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0편 2절-4절: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2절: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땅이 진동될 때는 인간들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오는 것이고, 또 땅이 갈라지게 되면 땅이 사이가 벌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도 벌어지고 쪼개진다. 땅이 갈라지니 이쪽저쪽에 살던 부모형제 일가친척들이 나누어진다. 하나님이 나눠놓는다.
한 가정에 원치 않는 사건이 닥치면 부부간이나 부자지간이나 자식 간에 쪼개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의사가 맞지 않으면 쪼개진다. 이건 눈에 안 보이는 지진이 난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이 일어난 거다. 땅에 지진이 일어나는 진동만 생각하지 말아라. 정신적인 진동도 있다.
에돔족은 에서의 후손들인데, 에서는 야곱의 형이다. 그러니까 한 집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동생이 나오고, 세상으로 향한 형이 나왔다. 한 가정에 자녀들이 많으면 여러 형태의 자녀를 보게 된다. 예수 믿는 것도 진리를 따르는 자녀가 있고, 비진리를 따르는 자녀가 있다. ‘진리냐, 비진리냐?’에 따라 ‘하늘이냐. 땅이냐?’로 갈라진다. 한 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고 ‘형아, 동생아, 엄마야, 아빠야’ 라고 하며 한 집에 살더라도 정신세계를 보면 하나는 이리 가고, 하나는 저리 가는 게 있다.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교회가 똑같은 거냐? 아니다. 의사성이 하나라야 똑같이 가는 길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를 구별 분별할 줄을 모르는 기독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어떤 사람이 성경책을 들고 있으면 ‘믿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이 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며시 마음이 간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 나가십니까?’ 하고 인사를 한 후에 대화를 하다보면 뭔가가 마음에 간격이 생긴다. 왜 그런 거냐? 같이 믿는 길을 갈지라도 신앙의 질적인 면에서 구별을 해보니 상대가 본질적인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대화를 하면서 상대가 자기 말을 안 듣고 반발을 하면 속에서 뭐가 올라오게 되는데 이게 뭐냐? 신앙의 질이 다르다는 거다.
본 60편은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 지은 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에돔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이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알고 보면 형제끼리 싸우는 거다. 성경으로 더 크게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아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다 형제인데 왜 싸우는 거냐? 왜 한 집안의 형제끼리 싸우고 왜 형이 동생을 때려죽이는 거냐? 서로가 의사성이 안 맞기 때문이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방 안에 ‘가화만사성’이라고 써서 붙여놓으면 되느냐?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써서 붙여놓으면 재물이 막 들어오는 거냐? 이게 얼마나 미신적이냐? 기독교 집안에도 미신성을 가진 가정이 많다.
다윗은 에돔이 쳐들어오니 이스라엘군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로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이유가 있다. 괜히 오는 게 아니다. 특히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매사를 신앙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봐야 옳은 거다. ‘그냥 자연적으로 됐지’ 이런다면 믿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자연적으로 되는 거라면 그냥 놔두면 되는 거지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진노로 봐야 그 일을 신앙적으로 처리를 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거다. 모든 사건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에돔의 정신은 세상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이 에돔사상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니까 군인들과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를 잘 믿는 궁극교회 안에 에돔사상인 세상정신이 들어오면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이건 하나님의 진노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진노가 오는 거냐? 성도가 하나님과의 의사 단일성이 아니라 세상 것을 소원 목적적으로 가질 때 하나님의 진노가 온다.
자기 속에서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면서 옛사람을 따르던 새사람을 따르던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자기 속에서 동요가 일어난다. 자기가 정확한 것을 안다면 한 쪽으로 답을 딱 내리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자기 속에서 두 사상이 싸우게 된다. 이러면 자기는 잠을 못 잔다. 번뇌가 일어난다. 그런 것처럼 교회 안에 세상정신이 들어오면 교회 안이 막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영적 이스라엘은 진동이 나고 요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통일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한 집안도 그렇고, 한 나라도 그렇고, 한 군대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의사성이 통일이 되지 않으면 자체 내에서 내분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상대 쪽에서 얼마든지 잡아먹기가 좋다. 그래서 전쟁을 할 때 무기로 싸워서 이기는 것도 있지만 적군 사이에 헛된 소문을 퍼뜨려서 내분이 일어나게 해서 스스로 망하게 하는 전쟁도 있다. 그래서 개인이던, 가정이던, 교회이던, 엄마 아빠나 딸이나 아들이 다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들어가면 못 사느냐? 아니다. 사람이 바로 되니 가정이 잔잔해지고, 돈을 헛으로 쓰지 않고, 술을 먹던 사람이 술을 안 먹고, 담배를 피던 사람이 안 피우게 되니 살림살이가 불어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게 좋은 거다. 그럼에도 예수를 안 믿겠다? 그래, 네 마음대로 살아라. 네 마음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어라. 이건 저주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서 ‘물질 축복, 축복’ 하는 것도 저주다. 이러면 사람이 정립이 안 된다. 지혜가 안 나온다. 마귀가 거짓된 목사들을 붙잡고 성경을 들고 ‘물질 축복, 축복’ 하고 가르치는 것은 저주다. 예수이름을 빙자해서 하는 축복이지만 그 안에는 저주가 들어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하나 같이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통일이 되지 못하면 여기에는 세상이 가득 찬 것이니 이렇게 되면 맨날 분쟁이다. 반대로 회사고 가정이고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하나가 되면 평화롭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이 이게 안 믿어지는 거다.
인생을 세상정신으로 살면 사람이 바로 되는 게 있을까? 하나도 없다. 사람이 가치가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사람이라면 하나님 다음 가는 고상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하나도 없다. 이런 인생은 평생을 살면서 욕하고, 먹고, 싸우고, 헤어지는 인생으로 살다 가는 거다. 이건 인간으로서 비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본질대로 바로 믿으면 사람이 정립이 되어나가는데, 이 일은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서 어느 정도 정립이 되기까지 답답할 수도 있겠으나 인내하면서 계속 바른 길로 나가다보면 그 신앙 믿음의 정신이 사람 앞에도 연결이 되어나가기 때문에 그 다음은 자기의 앞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이걸 못 참는다.
나이 많은 분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십 년 동안을 동네 구석구석을 청소를 하고 다니다 보면 이 분의 미담이 신문에도 나오고, 이 소문을 들은 관공서에서 이 분을 도로청소를 하는 관리자로 세우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겠느냐? 사람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자기가 사랑받거나 미움을 받는 것은 자기 할 탓이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얼마나 좋으냐? 좋은 인상을 심는 여기에는 말도 들어가는 거고, 행동도 들어가는 거고, 여러 가지 면으로 들어가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 속에 에돔사상이 들어오면 영적 이스라엘은 진통이 오기 시작한다. 왜냐? 영 위주로 나가는 영적 이스라엘과, 육 위주로 나가는 육적 이스라엘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진리에서 이탈이 된 것은 이 교회 안에 이미 에돔사상이 들어왔다는 증거다. 이건 세상 속화된 신앙 믿음이고 거짓된 교회다.
‘그 틈을 기우소서’ 라고 하는 것은 벌어진 틈을 메워달라는 것인데, 그러면 모든 사고방식이 하나 되지 못한 인간이 누구 편으로 붙어야 하나가 되겠느냐? 세상사람들은 무리가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가려고 하느냐, 적은 쪽에서 많은 쪽으로 가려고 하느냐? 적은 쪽에서 많은 쪽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면 많은 쪽은 항상 옳으냐? 인간을 세상의 어느 기준에 세워야 바로 되고 하나가 되겠느냐? 창세 이후로 인간을 바로 세울 기준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사람을 바로 세울 인간도 없다. 그러니까 사람을 기준으로 세워놓지 말아라.
3절: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을 가는 상황인데 무슨 포도주를 마시느냐?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계시사상으로 보면 그대로 맞아 들어간다. 이런 데서 성경의 맛이 나는 거다. 성경이 그냥 역사만 알려주려는 것이라면 역사로 말하면 되겠는데 성경은 우리의 영을 위해 계시로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계시사상을 찾아야 한다.
싸우다가 흩어지는 상황에서 왜 술이 나오느냐? 전쟁을 하다가 술을 마셨다는 거냐? 이스라엘 군대가 애굽군대의 정복에 의해 산산이 흩어졌으니 군대들이 놀람은 물론이고 이 소문을 들은 백성들의 마음도 술 먹은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얼마나 놀랐겠느냐?
그러면 이런 일이 왜 생긴 거냐? 이 사건이 갑자기 된 것으로 보이지만 포도주가 오랜 세월 동안 발효가 되듯이 사실은 이스라엘 안에 세상정신이 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점점 세상성으로 부풀어져 올라왔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이 사건을 마시게 된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전혀 감을 잡지 못하지만 신앙 면에서 정신세계가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상태를 말씀을 해 놓은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밤낮을 모르고 죽도록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모으는 사람이 있다.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사는 사람을 보고 ‘저거 돈에 미쳤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잠도 안 자고 밤낮으로 돈을 버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맞는 말이다. 왜 맞는 말이냐? 자기 죽을 줄도 모르고 일을 해서 아무리 돈을 많이 모아놔도, 그러니까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래서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소원 목적하고 뛰는 사람에게 다 해당이 되는 말이다.
세상만사를 보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사는 사람도 하루 세 끼 밥 먹고 살고, 그것보다 조금 못한 사람도 하루 세 끼를 먹고 산다. 거지도 하루 세 끼를 먹고 살고, 부자도 하루 세 끼를 먹고 산다. 그렇다면 누가 세상을 더 자유롭게 살겠느냐?
세상이라고 하는 에돔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인들의 신앙사상이 바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마련이다. 진리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인데도 비틀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교회 인도자는 이런 신앙상태를 바로 볼 줄 알아야 교회를 위해 바른 기도가 나오게 된다. 이게 다윗의 기도다.
4절: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승리권이 누구에게 맡겨지느냐? 우상을 숭배하는 자에게?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신다. 깃발을 주신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맡긴다. 깃발은 지휘권이요, 승리의 보장이요, 진리통치의 깃발이다. 즉 진리를 위하여 진리의 입장에 서서 진리의 소속에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에게 승리가 있다는 거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진리의 깃발을 세우고 싸우는 자가 영적 이스라엘의 진정한 중심세력이 된다. 오직 진리로만 나가는 다윗의 군대가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참 복음의 군대다. 그래서 뒤에 보면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라고 하는 거다. ‘셀라’란 교인들의 마음에 합당하면 ‘아멘’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그래서 ‘이것이 참 복음의 군대다’ 라고 하니까 ‘셀라’ 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라고 하는 이 말이 참으로 멋있는 말이다.
우리교인들은 어디를 가던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훈적 사상적인 면에 거짓이 많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잡고 쓰실 수 있는 성도는 이런 것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교회의 인도자는 성도들을 이렇게 길러나가야 한다. 자기가 옳은 진리를 깨닫고 앞으로 냅다 달리면 앞서 가는 거고, ‘안 하련다’ 하면 뒤쳐지는 거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성도들을 진리로 이끌고 가시는데 맨 뒤에 떨어져서 허우적거리는 교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불러서 엉덩이를 냅다 차게 하신다. 예수 믿는 각자는 자기의 신앙 믿음의 상태를 대강은 안다. 그래서 자기가 뒤떨어져서 헤매고 있을 때 얻어맞으면 ‘하나님께서 때리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이럴 때 마음을 다지고 쑥 앞서 나가면 얼마나 좋으냐?
어쨌든 앞서 나가는 사람은 진리를 강하게 붙들고 있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아무리 중직을 맡아서 일을 할지라도 진리가 아닌 세상이 잔뜩 들어있다면 이 사람은 맨 뒤에 뛰는 사람이다. 이건 얻어맞는다. 이 말이 안 믿어지면 실험을 해봐라. 맨 뒤에서 뛰면서 목사님의 애도 먹이고, 잊을만하면 슬며시 교회에 나와서 빼꼼 보이고 해 봐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