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레 7-20; 루카 17,20-25
+ 오소서 성령님
지금 수능 시험이 한창인데요, 수험생들은 얼마나 지금 긴장하며 시험을 치르고 있을까요? 또 부모님들도 얼마나 함께 긴장하고 계실까요? 수험생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오네시모스를 필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이 ‘쓸모 있는’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에, 바오로 사도의 아재 개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도 아재 개그를 하나 해 보자면, 필레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핀 레몬입니다.
오네시모스는 필레몬의 도망친 종이었는데,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이제 종에서 해방시켜주라는 말씀은 하지 않지만, 오네시모스를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내 심장과 같은 그”,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으로 받을 거야?”라고 돌려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갈등 상황에 있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바오로 사도의 온화하고 따뜻한 말씀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것이 첫 번째 부분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우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고 말씀하셨는데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하느님 나라가 도대체 언제 오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실제적인 다스리심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들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는데요, 당신께 감사를 드리지 않아서 서운해서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질문하신 것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이 초점인지, ‘병을 낫게 해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가 초점인지 예수님은 묻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만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에 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두 번째 차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요,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가 첫 번째 차원이라면, 이 하느님 나라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인해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가 두 번째 차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요, “사람들이, ‘보라, 저기에 계시다,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고 하신 후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번개와 같은 기상 현상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의 상징(탈출 24,15; 시편 97,2-4; 에제 1,4.13 등)으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되었던 일흔 두 제자가 돌아왔을 때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아스트라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눈부시게 차려입은 천사들이 나타나 여인들에게 말하는데, 여기서 ‘눈부시게’(아스트랖토우세)라는 말과 오늘 복음의 ‘번개가 치면’(아스트라페 아스트랖토우사)의 어근이 같습니다. (강론 때는 잘못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의 날에 대한 말씀이면서, 그 종말이 당신의 부활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내 마음 안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릴 능력이 없기에 ‘주님’이신 하느님께 다스려 달라고 내 마음을 내어 드려야 하고, 구체적으로는 성경 말씀을 반복하거나 묵주 기도를 반복하면서 나의 주인께 내 마음을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에 이룩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불의가 정당화되고 힘 있는 사람이 부정을 저질러도 눈감아 주는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하느님 나라에만 몰입한 나머지 두 번째 하느님 나라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마음 안의 하느님 나라는 도피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내 안에, 그리고 이 세상 안에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무덤의 천사, 밀레쉐바 수도원, 세르비아, 13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