로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연한 외교를 통하여 얻어진 평화의 시간 동안 자강책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오늘의 우리 역시 주변의 열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그 원만한 관계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시간동안 능력을 길어야 한다. 경제, 문화적 역량, 군사적 잠재력 등에서 주변 열강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있어야 한다. 380년 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조선 15대 왕 광해군에게서 가장 확실히 배워야 할 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