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7막58장(7부-3)
라이딩 코스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출발지에서 대청댐을 향해 강경쪽으로 가던중 차량이 있는곳으로 가려며는 어쩔수 없이 반환점을 돌아 다시 오던길로 돌아가야 하였다.
금강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길은 대중교통 수단이 전무 하다보니 다시 오던길을 가는 일이 반복되니 진도가 상당히 느렸다.
20km를 전진하고 다시 20km를 돌아 자동차 있는데로 돌아와야 하니 왕복 40km를 달려야 하였다.
서울에서 인천까지가 24km이니 인천을 갔다온것이나 매일반 이였다.
나는 그렇게 논산을 지나 부여 낙화암까지 도달하였다.
부여는 말로만 듣고 처음 와본것이다.
오일장이 들었는지 읍내는 인산 인해였고 금강으로 이어지는 관광명소에는 나룻배가 떠다녔고 요란스러운 음악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였다.
부여 축제가 열렸는데 사람들은 강가에서 축제를 즐기며 풍요로운 모습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것 같았다.
나는 두리번 거리며 엿장수의 가위를 쳐다보았고 품바옷을 입은 각설이 타령을 보게 되였다.
부여의 삼천궁녀는 온데간데 없고 축제같은 풍소소리가 금강에 울려퍼지니 이곳이 옛백제의 수도인 부여같은 운치가 더해졌다.
아름다운 강산이여
황산벌의 계백장군의 위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금강을 따라 오르던중 또다시 도시를 맞게 된다.
"공주"였다.
도시 이름도 누가 명명하였는지 예뻤다.
임금의 딸을 공주라 하거늘..
어찌 도시이름이 공주라 명명하였는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공주 시는 아담하였다.
부여처럼 웅장하지도 않았고 시골의 조그마한 읍내처럼 아기자기 하였다.
산성및 사찰으로 유명한 공주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피신하여 신라에게 항복한 도시이기도하다.
그래서인지 경주에서는 느껴볼수 없는 치욕의 눈물이 어려있는 도시같아 더한층 안아주고 싶은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