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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생각 /정임표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 집은 삼간도 못되는 나지막한 초가집이었다. 본체는 방 하나 부엌 하나가 전부였고 삽짝 문 옆에는 디딜방아가 있는 작은 헛간이 있었다. 식구도 어머니 아버지 나, 돌 지난 첫째동생 그렇게 살았다. 마당 한 편에는 감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햇살이 따스한 날 뜰에 앉아 감나무를 바라보면 졸음에 빠져드는 그런 집이었다. 그 집은 아주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동네 꼬마들과 때기(종이로 접은 딱지)치기와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기억과 함께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왜 그 기억이 남아 있는지 나 자신도 참으로 의아하다.
그 시절은 때기 만들 종이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웠다. 간혹 돌가리(시멘트의 경상도식 표현) 포대 같은 두텁고 누런 종이를 구하면 어른들은 떨어진 장판을 수리하는데 쓰려고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아이들은 어른 들이 피우고 버린 담배 갑이나 담배 속 은박지 같은 것으로 때기를 만들었다. 학교 다니는 형을 둔 꼬마들은 형이 다 쓰고 버린 헌 공책으로 때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형이 없던 나는 헌 공책조차 얻을 곳이 없었다. 풀이 죽어 지내는데 아버지께서 돌가리 포대로 나에게 커다란 때기를 만들어 주셨다. 큰 때기를 땅에다 탁 치면 때기가 일으키는 바람에 작은 때기들이 햇딱햇딱 뒤집어지니 다른 아이들은 도무지 나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래인 친구가 6학년 쯤 되는 제 형을 데려와 그 큰 때기를 조그마한 때기로 따먹어 버렸다. 왼 발끝을 때기 모서리에 대고는 바람이 때기 밑으로 잘 들어가게 모서리를 살짝 밟아 빈틈을 만든 다음 윗저고리의 단추를 다 열어 제친 후 펄러덩 하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팔이 빠져라하고 작은 때기를 내려치니 그 크고 무거운 때기가 들썩 일어나더니 홀라당 뒤집어져 버렸다. 내 친구는 환호성을 지르며 돌가리 포대로 만든 내 때기를 가져가 버렸다. 아, 그때 그 절망감이라니. 무어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억울하게 당한 기분, 망연자실 바로 그 것이었다. 친구 녀석은 내 때기를 들고 다니며 골목대장이 되었지만 형이 없던 나는 두 번 다시 그 때기를 찾아 올 수가 없었다.
때기 놀이가 심심해지면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다. 덕수네 집 옆에는 큰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고 그 소나무 곁에는 재여 놓은 보릿짚 더미가 누런빛을 발하며 해거름의 동산을 밝히고 있었다. 보릿짚은 속이 비어 있어 빗물이 쉬 스며들고 잘 썩는다. 땔감이 귀하던 시절인지라 보리 짚더미를 건드리는 날에는 된통 혼이 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 숨지 않는 곳이었다. 그 한쪽이 헤쳐져 있고 손을 댄 흔적이 보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 외고는 백을 다 세었다고 우기는 꾀 많은 녀석이 숨은 게 틀림없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짚더미를 들어내니 아이는 없고 그 속에는 붉은 사과들이 가득하였다. 나는 엉겁결에 한 알을 집어 들고는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도 못한 체 상기된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거짓부렁인 줄 알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데 한 녀석이 뛰어 왔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이거 내꺼다! 내가 맡았다!”하고는 윗도리를 바지춤에 끼워 묶은 후 그 속으로 사과를 밀어 넣고서는 아랫배를 감싸 안고 냅다 달아났다. 나도 사과 한 알을 손에 쥔 채로 집으로 도망하여 벽보 뒤에 숨었다. 벽보가 농(籠)을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대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을 나이임에도 그 사과를 먹기 위해서는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가 보았다.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마당에서 나락을 말리시던 어머니께서 수상한 기미를 눈치 채시고는 방으로 따라 들어 왔다. 훔친 줄 안 어머니는 등 뒤로 감춘 사과를 받아들고는 보릿짚 더미로 갔다. 이미 친구 어머니가 소쿠리로 가져가고 빈 짚더미만 남아 있었다.
그 후 들은 얘기로는 마을의 처녀 총각들이 서리를 하여 감춰둔 것이라 했다. 그 시절은 놀 곳 없는 젊은이들이 밤이면 뒷동산에 모여 수박서리, 사과서리 등을 하며 놀았다. 인심이 후하던 시절이라 닭서리까지 하다 들켜도 그냥 쫒아버리기만 했을 뿐 벌을 주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때의 어른들은 ‘아이들은 놀면서 자란다.’ 것을 알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더러 때기 치기처럼 망연자실한 경험도 했었고 숨겨진 사과더미 같은 것을 보기도 하였다. 나도 꾀를 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속 보이는 짓 같아서 그러질 못했다. 어릴 때 살던 곳을 지나면 옛 생각이 나지만 그 시절을 회상할 흔적은 하나도 없는데 뒷동산의 소나무만이 옛 모습 그대로다.
방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 안겨오는 오두막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팔을 베고 단잠을 자고 싶다. 꿈속에서나마 기죽어 있는 아들을 위해 돌가리 포대로 커다란 때기를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큰마음과 사과서리를 모른 체한 과수원집 주인의 넉넉한 인심 같은 것을 만나고 싶다.(2008. 3. 19)
나의 이중성/정임표
-마음을 감시하라
초등학교시절 어느 날의 하학 길, 손 씨 어른의 과수원에는 빨갛게 사과가 익어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마을 아이가 사과를 따먹자고 제안을 하였다. 가슴이 졸여 못하겠다고 하니 ‘망만 보라’고 하였다. 과수원 울타리는 늘 허술하였고 사과는 그 전날에도, 또 그 전날에도 그날처럼 탐스럽게 익어 있었다. 그것은 엄연히 남의 것이었고 내가 취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정말 우연히, 동행하던 아이가 사과서리를 제안하자 내 눈길은 사과가 아닌 탱자나무 울타리의 개구멍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사과를 따는 일에만 팔려 버린 것은 아니었다. 사과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키는 날이면 그 창피를 어찌 감당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전교 어린이 회장이었다. 주인은 대번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회장이면 모범이 되어야 할 놈이 이런 행동을 하다니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나쁜 놈’이라며 선생님께 가자고 내 손목을 잡아 끌 것이다. ‘네 부모들은 뭐하는 사람이냐’고 하면서 부모님까지 욕을 보일지 모른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사과를 훔치는 것이 옳지 못한 행동이니 중지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 게 아니라 주인에게 들킨 후에 일어날 난감한 상황만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어린 녀석이 어디서 그런 순발력이 나왔는지 난감해 하는 나를 보더니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망만 보라’는 것이었다.
“망만 보라”
참으로 기막힌 유혹이었다. 너에게 책임을 지우지는 않을 테니 모른 채 하고 있어라. 그러면 그 대가로 사과를 나눠 주겠다는 제안이 아닌가. 주인에게 들켰을 때, 잽싸게 달아날 수 있고 그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집으로 올수 있고 또 설혹 그가 나와 함께 사과서리를 했다고 고자질을 하더라도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 땔 수까지 있지 않는가. 벌은 녀석 혼자 받을 것이고, 또 주인에게 풀려난 녀석이 혼자 달아난 나의 비겁함을 탓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사과서리를 못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되래 큰 소리까지 칠 수가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망만 보라는 제안을 받고 보니 내가 망을 보던, 그냥 풀밭에 앉아 하늘의 구름만 바라보던, 나의 행위는 그가 사과를 훔치는 일과는 전혀 별개의 일처럼 느껴졌다. 책보를 벗어 내게 맡기고 그 아이는 살금살금 울타리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숨어서 기다리는 내 가슴은 사과를 따러간 아이보다 더 콩닥거렸다. 누가 오는지 연신 과수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 아이가 잘 익은 사과를 하나 따 왔다. 둘은 풀밭에 숨어서 사과를 비틀며 반으로 자르려고 하였지만 손보다 훨씬 더 큰 사과를 쪼갤 수가 없었다. 위험한 일을 그가 해냈으니 나는 사과라도 둘로 나누어야 반쪽이라도 먹을 체면이 서는 것이었다. 책보를 풀고 연필 깎는 칼을 꺼냈다. 면도날처럼 얇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사과 꼭지 한 가운데다 날을 박았다. 깊게 쑤셔 넣었다. 그었다. 사과에서 튕겨 나온 칼날이 사과를 쥔 왼 손가락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뼈가 허옇게 보였다. 면도날에 깊이 베이면 그 순간에는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오른 손의 엄지로 꽉 누른 다음 보드라운 흙을 뿌리고 러닝셔츠 자락을 찢어 감싸 매었다. 묶어진 셔츠 위로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나의 왼손 중지에 기다랗게 칼로 베인 흉터는 그때 남은 흔적이다. 그 흔적은 자신 보다 생각이 부족한 아이를 나쁜 짓에 앞장세운 내 비겁함, 알량한 체면 뒤로 더러운 욕심을 숨긴 나의 교활 함, 들키지만 않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나의 사악함을 징계한 벌이었다. 그리고 유혹 앞에서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경고였다.
사과서리 그것이 큰 범죄였다면 어리바리하다가 공범이 되는 것이다. 사과를 먹고 싶다는 마음과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망을 보라”는 핑계 한마디가 자신을 숨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여 범죄행위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다. 사과도 먹을 수 있고 빠져나갈 구멍도 있고……. 남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저질러 보고 싶은 그 애매한 인간의 이중성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다.
흉터를 볼 때마다 그때의 내 마음이 떠오른다. 고위층 인사들이 어린 부하들이 훔쳐오는 사과상자를 상납 받았다가 들통이 나면 ‘맹세코 그런 일이 없었다’며 잡아 때는 것을 볼 때는 애나 어른이나 하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유혹을 떨쳐 낼 수 있는 힘은 학벌이나 지위나 지식의 다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범죄형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혹 앞에서 누가 보는지 아닌지를 먼저 살피는 인간은 누구나가 범죄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는 연일 강호순의 기사로 떠들썩하다. 강호순. 이름도 순하고 얼굴도 착하게 생겼다. 누군가가 그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눈, 자신의 이중성을 살피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눈이 그의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그가 일찍 알았더라면 범죄의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진솔해지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골목마다 도로마다 내 영혼을 누군가가 대신 감시하는 카메라를 다는데 찬성한다. 형사정책 연구원은 한해에 일천 건이 넘는 살인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과서리 하듯이-(2009. 2.9)
* 강호순(1970년~ )은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으로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7명의 부녀자들을 연쇄 살인한 사건의 피의자다. (2009.1.31)
변검(變臉)/정임표
순식간에 얼굴이 바뀐다. 고개를 돌리거나 소매 폭을 휘저을 때마다 아무도 눈치체지 못하게 얼굴이 바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십 번도 더 바뀐다. 마술 같은 중국의 기예 “변검”이다.
변검을 보면 처음에는 신출귀몰하는 그 기술에 놀라고 나중에는 양파 껍질처럼 벗겨 나가는 가면이 곧 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또 한 번 놀란다.
수필집을 내려고 원고를 정리하여 평소 존경하던 K 선생께 보여 드렸더니 첫 페이지에 적어 놓은 내 이력위에 사정없이 줄을 그어버리셨다. 그리고는 어느 문예지에 무슨 작품으로 등단했다는 한 줄 만 남겨서 돌려 주셨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한때 정치를 하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부패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객기 때문이었다. 명함에다 미소를 띤 사진을 인쇄하고 그 뒤에다가 내가 활동해온 이력들을 줄줄이 적어 넣었다. 그 명함을 받은 사람은 열이면 열 모두가 첫 대면에 긴장을 하고 나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명함 뒤에 세긴 직함들은 대개가 감투만 쓴 것들이었다. 하루 24시간, 그 짧은 시간에 한 개인이 그렇게 많은 직책을 지니고 모든 역할에 충실하였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로 세상을 현혹하려는 그 마음이 권력을 잡고나면 부패의 씨앗이 된다. K 선생은 아직도 허명을 쫓고 있는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다.
삼국지와 성경을 다섯 번 이상 읽은 사람은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 나는 세상 이치에 통달하고 싶어 이 두 책에 몰두 한 적이 있었다. 솔로몬이 부귀가 아닌 지혜를 구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교회에 가서 나에게도 돈 보다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나는 일찍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변검의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성서와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등장인물들, 그 개성과 개성이 만들어 내는 삶과 트릭, 가면과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남 앞에 설 때는 고난을 극복한 의지의 인물인양 자신을 미화 한다.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다가 갈 때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한껏 여유가 있는 신사인양 접근한다. 술값을 치룰 때는 남보다 먼저 낼 것처럼 카운터로 달려간다. 자선이라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몰라야 한다며 겸손한 사람인양 떠든다. 제사보다 젯밥에 욕심이 있었으면서도 늘 초연한 체하였다. 열거 하려면 끝도 없는 가면을 만들어 썼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가면 만은 결코 만들지 못했다. 약한 자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는 가면,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가면, 선으로 위장한 악의 씨를 뿌리는 가면만은 쓸 수가 없었다. 세상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내 눈을 차마 속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필가로 등단한지 두어 해가 지났다. 지금까지 걸어 온 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이다.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수필로 등단한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인으로 등단한 분이 뒤 이어 다른 장르의 신인상을 받기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가면을 하나씩 벗어내고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가는 것인지, 새로운 가면을 덧붙여 쓰면서 더욱 노련하게 세상에 적응해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변검을 한다. 변검을 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청개구리는 흙색으로, 자벌레는 나뭇가지로, 거미 줄 속의 거미는 죽은 듯이 변검을 한다. 사자는 갈기를 세우면서 변검을 하고, 개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변검을 한다. 강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변검을 한다.
변검의 기예는 맨얼굴에 그린 가면이 나오면 끝이 난다고 한다. 더 이상 벗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참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맨 얼굴에도 가면을 그렸을까. 솔로몬의 지혜는 얻지 못했지만 남은 세월동안 중국의 기예조차도 미치지 못한 맨 얼굴을 드러내는 변검만은 꼭 한번 해보고 싶다.(200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