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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선 반격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낙동강선 반격작전은 미 제8군 예하의 지상군 4개 군단(국군 2개 군단, 미군 2개 군단)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9월 16일부터 9월 30일까지 낙동강선에서 북진하는 작전을 말한다.
미 제8군은 미 제10군단이 인천상륙작전을 시작한 다음날인 9월 16일 09:00시에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미 제1군단은 주공부대로서 대구-김천-대전-수원을 잇는 경부축선을 따라 진격하여 제10군단과 연결해 경부축선 서쪽의 북한군을 포위 섬멸하고, 경부축선 동쪽에서는 국군이 중동부 전선과 동부 전선을 맡아 38도선까지 진격하는 것이다. 새로 편성되는 미 제9군단은 한반도의 서남부지역으로 진출시켜 호남지역의 북한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반격작전이 개시될 무렵 북한군은 왜관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제1군단을 동쪽으로 제2군단을 각각 배치하여 제1군단에는 제2.4.6.7.9.10사단 등 6개 사단을, 왜 관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전선을 맡고 있던 제2군단은 제1.3.5.8.12.13.15사단 등 7개 사단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병력면에서 북한군은 약 7만여 명에 불과한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15만 7천여 명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가 국군 제1사단이 9월 18일 다부동 동쪽에서 북한군 후방 깊숙히 진출하여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북한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9월 21~22일 어간에 급속히 붕괴된다.
미 제8군의 주공인 제1군단은 제777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상주-청주-오산으로 진격시켜 시켜 26일 오산에서 인천상륙작전 부대인 미 제7-31연대와 연결하여 북한군 제1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9월 30일에는 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이 대전-전주-군산을 탈환하였으며, 중동부 및 동부전선의 국군 2개 군단이 원주-단양과 38도선 남쪽의 서림과 인구리까지 진격하게 된다.
여기서 각 사단의 진격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군 제3사단 : 포항-영덕-울진-강릉-양양-원산-함흥-신흥-성진-혜산진.길주.나남
수도사단 : 안강.기계-청송-춘양-평창-양양-신고산-원산-함흥-북청.부전.풍산-성진-길주.혜산진-청진-부령
제8사단 : 영천-안동-청주-양평-포천-평강-이천-곡산-구장. 맹산.영원
제6사단 : 영천-안계-문경-충주.음성--원주-춘천-화천-회양-원산-양덕-성천-순천-개천-온정.희천-운산-고장.초산
제7사단 : 영천-안동-원주-서울-38도선
미군 제1기병사단 : 대구-군위-청주-오산-서울-개성
국군 제1사단 : 대구-군위-보은-청주-안성.오산-서울-고랑포-평양
제24사단 : 대구-대전
제2사단 : 성주-합천-전주-강경
제25사단 : 마산.진주-함양-남원-익산, 마산.진주-순천-구례-정읍-군산
제 2절 작전 준비
1. 북한군 상황
낙동강선에서 유엔군의 반격작전은 9월 16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전선사령부를 수안보에서 김천에 두고 1개 전차 사단 및 2개 전차여단의 지원하에 총 13개 사단이 낙동강선에 전개하여 그 병력이 약 10만이 되는 것으로 미 제8군살령부는 판단 하였다. 하지만 실제는 병력은 7만여 명에 불과 했고 편제장비는 50%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북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사단의 원래 병력은 30%도 되지 못하고 대부분 남한에서 강제로 모집한 신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2. 국군 및 유엔군 상황
유엔군은 미 제1군단이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미 제24사단으로 대구를 방어하고 그 남쪽으로 미 제2사단이 창녕-영산에서, 미 제25사단인 마산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국군은 제2군단이 제6사단과 제8사단으로 신녕-영천에서, 국군 제1군단이 수도사단과 제3사단으로 안강-형산강에서 방어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육군본부 예비로 있었다.
병력은 국군이 7만 3천여 명이고 미군이 영국군1,700여 명을 포함하여 8만 5천여 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제 3절 낙동강선 돌파
1. 대구 정면 돌파
가. 가산-팔공산 방면의 돌파
국군 제1사단의 가산-팔공산 전투
거매동 적 포남동
신매동
국12-3대대
장군동 365 국12-2대대 화목동
장기동 국12-1대대
신천동
창평동 국12연
매곡동 국11-3대대
381 적
국15-3대대 국11-3대대
국11-2대대
655 적
불동 국15-1대대 558 적 국15-3대대
대율동 국11-2대대
가산 적1사 응추동 436 적 국15-1대대 538 국15-3대대
수산동 국15-2대대
756
783 둔덕동 국15연
득명동 국11-1대대 불노동 국11연
(1) 작전계획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에 맞서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가산-팔공산선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였으며 북한군 제1사단은 40여 일간의 전투에서 전투력이 40%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이 받은 명령은 "팔공산에서 가산을 공격, 정면의 적 제1사단을 격파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호응하여 낙동강 부근에서 도하하여 상주를 향해 공격을 하라"는 것이였다.
당시의 지휘관은 계속하여 사단장에 백선엽 준장, 제11연대장에 김동빈 대령, 제12연대장에 김점곤 대령, 제15연대장에 최영희 대령이었다.
(2) 공세작전으로의 전환
'50. 9. 16일 09:00시에 공격을 개시한 국군 제1사단은 당일은 기상악화로 크게 진출하지 못하고 17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작전을 감행하였다. 특히 우측의 창평동-신매동-거매동으로 진출하는 제12연대가 다부동-군위간 도로를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좌측의 미제1기병사단의 진출에도 영향을 미치고 특히 북한군 제1사단과 영천 북방의 제8사단의 간격이 뚫리어 북한군의 대구위협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북한군은 19일부터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주요 전투지역은 방어작전의 역순으로 가산에서 매곡동, 창평동에 이르는 주요고지군에서 벌어졌으며 특히 적 제1사단 지휘소가 있던 가산과 그 우측의 용수리 북방 558고지, 그 동쪽의 655고지, 그 동북방의 381고지 등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출하여 군위-다부동 도로를 완전 장악하였다.
9월 21일에는 제15연대가 다부동방면으로 남하하여 퇴각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고, 제11연대가 유학산 북방 천생산을 점령하면서 가산-팔공산 지역의 북한군은 무질서하게 퇴각하게 되었다.
(3) 낙동강 도하
9월 22일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하였다. 9월 23일에는 군단명령에 따라 계속 북한군을 추격하면서 부대를 낙동강 동안으로 약진시켜 도하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25일 우측의 국군 제1군단과의 접촉을 위해 군위 부근에 제12연대를 남겨두고, 제11연대와 제15연대는 낙동리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26일 11:00시에 선산을 점령하고 상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 제12연대도 선산으로 이동 명령을 받고 출발했다.
나. 다부동 방면의 돌파
(1) 작전계획
반격작전의 주공인 미 제1군단은 배속된 제5연대전투단으로 하여금 북한군 제3사단의 서쪽에 위치한 금무봉을 공격하여 왜관을 탈환케 하고, 사단 주력은 왜관 부근에서 다부동을 향하여 공격해 북한군 제13사단을 격파토록했다.
정면의 적을 격파한 후 제1기병사단은 왜관부근에서 낙동강을 도하해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에서 도하하여 상주로 진격토록 했다.
미 제24사단은 제1기병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도하, 김천을 향해 공격토록 했다.
이 당시에 병력을 비교하면 북한군 병력은 제3사단이 약 2,300명, 제13사단이 약 6,000명, 제105기갑사단이 약 1,200명 수준이고 미군은 제1기병사단이 1,4000여명, 제5연대전투단이 2,600여명, 제24사단이 16,500며명, 영국군 제27여단이 1,700여명 이었으며 전차는 10 : 1, 포 및 박격포는 5 : 1 이상의 전력차이를 갖추고 있었다.
(2) 미 제1기병사단의 다부동 진출
미 제1기병사단의 다부동 전투
상림동 장군동
적
인동 린치특수임무부대
신주막
천평동 린치특수임무부대(다부동에서 21일 편성)
유학산 미 제7기-3대대
수암산 진목정 356
741
미7기-1대대 다부동
미7기-3대대 466 가산
미1기-8기연
적 적 미8기-2대대
백운산 미8기-1대대
적 동석동 미7기-3대대
미7기-1대대 장원봉 (372) 적
적 적
왜관 미7기-3대대 적 적 적 미8기-3대대
명봉산
미7기-2대대 미5기-2대대 미5기-3대대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는 싯점에 미 제1기병사단은 188고지(독산동)-175고지(성문동)-402고지(명봉산)-571고지(지마산, 금암리)선에 좌로부터 제5-제8-제7기병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5연대전투단은 계속하여 금무봉 탈환에 실패하고 우측의 제5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도 적의 완강한 저항과 기습에 제대로 공격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에 국군 제1사단이 다부동-군위도로로 진출하여 북한군 제1,13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계속적인 제1기병사단의 진출이 더디게 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예비인 제24사단을 서측방으로 투입하여 제5연대전투단을 제24사단에 배속전환하여 왜관 탈환은 제24사단이, 미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 방면을 전담하게 되었다.
9월 19일 미 제5기병연대는 제7-2대대를 배속받아 제70전차대대 A중대의 지원하에 253-300고지와 372고지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곳에는 북한군이 각각 1개 대대씩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300고지를 공격하던 제7-2대대는 무려 26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점령시에 북한군 시체를 205구를 확인했다.(금무봉 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달서리 서쪽에 300고지 372고지(장원봉) 등이 있다)
제8기병연대는 도로를 따라 다부동을 탈환하기 위해 전차 1개 중대가 지원에 나섰다. 연대 좌익인 제3대대는기반산(465m) 우측 소학산(622m)으로 진격하고 제1대대가 중앙 도로를 다라 좌우 고지군을, 제3대대는 571고지(지마산)에서 능선을 타고 다부동을 공격토록 하였다.
"창평리-달서리 발굴되는 유해는 국군이 아니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매봉에서 적의 저항을 받고, 도로에서는 적의 지뢰지대에 봉착하여 진출이 제한되었다. 제3대대는 순조롭게 진출한 반면 우익의 제2대대는 고지 전방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어 어려움이 있었지만 강력한 포병 및 공군의 맹폭으로 북한 제3사단의 병력은 5,000명에서 1,800명으로 줄어들었다.
"미군의 연대장 보직 해임, 포병 대대장이 연대장을 하다"
이런 상황에 제7기병연대의 왜관지역 진출이 계속 더디게 되자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제7기병연대장 니스트 대령을 보직 해임하고 제77야포대대장 해리스 중령을 연대장으로 20일 23:00시부로 보직 하였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바로 제7기병연대는 심기일전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이 일대의 북한군을 구축하게 되며 석우리지역에서 남진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만나게 된다.
"북한군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의 투항"(소련 군사고문당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도 있음)
반면 대구 정면의 북한군 제1.3.13사단은 와해되어 상주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으며 제13사단의 경우는 21일 오전에 참모장인 이학구 총좌(병력이 너무 피해를 입어 후퇴를 주장했으나 사단장 최용진이 오직 진격만을 명하여 불화에 의해 사단장에게 총을 쏴 팔에 부상을 입히고 투항했으며 연대는 이학구의 지시로 후퇴하게 됨 : 차후 북한군 제2군단 공병부부장이었던 주영복의 증언)가 투항하여 왔다. 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9월 21일, 북한군이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가운데, 제1기병사단 부대들이 대구 돌출부를 돌파하기 시작하자 제1기병사단장은 해리스 중령에게 "제777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적을 추격토록 하였다. 이 부대는 린스 중령의 제3대대를 선두로 공병중대, 2개의 전차소대, 1개 포병대대, 중박격포1개 소대, 연대 수색소대, 1개 전술항공통제반으로 구성된 기갑추격부대다
9월 22일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은 제1기병사단에게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후퇴를 저지하며 제 1군단은 주공을 대구-김천-대전-수원 축원으로 진격하여 미 제10군단과 연결토록 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장은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사단을 병진 추격토록 하여 미1기병사단은 다부동-선산도하장-사주-보은-청주-수원선을 따라 돌진하고, 미 제24사단은 대전을 향해 돌진토록 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후속해 낙동강을 도하후 예비가 되도록 하였다.
"낙동리 도하장에서 오발이 명중하여 대승을 거두다"
"제777특수임무부대"는 계속 돌진하여 낙동리 도하장으로 진격, 22일 22:00시에 도하지점에 도착하여 북한군의 대전차포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해 초탄이 적의 탄약고에 명중하여 대폭발이 일어 나면서 주변이 대낮처럼 밝혀져 수중교를 건너던 북한군이 노출되어 약 200명이 사살 되었다. 이곳에서 탱크 2대, 트럭 50대, 10여 문의 야포를 노획하는데 모두 북한군 제3사단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하후 상주까지 진격하였으나 이미 적은 후퇴한 후였다.
(3) 왜관 탈환전
제5연대전투단의 왜관 탈환전
제5전투단-2대대 낙 작오산 제5연대전투단-2대대
동
왜관 적3사
제5연대전투단 2대대
강
파산 적
121 적
금무봉 적
제5연전투단-1대대, 3대대
141 적
제5연전투단-2대대
왜관 탈환은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제5연대전투단이 담당하였다. 낙동강선에서 총반격이 시행된던 9월 16일 제5연대전투단은 17일 낙산리에 이르렀을때 금무봉 방면과 낙동강서안의 북한군으로부터 박격포와 긱관총 공격을 받는다.
18일 공격을 개시했지만 금무봉과 그 서쪽 고지에서 적의 공격으로 진격을 멈추었다. 이에따라 미 제1군다단은 경산에 머물고 있는 제24사단을 군단 서측방에 투입하고 이 사단에 제5연대전투단을 배속하여 왜관 탈환작전을 수행토록 하였다.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즉시 제21연대를 금남동 도하점으로, 제19연대를 하산동에서 도하토록 하고 즉시 병력 이동을 명하였으나 금호강을 건너는 임시교량이 늦게 설치되는 관계로 19일 아침에야 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 공군은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6.25전쟁 기간 중 최대 규모의 근접항공지원을 감행하였다. 제24사단의 진격이 늦어지는 상황에서 제5연대전투단이 금무봉 일대에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금무봉에 죽어간 북한군"
9월 19일 제5연대전투단은 전투기의 출격과 네이팜탄과 로켓탄으로 엄체진지를 공격하여 결국 북한군 제3사단 제7연대장 김창봉 대좌를 포함하여 약 2,350명의 적을 사살하고 19일 15:30분경 왜관을 완전히 탈환했다.
"강변에 떠도는 시체와 왕쇠파리떼"
한편 미 제24사단은 9월 19일 낙동강을 도하하여, 한국전에 최초로 오산 전투에 참가한 제21연대 1대대가 120명의 사상자를 내며 하산리 일대에서 도하를 실시하여 174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날 제19연대 제2대대가 도하지점의 약 3.2km 후방지역에서 도하하게 되며 약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영국군 제27여단이 미 제7기병연대의 제2대대와 교대하고 제19연대의 도하지점으로 이동하여 공병이 가설한 도보교를 이용하여 낙동강을 도하했다.
그런데 사단 전투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송, 공병, 포병, 전차 및 근무부대가 따라가야 하는데 파괴된 다리의 복구가 늦어져 도하를 완료한 부대들은 정비를 실시하였다.
9월 20~22일에 걸쳐 중장비가 넘어갈 수 있는 M-1부교가 건설되어 중장비 및 포병, 기갑 부대들이 낙동강 서편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도하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고 5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병력 뿐만 아니라 제105기갑사단은 제203연대가 전차 9대, 제107연대가 전차 14대만을 가지고 후퇴하였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전사내용은 일본군 전사를 그대로 인용함)
(1)창평리-달서리 발굴되는 유해는 국군이 아니다?"
전사에 보면 낙산리 금무봉일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우측방이고 북한군 제3사단의 우측방이다. 그러나 북한군 제10사단이 현풍에 눌러앉아 거동하지 않는 관계로 30km 미터의 간격이 있었고 이 간격을 금무봉을 이용하여 경부가도를 통제하며 대구로 공격하고 있었기에 이 금무봉을 잃으면 대구공격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이 고지일대를 사수하려 하여 북한군 제3사단장 이영호 소장이 1,200명 규모로 추산되는 병력으로 전차의 지원을 받아가며 왜관에 이르는 접근로를 막아내며, 제7연대는 격렬한 독전으로 요충지를 확보했다.
미 제24사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제5연대전투단이 포병과 공군의 지원하에 맹공(9.18~9.21어간에 6.25전쟁 기간중 최대규모의 근접항공지원)을 가했으나 정상은 끄덕도 안하고 있었다. 16일부터 시작된 공격은 9월 18일 제5기병연대가 그 우측 203 및 174고지 일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18일 저녁 지난 2주간에 걸쳐 쟁탈전의 표적이 되었던 203고지를 점령하고 제3대대의 바로 눈앞에 있는 371고지 달서리의 장원봉을 공격하게 되는데 병력이 무려 165명에 불과 했다. 따라서 연대는 제1대대로 변경하여 19일 공격하기로 했다.
19일 하루종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긑에 북동쪽 능선을 제외한 금무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제5연대전투단은, 연대자으로 요청으로 정오경에 F-51전투기의 3회에 걸친 출격후 네이팜탄과 로켓탄으로 공격을 반복 실시해 적의 엄체호를 파괴하자 곧바로 병력이 투입되어 고지를 점령한다. 전투 결과 고지에는 제7연대장 김창봉 대좌를 포함해 약 2,350여 명의 북핮ㄴ군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북한군을 발굴하는 행위는 일정기간 있어서는 않된다]
따라서 나는 재임기간에 이곳에 대한 정밀 탐사 및 탐문활 동을 수 회 실시하였다. 그리고 결론은 이곳에 국군이나 미군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어쩌다 포로로 잡혀 있다가 그곳에서 전사한 인원이야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을 일방적인 북한군 위주 시신이 남아 있다고 판단하여 발굴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현자을 떠난 얾나 후에 들리는 소문은 내가 발굴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던 지역을 전부 발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발굴되는 유해 숫자가 적다보니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다 보니 그렇게 되고 있다고 본다. 여기에 위사람들이 숫자위주로 성과를 따지는 우수광스런 방침도 문제다.
"도대체 누굴위한 유해발굴 사업인지 의문점이 앞서는게 현실이다. 북한군을 발굴하여 아군으로 하지마라"
(2)왜관 서안에 제2의 융단폭격이 가해지다"
도하작전의 핵인 왜관지역의 탈환이 늦어지자 미 제8군사령관은 공군에 요청하여 B-29기 42대를 출격시켜 왜관 서안에 융단폭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바로 알 수가 없었는데 다만 일게 된것은 북한군 제3사단의 저항이 전혀 약해지지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다부동으로 공격하고 있는 재8기병연대도 북한군 제13사단 및 제1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바로 또 같은시기에 미 제1군단의 우익인 국군 제1사단이 군위-대구를 연결하는 효령으로 진출, 적 제13 및 1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3)왜관 최대의 격전지 300고지, 253고지 탈환전"(한국군 실종 28명이 명시되다)
미 제1기병사단장은 국군 제1사단이 다부동 북방으로 진출하자 적을 격멸할 호기라 판단하여 제8기병연대에 제7-3대대를 배속시켜 다부동을 공격하고, 제5기병연대에게는 그 좌측에서 공격중인 제7-2대대를 배속시켜 달서리 서북방 고지들을 (371고지,300고지등)공격토록 하였다.
제8기병연대는 다부리 바로 밑의 가천리 5번도로 좌우측 고지군에서 북한군의 지뢰및 기습적인 역습등에 일보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5기병연대 제1대대가 300고지를, 배속된 제7-2대대가 253고지를 공격했지만 일진일퇴의 공방전만 계속되다가 "왜관.금무봉 탈취"가 이루어 지면서 그 여파에 힘입어 300고지로 돌진하였다. 산 정상에는 무려 205명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고 미군도 받은 피해가 207명으로 전사 28명, 전상 147명, 실종 4명, 한국군 실종 28명이나 되었다.
또한 253고지를 탈취한 미 제7기병-2대대는 정원의 30%밖에 남지 않았다.
(4) 왜관.금무봉(북한군 연대장도 현장에서 죽었다) 탈취, 일본전사에 북한군 사망자 250명대 우리전사 2,350명 사망의 진실?
미 제24사단은 18일 사단 지휘하에 들어온 제5연대전투단으로 금무봉 및 왜관을 공격토록 하는 동시에 사단주력으로 낙동강도하를 강행한다.
금무봉 정상은 아직 약 200명의 북한군이 엄체호와 산병호를 이용하여 결사항전하며 산정상에서 수류탄을 굴러내려 피해만 늘어났다. 이에 연대의 요청으로 무스탕기 12대가 네이팜탄으로 사정상을 불태운 다음 돌격하여 3일간의 쟁탈전은 긑이 났다. 산 정상에는 북한군 연대장 이하 250구의 시체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전사책 제6권 241p에는연대장 김창봉 대좌를 포함해 2,350여 명의 북한군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기록 되고 있다. 무엇이 맞는건지 10 : 1의 비교인데 무언가 잘못이다. 해당 페이지 우리 전사 위에 보면 북한군 제3사단의 병력이 1,200명 규모로 왜관지역 방어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봐 250여 명이 맞지않을까 한다.
왜관으로 향한 제5연대전투단 제1.2대대는 하루에 약 300명의 손실이 발생하며 15시 30분왜관을 완전히 점령한다. 이어서 제2대대가 낙동강 선으로 후퇴시 피탈당한 작오산, 303고지를 공격하게 된다. 이고지를 탈취해야 북방에서도하는 북한군을 통제하기에 꼭 탈취해야만 하는 고지였다. 그러나 작오산은 적의 최후의 저항고지로써 무려 5일간의 공방전이 계속 되었고 결국 산 정상이 포격과 폭격으로 민둥산이 되면서 제2대대가 탈취하고 제3대대가 바로 그 뒤의 300고지를 탈환하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한군 사단은 9월 초에 5천명이던 병력이 1,800명 수준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을 지원하던 제105기갑사단 소속의 전차가 낙동강 서안으로 철수한 것은 제203전차연대의 9대와 제107전차연대의 4대에 불과 했다고 한다. 미 제5기병연대가 왜관지역 전장 정리를 한 결과, 전차 28대의 잔해와 수천구에 달하는 북괴군 시체가 있었다고 보고 되었다(일본군 전사 5권 90p)
"79번 도로는 한우와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좌익의 303고지를 탈환하면서 제5연대전투단의 제1대대가 도개동에 진출하게 진출하게 된다. 왜관에서 도개동에 이르는 산길은 9월 초순 미 제7기병연대가 수암산을 공격했을때에 사용한 도로로써 그 후에 북괴군이 연락을 위해 주로 사용했는데 도처에 전차와 76밀리 포의 잔해와 탄약. 장비 등이 산재해 있고 북괴군이 수송수단으로 이용한 한우와 노무자, 그리고 북괴군의 시체들이 9월의 뜨거운 해볕아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협곡의 도로는 미 공군의 좋은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5) "미군의 제7기병연대장 보직 해임, 포병 대대장이 보병 연대장을 하다"(일본군 전사 5권 91~92쪽)
우리는 전사에 즉결처형 문제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보직해임이야 대대장이하는 몰라도 연대장을 전투현장에서 바꾸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군은 대구북방 진격 작전간 지체없이 바꾼 일이 있다.
미 제7기병연대 제1대대는 9월 20일 새벽, 제5기병연대를 초월하여 왜관-도개동-다부동가도를 연하는 지역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8기병연대와 협동하여 북한군 제13사단을 다부동지역에서 포착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제5연대전투단이 303고지를 공격할 때에 그 우측의 제7기병연대는 도로의 양측이 모두 험한 산이고 북괴군이 도처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으며, 모든 교량을 폭파한 후 주변 고지군에서 이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은 진전되지 못했다. 이에 사단장이 직접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도개동으로 진출을 지시한다.
제7기병연대-제1대대가 도개동으로 진출하자 제7기병연대장이 전방에 나와 정면의 험준한 산악지역에 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즉각 야간공격을 중지시키고 다음날 새벽부터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제3대대가 제8기병연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복귀함으로써 제1대대를 초월해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명령을 받고 있었다. 대대는 20일 대구북방에서 차량을 이용해 왜관으로 급행했는데, 하차지점에 적의 포격을 받을 위협이 있다며 제7기병연대장이 목적지에 닿기전에 하차하도록 했다.
또한 불필요한 도보행군으로 이동시켜 16일 이후 계속적인 계속적인 전투행위로 지친 병사들이 피로가 극에 달해 공격할 기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지난번 제2대대가 이동해 왔을 때도 똑같은 우를 범하여 사단장으로부터 구지람을 들은바 있다.
이날 밤 사단장은 제7기병연대가 해도 넘어가기전에 야영에 들어간 것을 알고 몹시 노했다. 사단장은 제8기병연대의 다부동 공격이 진전되지 못하고 한 번의 전투에서 전차 7대가 파괴 되었을 정도로 격전이 있어 북괴 제13사단이 아직 다부동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 만약 제7기병연대가 과감히 돌진했다면 이를 포위 격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기회를 제7기병연대장 때문에 놓쳤다고 판단하여 그동안의 쌓인 이런저런 것들이 모여서 연대장을보직 해임시키고 직접지원 포병 연대장 해리스 중령을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런대 이 포병 중령 연대장이 지휘를 잘하여 그 직위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마. 북한군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의 투항"(소련 군사고문당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도 있음), 그리고 그의 정체는?"
9월 21일 새로 부임한 해리스 포병 중령의 지휘를 받는 제7기병연대-제1대대는 산악에서 저항하는 북괴군을 격파하고 다부동에 15:00시에 돌입했다. 그리고 바로 남쪽으로 공격하여 밑에서 올라오는 제8기병연대와 연결하고 제3대대는 다부동 북쪽으로 진출하여 남하중인 국군 제1사단과 연결하여 북한군 제1 및 제13사단은 협공을 받아 지리멸렬 되었고, 북과 제3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사단의 공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미 제1군단의 1단계 임무는 끝났다.
그런데 이날 아침 미 제8기병연대 정면에서 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괴 제13사단 참모장인 이 학구 대좌가 새벽녁에 다부동 남방 4km의 삼산동 길강에서 자고 있던 미군 병사를 흔들어 깨워서 투항을 해 왔다. 그는 지난 밤에 자기 사령부를 혼자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학구는 개전 당시에는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의 작전참모였다. 그러나 8월 공세의 실패로 좌천되어 군단 참모장으로 조자천 되었을 때에 이학구는 제13사단 참모장으로로 보직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의 젊은 장교였다. 그가 왜 귀순했는지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독선적인 사단장과의 마찰로 사단장에게 권총을 쏴 팔에 부상을 입히고 본인이 각 연대장들에게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귀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이학구를 귀순자로 처리하지 않고 포로로 처리하여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목상 수용소내에 이미 포진한 북한의 공작대의 명목상 대장 역활을 하게 된다. 벌써 그의 죄가가 통보되어 자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소리없이 죽게될 운명이었다.
이를 이용해 장교중 가장 높은 계급인 이학구를 대표로 내세워 수용소에 있는 친공분자들의 규합과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한다. 이미 수용소내는 군대 조직처럼 갖추어지고 철저히 이념무장하여 거대한 전투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수용소 주변에는 온갖 연락책들이 피난민이나 등등의 신분 위장으로 들어와 장사부터 별별 수단으로 안 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를 미군 수용소 책임자들은 수수방관했다. 이유는 포로교환시 보내 버리면 된다는 것이였다.
그러다 친공이 아닌 자유대한으로 오기를 원하고, 아니 처음부터 북한군이 아니라 강제 징용이나 우리군 포로를 입당시켜 전선에 내몰았기에 당연히 우리쪽으로 와야할 대상이 과반이 넘었다.
이를 알게된 북한은 실제 지도자를 위장으로 포로가되게 하여 수용소에 잠입하여 이학구를 조종하여 당시 수용소 소장인 도트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의키게 된다. 물론 1주일 만에 석방시키지만 그들의 요구조건을 상당수 관철시키게 된다.
이학구는 결국 휴전시 포로 교환간 돌아갔는데 자기를 포로로 취급했다며 북으로 돌아갔다. 이학구는 정말 귀순했을까, 아니면 위장 귀순이었을까? 이를 알 방법은 그가 북한에서 얼마나 잘 대우받고 살았느냐인데 알려진 것이 없다?
(6). "낙동리 도하장에서 오발이 명중하여 대승을 거두다"
전쟁에서 실수가 오히려 적을 잡는 그물이 될 수도 있다. 바로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으로 돌아 38도선으로 진격하기 위한 도하작전이 진쟁되는 싯점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9월 21일 미 제1기병사단 부대들이 대구돌출부를 돌파하기 시작하자 사단장 게이 소장은 제7기병연대장 해리스 중령에게 북한군을 추격할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토록 지시한다.
이에 바로 포병 중령의 해리스 연대장이 린치 중령의 제3대대를 선두로 공병 1개 중대, 전차 2개 소대, 미 제77야포대대, 연대수색소대 등으로 구성된 기갑추격부대였다. 이 "제777특수임무부대"는 계속 돌진하여 낙동리 도하장으로 진격했다.
22일 22:00시에 도하지점에 도착하여 북한군의 대전차포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해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대전차포에 명중된 것이 아니고 초탄이 적의 탄약고에 명중하여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주변이 대낮처럼 밝혀져 수중교를 건너던 북한군이 노출되어 약 200명이 사살 되었다. 이곳에서 탱크 2대, 트럭 50대, 10여 문의 야포를 노획하는데 모두 북한군 제3사단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9월 23일 ,제777린치특수임무부대는 04:30분에 도하를 시작하게 되며 다부동을 출발한 이래 5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 또는 생포하고 5대의 전차와 각종 장비를 노획하면서 낙동강을 건너 이날 16km북방의 상주까지 진격했으나 북한군은 이미 후퇴한 후였다.
(6-1) : 여기에는 이런 비화가 있다.
원래 낙동강 상에 북한군이 만들어 놓은 수중교가 2곳이 있는데 하나는 낙동리, 하나는 선산지역이었다. 최초는 가까운 선산나루터지역으로 명령이 주어져 그곳으로 진출했는데 도중에 경비행기에서 군단 작명이 떨어졌는데 명령이 바뀌어 낙동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경비행기에서 주어진 명령의 진위를 린치 대대장이나 연대장이나 사단장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기동을 멈추고 사단장이 직접 대구로 돌아가 확인한 결과 낙동리에 적이 없어 변경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19:00시에 전진을 재개했지만 무려 3시간의 시간 지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국군 제1사단의 낙동강 도하는 아래와 같다.〕
9월 22일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하였다. 9월 23일에는 군단명령에 따라 계속 북한군을 추격하면서 부대를 낙동강 동안으로 약진시켜 도하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25일 우측의 국군 제1군단과의 접촉을 위해 군위 부근에 제12연대를 남겨두고, 제11연대와 제15연대는 낙동리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26일 11:00시에 선산을 점령하고 상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 제12연대도 선산으로 이동 명령을 받고 출발했다.
(7) "미 제24사단, 진격하는 영국군 제27여단의 낙동강 도하작전(제6권 243~245p)이 미흡하다"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사5권 82~122쪽)
우리 전사에는, 6권 243쪽 중간부터 언급된 내용으로는 도대체 어디에서 도하하는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약기하면 "제5연대전투단 후방에서 애간 방면으로 진겨하던 제24사단은 9월 19일 05:30분에 낙동강을 도하하기 시작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서 도하한다는 것인지?
그러나 일본군 전사에는, "금남동에서 도하하도록 명받은 제21연대는 한잠도 자지않고(그 이유는 이동과정에 금호강을 도하하면서 시간 지체) 도하준비를 끝냈으며 19일 05:30분에 제1제대로 한국전 최초 참전부대인 제21연대 1대대 스미스부대였다"라고 기록 되고 있어 명확히 칠곡군 금남리를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도하하면서 그 맞은편 대안상의 174고지 도흥동능선의 적으로부터 곡격을 받아 120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게 된다.
또한 바로 그 밑에서는제19연대 제2대대가 제1제대로 도하를 개시하여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6:00시에 도하를 하게 되는데 적은 성주 방면으로 철수했는지 별 저항이 없었고 이날 밤중에 연대는 도하를 완료한다.
9월 23일 아침, 미 제24사단은 영국군 제27여단을 성주로, 사단 주력은 경부국도를 연하여 김천을 향해 추격을 개시한다. 사단은 3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며 기분좋게 7번도로, 33번도로, 4번도로를 이용하여 전진했으나금오산과 영암산 사이 협곡의 북쪽 끝부분인 부상리 일대에서 북한군의 지뢰지대와 대전차화망지역에 봉착하여 지체하게 되는데 북한군 105전차사단 일부가 이 협곡에서 잔류하면서 저항했던 것이다.
(8) 도흥리-성주간에서 죽은 북한군 2,500명은 어디에?
영국군제27여단은 성주로 가는 관문인 성원리의 385(383?)고지를 공격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동측 282고지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아아길 대대가 282고지 상에 대공포판을 펼쳐 놓았는데 마침 무스탕기 3대대 날아왔을 때에 북한군도 385고지에 똑같은 대공포판을 설치하므로써 비행기가 오판하여 282고지를 오인공격함으로써 89명의 손실이 발생했다.
북한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282고기가지 점령해 버렸다. 이에 제24사단장은 먼저 김천 남쪽 부상리까지 진출한제19연대 제1대대를 남하시켜 북방에서 성주를 공격, 24일 02:00시에 점령해 버리고 동에서는 영국군이, 서에서는 미군이 협공하여 지내내 북한군은 24~25에 걸쳐 패주하게 된다.
이때 포로 등을 심문한 결과 북한군 제10사단이 여기에 있었으며 이 전투에서 무려 2,500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우리는 선남면 관하리, 도흥리일대에서 탐사 및 탐문을 해왔다. 하지만 전사책에 언급된 그런 피해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도흥리와 소학리 강변에 지금은 밭을 경작하고 있는데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몇번의 홍수로 씻기어 가버려 당시의 흔적은 없다.
도흥리 차동지역까지 들어가 지역제보자를 찾았다.
한 할아버지를 만나 맛있는 곶감을 얻어먹고 차도 마셨다. 11살에 전쟁이 났고 할아버지 집도 다 타버렸다. 이때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를 잃었다. 갈곳이 없어 불타버린 집 잔해를 이용하여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영국군이 와서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럼 혹시 이곳에 죽은 미군이나 영국군이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때는 눈만 뜨면 나가서 탄피를 주어서 배가 고프니까 그걸 엿장수에게 주고 얻어 먹거나 돈을 일부 받았어요. 시체는 수없이 보았지. 저 강가에 가면 전체가 시체가 썩어가고 있어요."
"그곳은 지금 아무것도 없겠지요?"
"그렇지요. 몇번이나 홍수가 났는데, 물이 지금 도로 밑까지 넘쳐나요"
"혹시 기억나는 곳 없으시나요?"
"밖으로 나가서 좌측으로 신흥리 지나면서 바로 야산과 길언저리에 영국군인지 죽어있어 묻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한번 같이 가서 대략적이지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징어 덮밥을 먹고 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일정구역을 1개 분대규모를 투입해서 시굴을 해봤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다. 성주읍 일대도 탐문했으나 2,500여 명이 죽었다는 북한군시체의 해방은 찾지 못했다. 다만 들었던 이야기는 지금 성주대교 일대의 선원리와 소학리에는 북한군뿐만 아니라 미군, 영국군도 수없이 물에 그 시신이 둥둥 뗏목처럼 떠다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누구도 애처롭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쟁은 그런줄 알았다는 것이다.
성주읍내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침 엉징어 덮밥이라는데 빨간 모습에 나는 속이 좀 안좋았다.
2. 서남부지역 돌파
가. 창녕- 영산 돌파
미 제2사단의 창녕-영산 돌파
낙 적10사 현풍일대에 위치
동 시비리 미2-38연
강 미2-38연
미38연-3대대 낙
239 적 청회 미2-38-2대대
초계 309
적 동
적 사등 창녕
적 268 강 미2-23연대
미구리
낙 부곡리
적16전차여단 밀양
미2-23-1대대 동
신반리 적4사 강 오항
적 16전차여단, 적9사 223 영산
낙 쇠실
박진 고곡
미2-9연대(-)
동 오봉리
적4사
강
낙 기항
동 남지
창녕-영산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저지한 미 제2사단은 북한군 제2.4.9사단 및 제10사단 일부와 대치하고 있었으며 9월 16일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2사단은 현풍의 제38연대, 창녕의 제23연대, 영산의 제9연대를 그대로 공격으로 전환시켜 3개 연대 병진으로 돌파작전을 실시하였다.
"전사의 오류인지 번역의 오류인지---?"
특히 사단의 좌익인 제9연대는 201고지(사곡산)와 오봉리 부근의 탈환을 위해 유엔 공군의 폭격가지 이어졌지만 탈환에 실패한다. 중앙의 제23연대는 16일 새벽녁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제1대대 제C중대의 모든 장교를 포함해 25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제2대대는 강변을 굽어보는 208고지 탈환을 위해 전폭기와 네이팜탄과 로켓탄을 퍼부어 적을 구축하였다.
"워커 장군이 극찬한 가장 반격 3일째의 성공적인 도하작전 : 제38연대"
9월 17일에는 기상이 호전되면서 미공군 폭격기 네이팜탄 110갤런짜리 260개를 창녕 서쪽 낙동강 부근에 투하하는가 하면 기총소사로 적은 수많은 중장비를 유기하고 강을 건너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좌익의 제9연대는 201고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익의 제38연대 정찰대가 9월 19일 부곡리에서 강을 건너 정찰 결과 적이 없음을 확인하여 도하를 개시하여 선두 부대인 제2대대가 감제고지인 309고지(청덕의 302고지?)를 확보하였다. 이날 제38연대는 132명의 북한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중에는 32명이 여자 간호사와 1명의 소좌를 비록 장교 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제38연대는 도하지점에 숨겨놓은 125톤의 탄약과 포장된 채로 버려진 소총 등 많은 장비와 보급품을 노획하였다.
하지만 북한군 제9사단은 아직도 지내내에서 가장 위협적인 201고지와 409고지를 미 제9연대의 공격에도 확보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다른 지역에는 포와 박격포의 사격을 국한하면서 201고지와 409고지(현풍 제니산?)에 주력하였다.
9월 19일 미 제38연대 3대대는 몇 대의 전차와 포병, 그리고 중박격포 등의 장비를 갖추고 강을 건넜다. 그리고 제1대대에 현풍과 409고지에 대한 정찰활동을 수행케 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은 제9연대 지역의 201고지와 409고지 지역에만 강력하게 저항하여, 이에 미 제9연대는 제1대대에게 201고지(성지산?)를, 제2대대에게 174고지(청단고개?)를 공격하여 점령토록 하였다.
"북한군 제10사단은 왜 9월 총공세에도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었을까?"
9월 20일 상포 도하점에서 미 제23연대도 낙동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의 북한군은 제10사단 제25연대가 현풍 대니산 일대, 제27연대가 238고지(옥산동)-228고지(쌍산고개)에, 제29연대가 현풍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으며 북한군 제2사단이 합천, 제16기계화여단이 신반리 서쪽에, 제9사단이 신반리 남쪽에, 제4사단이 신반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 제2사단장은 제38연대로 초계-합천으로 진격토록 하고, 제23연대로 박진-신반리-합천으로 남쪽방면에서 진출토록 하였으며 좌측의 제9연대는 지내내를 경계하다 교두보가 확보되면 신반리-청계리-합천으로 공격토록 하였다.
9월 22일 제23연대는 여배리의 송곳산(281,286?) 왕령산(273)일대에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실시하며 신반리로 진출하고, 제38연대는 초계로 진출하면서 성태리 236고지(239?) 일대로부터 적의 강력한 저항을 비행기 폭격과 네이팜탄 사격으로 제압하고 진출하였다.
그러나 결국 제9연대는 박진나루 부근에서 도하에 실패하여 지내내 경계와 잔적소탕으로 임무를 변경하였다. 이때 제2대대가 409고지에서 북한군 제10사단을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제38-1대대와 임무교대를 하고 제38-1대대는 신속히 강을 건넜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은 현풍지역의 북한군을 안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지만, 22일 주력이 사단 목표인 신반리와 초계를 점령함으로서 합천-논산의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나. 마산 전투
유엔군 전선의 서부 마산지역에서는 미 제25사단이 9월 16일 09:00시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현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북한군은 필봉(여항산, 742m), 서북산(738m), 전투산(661m) 등 주요고지에서 강려한 저항을 벌이고 있었다.
미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진주로 진격을 위해서는 반드시 주요고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사실에 9월 16일 제35연대 제3대대장 울프 소령에게 "울프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전투산과 필봉을 공격토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17~18일 양일간 포병과 공군의 지원 사격에도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18일 저녁 북한군이 갑작스레 전투산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따라서 19일 아침에 별다른 저항없이 전투산을 점령한다.
이 무렵 북한군은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 제7사단(사단장 이익성 소장)이 9월 18일 이후 현 전선에서 물러나 남강 북쪽으로 후퇴한 상황이었으며 작전 지역내에는 여전히 북한군의 패잔병이 출몰하고 있었다. 제6사단 주력부대는 남강을 건너 진주를 통과해 진주에서 서쪽으로 약 10km지점까지 철수할 수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전 예하부대에 최대한으로 돌파구를 확대해 적을 깊숙히 포위하고 그 퇴로를 차단해 철저한 섬멸전에 전력을 집중하라고 명령을 하달한다. 워커 중장의 기동계획은 미 제1군단이 대구-김천-대전-수원에 주공을 지향하고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연결을 유지하며, 미 제9군단이 합천-거창-안의-전주-강경 축선으로, 미 제25사단이 진주를 점령한 후 서북방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였다. 동측방의 국군은 종심깊게 적진을 뚫고 들어가 포위기동으로 지역내의 북한군을 격멸하도록 하였다.
9월 23일부터 낙동강 교두보 전역에서 북한군의 저항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23일 14:00시로 미 제2사단과 제25사단을 현지에서 쿨터 소장의 미 제9군단에 배속시켰다.
이후의 진격은 크게 저항을 받지않으며 진출하는데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남강교를 폭파시켜 복구하는데 지체하게 되고 진주에서 의령으로 가는 중간지점에도 미군 공병대와 현지 주민 1,000여 명이 북한군의 산발적인 박격포 공격에도 굴하지않고 마대 등으로 도하장을 구축하여 26일 새벽 의령을 점령한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전사의 오류인지 번역의 오류인지---?"
미 제2사단이 도하작전을 감행하는 곳은 우전방의 제38연대는 청덕 적포리 뒷감나루터 일대에서, 중앙의 제23연대는 유어면 미구리 주변 상포나루터에서, 좌익인 제9연대는 박진나루터 부근에서다.
전사, 제6권 낙동강선 돌파 247쪽에 보면 상단부에 "사단 중앙의 제23연대는 16일 새벽녁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제1대대 제C중대의 모든 장교를 포함해 25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군이 쓴 한국전쟁사 5권 94쪽과 100쪽의 내용과 비교하면 많은 상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군 책 94쪽에 미 제2사단은 도하지점에 이르는 도로를 개척한 20일 새벽부터 상포 나루터에서 그 주력이 도하를 개시했다. 제1제대인 제23연대 제3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않고 대안에 당도하였고, 깊이 잠들어 있는 북괴군 대대본부를 기습하여 대대장과 참모들을 포로로 잡았고, 정오경에는 도하지점을 감제하는 227고지를 탈취했다. 이때 노획한 서류 중에 북괴군 제2.4.9사단의 신반리부근 배치도가 그려져 있어서 전면적으로 철수중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추격의 시기는 드디어 온 것이다. 제23연대장은 제3대대장에게 신반천 북안의 207고지를 탈취토록 명령하여 빠른 유속으로 사단의 수륙양용차량을 지원받아야 해질 무렵에야 도하함으로써 일몰 후 대대가 공격했을 때는 이미 북괴군은 철수한 뒤였다.
이날 밤 미 제23연대는 도하를 완료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바람때문에 227고지에서 도하지점을 엄호하던 k중대의 경계가 다소 소홀해졌다. 그 틈을 타서 북괴군 1개 중대가 이 고지의 정상으로 은밀히 기어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책 100쪽에 상포 도하지점을 감제하고 있는 227고지(아근리 223?)에서 경계임무를 맡고 있던 제 23연대 K중대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갑짜기 북한군 100여 명의 기습 공격으로 26명의 사상자를 내고 산 정상에서 밀려 났다.
물론 이 지역들은 유해발굴 지역의 결정적 장소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고려하는 것은 당시에 이미 중대당 몇명씩의 국군이 카츄사로 들어가 있고 지역에서는 일부 많은 노무자들이 동원되었기에 그런 사실을 추적해 가는 것이다.
사실 적포교부터 강 서안을 따라 박진교에 이르는 지역은 웬만한 곳은 도하가 가능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 입장에서는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요소요소에 수중교를 설치하고 부역자들을 동원해 전쟁물자를 주로 야간에 강 남안으로 옮겨야 했다.
따라서 이 일대에 엄청난 폭격이 가해져 많은 인원이 죽어가기도 했다. 그러니 실체를 파악하는데는 전사의 진실성이 매우중요하다. 사실 227고지의 실체도 우리측 전사 사실로는 어느쪽에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2) "북한군 제10사단은 왜 9월 총공세에도 움직이지 않고 현풍에 머물러 있었을까?"
9월 20일 상포 도하점에서 미 제23연대도 낙동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의 북한군은 제10사단 제25연대가 현풍 대니산 일대, 제27연대가 238고지(옥산동)-228고지(쌍산고개)에, 제29연대가 현풍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으며 북한군 제2사단이 합천, 제16기계화여단이 신반리 서쪽에, 제9사단이 신반리 남쪽에, 제4사단이 신반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 제10사단은 현풍에 들어온 이후에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9월 총공세에서 만약 대구 방향으로 진격을 했다면 유엔군측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것인데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군이 반격작전이 시작되자 슬그머니 성주로 빠져나가 집결하고 있다 영국군 제27여단의 성주 탈환시 2,500여 명이 손실된다. 그들이 주로 머물렀던 대니산 일대에 탐사결과 일부 개인호가 남아 있지만 대규모는 아니였다.
오히려 구지면의 달성 2차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화산리와 응암리 일대의 저지대 야산에 개인호가 많았고 실제 유해가 발굴되는데 공사하는 사람들이 불에 태워버려 정확하한 판단이 어렵고 개인호도 도쟈등으로 밀어 원형이 훼손됨에 따라 실태파악이 곤란했다.
"여기에 온 북한군은 서울 학생이 많았다"
다만 동네분들의 일부 제보에 의해서 미군이 네이팜탄 사격으로 일대가 다 타버렸고 북한군이 수없이 호속에서 죽었다는 내용과 주로 북한군은 나이가 어린 학생처럼 보였고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일부 북한군은 배가 고파서 동네로 밥을 얻으러 오곤 했는데 이걸 본 북한군 높은 사람이 바로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도 보았다고 한다. 그런 시신은 치우지도 안해서 나중에 국군이 들어왔으 때에 주로 논고랑이나 물구덩이에 집어넣어 이후의 수혜발생시 다 어떻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설리와 수리리에서 몇군데 제보지역에 대한 기초굴토를 해보았는데 찾는데는 실패했다.
전사에 밝혀진 내용은 북한군 제1군단장이 9월 25일에 철수명령을 내리어 그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북한군 제10사단장은 명령을 잘 지킨 것인지 상황판단을 못하는 무능한 사단장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 이 북한군 제10사단장이 우리측 예비역 장군인 박경석 장군님이 말하는 "전문섭"인지 한 번 재미로 보자〕
박경석 장군은 육사 생도 2기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17살의 나이로 군문에 들어와 포천북방에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육사 주변 불암산 전투를 거쳐 후퇴를 거듭하다 부산에서 소급교육을 받고 소대장이 된다. 반격작전간에 제9사단 제30연대에 전속되어 '50. 12월 초에 평창지역 1077고지(?)에서 전투중 파편상으로 부상당하여 북한군에 포로가 된다.
포로로서 북한군은 많은 포로들을 전향시켜 해방전사로 다시 전선에 내모는 상황에 본인은 전향을 거부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관심을 받으며 오히려 대접을 받았다.
바로 북한군 제10사단장이 자신에 관심, 먹을 것도 주고 잘 치료하라 해서 치료를 받으며 해방군 군관이 되라 계속 회유한다. 끝가지 전향을 안하니 소원이 뭐냐고 물어 "집에 가고 싶다" 고 했더니 정말 보내주고 부관을 시켜 먹을 것을 주었다. 그래서 복귀하다 '51. 2월에 중공군에 잡히어 다시 탈출하고 또 어떻게 미군헌병에 잡히어 원대 복귀한다.
그런 박소위가 옆에서 지켜본 북한군 제10사단장은 먹을 것이 없으면 병사들과 같이 굶고, 절대로 마을에서 닭한마리도 안잡아 먹더라고 한다. 솔선수범의 표본이었다. 어쨌든지 박소위를 끔직하게 좋아해(?)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 기간에 박소위는 전사자로 처리되어 나중에 국군묘지가 생겼는데 "15-2 묘역 730호 육군 소위 박경석"이란 묘비가 생겼다. 그래서 계속 있었는데 지난 12월에 파묘 되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을 비판한 이후에 생긴 일이란다.
판단은 각자에 맡긴다!
무능하다고 군사적 전무가에 조롱거리던 이 북한군의 제10사단은 유엔군이 북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평강-철원지역에서 후방교란활동을 하고 태백산맥을 이용한 제2전선이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북으로 탈출해 오는 병력들을 일부 규합해 전투력을 보강하면서 우리의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우리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제2. 5. 9사단 등이 후방지역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중공군 남침시 때를 맞추어 적극적으로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했고 1.4후퇴이 후에는 미군 해병대까지 동부지역 소백산맥 이남인 대구-포항 북방에 투입되어야 했다. 여기에 핵심 적의 세력이 바로 길원팔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제10사단이었다.
결국 우리도 적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이 육군 유격대로 일명 "백골병단"이 채명신 중령을 연대장으로 '50년 말부터 편성되어 동부전선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인 지금의 인제 용대리부근까지 침투해 들어가 북한군 후방지역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3) 신반리 일대에는 전투를 알고 있는 지역 주민이 없다
전사에 보면 반격작전시 북한군 제2사단이 합천, 제16기계화여단이 신반리 서쪽에, 제9사단이 신반리 남쪽에, 제4사단이 신반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제2-23연대는 상포에서 신반리 진출간 여배리지역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기록에 있다. 이에따라 미군의 포병 및 비행기에의한 엄청난 포탄이 작열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여배리에서는 송곳산과 왕령산, 그리고 앙진리 필재지역에서 미군의 전투를 목격한 지역주민의 제보로 탐사도 하고 발굴작전도 시행해 보았다.
우리는 전산내용에 따라 신반리가 북한군 사단 지휘소들이 있었기에 이런 곳에는 그들의 야전병원이 있고 그 병원에는 국군이나 경찰이 부상으로 포로되어 일부 치료를 받다 죽으면 일정한 곳에 가매장했다는 참전용사 증언을 참고로 조사를 하게 된다.
신반리는 교통의 요지다. 거창이나 합천일대에서 낙동강 동안으로 이르는 모든 길이 이곳을 통과하는 곳이다. 주변에 신번천과 지혜천이 흐르고 300고지군으로 둘러쌓여 있으면서 사통팔달처럼 요소요소에 골짜기가 산재에 있어 은폐엄폐에 좋고 유사시 퇴각하기도 좋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들어가 신반리뿐만아니라 강암리, 단원리, 서득리, 막곡리 등 마을 회관과 노인정을 방문하여 탐문활동을 병행했는데 기록할 내용이 없었다. 그만큼 아는 사람도 없고 다들 모른다가 전부다.
이유를 가만히 분석해 보니 우선 대부분 피난도 많이 갔지만 남아있던 사람은 좋든싫든 부역에 참여하고 명세기 지휘부지역이니 피해도 있지만 그렇게 시달리지않고 공생했을 거란 일부 판단이 섣다. 이런 판단은 추측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다니면서 들어보면 높은 북한군이 들어오면 그래도 그 동네는 조금 편했다는 말을 많이 들은 결과에서 오는 것이니 오해는 말길 바란다.
"전사지역보다 여배리 유학천의 동쪽 산에 더 많은 제보와 흔적이 있다"
우리는 초곡리에 사시는 분이 전화로 제보를 해와 유학천 동쪽 대문뜸이란 곳으로 들어가 지역주민을 만났다. 이미 낙동강선 철수작전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엄청난 뼈를 보았다는 분을 만났다.
"혹시 이 지역에 전투가 많았다고 하는데 아시는지요?"
"내가 어려서 아버지따라 화전밭을 일구는데 사람이 시거멓게 개처럼 끄실려서 죽었어요. 한두명이 아니고 산 능선에 깔려 있어서 그걸 괭일로 긁어서 몇군데 묻어버렸지 아버지가요."
"혹시 아시는 곳이 있으면 저희한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걸 뭘라고요. 이북놈들도 찾는가요?"
"찾지는 않지만 자료수집은 해서 관리하고 있다가 필요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남북교류에 활용이 될 수도 있거든요"
"아이고 그 뭐요, 하늘에서 불폭탄이 내려와 다 타버리고 여기도 내어릴때는 피난갓서 보지는 못했지만 대구갔다 오니 동네형들이 가자고 해서 따라다녔는데 교복입고 불탄 사람도 있고 그걸 여우인지 개들인지 물어뜯어 물고 다니지 누가 치우지도 안했어요. 이북놈들과 빨갱이들이 죽었다고"
"정확하지는 안해도 좋으니 같이 산에 한번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산에 올라봤다. 별로 올라가지도 안해도 벌써 개인호 흔적은 있다. 조그마한 것이 북한군이 판 것이 틀림없다. 미군은 크게 파고 국군은 여기서 전투를 안했다. 탐사를 하는 가운데 제보자의 화전밭이란 곳을 찾았는데 흔적도 없다. 잡목이 우거져 걷기도 힘들다. 60년대 사방공사라 하여 산에서 나무를 못하게 하고 화전을 금하여 이렇게 되었다 한다.
"미군이 오래전에 필재근처에서 미군을 찾아갔다고 소문이 있었는데 아시나요?"
"미군은 전쟁중에도 찾아가고 했어요. 그걸 우리가 세부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최근에는 안오는지요?"
"강가 모래사장에서 총탄을 찾아 돈을 번다"
"지금도 와요. 미군은 잊을만 하면 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제보를 주면 와서 감사장도 주고 갑니다. 그런데 요즘은 안보던데요. 저기 여의리 모래사장이 넓은 곳에서 총탄을 많이 찾아내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들었습니까?"
"예, 율산리와 정곡리,여의리를 다 돌아왔습니다. 정곡리 안쪽에 들어가니 북한군이 머물렀다는 집도 있어서 만나봤습니다. 그랬더니 저 모래속에 포탄도 나오고 박스로 나올 때도 있어서 얼마동안 군에서 탐지기를 동원해서 다 찾아갔다고 합니다. 오늘도 보니까 미군은 헬기로 보급상자 꾸러미를 공수하는 훈련을 하던데요"
"맞아요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는수시로 그런 훈련을 하더라고요.. 공포탄도 쏘고 뭘 터트리기도 해서 떠나가면 마을 애들이 달려가 뒤지고 다녀요. 어쩌다 전화기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 대부분 경찰서에 갔다줍니다. 탄피야 지금은 별로 돈도 안됩니다.
(4) 상포, 적포에 넘쳐나는 북한군 시체, 의령 지정면 성산리 상촌에는 미군도 북한군 시신도 묻혔다.
적포교 다리 주변에 성산리와 앙진리 일대도 참 많이도 갔다. 이유는 솔직히 미군을 한구라도 찾을까 하는 바램에서다. 아무리 일방적으로 북한군이 네이팜탄에 그자리에서 불타죽거나 질식해 죽더라도 발목을 묶고 못 도망가게 하고 기관총을 쏘게 하는 마당에 군기가 빠지고 산악전투를 등한시하는 미군은 많은 희생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유해를 다 찾았다 하더라도 남북한전역에서 8,000여 명을 못찾았고 남한에서만 2,000여 명이다.
이런 유해들이 어디로 갔겠는가. 물론 일부는 태풍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유실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군전투 지역에 들어가 들으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군이 좀 못된 짓을 많이 해서 거부감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곳은 미군이 죽으면 시계나 달러같은 것을 챙기고 안보이게 묻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북한군이 잘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규군인 그들은 처음에야 선심성으로 지역민들에게 쌀도 나눠주고 글도 가르치고 치료도 해주고 인심을 얻을려 노력을 했다. 지역 빨갱이들이 완장을 차고 대부분 인민재판을 진행하고 못된 짓을 다 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집들의 속속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 일대에서 탐사와 탐문을 하는 과정에 산에서는 별로 시신을 보지못했는데 강가에서는 많이 보았고 대부분강물에 휩쓸려가거나 모래톱에 묻혔다는 이야기다.
대상자가누군지 아느냐고 물으니 대부분 북한군이라 한다. 이곳 적포교 일대로 북한군이 땟목같은 것을 만들어 타고 성산에서 앙진리로 넘어가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그만 물속에 들어가 버리고 허부적 거리다 죽거나 일부는 뭍으로 가도 죽고 또 일부는 강을 건너지고 못하고 집단으로 죽어 성산리 강둑아래(당시는 강둑이 없었다 한다) 현재 모래밭에 묻혔고 초기에는 볼록하게 모양이 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몇번 수해가 나고나서는 흔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떠도는 북한군, 그들은 대부분 서울서 온 학도의용군이라더라"
이곳의 특색중에 하나는 대다수 인원이 말은 잘하는데 신원을 밝히기는 상당히 거려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전쟁 당시와 그후에 본의 아니게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포교 위 적포리의 한 식당에서 만난 분은 우리를 보고 찾아와 유해발굴을 하러 나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상당히 고맙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네 이 지역이 도하 지역으로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다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많이 정보를 얻었나요?"
"아닙니다. 대부분 강물속에 빠져죽거나 싯겨 내려갔다고 하는 이야기를 주로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당시에 어린 나이로 피난도 못가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집에 있었는데 나중에 미군 비행기가 불폭탄을 투하해 집이고 뭐고 다 불타버렸어요. 하지만 용케 살아 남았는데 그때 북한군들 참 많이 죽었어요"
"혹시 어디서 많이 죽었습니까?"
"여기서부터 초계로 쌍책으로 길바닥과 산에는 모두 북한군이 죽어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탐사를 해본 결과 흔적이 별로 없고 지역주민들로 못봤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그 사람들이 그때 여기 살지 안했거나 아니면 살았다 하더라도 부역을 한 사람들은 말못하지요"
"아니 지금은 부역자처벌법도 없고 북한군도 시신있는 것을 제보하면 소정의 제보비까지 드리는데 믿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럼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사하셨습니까?"
"그때 연세가 60이 넘어서 동네에서 고령에 속하여 누가 불러내지는 안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것이 군복도 안입은 형들이 학교 옷을 입고서 집에 와 밥을 구걸하는 겁니다. 총은 어깨에 메고 있어요. 무섭지도 안해서 내가 총을 만져보기도 했는데 그러면 할머니가 부엌에서 뭘 주기는 해요. 이사람들이 학도의용군인가요?"
"그렇게 보여집니다"
"할머니가 물어보니 서울 무슨 한0중학교라던가 경0중학교라던가 누구는 인천에서 온 학생도 있어요. 얼굴이 얼마나 쌔까만지 처음에는 흑인이 온줄 알았지... ."
옆에서 관심있게 지켜보던 한 어른이 틈새를 이용하여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북한군이지 아군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참 난감한 질문인데 상식선에서 이해 가능한 유품으로 밖에 판단 못하고 그래서 지역 주민의 제보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분은 대부분 뭔가는 알고 계신 분들이다. 하지만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나오지않던가 아니면 쓸데없이 휘말려 불려다니는(6.25 직후에 이런 일이 많았다) 화(?)를 입을까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먼저 물었다.
"아저씨 혹시 알고 있던가 소문같은 것 들은 것 없으세요?
"아 그게 있긴 한데. 소문으로 들어서 확실하지가 않아요"
"괜찮아요, 우리가 전국을 다니며 확인하기 때문에 어떤경우는 같은 내용이 있기도 하거든요"
" 북한군도 묻히고 미군도 묻혀다"
"그럼 저 밑에 남지쪽에 성산이 또 있는데 그곳 상촌이라는 곳도 가 보셨어요?"
"네, 나루터가 있는 곳 말이지요. 두곡리 유곡리 하는 곡자 들어가는 곳은 가보았는데 별다른 제보는 못받았어요"
"내가 어려서 형들 따라 탄피같은 것을 캐러 강을 따라 쭉 내려가면서 모래사장을 뒤져요. 그럼 어떨때는 큰 탄통에 총알이 가득 들어 있기도 한데 거기에 가니 많은 곳이 파헤쳐 있어 한발 늦었다고 하는데 한 형이 뭘 열심히 파는데 보니까 시체가 있어요. 학생복을 입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야 어리니까 형들 하는 것을 바라만 보는데 다시 그냥 그자리에 묻어버렸다고 생각돼요. 그후로 그곳을 안가다 나중에 군대에 60년 말에 김신조 넘어오기전에 제대해 와서 한번 가보았어요. 그랬더니 주변이 다 변했어요. 알아보니 큰 수해가 나서 다 씻겨 내려가고 다시 상류에서 흙이 내려왔는데 동네사람들 이야기가 미군도 흙속에 있었다는거예요. 그런데 뭐 지금 있겠어요. 그 후로도 한 몇 번은 홍수가 나서 다 지형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무슨 생태공원이가 조성되었다고 들었는데... ."
"맞아요. 그 말은 들었어요. 상촌 말고도 그 밑에 박진교 옆에 모래사장도 있었다고 해요. 얼마전에 박진교 옆 몰래사장은 포크레인을 동원에 거의 1주일 가량 굴토해 보았는데 모래밖에 없어요. 다 바뀐거지요"
"너무 늦었어요. 다 귀한 자식들인데. 조금 일찍 시작했으며 그나마 시신이라도 찾아서 묻어줄건데... .!"
우리는 쓸쓸히 어르신들께 고맙다는 인사와 명함 한장을 드리고 초계로 떠났다.
(5) 낙동강변의 비명소리
낙동강은 위쪽 안동대교부터 문경 점촌의 낙동리로 이어서 선선 해평리 지역으로 구미-왜관지역으로 성주대교에서 현풍-박진나루-남지교에 이르는 몇백km의 강변이 모두 전쟁터였다.
북한군이 밀어붙이고 국군과 미군이 후퇴시에는 적의 진출속도를 저하시키려 강상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북한군은 가교를 설치할 시간도 급박하지만 공병의 이런 급속도하나 정밀도하를 위한 장비가 솔직히 없음으로써 강변의 도섭지점을 찾거나 수심이 적은 나루터에서 강습도하를 주로 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고 그들의 탱크등 중장비가 도하를 못하게 되니 주변의 지역주민을 강제로 끌어들여 수중교를 놓고 도하를 감행했다. 더구나 계속되는 공중폭격에 주간에는 도하도 못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은밀도하를 하다보니 그 위험도가 얼마나 높았겠는가.
여기에 8월과 9월의 계속되는 폭우로 수중교가 유실되면 또 건설하고 그런 과정에 죽어간 북한군이나 민간인이 얼마나 되었을까! 영동지역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몰아붙이나 비행기 폭격을 피해 금강 상류로 급속도하를 감행하다 수많은 병력이 물속에 잠기어 죽었다는 지역주민의 제보, 아니 비참함을 이미 알고 있다. 물에 빠져 죽었어, 물먹은 돼지모양 배가 퉁퉁불고 눈알은 물고기가 빼먹고 모래톱에 전투화나 농구화같은 신발이 보여 파보면 몽둥아리는 없고 신발속에 뼈대만 고스란히 있더라는 이야기는 피아를 떠나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정말 고통스러운 행군이었다.
이곳 낙동강은 우리는 최후의 전선이고 북한군은 그들의 무력남침의 마지막 관문이라 죽을 힘을 다해 밀어붙이려 무리수를 두었던 것은 누구나 쉽게 판단할 자명한 현실이다.
이로인해 병력이 부족하니 점령한 서울 인천 이천 등에서 어린 수많은 하생들을 조국해방전선에 투입한다는 미명아래 전쟁터로 의용군이라며 내몰아 또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반대로 우리도 긴박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이것저것 가리지않고 조금만 키가 커도 덩치가 있고 하면 강제로 징집하여 총도 한번 쏘아보지 못한채로 전쟁터에 내보니 인간방패막이로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곳 낙동강변에 죽어간 영혼들의 절규는 너무나 애처로운 것이다. 우리 진혼제를 그해 9월이 오면 수만번 올려야 한다. 나라가 제대로 국력을 키우지 못했고 또한 사상적으로도 공산주의가 민주주의가 뭔지를 교육도 못하고 오직 일제식민시대를 벗어나면 천국이 오는줄 알았던 우리 선배님들이다.
3. 중동부지역 돌파
가. 신녕돌파
국군 제6사단의 신녕돌파
의흥 적8사 적 대대
적기갑
적8-1연 적8-3연 적대대
매성동 적 대대
각석산 적 대대 적 대대
화수동 장곡동
국7-1대대
하본동 조림산 적 대대
국7-2대대
적 3개대대 국7-3대대
화정동
국6-2연 3개 대대 화산
국6-19연 3개 대대
신녕 국6사, 국6-7연
중동부지역의 국군 제2군단은 9월 15일 제6사단이 신녕에서, 제8사단이 영천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제1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작전을 준비중이었다.
군단의 주공인 국군 제6사단은 9월 16일 함창-예천-안동을 연하는 선을 점령하기 위해서 도원동-구산동-의성을 연하는 중간통제선을 설정하였다. 당시 사단장은 계속적으로 김종오 준장, 제2연대장은 함병선 대령, 제7연대장은 임부택 대령, 제19연대장은 김익렬 대령이다.
사단은 제2연대를 좌측에서, 제7연대를 우측에서 공격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우선 전술적 요충지인 신녕 북방 조림산을 탈취하기로 했다.
사단은 9월 16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2연대가 조림산 방면으로, 제7연대는 그 우측 화산과 장곡동일대에서 조림산 우측방 화수동과 옥녀봉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조림산을 공격할 준비를 완료했다.
9월 17일에 사단은 제2연대를 주공으로 조림산탈환작전을 전개하게 되고 28번도로 우측방에서는 제7연대가 병행 공격 하였다. 일시적으로 북한군은 아치동으로부터 종심깊게 병력을 배치하여 저항하였으나 18일 03:00시경 조림산 정상으로 퇴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단의 우익 제7-1대대가 장곡리에서 진출중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주공인 제2연대도 목표상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과 적 후방 의흥의 원산리지역에서 적 예비대의 진출 정보에 일시적 공격을 중단하고 재정비를 하였다.
사단은 우선적으로 조림산을 점령하는 것이 우선순위라 보고 제2연대가 공격을 하고 예비인 제19연대와 제7연대는 좌우에서 조공으로 모든 화력을 조림산에 지향토록하여 21일 14:00시에 공격을 개시 하였다. 계속된 공격에도 점령이 어렵게 되자 다시 야간공격을 하기로하고 하산한다.
이때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기만전술을 하기로 하고 차량 170대를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켠체로 군가를 부르며 진출시켰다가 조용히 되돌아가게 하는 방법으로 적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다시 22일 09:00시에 주간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적이 모두 퇴각하고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북한군 제8사단(오백룡 사단장)은 조림산에서 물러나 의성-청송방면으로 패주하고 있었다.
나. 구산동 돌파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영천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영천 방어에 성공한 국군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준장, 제10연대장:고근홍중령, 제16연대장:유의준 중령, 제21연대장 김용배 대령))은 구전동-자천동-삼매동 북쪽 인구동 남쪽을 연하는 선에서 총반격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국군 제2군단(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제6사단을 주공으로 도원동-함창-충주선을, 제8사단을 조공으로 의성-안동-영주선을 따라 진격하도록 하였다.
제8사단장은 제21연대를 좌, 제10연대를 우로 하여 제1차 진출예정선인 구산동-의성쪽으로 공격, 계속하여 안동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사단의 첫번째 과제는 기룡산(961m)과 보현산(1124m)를 탈취하는 것이다. 여기는 북한군 제15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9월 16일 공격으 마침 쏟아지는 폭우로 이튿날까지 진전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제21연대 정찰조가 17일 새벽 하송동 일대로 침투하여 적정 수집중에 짚차를 타고가던 북한군 대위(총위)를 생포하여 그의 소지품에서 제15사단 사령부로 보내는 공문서가 있어 확인결과 현재 보현산 일대의 적 제73연대는 탄약이 고갈되어 현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였다.
여러 정황을 분석결과 지금이 적기라 판단하여 국군 제8사단은 제10연대는 기룡산을 , 제16연대는 보현산을, 제21연대는 노고령(노귀재)을 목표로 9월 18일 공격을 개시한다.
제10연대는 기룡산의 적이 일시적 저항하였으나 결국 탈환하게 되고 좌측의 노귀재를 공격하는 제21연대가 사단예비의 투입을 하면서 우회기동으로 기습을 시도해 탈환하게 된다. 그러자 보현산의 적이 퇴로차단이 두려워 철수함으로서 제16연대는 무난히 보현산을 탈환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단은 제21연대로 길안 남족 구산동까지 21일 06:00시에 진격하였으나 구산동 남쪽고지(444m)일대에서 3시간동안의 격전을 벌이며 21일 구산동을 완전 점령한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전사내용의 진실성 검토
우리 전사책에는 국군 제7사단의 언급이 없고 일본군 전사책에는 언급이 있다(제5권87쪽, 101~102)
한국 제6사단은 화전동 북방의 북괴 제8사단에 대해 맹공을 가했고, 그 우측의 한국 제8.7사단은 병진공격으로 북괴 제15사단을 압박하여 전선은 점차 북상하고 있었다.(57p)
한국 제6사단은 2주 동안이나 서로 대치하고 있던 북괴 제8사단을 격파했다.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이 사단은 약 4천명의 손실이 있었고 예천방향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제6사단은 이를 급히 추격하여 저녁 때는 의흥을 동서로 연하는 선까지 진출했는데 북괴군의 저항은 없었고, 우측의 한국 제8사단도 제6사단과 비슷한 선까지 진출했으나 그곳에 있어야 할 북괴 제15사단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101~102p)
이상의 내용과 우리전사의 제6사단의 조림산 전투와 국군제 8사단의 구산동 남쪽 고지에서의 격전에 대한 신뢰성이다. 나는 이 지역에서의 탐사 및 탐문활동을 거의 15년이상 해왔다. 그러나 후퇴작전시나 반격작전간 진행된 전사의 내용이 약간은 어색한 전과라는 것이다. 그곳에 그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유배발굴 초기에는 많이 살아 계셔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국군 제7사단 진출과 관련하여 우리 전사책(6권 280)에 제8연대(연대장 김용주 중령)가 도덕산 방향으로 진격함으로써 2주간 공백상태로 있던 국군 제2군단 경계지역의 간격을 메우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럼 나머지 2개 연대는 어디에 있다는 기록이 미흡하다.
부대이동로 자료집에 보면 제3연대는 9월 3일 경주로 이동하여 제1군단에 배속되어 포항지구 전투에 참여하고, 9월 4일~9월 13일까지 안강-기계 전투에 무릉산-곤제봉 전투를, 9월17-29일간에는 경주-서울 진격전으로 경주-안강-안동, 다시 9월30-110.7일어간에 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서울로 진격한다.
제5연대는 8월 20일 제6사단에 배속되어 효령 남쪽고지에서, 9월2일-12일에는 8사단으로 배속되어 기룡산-상리동 전투에, 9월 17일-29일에는 경주-서울 진격전에 기계-안동, 9월 30일에 문경, 101-10.7어간에 수안보-충주-장호원-서울로 진격한다.
제8연대는 8월21-9월2일까지 신녕전투에, 9월3일-12일에는 제8사단에 배속되어 영천지구 전투에 참여하고, 9월16일에는 원복하여 도덕산, 9.29-9.30일어간에는 경주 -서울 진격전에 경주-안강-문경, 101-10.7일에는 수안보-충주-장호원-서울로 진격한다.
따라서 연대별 부대이동 자료에 의하면 제8연대와 동일 기간에 제3연대는 안강-기계전투 지역에 , 제5연대는 제8연대와 같이 제8사단 지역에 운용되다 안강-기계 전투지역으로 돌아와 전투를 하였다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실제 발굴결과가 그리 원하는 수준이 아니였다. 오림터널 상에서의 결과는 최후저항선 방어 답게 많은 결과가 있었지만 다른 지역은 결과가 미흡하였다.
(2) 노귀재에 오르다
노귀재(터널구축됨)는 청송현서면 사촌리에 있는 언덕이다. 재의 오른쪽으로는 동쪽으로 600-700고지군이 발달하면서 보현산에 이르고 북쪽을는 35번 도로를 따라 우측은 방각산.대장산.고모산.모래실.600고지군이 길안천으로 내려선다. 서쪽으로는 700-600고지군이 북으로 내려기 구산리에 이르며 그 중간에 720고지군의 산두봉이 있다. 서쪽으로는 노귀재-어골재-700고지군-매봉을 거쳐 갈산골-매봉-의흥의 선암산으로 연결되는 목에 위치한다.
나는 이곳의 좌우측 일부 고지군과 고모산. 모래실위의 650고지군, 현서 모계리에서 문봉산과 산두봉을 거쳐 구산리로 내려서는 지역을 탐사하고 지역주민과의 제보청취활동을 해봤다. 그러나 전사의 내용보다는 전투 흔적이나 제보내용이 미흡하고 다만 구산리 일대 과거 과수원자리아 후퇴작전시 우리 수도사단 일부부대가 머물렀고 북한군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남기고 의성방향으로 철수해 갔다는 제보는 들었다. 이는 전사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유해발굴에는 기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구산리 일대는 완전히 지형이 변하여 전투흔적마저 없다.
4. 동부지역 돌파
가. 국군 제1군단의 안강- 포항 돌파 계획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9월 15일 안강평야와 형산강을 사이에두고 안강 남쪽에서는 수도사단이, 포항 남쪽에서는 제3사단이 경주방면으로 돌파하려는 북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이전할 준비 중에 있었다.
육군본부의 작명은 제1군단은 미 제8군사령관에 의하여 잭슨전투부대 지휘하로부터 해제된 후 즉시 각 부대를 정위치하도록 하였으며 각 사단에 내린 작명은 다음과 같다.
[수도사단은 사단 우인접인 제3사단과 사단 좌인접 부대인 제2군단 제8사단과 협조하여 D일 H시 시단 담당 정면의 북방 및 서북방으로 공격을 개시하라. 제1차 진출선인 대전동, 인지동 및 도로 교차점을 확보하고 제1차 진출선 확보 후에는 제2차 진출 예정인 덕천동, 천지동 공격 준비를 하라
제3사단은 좌인접 부대인 수도사단과 협조하여 D일 H시 당당 정면의 북방으로 공격하여 제1차 진출선인 청하, 서정리, 상옥리 및 돌 교차점을 확보하라. 제1차 진출선 확보 후에는 즉시 제2진출 예정인 영덕을 공격준비하라]
군단은 육본의 작명에 따라 제1단계 작전목표로 청송-영덕선을 점령하며 도평동-청하선을 그 중간 통제선으로 설정하였다.
나. 국군 제3사단의 형산강(포항)돌파작전
성곡동
국8-22-1대대
국8-22-2 대대 적5-11연대
적 대대 적 대대
국8-22-1대대 포항동 국3-26연대, 국3사
국8-23-3개 대대
적5-10연 적 1개 연대 적1개 연대 국3-26-3대대 형산강
자명동 국3-26-1대대 형산강
적 ? 적?
형산강 국3-26연대
형산 국3-23연대 연일 국3-22연대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사단장 이종찬, 9.21부 준장)은 형산강 남안으로부터 제23연대, 제22연대, 제26연대를 전방에 나란히 배치하여 북한군 제5사단 및 제12사단의 일부가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사단은 9월 17일 10:00시를 기해 제23연대와 제26연대가 먼저 양 측방에서 도하하고 중앙의 제22연대가 제23연대의 도하를 지원한 후 도하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각 연대는 9월 16일 일부 소규모 특공대를 형산강 북쪽 500m까지 진출시켰으나 적의 저항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은 서쪽의 제23연대를 공격 제대로 하여 제22연대의 지원하에 형산 고지 동쪽에서 도하해 원동 일대의 고지를 공격케 하고, 제26연대를 형산교 부근에서 교량 또는 선박을 이용해 돌파구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적의 공격력을 견제토록 하였다.
9월 17일, 사단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데도 불구하고 동해안의 함포지원하에 형산강 도하작전을 계획대로 강행하였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도하작전에 실패하고 원상태를 유지했다.
북한군은 형산강 대안상에 약 2개 중대 규모로 대항고 제방 후면에 약 2,500명이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 피로 물든 형산강, 아 김석원장군을 생각하다.
9월 18일, 제3사단은 형산강 북안에서 저항하는 적에게 해.공군의 전폭적인 포격과 폭격을 가하는 가운데 제23연대가 04:00시를 기해 도하작전을 개시하여 12:00시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제26연대는 형산교를 도하하는 가운데 31명의 자원결사대가 죽음을 무릎쓰고 돌진하여 그중 19명이 교량 위에 쓰러지는 희생을 치르며 교량 북단 제방을 확보하게 된다.
각 연대는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며 형산강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결국 제26연대가 9월 20일 포항을 탈환한다.
도덕산을 우회한 제3사단은 9월 22일 제22연대가 06:00시에 흥해를 탈환하고, 고현리까지 진출함으로써 중간목표를 달성하였다.
국군 제3사단의 반격에 5~6일 동안 북한군 제5사단은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로 타격을 입고 7번도를 따라 울진방향으로 철수를 하고, 일부는 흥해 서북쪽 비학산으로 잠입하였다.
다. 수도사단의 안강-기계 돌파
국군 수도사단의 안강-기계 돌파(1)
옥산리 안강 광암리 수도-1연대
형 형산강 포항방향
수도-18연대 근계리 수도-기갑연대 낙산
적 1개연대 수도-1연대
적 산 호명리
수도 18연대, 수도-1-3대대
무릉산 적12사
수도-기갑연대 곤제봉
강
적 1개연대
안태봉 수도-기갑연대
국군 수도사단의 안강-기계 돌파(2)
구지동
346
수도-기갑연 적 대대
236 적부대
수도-18연 기계 수도-기갑연
수도-1연 적5-10연
445 적12-2연 적 대대
기갑-2대대 기갑-1대대 적 부대 수도-1연
561 적12-1연 적 1개연대 적 1개 연대
수도-18-2대대 수도-18연 수도-기갑연 수도-1연
(1) 안강 탈환
안강의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 9월 21부)은 제1연대, 제1기갑연대, 제18연대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 제10연대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도사단 정면은 북한군 제12사단 주력이 무릉산(459m)을 중심으로 약 5,000명이 있었다. 이들 병력은 대부분 북한군이 남한지역에서 강제 모병한 '의용군'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사단은 제1단계 작전 목표인 청송-길안 방향으로 진격하되 그 중간목표인 도평동(인지동 남쪽)-대전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먼저 안강.기계를 점령하여야 한다.
수도사단장은 안강을 탈환하기 위해 3개 연대를 예비대 없이 전부 공격제대로 투입하여 안강 서측에서는 제18연대, 동측으로는 제1연대를 투입하여 좌우측에서 협공하고 중앙에는 제1기갑연대로 안태봉에서 무릉산과 안강을 연하는 축선으로 정면을 돌파하도록 하였다.
수도사단은 9월 16일 05: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14:00시경 무릉산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고, 제1기갑연대는 무릉산 동남쪽의 344고지를 6시간의 혈투끝에 점령하여 무릉산 방향으로 진출하였다.
9월 17일, 제18연대는 옥산리 방향(안강 서쪽)으로 진출하고 제1기갑연대는 무릉산을 거쳐 안강읍으로 진출함으로써 동쪽의 제1연대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적은 노당치 부근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한편 이날 제7사단(사단장 신상철 대령)의 제8연대(연대장 김용주 대령)가 사단의 서측인 도덕산 방면으로 진격함으로써 2주간 공백상태인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경계지역의 간격을 메우게 되었다.
(2) 기계 탈환
9월 18일, 안강을 탈환한 수도사단은 안강에서 철수하는북한군 제12사단 병력이 기계 남쪽의 횡격실 능선에서 저항하고 또 동측방에는 북한군 제5사단 제10연대가 단구리 일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9월 19일, 제18연대는 제7사단 제8연대와 합동으로 어래산-445고지 능선을 공격해 점령하게 되고 중앙지역을 돌파해 온 기갑연대가 육통리를 점령하면서 우측 제18연대의 445고지를 목표로 인계받는다. 그러나 우측의 제1연대는 다산리 일대에서 적의 저항에 부딪쳐 급편방어태세에 들어갔다.
9월 20일 ,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561고지를 점령하지만 사단 우측 제1연대가 단구리에 145고지, 마곡 236고지와 200고지에서 북한군 각각 300명으로부터 진출이 저지되고 중앙의 기갑연대도 육통리 전방 고지에서 진출이 저지 되었다.
9월 21일, 우측의 제18연대가 기계를 감제하는 고지선까지 진출하면서 도덕산까지 진출하면서 우측의 부대들도 노당치 능선과 단구리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에 힘입어 기갑연대가 포병 및 항공의 지원하에 기계를 점령한다.
라.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이곳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 추가하여 별도 특별한 곳이 없다.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막아내던 곳이 결국 진출하는 과정에 우리가 점령해야 할 곳이여기 때문이다. 다만 언급되었던 제3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교체와 맞물린 미 군사고문과의 마찰이 발생한 핵심이 형산강 이남으로의 철수 문제 였다.
(1) "피로 물든 형산강, 아 김석원장군을 생각하다."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실제 형산교 일대와 좌측의 형산에 이르는 제방에서 형산강을 도하하여 강 북안으로 진출하는데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실제 포병과 동해안에서의 함포지원과 항공기들의 지원 화력이 있었음에도 형산교를 넘어가는데도 본문에 있듯 31명의 자원결사대중 19명의 전우를 잃어야 하는 혈전으로 북안교두보를 확보한다.
그렇다면 이 이전의 몇번에 걸친 공격에서 과연 얼마나 전사했을까, 그때는 제대로된 병적기록부도 없이 주변에서 대충 키만 되면 차로 실어서 총을 주오 수류탄만 주어 전쟁터에 투입했다.
정말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를 해야했는지는 지금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당시에 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남긴 "이 강을 넘어가면 차후에 넘어서 올 때는 핏물이 되어야 한다"는 예언이 맞았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군의 전투력 종말점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아도 이미 8월공세를 끝으로 그들은 한계점에 달했고 9월 공세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전투력이 불과 50% 미만에서 발악을 했다고 본다면 굳이 포항을 포기하지 않해도좌측의 수도사단 제1연대와 접촉을 유지하며 방어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강물에 실려간 용사님들의 영혼을 빈다"
기록에 의하면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유해중 찾지못한 유해는 200여 명이다. 하지만 이 숫자보다 훨씬 많은 용사님이 돌아오지 못하고 수습되지 않아 저 말없이 흘러가고 있는 형산강과 함께 했을 것이다.
위패로 남겨진 인원은, 경주(107), 포항(17), 죽도(13), 칠포(45), 청진(16) 등 200여 명에 불과하다.
묘비로는, 포항에 178명, 경주에 172명, 영일에 117명, 양동에 57명 등 500여 명의 용사님의 유해가 지금 현충원에 안장 되어 있다.
(2) 안강. 기계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를 말하다.
지금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위패 카드 숫자"와 "묘비 숫자"를 통해서 대략적인 전사자 인원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를 비교하면 얼마나 더 찾아야 하는지를알 수도 있다.
찾지못한 유해관련 내용으로 먼저 위패숫자는 기계 31위이며,
찾아서 안장된 인원은 안강이 268명, 양동 57명, 강동 41명으로 350여 명의 용사님이 지금 현충원에 안장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20년간 발굴된 유해는 몇 명 일까?
무릉산 일대에서 '00년 32구, 갑산리 마미산 일대에서 27구, '01년도에 무릉산에서 11구, 어래산에서 '00년도에 6구, 노당치에서 '07년도에 29구, 비학산에서 '01년도에 17구, 계전리 300고지군에서 '09년 28구. '13년에 27구. '08년에 27구 등 안강. 기계 일원에서 지금까지 약 500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찾지 못한 유해는 기계의 31명, 찾은 유해는 500여명~~!
제 4절 38도선으로 진격
1. 제8군의 추격작전 계획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개시 1주일 만에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최초 인천상륙작전에도 불구하고 대구 또는 부산 점령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강력하 저항을 계속 했으나 , 9월 18일 김포비행장이 유엔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남에서는 낙동강 서안에 유엔군의 교두보가 형성되고 다부동 서측방이 돌파되면서 방어선에 균열의 징후가 나타나게 된다.
결국 김일성은 차후 작전을 위한 주력부대의 보호를 위해 낙동강선 부대를 축차적으로 철수시켜 금강과 소백산맥선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토록 강조한다. 이에 따라 전선사령부는 대전에 전선예비, 김천에 서부지역 예비를 확보하고 제2군단으로 하여금 왜관을 사수하고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전진을 견제하는 동안 제1군단을 포함, 서부지역 부대들을 우선적으로 전환시킨다는 계획하에 9월 19일부터 주력부대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 왜관이 유엔군 수중에 들어가고, 포항에 국군이 들어가면서 자신들 제2군단 전선이 피탈되는 가운데 21일 인천상륙적전 소식이 전파되자 전의가 극도로 저하되어 독전의 총부리도 아무런 소용없이 22일부터는 전선이 붕괴되자 김일성은 9월 23일 전부대의 북으로의 후퇴명령을 내렸다.
한편 제8군사령관은 9월 22일 북한군의 전선이 붕괴조짐이 보이자 전과확대를 위한 추격명령을 하달 하였다.
"미 제1군단은 주공을 대구-김천-수원 축선에 두고 제10군단과의 연결을 이룬다. 미 제2사단은 합천-거창-안의-전주-강경 축선으로 무제한 공격을 실시한다. 미 제25사단은 진주를 점령하고 의명 서쪽 또는 북서방향으로 공격을 준비한다. 한국군은 책임지역 내에서 종심깊은 돌파와 포위기동으로 적으 격파한다."
이 명령에서 모든 지휘관은 필여한 곳에서는 측방경계를 고려함이 없이 진격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같은 날 육군은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제1군단은 주공을 청하-영덕-평해 축선을 따라, 조공은 인지동-천지동-춘양 축선을 따라 무제한 공격을 한다. 제3사단은 제7사단과 청하선에서 교대시켜 육군 예비가 되라. 평해와 춘양을 확보한 후 육본 명에 따라 북방 또는 서북방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제2군단은 주공을 도원동-함창-충주 축선에, 조공은 의성-안동-영주 축선을 따라 무제한 공격을 하라. 충주와 영주를 확보한 후 육본 명에 따라 북방 혹은 서북방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라. 제7사단과 제3사단이 교대되면 그와 동시에 제3연대는 제7사단 지휘하로 복귀하라"
이와 동시에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 지휘부를 부산에서 대구로 옮겼다.
2. 서부지역 추격작전
가. 인천상륙자전부대와 연결작전
당초 미 제1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왜관을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하게 한 다음, 미 제24사단을 선봉으로 , 제1기병사단을 후속으로 김천-대전을 향해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로 먼저 왜관교두보를 확보한 제24사단을 김천-대전 방향으로 투입하고, 국군 제1사단을 예비로 기병사단을 후속하도록 추격작전을 전개하였다.
다부동 전선을 돌파한 제1기병사단은 제7기병연대 제3대대장 린치 중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제777특수임무부대"를 구성하여 이 린치특수임무부대가 9월 22일 낙동리 도하장에 도착하여, 오발이 탄약고에 명중하여 그 당시에 주변에 있던 탄약적재 차량들이 연쇄 폭발하면서 그 조명으로 많은 수의 북한군을 수장시키면서 도하장을 확보한다는 내용은 앞에서 언급했다.
9월 23일 04:00시에 린치부대는 도하를 개시하여 교두보를 확보한다. 이어서 제7-1대대가 도하하여 상주로 진출했으나 적은 이미 철수한 다음이었다. 린치특수임무부대는 전차부대를 보은으로 출발시켰다.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9월 26일 상주에서 지휘관 회의를 통해, 12:00를 기해 제777특수임무부대는 보은-청주-천안-오산 도로를 따라 적을 추격하고, 제8기병연대는 괴산을 거쳐 안성으로 진격한다. 제5기병연대는 오후 국군 제1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조치원을 거쳐 천안으로 진출하여 남쪽 및 남서쪽에서 후퇴해 오는 적을 봉쇄하고 사단 후방을 경계하라고 명령했다.
"전차 기름이 마르도록 진격한 베이커 소대장, "헤이 오산?", 북한군은 어리둥절, 고개만 북쪽으로 끄덕끄덕~"
선두에서 진격하고 있는 제777특수임무부대인 린치부대에 제7사단과의 연결을 위해 신속히 진출할 것을 명령했다. 린치 중령은 제70전차대대 C중대 제3소대장 베이커 중위에게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전진할 것을 명하여 베이커 중위는 계획보다 30분 앞서 11:0분에 보은을 출발했다.
베이커부대는 이날 17:0시에 청주를 지나 18:00시에 충북 진천 서남방 사암리 도로 교차점 부근에서 휘발유가 떨어져 더 이상 달릴 수가 없게 되자 6대의 기름을 3대에 옮기고 3대만 진격하려 하는 싯점에 마침 어둠 속에서 3대의 북한군 트럭이 접근해 오다 미군 전차를 알게된 북한군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그런데 이 차량에 실려 있는 것이 휘발유였다. 따라서 나머지 전차에 충분히 급유하여 전조등을 켜고 계속 전진하였다. 그리고 천안삼거리에서 길을 몰라 마침 그곳을 지나 후퇴하는 북한군 병사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천안에서 오산북방으로 진출한 베이커부대는 죽미령 일대에서 사격을 받아 일시 오인사격의 혼란이 벌어지지만 곧 아군임이 식별된다. 바로 미 제7-31연대와 9월 26일 22:36분 접촉하게 된다. 무려 11시간만에 170km를 달려 감격의 순간을 맞이 했다.
반면 후발대로 들어오는 린치부대 본대는 1시간 뒤에 오산 남쪽 하북리에서 북한군 전차 10대와 교전하여 7대를 격파하고, 린치부대 전차는 2대가 격파되었다.
9월 27일 08:00시에 오산에 진입한 후 08:26분에 오산북방의 작은 교량에서 제7기병연대 K중대의 맨실 상사가 미 제31연대 H중대와 만나 감격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제1기병사단이 상주-수원 일대에서 부간군 패잔병을 소탕하는 동안 유엔군의 38도선 돌파가 결정되었다. 사단은 10월 5일 제5기병연대가 문산에서 임진강을 도하하고 10월 8일까지 전 사단이 개성 일대에 집결하였다.
나. 대전 탈환전
미 제1군단의 주공 미 제24사단(제5연대전투단 배속)은 9월 23일 왜관-김천간의 국도를 따라 제21연대를 선두로 3개 연대 종대대형으로 북서쪽의 김천을 향해 진격하였다.
북한군 제105전차사단(사단장 유경수 소장)은 요소요소에 전차를 위장해 매복시키고, 도로상엔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대전차포를 배치하여 아군의 추격을 방해하였다.
9월 24일, 미 제24-19-1대대가 왜관-김천 간의 국도상 부상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공격하여 성주를 탈환하였고, 시가지 남쪽의 영국군 제27여단과 연결하였다.
한편 제5연대 전투단은 24일 00:30분경 제21연대를 추월하여 김천으로 진격을 선도하였다. 부대는 김천 외곽 월천동 국도변의 140고지 능선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여 전차 6대가 격파되고 북한군 전차 8대를 격파하였다. 여기서 북한군 1개연대 규모가 전멸하고 미군도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김천에는 북한군 전선사령부와 제1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곳이다.
미 제5연대전투단은 9월 25일 미 제21연대와 협공으로 김천에 돌입하게 되며, 9월 26일 별 저항없이 영동, 27일 옥천까지 진격하였지만 대전에 진출하면서 북한군의 대전차지뢰에 지연된다. 미 제24사다은 대전 동남쪽 전투에서 북한군 300명을 포로로 하고 전차 13대를 파괴하였다
미 제24-19연대는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 16:30분에 대전 외곽에 도달하고 포병연락기가 대전비행장에 착륙한다.
※ 국군 500여 명이 집단학살되어 묻혀있다
대전탈환에 이어 소탕작전에 돌입한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 부근에서 손을 뒤로 묶인 채 500여 명의 국군이 집단학살되어 매몰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대전시내에서 5,000~7,000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 17명의 국군, 40여 명의 미군이 살해되어 매장된 곳을 찾아냈다.
미 제24사단은 대전탈환후 낙동강에 이르는 161km에 달하는 병참선 경계임무를 맡는다.
다. 국군 제1사단의 후방지역 잔적 소탕과 38도선으로의 진격
(1) 보은-미원 부근 전투
미 제1군단 예비인 국군 제1사단은 25일 낙동리에서 도하를 완료하고 추격작전 대열에 들어섰다. 사단은 26일 상주로 진출하였는데 미 제1기병사단을 후속하여 상주-보은을 거쳐 미원으로 진출하면서 제11연대는 미원에, 제15연대는 화령장을 거쳐 보은에 진출하였다. 제12연대는 상주에서 후방지역 소탕작전을 진행한다.
※회인에 불었던 피바람
'50. 10월 2일 제11연대는 미원일대에서 증평으로 이동하고, 제15연대(9월 30일부 최영희 연대장이 부사단장으로 영전하고 조재미 중령이 취임)는 계속하여 보은 일대에서 계속 임무수행중 사단은 사단 사령부를 청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1사단 예하 부대는 계속적으로 훈련과 부대정비를 실시하면서 주변의 잔적소탕 작전을 완료하였다.
(2) 38도선으로 진격
국군 제1사단은 10월 6일 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대전의 미 제1군단사령부를 찾아가 사단의 평양탈환전 참가를 요청해 승인 받았다. 미 제1군단은 10월 3일 미 제8군으로부터 북진명령을 받고 미 제1기병사단이 5일에 임진강을 도하해 개성으로 진격중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미 제24사단과 임무교대하여 군단 주공의 진격을 엄호 하면서 북진하도록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제1군단의 우측 공격부대로 전환된, 국군 제1사단은 10월 8일부터 사단 사령부와 각 연대들을 38선으로 진출시켜, 제12연대는 안성-평택-수원-소사-서울을 경유 하여 봉일천 등원리로, 제11연대는 수원-용산을 거쳐 파평으로, 제15연대는 안성에서-평택-영등포를 거쳐 고랑포로 진출하얐고 사단은 봉일천에 위치하였다.
이 무렵 미 제1군단의 주공인 미 제1기병사단이 개성 북방에서 38선을 돌파하고, 국군 제1사단 우측에는 국군 제8사단의 제21연대가 연천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국군제1군단은 언산선에 근접하고 있었다.
38선 돌파를 눈앞에 둔 제1사단은 10월 10일 전 예하부대가 임진강을 넘어 고랑포 일대의 공격대기지점으로 들어가고 사단 사령부도 고랑포에 있던 면사무소로 추진하였다.
돌파 및 소탕작전간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4,543명을 사살하고 5,211명을 생포하였으며, 반면에 사단은 355명이 전사하고 77명이 실종되었다고 전사는 기록한다.
라.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GO G0~!"
미 기병 제1사단의 최 첨병 소대로 나선 제777특수임무부대, 린치 부대는 맨 선두에 베이커 중위가 소대장으로써 최대한 빠른 속도로 경부국도를 달려 천안에 이르렀다. 그런데 길을 잘 모르는 베이커 소대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두리번 거렸다. 옆에 보니 조그만한 남자가 지나간다.
"헤이, 오산?" 하고 물었다.
그 어린 남자는 북한군 의용군이었다. 무시무시한 미군 탱크에 놀라서 말도 못한다. 그저 손짓으로 대답했다.
"GO GO!"
그래도 베이커 전차는 잘만 달려 수원 죽미령에 도달했다.
나. 국군 500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되어 묻혀있다
대전탈환에 이어 소탕작전에 돌입한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 부근에서 손을 뒤로 묶인 채 500여 명의 국군이 집단학살되어 매몰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대전시내에서 5,000~7,000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 17명의 국군, 40여 명의 미군이 살해되어 매장된 곳을 찾아냈다
그러나 지금 대전비행장 부근은 흔적도 없다. 물론 이 많은 유해는 그 당시에 전부 수습하여 일부는 유가족이 찾아가기도 하고 일부는 그대로 현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너무 보기에 안타까워 가까운 공동묘지나 일부 통제된 곳으로 옮겨져 가매장 되었다.
다. 회인에 불었던 보복의 피바람
제15연대가 9월 28일 보은읍 일대에 진입하면서 회인과 문의지역에서 1,000여 명의 북한군 패잔병 및 유격대를 섬멸한다. 이런 곳은 바꾸어 이야기하면 그만큼 지역주민들이 북한군과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 질수도 있는 곳들이다.
북한군이 진주하면서는 지역 프락치들이 일어서 많은 양민들과 경찰 군인의 일가족을 몰살하는 앞잡이들이 많은 곳이 된다. 마침 국군 제15연대에는 이곳 회인 출신 중대장이 있었는데 수복하면서 집에 가보니 임신을 한 가족부터 온 집안 식구가 피해를 입었다.
이걸 목격한 중대장이 이 일대의 부역자들이나 앞잡이를 했다고 신고되는 집을 찾아 보복을 함으로서 하루에 18명이 한순간에 다리밑으로 끌려가 죽게 된다. 그 동네는 18가옥의 제삿날이 같은 날이다.
라. 제1사단이 사살한 4,500명의 북한군이 진짜 북한군인지, 점령지마다의 부역자들을 총살한 인원까지인지 의문이다?
전사 기록에 의하면(제6권 296~) 보은 일대에서 격멸시킨 북한군이 1,000명이 넘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격간에는 북한군은 시신을 처리할 여유가 없었다. 모두 지역에 유기되었다는 것인데 이 많은 시신들이 다 어디로 갔다는 것인지?
나는 이곳 충북지역에서 2년간 포병연대장을 하며 정말 샅샅이 지역마다 돌아다니며 제보를 받고 산에 올랐다. 후퇴당시의 앞선 내용에서 언급이 되어있지만 미원을 깃점으로 주로 회인까지 광범위하게 국군 제1사단은 후퇴과정에서 그리고 진격하는 과정에 원 사단의 진출로르르 따라서 올라오며 그 지역의 일부 불순세력과 프락치들을 처단하는 일도 수행한다.
북한군을 따라 가버린 세력은 어쩔수 없지만 그 일가친척이 받아야하는 대우는 처참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일가친척도 원수였다. 살기 위해서 북한군이 있을 때는 북한군 편에 서고 국군이 들어오니 국군 편에 서야 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 하나로 가리키면 곧 죽음이다. 그 죽은자들은 대부분 유족들이 어두운 밤이 오면 시신을 찾아간다. 그래서 사실 없다.
마. 충북지역 민간인 피해 사례 (앞에서도 언급되었음)
가. 청주형무소 피해
1950. 7. 8~9 등 7월초에 군경이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정치범(대부분 보도연맹 가입자)을 중심으로 약 200여 명을 북한군이 남하하면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청주시 산성동과 미원 국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3백여 미터 떨어진 골짜기, 청원군 남성면 관저1리 도장골, 청원군 피발령 아래 가덕공원묘지 8지구 등에서 군경이 용수를 씌운 재소자들을 트럭에 싣고 와서 풀어준 뒤에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 사후에 주민들이 가매장 등 사후 수습에 동원되었다.
나. 청주 보도연맹 피해
1950. 7월 초에 군경이 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청주 남일면 두산1리 분터골에서 100여 명, 청주 피발령아래 가덕공원 묘지 8지구에 200여 명이 처형되었다.
다. 청원 덕유리 보도연맹 피해
1950. 6. 27~29일에 군경에 의하여 청원지역 보도연맹 50~60여 명이 군용트럭에 실려 청원군 덕유리 광원마을(지금은 수몰됨)에 끌려와 일부는 뽕나무에 묶여서, 일부는 뒤로 손이 묶인 채 군경이 도로위 산쪽에서 총을 쏴처형하였다.
라. 청원 남성면 추정리 보도연맹 피해
1950. 7 8일 군경이 트럭 두대에 100여 명을 실고와 콩밭을 짓밟고 산으로 향했고 이후 3일간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운좋게 한사람이 살아서 도망쳐 동네에 알리는 바람에 그지역 유족들이 달려와 통곡으로 가득했다.
마. 청원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골짜기 보도연맹 피해
1950. 7. 9~11어간에 군경 40명이 괴산군 사리면, 칠성면, 불정면 일대의 보도연맹 800여 명을 끌고와 기관총을 준비란 채 대기하고 있다가 새기줄로 양손을 묶어 열명식, 스무명씩 세워놓고 총을 쏴죽였다. 여기에 월북작가 홍명희의 어머니도 포함돼 있었다. 충북지역 최대의 피해지역이며 당시에 충북일원에서 3천여 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 청원 오창면 양곡창고 보도연맹 피해
이곳은 내가 제6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에 실제 당시에 이곳에서 기관총 사격을 통제한 예비역 대령을 직접 만나서 함께 찾오 묵념을 올린 곳이다.(당시는 중위로 육사 8기생이었다)
오창면, 문백면, 진천읍 사석리 등에서 400~5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을 7월 6일에 잡아서 군용찰량 등에 태워서 끌고와 창고안에 가둬 놓았다가 1950. 7. 10/11일에 지도자급 12명은 군 헌병이 사살하고, 나머지는 양곡창고에 있는 그대로 7월 10일 밤 군이 퇴각하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트려 사살하고 11일에는 동이 틀무렵 비행기가 같은 장소를 폭격했다.
아. 단양 곡계굴 미군 폭격
1951.1. 20일 미군 비행기 4대가, 1.4후퇴로 피난민들이 방공호나 영춘면 주민 100여 명, 강원도 영월 등지에서 온 300여 명의 피난민이 있는 굴을 맹폭하여 굴 입구에 가재도구등이 모두 타버렸고 4시간이 계속된 포격으로 연기에 질식되고 파편에 기총소사에 맞아 400여 명이죽었다. 이 전투기들은 다시 상2리 마을에도 네이팜판을 퍼부어 가옥 70여 채가 전소 되었다.
자. 옥천 평산리 들미마을 보도연맹 피해
1950. 7. 14일 경찰이 옥천군 청성면, 정상면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옥천 창고에 4~5일간 구금하였다가 수십명씩 트럭에 실고가 들미마을 성골에서 학살했다.
차. 옥천 금구리 보도연맹 피해
1950년 7월에 경찰이 옥천경찰서에서 각 면의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구금했다가 200여 명을 학살했다.
카. 옥천 월전리 말무덤재, 용머리 바위 등 보도연맹 피해
1950. 7. 9/12/13일에 경찰이 철사줄로 묶인 600여 명 트럭에 실고와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총살했으며 겹겹이 매장했다.
타. 영동 황간면 노근리 굴다리 피해
1950. 7. 26~29일 어간에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가 피난민 저지선을 넘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소개시키는 과정에 피난민 대열에 들어와 있는 북한군 오열들의 책동등이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넘지말라는 선을 넘게 되고 몇번의 이런 과정속에서 피해를 본 미군이 총을 쏘아 250여 명의 지역 피난민이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미군측에서 2000년도에 한미합동조사를 통해 어느정도 진실이 규명되고 일부 피해보상도 있었으며 나는 유해발굴 통제장교로써 두번에 걸쳐 현장 합동 조사에 참여하였다.
파. 영동 석쟁이재 보도연맹 피해
1950. 7월 중순에 영동경찰서에서 산막리, 양정리 등 인근지역 보도연맹원 300~400여 명을 설계리 야산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하. 영동 부용리 어서실 보도연맹 피해
1950. 7월에 영동경찰에 의해서 부용리 어서실 보도연맹 100여 명을 큰 구덩이 두 개를 파 놓은 후 사람들의 손을 엮어 놓고 총을 쏴 학살했다.
이상의 피해내용은 피해정도가 심한 것 위주로 발췌하였고 실제 노근리나, 오창, 분터골 같은 것은 직접 찾아가 현장을 답사도 하였으며 사실관계를 내가 밝힐 수는 없는 아픔이 있다.
라-1 : 발굴된 유해 숫자 비교
사실 대전지역의 유해발굴은 그렇게 진전이 없다. 지역의 변화가 심하여 발굴지역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반격작전과 연관이 되는 지역이나 내용 위주로 비료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 대전지역 일대에서 찾지 못한 유해는 금산 복수에 307위, 충주 161, 청원 16, 청주 16, 진천 16, 옥천 12, 제천 13, 오창 11, 청원 옥산 10, 음성 43, 음성 원남 13 위 이다
서해안 방면으로 보령 월사리 241, 태안 167, 논산 14, 예산 오가 10, 보령 월도 11, 서천 신포해안 10, 해미 안평 10, 보령 오서산 10 명이다.〕
대전탈환에 이어 소탕작전에 돌입한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 부근에서 손을 뒤로 묶인 채 500여 명의 국군이 집단학살되어 매몰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엿다. 또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대전시내에서 5,000~7,000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 17명의 국군, 40여 명의 미군이 살해되어 매장된 곳을 찾아냈다.
3. 서남부지역 추격작전
가. 합천-논산 추격작전
낙동강 서남부 전선에서의 추격작전은 미 제9군단에 의해 전개되었다. 제9군단은 밀양에 사령부를 두고 제2사단과 제25사단을 작전통제하여 9월 23일부터 작전을 개시한다.
군단에 하달된 명령은 강경을 점령하고 금강선을 학보하여 경부축선 서부지역의 북한군 퇴로를 차단하여 지대내 적을 포위하여 양단된 적을 각개 격파한다는 것이다.
미 제8군사령부의 명령이 떨어진 9월 22일, 제2사단은 초계와 신반리 일대에서 공격준비를 하게 된다. 북한군은 신반리의 북한군 제4사단, 합천의 제9사단이 이미 합천 서쪽으로 철수하였고 제2사단이 초계로 집결중이였다.
9월 24일 미 제2사단은 양익포위로 합천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25일 거창으로 진격했다. 이때 북한군 제2사단(사단장 최현)이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있었으며 450여 명을 생포하였다. 26일 거창을 점령하며 안의-전주로 전주로 진출하는 과정에 9월 28일 13:15분경 미 제38연대는 북한군 제102,104 경비연대 300명중 100여 명을 사살하고 170명을 생포하였다.
미 제2-38연대는 9월 29일 새벽에 강경에 도착하여 사단의 추격작전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에따라 제38연대는 강경-전주지역에, 제23연대는 안의, 제9연대는 고령-삼가지역에 재배치하여 패잔병 소탕과 병참선 경계에 임하였다.
미 제2사단은 반격기간 중 적 사살 360명, 포로 757명이고 사단의 손실은 전사 32명 이었다.
나. 진주-군산 추격작전
미 제25사단은 제8군사령부 작명에 따라 진주를 탈환하고 의명 서측방, 혹은 서북방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였다.
23일 제9군단의 작전통제에 들어간 사단은 23일 아침, 제35연대가 진주고개, 해안을 따라서 추격한 제27연대가 배둔리까지 진출하였으며 제24연대가 서북산을 소탕 중이었다.
9월 24일 아침에 제35연대가 진주고개를 점령하게 됨에 따라 군단은 제25사단으로 하여금 진주를 탈환한 후에 군산 점령을 목표로 함양-남원-이리 축선을 따라 진격하라 지시하였다.
9월 25일 제35연대는 02:00시경 남강을 도하해 북한군 1개 대대를 격멸하고 오후에 진주를 점령하고 연대주력이 진주에 집결하였다.
한편 의령 방면으로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27연대는 24일 아침부터 지역주민 1,000여 명의 도움을 받아 수중교를 26일 아침에 완료하여 정오경에 의령을 점령하고 28일에 진주로 진출했다.
이에 따라 킨사단장은 제27연대로 진주지역 경계를 시키고, 제24연대와 제35연대를 중심으로 2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다. 제24연대는 제79전차대대 A중대장 매튜스 대위가 지휘하는 "매튜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 진주-하동-구례-남원-순창-김제-이리-군산으로 진출하고, 제35연대는 미 제89전차대대장 돌빈 중령이 지휘하는 "돌빈특수임무부대"를 편성 진주-하양-남원-전주-이리-강경을 경유 금강선으로 진출토록하였다.
사단 우측으로 기동하는 돌빈특수임무부대는 지뢰지대 개척과 산악에 은거한 적의 저항을 공중지원하에 극복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을 추격하여 지리산 북쪽으로 우회하여 28일 함양을 점령하고 15:00시경 남원에 진입한다. 이대 이곳에는 매튜스특수임무부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매튜스특수임무부대"는 하동고개를 통과하며, 지난 7월말 못트 대대가 첫 전투에서 괴멸의 비운을 맞았던 하동주변에는 수백구에 이른 전우의 유해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매튜스특수임무부대가 하동을 통과할 때에 지역주민으로부터 미군포로가 끌려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하동 북방 16KM지점에서 구출했다.
28일 남원에 진입하면서 미 공군의 폭격에 대피하느라 미처 미군 보병부대의 진입을 알지 못하다 전차를 보고 놀라서 대혼란이 생기고 이를 격멸하게 되며 그 사이 한가옥에서 86명의 미군포로가 쏟아져 나와 구출된다.
이날 15:00시경 돌빈부대가 남원에 진입하여 합류하며 후속한 제24연대 3대대, 일명 "블레어특수임무부대"가 진격을 시도하여 29일에 정읍, 이리를 거쳐 금강에 도달했으며 제24-1대대가 군산을 무혈 입성했다.
미 제25사단은 군산을 점령후 제24연대는 군산을, 제35연대는 이리지역을, 제27연대는 진주-함양-남원간 병참선을 경계하였다. 미 제9군단은 9월 16일부터 낙동강 서부에서 돌파작전을 펴 북한군 제2,6사단을 비롯하여 제4.9.7사단 등 북한군 제1군단 예하 5개사단을 추격하여 재편성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이때 철수하지 못한 적들이 조직적으로 지리산 일대의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후일 게릴라의 기지가 되었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구례경찰서의 비극을 보다
진출하던 미군 선발대가 구례를 지나면서 경찰서에 들어가 보니 너무도 기막힌 참상이 진행 중이엿다.
패주하던 북한군이 저지른 것인지 지역 빨갱이 들이 저지른 것인지는 몰라도 경찰서 내부 철창안에 수많은 사람을 집어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르고 도망가 버렸다.
사람이 산채로 불에 타고 그걸 피해야 하는사람과 지금 불붙은 사람의 아비규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탐사간에 구례경찰서에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위치가 변하여 그 흔적을 볼 수는 없는데 문제는 근무하는 경찰관에게 이런 사실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지역주민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옛날 경찰서 자리에서 북한군이 도망가며 많은 사람을 유치장에 넣고 불질렀다는데 아시나요?"
"뭐 그때는 다 그러려니 했어요. 이 동네도 비행기가 포격해서 다 타버리고 집에 있던 사람들 다 죽었어요?"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란다. 하지만 그 골짜기 곳곳마다 피흘린 아픔이 서리고 아직도 그 한은 진행형이다"
(2) 미군의 진출로는 북한군의 진격로였다.
전사에 보면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면서 북한군의 진출 속도를 저지하기 위해 교량을 다 폭파한다.
그래서 한강교 폭파, 안동교 폭파, 오십천교 폭파 등으로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유는 사전 통제되지 않고 폭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폭파된 곳이 왜관철교이다.
문제는 북한군이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 오며 신속히 도하를 해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포위소멸을 달성할진데 그러지를 못했다. 아군의 포병과 비행기의 맹폭에 도하를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고안해 낸것이 수중교다.
북한군은 도섭이 어느정도 가능한 곳을 선정하여 지역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밤사이에 마대등을 이용하여 물속에 다리를 놓고 병력뿐만 아니라 중장비도 이곳으로 도하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밤에는 정찰기로 식별이 곤란한 점을 이용하여 물속에 다리를 놓고 건너고 혹시니 억수로 쏟아진 비로 유실되면 또 쌓고 그들은 9월의 최후공세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남한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않고 끌어다 물속으로 투입했다.
물론 이 다리들은 주간에 식별되면 유엔군의 포격으로 또 파괴되고 밤이면 또 만들고 숨바꼭질이 계속 되었는데 역으로 공세이전에 성공한 유엔군과 국군이 진출할 때는 이곳이 또한 도하장소로써 역활을 충분히 했다
(3) 미군이 진출한 격전지에는 남겨진 북한군 시체가 없다.
미군은 진격하면서 전장 정리반을 운용하여 미군의 유해는 많은 수를 수습하였다. 지역 주민의 제보와 포로들의 진술을 토대로 지역에 들어와 미군을 수습하게 된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면이 있었다면 발굴하는 과정에 국군도 있을 것이고 북한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이런 경우에 별도로 수습을 한 것이 아니고 옆에 가매장을 다시 해버렸다고 한다. 한 예로 조치원 밑의 부강리 전투지역은 미군과 북한군간에 금강도하를 놓고 후퇴과정에 엄청난 군인들이 전사해서 그 다리 주변에 가매장 되었는데 미군이 진격하면서 포크레인까지 들어와 다 파낸 후에 미군만 수습해 갔고 기타 유해는 그 강변 모래사장에 다시 묻어버렸다.
이러한 경우는 상주에서도 미 제25사단 병력이 가매장된 장소에 국군과 북한군이 엄청나게 같이 매장된 것을 미군이 들어와 미군만 수습해 가고 기타는 옆에다 그대로 가매장되면서 부패되어 아예 구분조차 힘들어 차후에 경찰이 통제하여 발굴되면서 전부 화장되어 버렸다고 한다.
(4) 퇴각하는 북한군은 더이상 정규군이 아니였다.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치를듯이 높았다. 세계 1,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군도 북한군에 밀리어 낙동강까지 왔다. 미군이 처음 판단하기에는 미군 모습만 봐도 북한군은 물러날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주일 주둔 미군이 많이 본국에 복귀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전에 참가한 부대 병력은 사실 전투경험이 없는 인원이 많았다.
그러나 미군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전투경험이 축적되고 3.5인치 로켓포와 패튼 전차가 들어오고 서서히 그 위력을 찾아가고 해병대는 정말 많은 인원이 신병으로 편성되었음에도 해병의 자존심과 해병대를 키울려는 다짐으로 열심히 사워 그 명성을 살렸다.
하지만 막상 북한군은 그들의 9월 공세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처음 미 제24사단이 경부가도에서 밀려나던 모습처럼 , 아니 그보다도 더 형편없는 오합지졸의 군대가 되어 물러났다.
그 이유는 바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계속되는 유엔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와 실제 30% 미만의 병력에 그마저도 대다수가 남한의 점령지역에서 강제로 동원된 의용군이었다.
이 의용군들은 중고등학생이 태반이고 게중에는 여학생부터 나이들은 장정까지 다양하게 끌여들여 전쟁터로 내몰았다. 하지만 대부분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했고 무기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 총알받이로 활용된 것이다.
4. 중동부지역 추격작전
가. 신녕-춘천 추격작전
중동부지역의 추격 작전은 국군 제2군단이 9월 23일 제6사단을 주공으로 도원동-함창-충주 축선으로, 제8사단이 조공으로 이성-안동-영주 축선을 따라 진출하여 충주와 영주를 확보한 후 북방 혹은 서북방으로 이동하도록 준비하고 명령이 주어졌다.
이에 다라 제6사단은 신녕의 조림산에서 부터 함창을 거쳐 충주로 향하도록 했다.
이 무렵 국군 제6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8사단(사단장 오백룡 소장)은 조림산에서 철수하여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하였고, 그 주력은 안동-영주-단양 방면으로 빠져 나갔다.
이러한 정황을 판단한 제6 사단장은 25일 일제히 진격을 개시하여 26일 각 연대가 도하지점인 낙동리에 진출, 야간 도하로 함창까지 진출하였다.
27일, 제6사단은 제2연대가 보은과 괴산으로 진출하고, 제19연대는 점촌 부근 유곡리에서 북한군 2개 대대와 격전을 치르고 격파하였으며 제7연대가 문경까지진출하였다. 그리고 29일 충주를 확보하였다. 9월 30일, 사단에 새로운 명령이 주어져 제6사단은 제천-주포리-원주 축선을 딸라 춘천까지 계속 전진하라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제6사단은 3개 연대 종대로 진출을 실시하여 제2연대 선봉으로 충주를 출발, 9월 30일 당일 16:00시에 횡성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24:00시에 원주에 돌입했다. 제7연대는 충주에서 차량을 이용해 구간 전진을 하며, 제2대대가 청풍에 이르며 제3대대가 16:00시에 충주까지 진출한다. 제19연대는 원주외곽 지역으로 진출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 제2연대는 원창고개에서 적 1개 중대로부터 저항을 받으며 격퇴하고 춘천시내로 진입했다.
한편 제2연대를 후속하는 제7, 19연대는 제7연대가 원주에서 잔적 소탕을 , 제19연대는 문막일대에서 패잔병 2개 대대와 격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하고 양평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의 패잔병 2,000여 명이 국군 제8사단에 쫒겨 제천에서 원주에 이르는 신림고개 일대에 고립되어 있다가 북으로 철수하였는데 그 철수로상에 위치한 제6사단 전투지휘소와 제2군단 전투지휘소가 습격을 당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들은 원주에서 1,000~2,000명의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9월 16일 신녕에서 반격작전으로 돌아서 9월말 원주를 탈환하고 10월 2일에 춘천에 도착하였다. 한편 양평에서 용문-용두리를 경유하는 제19연대는 18:00시에 사단사령부와 더불어 홍천에 집결하였다.
10월 3일, 국군 제6사단은 제2연대가 춘천에서 38선 돌파준비를 하고 제2군단 사령부가 양평을 경유해 서울의 보송중학교에 지휘소를 설치 하였다.
10월 4일, 제6사단은 제2연대가 38선 경계인 모진교에서 돌파준비를 하고 제7연대는 수리봉과 652고지등 춘천을 경계하고 제19연대는 사단과 춘천으로 이동하되 제1대대가 가평-춘천간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홍천-가평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나. 의성-동두천 추격작전
(1) 의성 -단양 추격전
영천의 제8사단은 구산동을 점령하던 날인 9월 22일 군단의 조공으로 의성-안동-영주 축선을 따라 공격하라는 명령에 우선 의성을 9월 24일 점령하고 9월 25일 안동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모든 교량을 폭파해 사용불가로 만들고 도섭이 가능한 지역은 지뢰를 매설하여 국군의 진출을 최대한 지연하려 했다.
이에 응하여 사단은 항공지원으로 적부대를 집중 폭격하고 포병화력으로 지뢰지대를 포격하여 25일 안동에 진입하였다. 9월 27일 북한군의 패잔병 4,000여 명이 예천방향으로 패주한다는 정보에 제21연대를 영주-단양 쪽으로 투입하여 죽령을 점령하여 퇴로를 차단토록 하고, 28일 제10, 16연대는 영주에 진입후 바로 풍기를 거쳐 죽령에 진출하여 제21연대와 합류했다.
죽령일대에서 북상중인 적 2개 연대규모를 포착하여 포병 화력과 협조된 공격으로 적을 와해시키고 패잔병은 산악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했다.
9월 29일, 제10연대 선두가 단양에 입성하면서 육군명으로 충주-원주-횡성-용두리-양평-수유리 축선으로 의정부까지 진출하라는 예비명령을 부여 받았다.
(2) 양평-연천 추격전
국군 제8사단은 9월 30일 단양을 출발, 대강-삼곡제천을 경유하여 원주 남쪽 신림부근까지 진출하였다. 신림을 지나 원주에 이르는 치악고개는 동북쪽의 남대산(1,182m)과 서쪽의 백운산(1,087m) 사이의 계곡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이곳을 통과하는데는 많으 경계가 요구되었다.
제8사단은 신림에서 부대정비를 한 후 10월 1일, 원주로 진출하기 위해 제21연대가 신림고개 마루에 이르렀을 때 1개 연대 규모의 적과 조우하게 된다. 이 적들은 이미 국군 제6사단이 원주를 선점하여 퇴로가 차단됨으로서 퇴로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8사단장 이성가 장군은 제6사단장 김종오 장군과 협조하여 적을 격멸토록 건의하였으나 협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의문을 갔고 있지만 제8사단장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제6사단이 야간에는 병력을 산능선이 아닌 밑으로 내려 공제선을 투시하도록 길 옆에 배치해야 하는데 산 능선에 배치함으로서 적이 이 공간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고 한다.
적들은 북으로 밀려 원주를 통과하면서 제6사단사령부와 제2군단사령부를 기습한 후 원주북방으로 도주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10월 2일 새벽에 원주에 돌입, 바로 양평으로 진격을 계속 하였다. 당시 양평에는 약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저항하고 있었으며 사단은 제10연대를 동북쪽으로 우회시키고 정면에서는 제21연대가 진격함으로서 적은 용문산 줄기를 이용 도주하였다.
10월 2일, 양평을 탈환한 국군 제8사단은 이 지역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다음날 중앙선 철로를 따라 양수리-도농을 거쳐 서울 미아리까지 진출하여 10월 6일가지 3일간 부대정비를 하였다.
제8사단은 부대정비를 마친 10월 6일 의정부를 경유해 동두천으로 진격하였다. 사단은 전쟁초기 마차산에서 고립되었던 제6사단 잔류인원인 마차산 유격대를 무려 100일 만에 만나 모두를 사단 특수유격대로 편성하였다.
동두천을 탈환한 제8사단은 10월 7일 제10연대를 선봉으로 초성리까지 진출한다. 여기서 한탄강을 건너야 하는데 북한군이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주변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진출을 저지하는 상황하에 10월 8일 38선 돌파를 감행한다.
한편 제7사단은 군예비로 있다가 제6. 8사단을 후속하여 9월 말 문경으로 북상한다. 9월 29일 제2군단에 배속되어 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에 도착하였음며 다음날 포천으로 이동하여 차후작전을 준비한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단양일대 또아리굴 및 죽령고개 일대에 유해가 없다
이미 몇번에 걸쳐 피아간 죽은 인원의 숫자에 대한 의구심은 언급하였다. 당시에 유해수습을 쌍방간에 원활히 하지못했기 대문에 전투지역 일대에 많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50년, 70년의 세월 속에 수많은 자연재해나 도로개설, 농업단지 조성 등의 인위적 지형변화에 따른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그 지역의 주민들이 그걸 알지 못한다면 사실 진위여부가 갸우뚱해진다.
우리 전사에는 몇십명은 숫자도 아니다. 보통 100~150이고 500이나 2,000도 나온다. 그럼 이 정도의 유해라면 규모가 얼마나 될까?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동네에서 부역에 나가 묻거나 차후에 군인이나 경찰의 통제로 수습되거나 지역에서 화장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더라도 그 사실의 소문은 이어져야 한다.
이곳 단양의 소백산맥을 끼고 금강-소백산맥선이 무너지는 후퇴작전간에도 우리 제8사단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여 남한강 차안상이나 슬음산, 소백산 등에 많은 피해가 벌어지고 그 중앙선 기찻길에 있는 또아리굴 일대도 많은 유해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난 20여년의 조사결과 우리는 별로 였다.
우리가 발굴한 유해는 마조리 일대에서 '04년도에 38구, '08년도에 10구, 슬음산 일대에서 '03년도에 4구등 100구 미만이다. 용부원리 죽령역이나 연화봉 일대에서 희방사로 내려가는 계곡등에 시신이 많았다는 제보는 있었으나 군인이기 보다는 당시에 피난민들이 모여 있다가 폭격으로 숨진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 연화봉에 있는 여러 중계소 공사간에 실제 고지주변에 있던 유해는 모두 훼손 되었다. 이곳 공사현장에서 일했던 당사자를 직접 만나서 제보도 들었고 연화보에 올라 조사도 했으나 흔적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1-1) ; 발굴된 유해 비교
현충원 위패 숫자는 충주 161위 상주 외서 404위, 군위 172위, 의성 81위, 점촌 13위, 풍기 죽령 14위, 제천 13위, 음성 43위, 음성 원남 13위로써 1,000위의 숫자다.
반면 발굴되어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안동 188명, 의성 125명, 효령 82명, 문경 79명, 신녕 88명, 해평 51명, 영주 43명, 유곡 41명, 안계 33명,상주 30명, 의흥 33명, 국통산 27명, 군위 28명, 단촌 14명, 비안 13명 등으로 공교롭게도 이숫자도 1,000명 선이다.
(2) 양평에서의 제6사단, 제8사단의 혼전! 누가 누구와 전투를 했을까?
양평하면 대부분이 용문산 전투를 생각한다.
이 전투는 중공군 4월 공세시 화천 사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대패를 하여 물러난 아픈 추억이 있는 제6사단이 반대로 중공군 5월 공세를 맞아 '51. 5. 18~20일 까지 중공군 3개 사단을 끌여들여 격멸시킨 곳이 용문산 지역 전투다.
그러나 이전투는 양평까지 내려오지않고 홍천강 남안, 북한강 동안에서 장락산맥을 끼고 남쪽 벽암산 아래 가일리 선 안에서 중공군을 물리친 전투로 이 전투 이후에 중공군은 더이상 38선 이남에서 공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
반면 낙동강선에서 반격작전시는 상황이 다르다.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원창고개에서 적 1개 중대로부터 저항을 받으며 격퇴하고 춘천시내로 진입했다. 한편 제2연대를 후속하는 제7, 19연대는 제7연대가 원주에서 잔적 소탕을 , 제19연대는 문막일대에서 패잔병 2개 대대와 격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하고 양평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양평에서 용문-용두리를 경유하는 제19연대는 18:00시에 사단사령부와 더불어 홍천에 집결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10월 2일 새벽에 원주에 돌입, 바로 양평으로 진격을 계속 하였다. 당시 양평에는 약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저항하고 있었으며 사단은 제10연대를 동북쪽으로 우회시키고 정면에서는 제21연대가 진격함으로서 적은 용문산 줄기를 이용 도주하였다.
양평읍 성두봉(433m)고지 아래에 용천리 사나사 계곡이 있고 그 밑의 동네가 옥천리 및 단애리, 덕평리다. 여기서 용문산 전투의 핵심지역인 가평 설악 엄소리-신천리까지는 20km 거리고, 중공군이 우회하여 내려온 용문산 동쪽 용문면 신점리와 중원산은 사나사 절이 있는 용천리의 바로 북방의 거리에 있다.
따라서 전사대로 인용하면 양평일대의 전투는 제8사단 제10연대 및 제21연대가 전투를 하고, 제6-19연대는 양평에서 용문-용두리-홍천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탐사 및 탐문활동을 하면서 이곳 용천리와 신애리 지역에 들어갔을 때에 직접 전투를 목격했다는 지역 주민이 제19연대가 들어와 북한군과 전투를 했고 북한군이 용문산으로 도주했다는 것이다.
"아저씨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걸 왜물어요. 먹을 만큼 먹었지. 얼마로 보여요?"
"죄송하긴 하지만 한 60 중반?"
"뭘 거짓말, 정말이요?"
"왜 거짓말이라 하시는지요. 한 50후반입니까?"
아저씨는 '12년 당시에 81세였다. 지금은 살아계신다면 91세다. 전쟁 당시에 군에 갈 나이였다. 하지만 너무 키작고 마침 이질병에 걸려 누구도 데려가려하지 않았다. 집에서 누워 가져다 주는 밥을 먹고, 동네에 프락치가 살았는데 실정을 알고 있으니 인민군 시절에도 잡혀가지 않았다.
이 어른의 제보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전쟁이 났다는데 사실 동네분들이 피난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이유는 전쟁이 났는지도 몰랐다. 잠자고 일어나니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잘 살지는 못하지만 밥을 굶지는 안했는데 마침 옆집 형이 갑짜기 사라졌었는데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나타나 완장을 두르고 동네를 활보하며 완전히 북한군 앞잡이 역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 집이 바로 옆집인데 사람은 바뀌었다. 북한군이 떠나갈 때에 함께 집 식들 모두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덕분에 살았다. 하루는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더니 사나사 절에 갔다. 절 앞에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 일부군인들과 경찰인지 붙들려 와 묶여 있다. 아마 절이 무슨 지휘소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여기서 사람을 죽여 몇군데 묻었다고 한다. 그후에 누가 파갔는지는 모르지만 묻은 것은 확실하다".
할아버지는 1.4후퇴시는 피난을 충주까지 갔다 7월에 돌아 왔다고 한다. 그러니 그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피난갔다 오니 동네에 수많은 시체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이야기가 중공군도 왔고 미군도 오고 국군 제19연대가 동네를 휘젖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국군 제19연대가 이곳에서 전투를 했다고 하는지 전사적 고찰을 해보기로 한다. 먼저 낙동강에서 진격 작전, '50. 9월 말 10월 초는 제8사단 제10연대와 21연대가 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다.
다음은 1.4후퇴 이후 재반격 작전간 누가 양평 전투를 했느냐의 접근이다.
1.4후퇴시 국군 제6사단은 북한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출했으나 10월 19일 은밀도하로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 남으로 철수를 해야했고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51.1. 4일 02 : 00시를 기해 한강을 넘어 D방어선인 평택-안성-원주-삼척선으로 철수한다.
제6사단은 수원 동쪽으로 진출할 무렵 명령이 전달되어 금양장리-양지리 도로에 배치되었다. 다시 미 제9군단의 통제로 좌인접 국군 제1사단과 연결하여 죽산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영 27여단은 법천리, 미 제24사단은 장호원, 미 제1기병사단은 주보급로 경계를 위해 충주에 위치)
미 제8군사령부는 우군 전선의 근거리에 있는 오산 수원간에 집결된 적을 공격목표로 선정하고 미 제25사단의 제27연대에 임무를 부여하고 위력수색 작전을 전개하는데 바로 그 부대의 명칭을 따서 "울프하운드 작전"이라 하였다.
※썬더볼트 작전
나아가 '51. 1. 25일 한강 이남지역에서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더 강한 의미의 파괴적 위력수색작전이라는 "썬더볼트"즉 번개작전을 미 제1. 9군단에 부여하여 전차로 증강된 1개 사단과 필요시 국군 제1개 연대를 추가하여 한강까지 수색작전을 펼치도록 한다. 이에 따라 수원-이천 진출 작전과, 인천-서울-곡수리 진출 작전이 서부 전선에서 진행된다.
수원-이천 진출 작전은, 미 제1군단에서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으로, 여기에 국군 제15연대를 미 제25사단에 배속시켜 안양-소사-인천 도로를 따라 한강선에 도달하게 된다. 미 제1군단 우익의 미 제9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좌익으로 미 제24사단(여기에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 배속)을 우익으로 이천북방으로 진출한다.
인천-서울-곡수리 진출은, 미 제1군단은 좌전방에서 국군 제15연대, 미 제25사단 제35연대, 터키 여단으로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의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고 우전방에서는 미 제3사단이 검단산과 청계산을 경유하여 한강가지 진출토록 하여 2월 10일 인천-영등포-노량진-대모산-북한강 남안(양수리 근방)까지 진출하다.
제9군단은 '51. 2월에 접어들며 남한산과 양자산으로 진출하며 적의 저항에 직면하자 국군 제19연대를 미 제24사단에 배속시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경안리에서 동쪽의 양평에 이르는 24km, 한강에서 남쪽으로 6~10km 불거져 나온 U자형 지형의 불랙홀에 빠지게 된다(남한산,양자산, 태화산, 천덕봉 등 수개의 고지군)
이 싯점에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이 1월 중순 적 제2전선부대의 침투로 제천-영월 이남지역에 형성된 돌파구내의 인민군을 격파하고 원주-평창 선으로 진출중에 있었다.
※라운드업작전
이때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의 서울 진출을 보장하기 위해 미 제9군단의 우측, 미 제10군단이 예하의 미 제2사단으로 한강진출작전의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여주-원주를 연하는 선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로써 지평리까지 수색정찰을 실시한다. 여기서 제10군단의 전략적 요충지인 홍천을 확보하여 국군 제3군단 정면에서 퇴각중인 인민군 제2군단을 섬멸함은 물론 , 아군이 홍천-대관령-강릉 선으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몰이"즉 포위라는 의미로 "라운드업작전"이라 명명 하고 작전을 개시했다.
미 제10군단은 지평리-횡성에 미 제2사단, 횡성 남동쪽 치악산 북쪽에 미 제187공수여단, 평창 남서쪽 주천리에 미 제7사단을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공격제대로 좌전방에 국군 제8사단(미 제2사단에서 1개 야포 대대 등 제21지원부대 편성하여 직접지원) , 우전방에 국군 제5사단(미 제7사단에서 1개 야포 대대 등 편성하여 제7지원대 편성하여 지원)을 투입하여 홍천을 포위 공격하게 된다.
"'51. 2월의 라운드업 작전간에 제8사단은 양평에 진입하지 않는다"
51. 2. 5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게 되며 홍천을 좌측과 중앙으로 공격하게 된 제8사단장 최영희 장군은 3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할 계획아래 주공인 제21연대는 전차소대와 보전조를 편성하여 29번도로(횡성-홍천)를 따라 벽학산-독재봉-오음산으로 공격하여 홍천을 점령하고, 중앙의 제10연대는 성지산을 점령 후 상오안리-양덕원리로 진출토록 하였다. 좌전방 제16연대는 2번도로(횡성-용두리)를 따라 증안리로 진출, 화채봉을 넘어 용두리를 확보하도록 명령하였다.
여기서 재반격 작전간 가장 멋지고 가장 비극적인 두 장면이 연출된다. 하나는 지평리 전투의 승리, 하나는 횡성의 대재앙이다.
횡성의 대재앙은
중공군 제13병단의 주력이 북한군 제3,5군단과 연합하여 '51.2. 11일 야간에 라운드업작전으로 홍천을 공격하는 국군 제8사단과 제5사단을 공격하여 진출 중이던 제8사단이 12일 01:00시에 지휘체계가 와해되고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전투이다.
제8사단의 피해는 무려 전사하거나 실종돈 인원이 장교 323명, 사병 7142명이었다. 우측의 제5사단도 포병대대만 손실이 없고 4개 대대 정도만 남았다.
지평리 전투는
미제2사단 예하 미 제23연대전투단(프랑스 대대 배속, 여기에 국군 유격중대도 있었음)이 '51. 2. 13~15일에 중공군 8개연대를 괴멸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립방어를 한 미군은 무려 5,000여명의 중궁군을 살상하게 되고 미군 등은 전사 52명에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었다.
이 당시에 원주에 미 제2-9연대가 진지 편성중에 있어 약 20km의 간격이 발생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관은 제9군단장에게 현재 한강 이남교두보에서 전투가 없는 국군 제6사단(제19연대는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양평 좌측 남한강 서안지역으로 이동)과 영 제27여단을 여주로 이동 시킨다. 또한 제1기병사단에서 제5기병연대가 직접 한강을 도하하여 곡수리에 지평리로 돌파하여 중공군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다.
이에 따라 영 제27여단은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지평리 부근으로 이동하고, 국군 제6사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9연대 제1대대 좌측의 공간지대로 이동하여 '51. 2. 15일 원주 서쪽 간현리에 일대를 점령하고 그 좌측에 영 제27여단이 주암리로 진출한다.
따라서 유엔군과 국군은 '51. 1. 25일 재 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가운데 서부에서는 한강선을 확보하고 중동부는 양평-횡성-강릉으로 진출한 다음 홍천을 목표로 공격 도중 중공군의 4차 공세(2월 공세)를 맞아 대돌파구를 허용했으나 .2월 18일경 양평-원주-제천-영월을 연하는 선에서 이를 저지하였다.
중동부지역의 킬러 작전('51. 2. 21~3.4)
중공군의 2월 공세의 예봉이 무뎌진 것은 바로 그들의 공격이 시작된 1주일이나서였다.
즉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즉시 반격작전을 계획했다. 중공군 개입이후 유엔군의 두번째 반격작전이다. 바로 제천-영월 지역의 공산군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반격작전으로 포위 섬멸을 강조하기 위해 "킬러 작전"이라 명명했다.
이를 위해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 방향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제천-평창 방향으로 각각 공격하기로 했다.
당시의 부대배치는 다음과 같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이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 미 제3사단이 한강선을 따라 경안리 일대, 미 제25사단이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를 방어 중이었다.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미 제24사단(국군 제6사단 제19연대 배속)이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방어하고, 미 제1기병사단이 남한강 동쪽의 하진 일대, 영 제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판대리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51. 2. 21일 10시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 사단 병진으로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이 중앙에서 횡성을 향해 진격하고 나머지 3개 사단(미 제24사단,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6사단(-))이 해병사단의 좌우측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군단의 좌전방 미 제1기병사단이 24일 양평-홍천간 도로 북쪽의 469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주공인 해병사단의 진출이 더딘 가운데 '51. 2. 24일 무어 제9군단장의 헤리곱터가 남한강에 추락하여 군단장이 전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면서 25일 해병이 횡성을 점령하기 목전에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우전방 제5해병연대 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하고 좌인접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제7해병연대가 인수, 사단의 좌전방으로 투입된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이 원주 서쪽 섬강, 제187공정연대전투단(국군 제3사단 제18연대 배속)이 원주, 국군 제3사단(-)이 성남리, 국군 제5사단이 입석리 일대서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51. 2. 21일 1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7사단을 주공으로 영월-평창간 도로를 따라 킬러작전을 개시한다. 군단 조공의 국군 제3사단(-)이 미 제9군단의 제1해병사단의 우익을 엄호하면서 강림-안흥-봉화산을 목표로 공격한다. 사단 우측은 미 제2사단이 진격하고 있었다.
군단의 모든 제대들은 3월 7일 원주-방림리 도로 북쪽의 감제고지를 점령하면서 군단은 국군 제3사단 지역을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인계하고 배속해제하여 국군 제3군단에 복귀시킨다.
2월 21일부터 3월 6일까지 실시된 킬러작전은 미 제9.10군단이 목표선인 횡성-평창선(아리조나선)까지 도달하였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이 마차리, 제9사단이 정선, 수도사단이 삽당령에서 강릉에 이르는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중서부전선의 리퍼 작전('51. 3.7~ 3.31)
리퍼작전은 킬러작전의 연장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3월 7일부터 31일까지 실시한 공세작전이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분쇄하고 킬러작전을 벌여 '51. 3월 초에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연하는선까지 진출한다.
이때 미 제8군사령부는 서울 재탈환의 정치적 심리적 중요성을 고려 현 전선에서 중앙에 대돌파구를 형성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을 분리하여, 남쪽에서의 정면공격과 동측에서의 측면공격으로 서울를 양익 포위해 탈환한다는 작전을 수립하는데 "전선의 절단과 분리"라는 작전 목적을 고려해 "전선 절단작전"이라 명명 하였다.
이를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9.10군단이 중서부에서 진격하고, 미 제1군단이 서울 서쪽과 한강 남안의 전선에서 적으 ㄹ견제한 후 서울을 탈환하며, 국군 제1,3군단이 동부전선에서 적을 견제 및 후방 산악지대 잔적 소탕을 실시토록 계획 하였다.
특히,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9군단을 주공으로 하여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 북방-한계리를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 진출해 전선을 양단하고 홍천과 춘천을 점령함으로써 동쪽에서 수도권 지역을 압박하고자 했다.
3월 7일 08시를 기해 킬러 작전을 종료하고 리퍼 작전으로 전환한 미 제9군단은 4개 사단 병진으로 좌전방 미 제24사단(국군 제19연대 배속)이 용문산으로,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영 제27여단 배속)과 국군 제6사단(제19연대 결)이 홍천강 남쪽 산악지대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이 홍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바로 여기에 용문산으로 진격한 미 제24사단이 나온다. 제19연대가 배속되어 함께한다. 바로 '51. 3월 초에 국군 제19연대가 양평을 경유 홍천강 남안으로 진출해 올라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이런 제보에 사나사 절 앞에 몇 군데를 시굴을 해보기로 했다. 절의 스님을 만나 양해를 구하였다. 하지만 징후를 찾지 못했다.
우린 옥천 아신리와 용천리 일대를 발굴 '09년도에 발굴작전을 시행히여 매봉사 벼락바위 일대에서 8구, 용천리에서 1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당시는 우린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5월 공세이후 재반격간 전투를 하면서 전사한 인원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제보에 의해 다시 '12년도에 아신리 매봉산 일대를 발굴하여 6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결국 양평지역의 전투는 제6사단이 '51. 4월에 용문산, 3월 초에 양평 일원, 제8사단이 '50. 10월 2일 양평, 제2사단이 '51. 5월 말 6월초에 국군제6사단의 좌익으로 들어와 양평 바로 위 옥천지역에서부터 유명산-중미산-통방산-화야산-청평호로 진출했다.
(3) 마차산(587m) 유격대의 진실
우리 전사책 제6권, 317페이지에 나와 있는 관련 사실을 먼저 기록한다.
10월 2일, 양평을 탈환한 국군 제8사단은 이 지역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다음날 중앙선 철로를 따라 양수리-도농을 거쳐 서울 미아리까지 진출하여 10월 6일가지 3일간 부대정비를 하였다. 제8사단은 부대정비를 마친 10월 6일 의정부를 경유해 동두천으로 진격하였다. 사단은 전쟁초기 일부 낙오병들과 애국청년들로 조직되어 고립무원의 사면초가 속에서 100일간 반공투쟁을 하던 "마차산 마차산 유격대"를 비롯한 여러 조직의 유격대원을 만났다. 사단에서는 이들 유격대원 모두를 사단 특수유격대로 편성하 운용였다.
동두천을 탈환한 제8사단은 10월 7일 제10연대를 선봉으로 초성리까지 진출한다. 여기서 한탄강을 건너야 하는데 북한군이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주변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진출을 저지하는 상황하에 10월 8일 38선 돌파를 감행한다.
그럼 여기서 전쟁초기에 마차산에 고립되었던 낙오병과 애국청년 유격대원을 언급한다. 과연 마차산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한국전쟁 유격전사 내용을 근거로 인터넷 상에 언급된 내용을 먼저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파주지역 반공애국 청장년들과 미처 후퇴하지 못한 국군 장병 등 500여 명이 감악산에 은신하였다. 이들은 봉암사를 본거지로 대한 의열단 감악산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서부에는파평산 무건지구 유격대, 남부에는 노고산 양주지구 남면 특공대를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부지구에는 대한구국 적암결사대와 마차산 양원유격대가 편성되었다.
각 지역별 결사대원들은 서울이 수복되고, 아군이 북으로 진격할 때까지 북한군 치하에서 내무서 습격은 물론 적색분자, 부역주동자들을 색출하여 납치, 처단하였다. 이 당시에 임무수행중 희생된 38명의 대원이 감악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다음은 전쟁사에 언급된 내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당시 38도선 경계진지 전투간 동두천 북방은 국군 제7사단의 우측 정면을 담당하고 있던 제1연대 경계지역에 북한군 제4사단이 2개 연대 병진 공격으로 연대 정면을 공격해 왔다.
적과의 교전 3시간 만에 전방 경계진지가 무너지고 소요산-마차산 간의 주저항선 지역의 거점상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 된다. 북한군이 보전협동으로 공격해 중앙이 돌파되면서 동두천이 피탈되면서 덕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마차산의 제1대대(-)는 이런 명령을 받지 못해 산 정상에 대기하는데 결국 소대단위로 나누어 의정부를 목표로 철수하게 되는데 27일 밤 미아리 전선에 도착한 병력은 1개 분대였다.
그러면 과연 남겨진 병력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그 후로도 계속하여 남하하여 군에 복귀하기도 하고 일부는 북한군에 포로가 되기도 하고 또 일부는 적과 끝까지 유격전을 하다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는 마차산과 감악산, 소요산 일대에 은거하여 유격전을 수행하다 국군이 진격하면서 복귀하게 된 것이다.
5. 동부지역 추격작전
국군의 동부지역 추격작전
(9.30 서림리) 수도사단 국군3사 (9.30 인구리)
강릉
동해
삼척 (9.29)
(9.28) 정선
영월 수도사 임원 국군 3사
봉화 (9.27) 울진 (9.27)
영양 평해
청송 (9.23) 영덕 (9.25)
안강 수도사 포항 국군3사
가. 흥해-인구리 추격작전
(1)흥해-울진 추격작전
동부지역의 추격작전은 국군 제1군단이 돌파작전에 이어 계속 하였는데, 군단은 9월 22일까지 북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기계-청하선까지 진출한다. 제1군단은 주공을 청하-영덕-평해 축선에, 조공을 인지동-천지동-춘양 축선을 따라 진격토록 한다.
군단은 9월 23일 추격작전을 전개하여, 제3사단이 주공으로 제26연대를 선두로 제22연대를 후속부대로 청하-울진간 도로를 따라 추격하고, 제23연대는 흥해 서쪽 토성동에 집결한 북한군 제5사단 사령부 및 제10연대를 격파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25일 강구를 경유, 영덕을 탈환하게 되는데 아군의 진출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영덕시가지에는 북한군이 차량에 시동을 켜놓은 체로 도망치고 있었다.
영덕에서는 미 고문관의 주선으로 2.5톤 차량 25대를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동력이 크게 향상된다.
※평해 뒷산의 비밀, 달리는 국군 / 뒷걸음질 하는 북한군
사단은 평해를 통과하면서 제22연대와 제23연대가 공격 일선에 나서게 된다. 특히 제23연대는 평해 뒷산고지에서 3시간여의 교전으로 북한군 80명을 사살하고 82명을 포로로 하였다.
사단은 별 저항없이 27일 울진을 탈환하였으며, 군단 사령부는 기계에서 청송을 거쳐 진보로 이동하였다.
(2)울진-38도선 진격작전
목표선을 점령하자 사단장은 27일 22:00시를 기해 강릉을 신속히 점령하고자 제22연대로 하여금 28일 03:00시에 출발하여 강릉을 점령토록 하고 제23연대는 후속부대로 울진-죽변 부근에 적을 경계하고 28일 08:0시에 삼척-강릉으로 진출토록 했다.
제22연대는 28일 19:00시에 삼척 남쪽 10km까지 진출했고, 제3대대는 육군 명으로 평해에서 청송으로 진출중에 있었다(청송-진보-청리-영양-철암-삼척-강릉으로 나와 본대와 합류).
육군본부는 9월 29일 "군이 38도선 남쪽의 지정된 지역에서 재편성하여 북진작전을 준비"하도록 조치하였다.
제3사단은 9월 30일 울진에서부터 선봉으로 진격해온 제22연대가 08:00시에 강릉 남쪽 운산리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제23연대와 협동으로 15:30분에 강릉을 탈환하였다. 이때 수도사단의 제1연대도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진격하였다.
강릉 탈환 후 제22연대가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제23연대가 계속 북진하여 38도선 남쪽 인구리에 진출하였으며 제3대대의 전초중대는 38도선을 넘어 양양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이 부대가 가장 먼저 38도선에 도달한 부대다.
※강구 4,172명의 전사자 위패는 어떻게 된 것인지?
결과적으로 제3사단은 총 260km에 달하는 포항-38도선 반격작전에 9월 16일부터 30일까지 15일간에 걸쳐 1일 평균 17.3km를 진출하였다. 진출중 사단은 적 사살 1,351명 포로 230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71명, 실종 2명이었다고 기록한다.
나. 기계-서림 추격작전
(1) 기계-평창 추격작전
국군 제1군단의 조공인 수도사단은 인지동-천지동-춘양 축선을 따라 공격을 명 받았다.
수도사단은 9월 23일, 제18연대와 제1기갑연대로 기계에서 도평동-청송을 향해 추격하고, 전날 구산동에 진출한 제1연대는 서북방에서 도평동을 공격하였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가 있는 부산에서 "38선이란 없다. 38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북진을 강조했다.
9월 24일 도평동 북쪽을 시찰하던 사단 참모장 이상근 대령과 작전장교 최정택 소령이 대전차 지뢰에 전사한다
9월 25일, 사단은 제18연대가 청송을 점령하면서 사단 지휘소도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사단은 계속하여 청송에서 영양을 경유하여 27일 05:00시에 춘양에 도달하였다. 이 무렵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의 일부로서 오대산으로 도주하면서 영월 동북쪽 산악지대에 잠입 후 산간 민가에 내려와 식량과 피복을 약탈해 갔다.
인천상륙작전 부대가 서울을 탈환하던 9월 28일, 제18연대는 춘양집결지에서 새벽에 차량편으로 영월을 거쳐 평창까지 진격하하며 적 3개 중대의 저항을 격퇴하였다.
(2) 평창-서림 추격작전
이 무렵 수도사단 정면의 부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 일부는 계속 패주하여 그 주력이 대화-강릉을 연하는 경강도로를 횡단한다음 오대산을 경유 38도선 이북을로 물러가고 있었으며 주력의 철수대열에서 이탈한 잔여부대는 대화에서 창촌-현리를 경유해 인제 방향으로 패주하고 있었다.
사단은 9월 29일, 육본으로부터 평창-대화-창동-창촌까지 계속 전진하여 용포 근방에서 재편성하여 차기작전 수행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제18연대는 대화를 경유 장평동에 진출하고, 제1기갑연대는 영월에서 대화로 진출하였다. 제1연대는 영월에 진출 후 1개 중대가 영월 발전소 경계임무를 하도록 한다.
※잘못 보고가 적 1개 중대를 포로로 잡았다
제18연대 제1대대가 평창-대화 진격로상의 산간 계곡에서 휴식과 식사를 하던 중에 갑작스레 송요찬 사단장이 전방상황을 확인차 대대에 도착했다.
"대대장(장춘권 중령) 선두가 어디까지 갔소?"
"네, 대화까지 갔습니다"
그길로 사단장은 바로 떠났다. 그러나 아직 선두는 대화에 있지 않았고(5~6km전방) 도중에 북한군 1개 중대를 만났다. 복장이 아군 복장이라 우군인줄 알고 사단장이 다가서 보니 북한군이다.
"넌 누구냐?"
"나 12사단?"
사단장이 되돌아설 순간 호위하던 헌병차량에서 기관총사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바로 본대가 들어와 놀란 이들을 모두 포로로 압송했다.
※우리가 먼저 38선을 넘었다"
이와같은 정황속에 제18연대는 9월 30일 장평리-창촌을 경유 38선 직후방 서림리까지 진출하였으며, 제1기갑연대도 속사리에서 서림 남쪽 광원리까지 진출한다. 한편제1연대는 평창에서 대화-속사리를 거쳐 대관령-강릉방향 진출준비를 했다.
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반격작전간 지형탐사는 사실 초기전투부터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는 과정에 주 전투지역이 거의 유사하여 특별히 언급할 내용이 없다. 대부분 중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 사단별 전과에 대한 의문점이 많아 주로 대규모 전과확대 사실이 있는 경우 위주로 약술하려고 한다.
(1) 평해 뒷산의 비밀, 달리는 국군 / 뒷걸음질 하는 북한군
제3사단은 9월 25일 평해를 통과하면서 제22연대와 제23연대가 공격 일선에 나서게 된다. 특히 제23연대는 평해 뒷산고지에서 3시간여의 교전으로 북한군 80명을 사살하고 82명을 포로로 하였다.
이 당시에 사단은 영덕에서 2.5톤 트럭을 미 군사고문관의 도움으로 지원받아 7번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렸다. 당시 북한군은 이미 대열이 무너지고 오합지졸로 산악을 이용하여 북으로 패주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몇명이 길가로 걷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못했다. 빨리 38선을 넘는 영광을 안보 싶은 것이다.
영덕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7번도로 안쪽으로 768m의 등운산과 810m의 칠보산이 태백산맥 동쪽 지맥으로 흘러내리는 곳이다. 국군이 후퇴 작전간에도 이곳으로 북한군 제766부대가 침투하여 국군 제3사단을 추격해 왔다.
칠보산에서 언수목이로해서 온정까지는 양호한 산악도로가 있어 기동에 문제가 없는데 이 온정이 평해에서 남대천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10km 거리에 있으니 북한군은 후퇴시에 당연히 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평해 사람이 모르는 전투
사실 평해읍 주변은 고지가 200m 내외로 높지가 않다. 오직 도보로 패주하는 북한군 입장에서는 주도로를 가능한 이용하려 했을 것이고 차량으로 통과하는 국군은 밀물처럼 쫒다보니 북한군은 도로변 인근에 잠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탐문활동 하면서 평해에서 들은 이야기는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몇방의 총만 쏘았지 큰 전투는 없다고 한다. 아니 80명을 사살하고 82명을 포로로하는 전투인데 총 몇방 쏘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범모래제방에 미군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신나게 하였다. 북진시가 아닌 우리군이 후퇴시였다. 도대체 어디서 전투를 하여 북한군을 사살했을까, 했다면 그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의문이 남지만 여기도 시원한 대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다만 점심시간에 식당앞에서 만난 어느 아주머니의 " 우리 동네(온정 조금리)가 북한군 소굴이었다"한 제보내용이 귓전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반격작전을 감행하여 다시 38선으로 오르는 길은 모든 사단들이 서로 먼저 38선에 도달하기 이한, 그리고 먼저 넘어가려는 왕성한 용기가 넘쳐나 차량을 확보하여 작전지역을 넘나들며 진출하고 그러다 보니 걸어가는 북한군은 뒷걸음으로 논속으로 들어가거나 산속으로 숨고 아니면 자발적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북한군 정규군이 아닌 대다수가 남한지역에서 강제로 동원된 의용군들이다.
(2) 강구 4,172명의 전사자 위패는 어떻게 된 것인지?
제3사단이 후퇴시에 가장 치열하게 전투한 곳이 영덕이고 그 바로 동쪽해안으로 능선을 타고 내리면 강구다. 그런데 이미 언급되었지만 무려 이곳의 위패카드가 4,172위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 숫자면 당시의 사단의 50%수준의 병력이다.
그런데 반격시에 영덕-강구에서 그리 큰 전투는 없었다. 있어야 북한군이 도망치다 죽는 몇십명 수준이다. 도대체 이건 뭔지 북한지역에도 강구는 없다.
쉽게 판단하면 전쟁 직후에 새로이 전사자 명부를 만드는 과정에 신고를 받으면서 많은 유족들이 제3사단이 이곳에서 전투했고, 김석원 장군 밑으로 학도병이 몰려갔으니 그리 추측해서 전사했다고 신고를 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본다.
아니면 북한의 강계를 강구로 발음하고, 그곳 아래인 희천. 운산. 부전지역 전사자들의 전사장소가 그렇게 오기 되었는지 참 어려운 문제이고 이런 것을 해결해야 6.25전쟁의 허와 실도 풀리리라 본다.
(3) 우리가 먼저 38선을 넘었다"(수도사단 제18연대 수색중대)
전사기록의 제일 먼저 38선에 도달한 부대는 제3사단으로, 9월 30일 강릉 탈환 후 제22연대가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제23연대가 계속 북진하여 38도선 남쪽 인구리에 진출하였으며 제3대대의 전초 중대는 38도선을 넘어 양양 부근까지 진출한다.
제23연대장은 본인이 직접 정일권 총장으로부터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38선을 돌파한 부대라고 기록에 남겼다.
하지만 내륙에서 진출하는 수도사단 제18연대는 9월 30일 장평리-창촌을 경유, 38선 직후방 서림리까지 진출하였으며, 제1기갑연대도 속사리에서 서림 남쪽 광원리까지 진출했다고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제18연대 참전용사 왕선구님과 전기풍님을 만나 38선은 제18연대가 먼저 넘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당시 제18연대 수색중대 소속인 전기풍님은 지금 흑석동에 살고 계시다. 요즘 귀가 잘 안들려 대화가 어렵긴 하지만 얼마전에도 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만난 횟수만도 20회는 넘는다.
"전 선배님, 38선을 누가 먼저 넘었습니까. 전사에는 3사단 23연대가 10월 1일 08:10분에 인구리 북쪽 하조대 근방에서 라고 하는데?"
"그건 전사기록이고 우리 제18연대는 9월 30일에 서림에 도착하였고 수색중대는 38선을 넘었어요. 그리고 양양 방향으로 진출해 들어가 당시에 훈련소가 있는 곳을 우리가 기습했는데 아무도 없어요. 조금 있으니 3사단이 들어왔어요"
"혹시 당시 수색중대에 미군 군사고문관은 없었나요?"
"중대까지는 없지. 연대에 있을 때는 보았어요"
"그럼 이런 내용을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연구소에 알리지않았나요?"
"아냐, 지금이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우리들이 찾아가서 인터뷰했는데 안먹혀". 여기에 우리가 나중에 제3사단이 되었잖아요. 그러니 "백골부대"라는 명예에 서로 싸우지말자고 한거야."
전기풍 용사님은 정말 제18연대의 산 증인이다. 왕선배님은 학도병으로 들어왔고 전선배님은 처음부터 있었다.
"선배님은 서림일대 기억이 없어요?"
"우리가 구룡령을 넘어 서림에 들어간 것이 9월 마지막 날이란 것은 알아. 그러나 38선을 누가 먼저 넘었는가는 잘 모르겠고 우리가 양양에 들어가니 3사단이 일부 들어 있었던 것은 맞아요. 우리 수색중대는 먼저 치고 들어갔으니 왕씨 말이 맞다고 봐요"
"선배님은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상원사를 전쟁시 불태우려던 것을 막은 훌륭한 스님) 일화를 잘 알잖아요?"
"그곳에 우리 수색중대가 들어갔으니 잘 알지. 우리가 그 큰스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다비식까지 했으니까"
이 사항은 이미 기록에 상세히 남겼지만 다음 1.4후퇴 이후의 군사작전과 연계하여 다시한번 언급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