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대로 됩니다 (잠 14:1-3)
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이 시간에 “믿음대로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장 두려운 말 중에 하나가 “믿음대로 되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아름답다면 다행이지만 잘못되어 있다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흥망도 자기에게서 납니다.
1절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한 가정의 흥망이 한 여인에게 달려 있음을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식구들을 잘 보살피는 것은 물론 가계를 풍성하게 하고 번영하게 하며 가문을 영예롭게 일으지키만 미련한 여인은 부도덕하고 미련하게 행하여 가정의 파탄을 초래한다는 교훈입니다.
여성교육이 중요합니다. 자녀를 누가 기릅니까? 여성이 기릅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칩니다. 가족의 식사를 누가 장만합니까? 여성이 합니다. 가족의 건강도 여인의 손에 달렸습니다. 가정 화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에 남자들은 주는 음식이나 먹고 있지만 활동은 여자가 하는데 여자들 끼리 문제가 생기면 가족이 풍비박산이 납니다. 가족의 흥망이 자기에게 달렸다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흥망성쇠가 자기 믿음에 달렸습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마13:12에서 ‘마태효과’(Matthew effect)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의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란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욱 가난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한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물질의 대소가 아니라 믿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부자여야 부자가 되고 가난하면 가난해진다는 것은 현상일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아닙니다. 꼭 그렇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인드냐를 말씀한 것입니다. 부자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부자가 되고 가난한 마인드를 가지면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경제인들이 가장 잘 써먹고 있습니다. 흥하느냐? 망하느냐? 이런 것들이 자기 믿음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2. 신앙 불신앙도 자기에게서 납니다.
2절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한 가지를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을 경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것도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을 고쳐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입니다. 왜 하필 시각장애인에게 믿음을 말씀하셨을까? 여기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따라서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도 좋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각을 고치는 것입니다.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실낙원』을 쓴 영국의 작가 존 밀턴은 44세에 실명을 하였는데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주께서 내 육안을 어둡게 하심으로 주님만을 볼 수 있는 심안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는 이렇게 시각이 달랐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었고 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럼 믿음이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정직이라도 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헛소리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가 생깁니다. 다른 종교인들의 글을 읽다보면 얼마나 논리를 비약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주가 존재한다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고요. 왜 존재하는가? 존재를 존재케 하는 진정한 존재는 무엇인가? 이것이 정직한 철학의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종교인들이 한다는 사람들이 철학자들보다 탐구정신이 정직하지 않아요.
철학자들은 최소한 정직했습니다. 비약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인은 나를 존재케 하신 진정한 존재는 누구인가 그렇게 나갔습니다. 참된 자기를 찾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바로 이 참 자기를 존재케 한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 누구인가?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찾는 문제도 그래요. 자기 찾아야 무엇합니까? 자기를 찾아도 자기는 결국 자기 일뿐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신비해도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물일 뿐입니다. 믿음 없으면 장차는 지옥에 떨어질 불쌍한 영혼일 뿐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인간은 초능력적인 자기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영혼이 자유를 느끼게 되고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하여 방송보다 먼저 알아서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놀랍게 지으셨어요.
도에 깊이 몰입하게 되면 호흡이 멈춰진다든지 콤마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이 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게 됩니다. 이 때 여러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걸 흔히 도통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경험은 도사 말고도 중환자들도 합니다. 중환자들이 하늘을 나는 경험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통했다 해도 그것은 자신 혹은 악령을 경험할 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지옥에 떨어질 영혼에 불과할 뿐입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를 있게 한 진정한 원인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 인간의 허무와 유한을 발견했다면 솔로몬의 전도서와 같이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은 스스로 의로울 수 없고 오직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달리 말해 진정 정직한 자만이 구세주 앞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3. 칭찬도 징계도 자기에게서 납니다.
3절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속담에 고운정도 자기에게서 나고 미운정도 자기에게서 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칭찬을 받아도 매를 맞아도 스스로 자청하는 면이 크다는 것입니다. 각자 믿음대로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매 맞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식도 실수도 허물도 죄악도 용납될 수 있지만 교만만큼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일컬어 자기PR시대라고 합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며 글로벌 경쟁력 시대에 겸손은 성장의 장애물이며 힘을 매개로 한 문화 속에서 지배의 힘만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서 받는 이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고 있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무시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이 교만 때문에 유대인이 나를 잃고 세계에 흩어져 방랑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교만은 선민의식입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들의 의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교만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믿음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좋은 믿음을 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구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더욱 흥하고 정직하고 하나님께 사랑과 칭찬을 받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