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엔 스산한 찬기운이 느껴질 즈음이었다. 새벽에 서울에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밑도 끝도 없이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로 출장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아니,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가면 2시간 거리인데, 무려 9시간이나 걸리는 모스크바에서 거기로 가라니,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서울과의 소통 수단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전화로 들려온 설명은 대충 이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 외교관 한명이 피살됐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서울에서 급히 출장을 보내려고 하니, 러시아 입국 비자를 받을 수가 없다. 중앙 언론사들이 모두 외무부를 통해 주한러시아 대사관 측에 취재 기자의 러시아 입국 비자 발급을 요청했는데,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린다는 답변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그 쪽으로 가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빠른 길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조차 안되는 상황이 그 때는 그랬다. 꼭 25년 전의 일이다.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25년전에는 여기가 아니었다/사진출처:페이스북
피살된 외교관은 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국가정보원 소속 고 최덕근 영사였다. 1996년 10월 1일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파트 계단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현장에서 숨졌다.
그는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1961년 이후 지금까지 순직한 19명 중 유일하게 실명이 공개된 요원이다. 10년쯤 지난 뒤 국정원을 방문했을 때, 전시된(?) 그의 유품과 최덕근이란 이름 석자를 보는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밀려 올라왔다.
국정원은 1일 고 최덕근 영사의 25주기를 맞아 추모 행사를 열었다고 밝혔다. 추모 행사를 공개한 것 자체만으로도 이례적이다. 국정원은 이날 청사 내 보국탑(순직자 추모탑)을 참배하고 고인이 묻힌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 추모하는 한편, '온라인 추모관'을 열었다고 했다.
온라인 추모관 서두에는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직한 최덕근 선배님,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인의 숭고한 희생은 우리 후배들의 가슴에 지지않는 별로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담겼다.
공식 추모 행사에 앞서 지난달 29일에는 한국행정학회 세미나실에서 국정원 전직들의 모임과 민간 학술단체들이 공동으로 ‘최덕근 영사 순국 25주기 추념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국정원의 추모 행사 공개도 이 학술행사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굳이 구별하자면, 최 영사는 해외에 파견된 정보요원중 '백색요원'이다. 러시아에서 불법적으로 정보수집을 하다 적발되더라도 '빈 협약'에 따라 면책을 보장받는 외교관 신분을 갖고 있었다. '백색요원'과 다른 신분을 지닌 요원을 '흑색요원'이라고 한다. 신분을 위장한 채 주재국 측의 공식적인 감시를 벗어나 폭넓게 정보를 수집하는 요원이다. 상대국의 감시 영역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활동 영역은 넓은 반면에 불법(스파이) 행위가 적발될 경우 처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국정원 순직자 19명은 대부분 흑색요원으로 추정된다.
그날 오후 모스크바 공항에는 모스크바 주재 각 언론사 특파원들이 하나 둘 몰려들었다. 그리고 같은 아에로플로트 항공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갔다.
이튿날 찾은 사건 현장은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 계단을 따라 점점이 떨어진 피의 흔적 같은 게 남아 있었다. 정확히 몇층이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계단 어디쯤에 숨어 있던 괴한이 최 영사를 덮쳤고, 최 영사는 괴한의 공격을 피해 계단을 따라 도망갔지만, 끝내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명한 게 분명했다.
아에로플로트 항공/사진출처:홈페이지
현장에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외교관이, 그것도 국정원 파견 외교관이 왜 이런 허술한 아파트에서 살았을까?'였다. 답은 당사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후에 알려지기로는 최 영사는 현지 근무 경험과 생존 노하우(?)를 내세워 전임자가 살았던 안전한(?) 가옥에서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 과한 자신감 탓에 자신에게 닥쳐온 비극을 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후반께 모스크바에 주재했던 한인들은 대부분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다보니, 분에 넘치는 아파트를 구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러시아는 치안이 불안했다.
게다가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과도 아주 가까워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언제든지 신변을 위협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실제로 사건이 나기 두해 전, 탈북벌목공 취재차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을 때, 총영사관 측에서 몇 번이나 "이곳은 북한도 가깝고 위험한 곳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지금 입은 옷이 너무 튀니, 여기 사람들처럼 검은색 계열의 옷으로 갈아 입어 '한국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건 현장에서는 최 영사의 정보 추적 활동에 관한 소문이 조금씩 돌았다. 기본적으로 그가 맡은 임무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이뤄지는 북한의 불법 활동을 추적하는 일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무턱대고 현지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최 영사 피살 사건 발생 당시 남북관계는 거의 최악이었다. 강원도에서는 북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된 북한 잠수정에 타고 있던 무장공비들이 산악지대를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려는 과정에서 보름째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는 상태였다. 북한이 연일 방송을 통해 ‘백배, 천배 보복’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최 영사 피살 사건을 북한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의 달러화 위조와 마약 밀매 조직을 추적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은 나중에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확인됐다. 현장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국내에서 대책반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고, 총영사관 측의 브리핑도 시작됐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거의 없었다. 요즘처럼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시기도 아니어서, 한인 사회를 두루 탐문해 최 영사에 관한 이야기 거리를 얻기도 힘들었다.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듯이 총영사관과 현장을 뱅뱅 도는 게 고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바트 거리/바이러 자료 사진
쓸 거리를 찾아 머리를 싸매던 어느날,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D일보가 죽은 최 영사의 옷에서 나온 메모 쪽지를 확인했고, 메모 내용으로 1면 톱 기사를 썼다는 다소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보 당국에서는 그 보도 내용을 사실로 확인해줬다고 했다.
발견된 메모에는 최 영사가 100달러짜리 위조 지폐와 마약 밀매 등 북한의 불법 행위를 추적한 것으로 짐작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 정보가 우리 측에 넘어갈 경우, 위험에 빠질 누군가가 최 영사를 비밀리에 살해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이 기사의 큰 줄거리였다. 물론, 누군가는 특정되지 않았다.
그후 블라디보스토크 대책반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범인은 '북한 정보원'이라느니, '러시아 정보원'이라느니, '이중스파이'이라느니, 확인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국정원 업무나 북한 관련 문제는 현지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누가 어떤 기사를 본사로 송고하든, 서울에서 팩트를 확인해 주지 않는 한, 현지 정황으로 엮은 작문성 특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D일보 기사는 서울에서 팩트로 확인됐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취재가 가능했을까?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다행히 기사를 쓴 이는 모스크바에서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온 D일보 특파원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큰 사건을 담당하는 검찰 출입기자가 어느날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와 그 기사를 쓴 뒤 다시 서울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D일보 특파원은 서울로 튄(?) 기자가 확보했다는 메모 내용을 동료들에게 풀(공유)해줬다. 그 메모를 바탕으로 현장 분위기를 섞어 기사를 작성했던 기억은 아직도 씁쓸하다.
현자에서 동료 기자들이 허탈해 한 경험은 또 있다. 함께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를 탄 모 방송사 특파원은, 우리가 모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할 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OOO기자입니다'라는 첫 리포터가 국내에서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서울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경쟁 방송사 특파원들은 "그OO는 기자도 아니다"고 했고, 일부는 "서울에서 (리포트) 하라는 데 어쩌겠느냐?"고 애써 이해해 주기도 했다.
최 영사의 시신은 서둘러 서울로 운구됐고, 부검 결과는 메모에서 나온 정황과 비슷했다. 그는 둔기로 머리를 8차례 가격당했고, 주사바늘로 추정되는 흉기에 옆구리를 찔린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을 통해 북한 공작원이 주로 사용하는 독극물인 '네오스티그민'을 찾아냈다. 우리 정보당국이 지금도 최 영사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는 가장 큰 이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 영사 사건으로 만난 한 국정원 관계자가 얼마 뒤 주모스크바 대사관의 고위급 외교관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다. "이 박사, 나중에 통일되면 그 놈 잡으러 같이 갑시다"라고.
주모스크바 대사관, 25년전에는 이 곳이 아니었다/사진출처:국토안전관리원
그를 살해한 범인은 최 영사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계속 소통해온 중간 정보원의 짓인지, 북한 공작원의 짓인지, 북한 공작원이 러시아 킬러를 사서 저지른 짓인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그 진실은 앞으로도 쉽사리 규명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정보당국은 최 영사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을 뿐, 현재까지 용의자는 찾거나 특정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살인사건의 공소시효(15년)에 따라 2011년 수사가 중단될 예정이었지만, 시효를 중단해 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 검찰은 공소시효를 중단했다. 용의자가 검거되거나 관련 증거가 확보되면 수사 재개가 가능하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관계자는 "우리 당국은 그간 최덕근 영사 피살 사건과 관련한 여러 증거와 정보를 러시아 정보당국에 제공하는 등 진범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사건 취재 출장 지시를 받고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 지인은 사건 발생 직후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외교관과 함께 피살 현장으로 가 현지 경찰에게 최 영사의 신원을 확인해 줬다고 했다. 최 영사의 시신을 가장 처음 본 두어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최 영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물품들을 현지 경찰과 함께 일일이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고 했다. 바지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소지품은 OOO, 윗 저고리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XXX 하는 식으로..
"혹시 주머니에서 수첩같은 것은 없었냐?"고 물었다. 그 지인은 "그런 건 없었다"고 두번 세번 이야기했다. 상식적으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정보요원이 귀가하면서 중요한 정보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을 리가 없다는 게 합리적인 추정이다. 그런데 메모가 나왔단다. D일보가 확인한 그 메모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 기자는 왜 서둘러 서울로 떠났을까? 그 답을 개인적으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