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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의 길 사랑의 길
이 세 종
글쓴이 : 최흥욱 목사(서부동산교회 담임)
실천신학자 박근원은 언젠가 「기독교사상」지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 어느 면으로 보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출은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신앙생활의 운동이었다. …이 분들은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서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들의 영성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대가들의 신앙생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세종은 한국교회 영성사의 큰 맥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 개신교회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전해준 한국적 토착적 영성인이다. 그는 신학자도 목회자도 장로도 아닌 평신도였으나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르며, 복음을 말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고 증언한 한국적 영성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이세종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1930년대의 조직신학자 정경옥은 이세종을 가리켜 도암의 숨은 성자라고 하였다.
예수 믿어야 산당께!
이세종은 1880년 무등산 자락이 길게 늘어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영찬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그는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댁에 얹혀 살았다. 일자무식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 그는 28세 되던 해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였다. 무엇이든지 하면 끝장을 보는 오기와 뚝심을 가진 이세종은 지게발이 닳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였다. 드디어 머슴살이 10여년 만에 마을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다. 번듯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이웃에게 돈과 쌀을 꾸어주는 넉넉한 살림살이가 되었다. 100여 마지기의 논을 소유한 큰 지주가 되었다. 전에 사치를 모르던 그는 이젠 깨끗한 새 옷에 조끼를 겹쳐 입고 제일 좋은 옥양목 두루마기를 해 입고, 장자처럼 으시대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런 이세종이 어찌된 영문인지 돌연 나이 40세에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가 예수 믿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이러 저러한 말들이 많지만 이런 이야기가 유력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가 결혼을 한지 10년을 넘어서도 자식이 없자 아내에게 약도 지어 먹여보고 굿도 해보았으나 허사였다.
이것이 병이 되어 몸져 눕게 되었다. 병이 악화되어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산골 동네에 미친 여자 하나가 나타나서 “예수 믿어야 산당께! 예수 믿어야 살아!”하고 크게 외치며 지나갔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있던 그에게는 하늘의 소리로 들렸다. 벌떡 일어나 미친 여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예수 믿는 길을 알고자 온 동네를 뒤졌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다행히 무명의 전도인이 뿌리고 간 전도지 한 장을 구하였다. 예수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성경책을 구해 읽으라는 말에 광주에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성경 한권을 사오게 하였다. 그는 날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글을 배우며 읽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글을 깨우쳐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예수를 믿으라!
이세종의 얼굴은 기쁨에 넘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가서 두 손을 쳐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그는 너무도 흥분하여 춤을 추는 동안에 자기의 아랫도리가 벗어져 배꼽과 하체가 드러나는 줄도 몰랐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산당을 짓고 드린 공이 헛수고요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Imitatio Christi) 청빈과 자기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이었다.
이세종은 불같은 성격으로 그러한 깨달음의 진리를 실천에 옮겼다. 그의 변화는 참으로 철저하였다. 그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 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모두 갚아 주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라곤 하나도 있을 수 없다고 깨달은 그는 빚진 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에게서 담보로 잡았던 집과 땅 문서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들의 채무를 탕감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창고문을 열어 쌓아 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고루 나눠 주었다. 자기 피땀으로 마련한 땅들은 구제에 써 달라고 면사무소에 몽땅 바쳐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세종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를 마을 길에 세워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세종은 자기가 한 일은 비를 세울 일도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사정하였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어 버렸다. 지금도 파묻은 자리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그는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처녀 총각들을 모아다가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 이외의 다른책은 일체 보지 않았다. 그의 삶의 유일한 표준은 성경이었다. 그에게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멀리 광주에서 고등 성경학교 학생, 전도사, 광주에서 당당한 큰 교회 맡은 목사들, 산에서 도 닦는 도인들이 모여 들었다. 최흥종 목사가 그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노라복 선교사도 그를 지지했고, 강순명 목사도 그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백영흠 목사도 늘 참석해서 감동을 받았다. 이세종이 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가르친 교훈은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 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세종의 강의를 제대로 필기한 이는 이현필 뿐이었다. 이세종은 이현필을 천재라고 칭찬했는데 후에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의 정신을 그대로 따라 사는 영의 사람이 되었다. 이세종은 성경공부 시간에 누가 찾아 오면 인사하지도 인사받지도 않았다. 공부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성경공부는 공사요 음식 먹는 것은 사사다”고 하면서.
이세종은 자기 죄를 철저히 회개하였다. 그는 예수 믿은 후 사람들이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이공(李公)이 아닌 이공(李空)이었다.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이었다. 그는 돈들여서 지은 산당도 버리고 모든 소유도 버리고 도구밖골과 각시바위 너머 깊은 산중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여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이세종은 즉석에서 “빌어먹으라!”고 하였다. 거지가 되라는 것이다.
그는 남들에게도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 오장치 짊어지듯 믿으라.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라!”고 가르쳤다. 그는 예수를 믿고부터는 믿는 일에 아예 퐁당 빠지려 했다. 거지가 되려 하고, 남보기에 미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이세종의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치게 검소하였다. 잘 입으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치스럽고 좋은 듯 싶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쓴다고 하면서 헌 누더기로 만족하였다. 그는 평생 누더기 옷을 걸치고 살았다. 그는 남이 보는 데서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쑥에다 밀가루를 섞어 밀가루 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세종은 거지 옷에다가 머리에 맥고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 모자는 너무 오래 되어서 퇴색하고 다 떨어져 볼품 없는 것이었다. 이세종과 친한 어느 장로가 보다 못해 그가 없는 사이에 그 모자를 아궁이에 던져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새 모자를 대신 걸어 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세종은 그 장로와 절교하고 그동안 그에게서 신세진 것을 돈으로 계산해 갚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세종의 길은 청빈의 길이었다. 청빈은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을 말한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이세종은 청빈의 길을 걷기 위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갔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들만 붙잡았다. 단순과 간소는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워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가 아니겠는가?
만물들아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
천태산 기슭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오솔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이세종은 울고 있었다. “하나님, 이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그의 마음 속엔 자비심이 강물처럼 넘쳤다. 걸음마다 눈물이었다. 이탈리아의 성인 프란치스코가 언제나 울며 거리를 지나갔듯이 이세종도 자비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남의 영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이세종은 예수 믿다가 타락한 이를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누구의 집을 방문할 때는 대문 밖에서 잠깐 발을 멈춰 서서 자기 마음을 반성해 보고 자기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다. 이 추운 밤에도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 차려놓고 먹었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차마 먹을 것을 입에 넣지 못했다. 남이 죄를 짓는 것만 보고도 울었고 남이 불행을 당하면 달려가서 함께 울었다.
“만물들아!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아름다운 산천과 우거진 숲을 바라볼 때면 이세종은 한량없이 기뻤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일이 없지만 프란치스코가 해와 달과 벌레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했듯이 이세종도 황홀한 환희 속에서 그렇게 노래했다.
그는 모든 성인들이 그렇듯이 사람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사랑했고,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을 경외하고 넘치는 자비심으로 대하였다. 그는 산길을 지나가면서도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풀잎을 쓰다듬어 주면서 다녔다. 길에 뻗어나온 칡 넝쿨은 밟지 않고 옮겨 놓고 지나갔다. 누가 밟은 넝쿨을 들고는 탄식하며 넝쿨에서 흐르는 진액이 피같다고 하였다. 자기 발 밑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를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았다. 파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몰아내긴 했어도 죽이진 않았다. 자기 집 구정물 통에 쥐가 빠지면 나뭇가지를 꺾어 사다리를 놔 주어 쥐가 도망치게 해 주었다. 부엌 구석에 독사가 있어도 때려잡지 않고 나뭇가지로 슬슬 몰아 밖으로 내쫓아 보내면서 “큰일 날 뻔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사람의 먹을 거리라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에게 횡포를 가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생명은 대소고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분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온갖 생명에 대한 사랑 여기에 이세종의 토착적 영성의 핵이 있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 속에 있는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며 살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을 이루는 생명을 하나같이 제 몸 위하듯 존중하였다.
살다 살다 못살겠으면 또 나를 찾아오시오!
이세종이 30세 때 14살 짜리 시골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세종의 부인 문순희는 무식하고 생각이 좁고 답답한 여자였다. 예수 믿고는 순결생활에 대한 깨달음이 커서 아내와 이혼은 하지 않으면서도 한 방에 거처하는 것을 거부하고 남매처럼 지냈다. 그렇게 하는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그러한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밤에 아내가 남편 방에 기어들어오면 내쫓았다. 건강하고 무식한 아내는 참다 못해 본 남편을 버리고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갔다. 그럴 때면 이세종은 아내가 쓰던 세간을 사람을 시켜 지게에 옮겨다 주고 아내에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아무 때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간곡히 타일러 주었다.
그리고는 때때로 아내 집에 심방을 갔다. 어떤 때는 아내의 새 남편 전처의 어린애들에게 주려고 사탕을 사 가지고 찾아갔다. 아내는 이세종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래도 또 찾아가면 아내는 구정물을 바가지로 떠서 이세종에게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면서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느냐고 대들었다. 이세종은 구정물 세례를 받으면서도 부인을 향해 “예,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하나님을 꼭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 살다 못살겠으면 또 나를 찾아오시오!”하고 간곡히 권면하였다.
이세종은 참으로 호세아를 닮은 사랑의 성자였다. 그는 초목을 사랑하고 짐승들과 벌레도 사랑하고 개미와 지렁이 그리고 지네와 독사까지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이제 창녀같이 여러 남자를 따라가는 음탕한 아내까지도 사랑했다.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가 음녀로 타락한 아내 고멜을 찾아가 타이르듯이 이세종도 능주로 시집간 아내의 집을 또 찾아 다녔다. 이세종은 참으로 한국판 호세아였다. 부인 문순희는 그후부터는 마음을 고치고 남편의 감화로 변해갔다. 말년에 이세종이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 숨어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떠나지 않고 따라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꼴로 살았다. 그녀는 이세종이 세상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의 무덤을 삼년 동안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말년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고독했으나 꾸준히 지난 날을 참회하면서 이세종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나는 세상에 와서 그렇게 잘 믿는 남편을 만난 행복자이다”하면서 감사했다.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하면서 자기 같은 여자가 좋은 남편 만난 덕에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것을 감사하였다.
이세종이 세상 떠난 뒤에도 부인은 수십년 더 살면서 77세에 임종할 때까지 남의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이세종의 길은 사랑의 길이었다. 그의 신비적 사랑은 끝없이 열려진 사랑, 무차별의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의 무차별의 사랑의 무제약성은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이세종은 말년에 세상과 사람을 떠나 산에서 산으로, 보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옛날 이집트의 안토니처럼 깊은 산에 숨어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았다. 고독과 침묵은 모든 수도자들이 영성을 길러가는 두 가지 방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다.
화학산 도구밖골은 주위 십리에 인가가 없는 수도의 적지였다. 이세종은 이 도구밖골에서 돌로 울타리를 쌓아놓고 그 안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앉아 매일 하늘만 쳐다보면서 명상하였다. 얼마 후 더 깊은 산 자기의 마지막 장소를 찾아 거기서 떠나 화학산 각시바위 넘어 한새골에서 최종 말년을 보냈는데 그곳은 인가가 전혀 없는 산중이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 박복만을 시켜 통나무집을 나흘간 지었는데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었고, 문도 성경대로 좁은 문이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세종은 평소에 가르치기를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좁은 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을 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집을 지었다. 이 한새골 움막 좁은 문도 이세종은 너무 크다고 했다. 제자가 “다시 뜯어 다시 좁게 할까요?”하고 물으니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내버려 두시오”하였다. 결국 그 집에서 삼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세종의 길은 좁은 길이었다. 우리 생각에는 큰 문 열어놓고 대대적으로 전도하며 “아무나 와도 좋소!”하고 싶으나 진리는 언제나 좁은 길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세속적 기독교는 넓은 문이다. 참 신자가 찾아가야 하는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나사렛 예수의 길은 바로 이 길 좁은 길이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날 때는 평생 그를 따르던 제자 몇 사람만이 곁에서 시중하였다.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사다리 상여를 만들어 자기 좁은 방에 놓았다. 그 위에 이불을 펴고 평소에 베고 자던 목침을 놓고는 제자들에게 “나를 들어 그 위에 올려놓으시오. 그리고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주어야 합니다. 달리하면 당신들 벌받습니다.”고 하였다. 바싹 마른 이세종의 몸은 이미 미이라 같은 해골이었다. 제자들에게 자기 누운 상여를 들어 어깨에 메라고 명했다. 제자 다섯 명이 시키는 대로 하니 아모스 4장 12절을 찾아 읽으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소리쳐 읽으니 이세종은 상여 위에 누운채 “높이! 더 높이!”하고 재촉하더니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하고 세 마디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숨진 뒤 시신에 입힐 수의를 새로 마련할 필요도 없고 늘 입고 있는 거지 옷 그대로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소리내어 통곡하니 누워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왜 우느냐면서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하고 말했다. 아내가 울음을 멈추자 이세종은 도로 누워 얼마 후 고요히 잠자듯 숨을 거두었다. 그는 끝까지 따르던 몇몇 제자들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우여곡절 63년의 지상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때가 바로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세종이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다. 일생 사진 한 장도 안 찍었다. 추운 겨울 언땅을 파고 그들은 스승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의 껍데기인 육신만 땅에 묻혔을 뿐 그의 혼과 얼은 제자들의 가슴에 묻혀 한국 기독교의 토착적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었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동광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세종의 운동을 이현필은 조직과 운영으로, 정인세는 이 운동을 서울로 끌어 올리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김병로와 같은 이는 대법원장으로 있을 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경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이로서는 전 검찰총장 원택연 장로가 있고 정치가로서는 장면과 김상돈이 있다. 학계에는 전남대 농대 교수인 김준과 전남대 명예 교수인 신귀남이 있다. 철학자로는 유영모가 있고 사회 운동가로는 현동완 YMCA총무가 있었다.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이세종 선생같은 독특한 인물은 없었다. 청빈의 길, 사랑의 길, 순결의 길, 초월의 길, 고난의 길등 그것을 생명처럼 강조하며 몸소 그렇게 산 사람도 없었고, 철저한 자기비움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도 드물다. 우리는 이세종을 통해 고난의 예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간 비천한 예수, 청빈의 예수를 본다.
“주여, 나는 당신 밖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Domine, ego non habes nec volo nisi te)라고 기도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처럼 이세종은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 고요히 이름없이 지나갈 고독한 들꽃으로서의 짧으나 굵은 삶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