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당을 읽고
당신은 사랑하고 있습니까?
순이는 현보의 아내이다. 이번에 숯을 판 값으로 자신의 댕기와 고무신을 사오기로 했던 현보가 오지 않자 조급해하던 순이는 현보가 고무신을 사오자 전부 술값으로 쓰지 않고 사온 것이 어디나며 만족해한다. 그렇게 알콩달콩 살던 어느 날, 현보가 숯가마에서 숯을 굽는 것을 도우러 갔을 때, 자신에게 들이대는 긴상을 만난다. 순이는 자신과 같이 있자는 긴상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긴상은 현보를 불법으로 소나무를 자른 죄로 잡혀가게 한다. 그 이후로 순이는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성황당에 가서 항상 몇 시간씩 기도를 올린다. 순이에게 들이대던 또 다른 남자인 칠성이 새 옷을 선물하며 자신과 같이 가자 말할때 약간 혹하기도 하지만 결국 순이는 자신의 삶의 일부인 숲과 현보를 위해 돌아온다.
순이는 성황당을 정신적으로 의지한다. 남편이 잡혀가고, 주변에는 자신에게 들이대는 남자들 뿐이니 정신적으로라도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성황당이 유일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순이 뿐만 아니라 인간은 모두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스 사람들이 설화 속에서 수많은 신들을 만들며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분야 신에게 불평했다는 이야기가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또한 위의 예들처럼 꼭 신같은 존재가 아니라 같은 사람, 또 반려동물 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 소설에서 보여지는 순이의 성황당에 대한 믿음은 꽤나 절실하다. 그리고 분명하다. 스스로가 성황당에게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마음을 써서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 노력에 버금가는 대가가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모습은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교인과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이런 믿음을 가진채로 교회에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전, 교회의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한 일화를 들려주셨다. 아는 분께서 수능을 치는 자식을 둔 가족들의 기도 모임에 갔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제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제 아들은 꼭 인서울 대학에 붙게 해주세요."하는 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더라. 그 모습은 순이가 성황당에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을 그저 소원을 이루어주는 존재로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일까? 전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자신의 소원에 투영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고, 더 소통하기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 같다.
또 이것은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닌 그사람의 본모습을 계속 궁금해하고, 소통하고, 알아가는 것이 좀 더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또, 순이는 산을 아낀다. 그렇게 원하던 새 옷과 댕기를 주겠다는 칠성의 말을 듣고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흙바닥에 털썩 털썩 주저앉지도 못하고, 입맛을 돋구는 나물도 구하지 못하며 나무가 없고 산이 없는 곳인 도시로 갈 바에는 자신의 집이 있는 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순이는 왜 그랬을까? 나는 순이가 산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향이자 항상 옆에 있으며 필요한 것을 주던 존재니까 말이다. 우리 역시 어릴 때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존재들이나 장소들이 있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가끔씩 생각나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분명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이만 해도 잊고있던 산에 대해서 생각하며 칠성의 말을 거절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보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어린 맘을, 초심을 일깨워 줄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하자.
인간은 사랑하기에 아름답고 더 멋있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묻고 싶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름답고 더 멋있게 살 준비가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