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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입니다(행 15:12-29)
율법이냐 은혜냐의 문제는 신앙 안에서 생각해보면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문제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나에게 값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난 것은 부모님의 사랑의 결실이지 자녀가 선택하거나 노력하거나 힘쓴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구원이 그렇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무지와 죄성때문에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정리해봅니다.
1)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이니 범죄하지 말라고 주셨습니다.
롬 2:12.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가운데 첫째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임의대로 기준을 삼거나 행동하는 것을 막으시려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누구나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불법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게 하셨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될 일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는 개인의 생각이나, 어느 한 나라의 관습이나, 전통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오직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율법만 있을 뿐입니다.
2)선한 삶의 기준을 삼고 살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선한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선한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신 생활 규범입니다.
3)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절대적 기준을 알게 하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았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정말 중요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서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인간이 이것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 나의 공로, 나의 선행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성이 지배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기가 강화되는 것입니다.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하지 못합니다. 자기 중심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한 것처럼 대적하고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고 자기 연약함과 자기 부족을 감춥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세상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주인노릇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부입니다. 자기가 만족해야 최고의 축복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바로 율법주의의 유혹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역사에서도 이러한 율법주의 모습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천주교회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구제사업을 하고 자선사업을 하는 데 다 인간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치 않습니다. 구제사업도 하고 자선사업도 하지만 본질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빚진 자의 자세로 이웃을 섬깁니다.
여기에 자기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요즘 묵상하는 솔로몬왕이 성전을 완공한 이후에 그의 고백과 찬송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주의 종입니다. 주의 뜻앞에 순종한 것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갈등은 이러한 사탄의 무서운 흉계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을 앞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이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맞는 말 같습니다. 율법주의 입장에서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체험했기에 이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여서 생명을 살리려고 바울과 바나바가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선교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안에는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도 필요하지만 모세의 율법을 동시에 지킴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냐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논쟁이 지나서 다툼까지 되었고, 이 문제는 안디옥교회에서는 해결을 볼 수가 없어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교회에까지 이 문제가 이송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내가 좀 더 뭔가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든지, 선행을 해야 한다든지, 금식을 해야 한다든지, 이런 율법적인 행위들을 해야만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도 이 문제로 상당히 심각한 논쟁을 하였습니다.
예수믿는 것도 좋지만 할례를 행해야 한다,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거치고 사도 베드로는 일어나서 아주 분명하게 자기가 체험한 사역을 통해 깨달은 말씀을 주장했습니다.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어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엡 2:8,9)이 그 해답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입니다.
1. 바나바와 바울의 증언(12절)
그 다음에 바나바와 바울이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하신 일을 간증을 합니다. 이것이 12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안디옥 교회의 목회를 통해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분명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이 되어 주셨고,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질 수가 있을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할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셨지만 전혀 제사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은 자기가 믿는 방법이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의 경험, 자기의 지식, 자기의 방법 안에 하나님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태도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과 경험밖에 하나님이 계실 때에 그들은 수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경험과 생각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에 가두어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이 있은 다음에 예루살렘회의의 총회장격인 야고보사도가 결론을 맺습니다.
2. 야고보사도의 결론(13-21절)
13-15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여기서 시므온은 베드로의 옛이름입니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로는 시므온이 체험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할 이방인을 부르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할례도 받지 않았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임하고 기적이 임한 이 사건은 구약에 없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직접 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전통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받은 일은 사람이 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과 약속대로 그 약속의 응답과 성취로서 지금 처음으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이 일은 무작정, 예고없이 하나님이 생각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도 바나바와 바울이 말한 것도 그들이 체험한 실재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결정할 때 개인의 경험과 환상을 가지고 결정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말씀과 예언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사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아모스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이 바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이루어졌던 현장의 사건과 베드로가 경험한 모든 내용과 놀랍게도 모두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구약에 있는 말씀과 지금의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구약 아모스서에 나타난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16-18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왜 다윗의 위를 폐하시지 않으시고 영영히 두게 하십니까? 그것은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를 나오게 하시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오래 전에 예언한 것입니다. 아모스서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야고보는 이제 교회를 대표해서 두 가지 일을 결정합니다.
19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1)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 왔던 율법이나 할례때문에 지금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전통과 관습으로 하나님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쉽습니다.
율법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사도역시 네 조상도 너도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를 이방인에게 메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굉장한 결론입니다. 은혜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받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렸구나, 이것을 깨닫는 겁니다. 내 주장대로 되는구나가 아니고 내 생각이 모두 잘못되었구나, 내 생각들이 모두 어리석었구나, 이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2)야고보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다 끝나느냐?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0-21절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술담배라는 말로 생각해 봅시다. 술담배를 끊어야만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술담배를 먹어도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먹어도 괜찮습니다. 술담배를 끊어야만 구원이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나는 담배를 피우는데 합니다. 그래도 구원이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내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아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구원과 술과 담배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까? 술과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술과 담배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우상숭배하고 그렇게 세상적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행동이 바뀌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이제 구원을 받고 보니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거지로 살았을 때는 거지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깡통 들고 돌아다니는 것. 그러나 왕이 됐을 때는 왕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으로 살 때는 도둑의 문화가 있습니다. 사기꾼의 문화가 있습니다. 깡패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니 깡패의 문화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고 술담배의 문화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받은 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상 숭배에 사용되었던 제물이나 음식이나 그런 물건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하면 옛날에 섬기던 우상 문화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문화 속에 들어가면 다시 우상 숭배로 돌아가기 쉽기때문에 영적으로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섬기던 우상 숭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둘째, 음행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있는 곳은 꼭 음행이 있습니다. 음행을 하게 되면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세째는 목메어 죽은 것과 피를 먹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다 금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두 사람을 더 선택해서 안디옥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3. 교회의 결의(22-29절)
22-23절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25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고는 27절을 보니까 편지를 보낼 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전하게 됩니다. 편지와 똑같은 말을 하는 데 28절,29절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잘되리라' 이것을 순종하면 교회가 평안하게 될 것이다. 하고 그 부분을 마치게 됩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거나 할례를 행하라고 하지 말라.
두 번째는 그렇지만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있다. 우상 숭배의 생활을 벗어버려라. 음행을 버려라. 정결한 생활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참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28절말씀이 중요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많은 논쟁 끝에 드디어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할 때에 한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이 결론은 야고보가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토론해서 만장일치로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한 것입니까?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가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지금 여러분이 어떤 일에 결정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그것이 누구의 생각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생각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그들이 교회안에서 논쟁을 했습니다.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결론을 내릴 때에 '나만 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우리가 함께 결정을 한 것이다'라는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를 하지만 만약에 성령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우리의 결정이 성령님의 결정입니까? 아니면 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결정입니까? 베드로전서 4:11에 아주 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성령님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 성령님의 생각이 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내 인격이 되도록 말씀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안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말씀대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말씀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는 성령충만하니까 그 사람의 속에 성령님의 생각이 끊임없이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말을 들을거냐? 성경 많이 읽는 사람의 말을 들으십시오. 어떤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일거냐? 기도 많이하는 사람. 나이가 어리고 많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압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깨닫고나면 그 은혜가운데 감사하고 그 은혜가운데 겸손하고 그 은혜가운데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