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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 진심은 진담으로 듣자 (창19:12-16)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거의 잊혀진 예전 일이지만 매일 오가던 성수대교가 무너지리라고, 또한 늘 사람들로 붐비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당시를 회상해 보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어? 어?’ 하는 사이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주저앉았습니다.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고 재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사고들이 ‘인재’였다고.
‘인재’라는 건 천재지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고의 원인이 사람에게 있고 사람에 의해 발생됐다는 겁니다. 건설 과정에서부터 부실 자재를 쓰고 부실시공을 하고, 그렇다고 관리를 잘했는가 하면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넘어가고 방치하다 보니 원인이 잘못됐기에 결과는 반드시 잘못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매사에 ‘유비무환’이어야 하는데 노상 ‘사후약방문’이기만 하면 그게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이든 국가든 재앙은 피할 수 없고 재앙 뒤에 남는 건 후회뿐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상황에서 그 성안에 살고 있던 롯의 이야기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는데 아브라함을 따라 이주해 온 외지인으로 원래부터의 소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롯이 그 땅을 택했고 거기를 거주지로 정했기에 하나님이 그 땅을 멸하려 하셨을 때 그 성과 함께 멸망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소돔을 멸하려 하신 걸까요?
본문 13절에 답이 있습니다.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롯에게 말하기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때 13절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부르짖음’이라는 말입니다.
‘부르짖음’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뜻은 ‘애통하게 호소함.’ 또는 ‘고통으로 울부짖음’ 등으로, 전자는 창세기 4:10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하셨을 때와 후자는 출애굽기 3:7절에서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라고 하실 때 쓰였던 말입니다. 즉 아우를 살해한 가인에게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애굽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대로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셨을 때 사용됐던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유다서 1:7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가 성적인 범죄와 동성애가 만연한 사회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당시의 소돔은 모든 분야에서 개개인의 정욕이 행동의 기준이었던 상태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어떤가요? 하나님께서 더는 두고 볼 수 없으셨던 그런 현상들이 소돔 성 멸망 이후엔? 그리고 오늘날엔 좋아졌나요?
이후 하나님이 두고 보실만한 세상이 되었던가요?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든 사람이든 변한 게 없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매 세대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으셨던 시간들을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더는 안 되겠다.’ 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신 최고 절정의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혹 기억나시나요?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어라 했는지?
예수님의 계시고 안 계시고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이사야 53:6절에서는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2:24절에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인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공의로우셨기에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던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작동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랬기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사랑’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즉결 심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행사하심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인간에겐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리고 죄에 대한 심판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께로 향해지게 됐습니다. 그랬기에 구약 시대와는 달리 오늘 우리에겐 죄에 대해서는 용서받을 기회가 생겼고 믿기만 하면 언제든 사랑받을 기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린 본문을 보며 소돔의 심판과 관련한 내용들이 어떠했는지를 알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감사’ 즉 ‘나에게 예수님이 계셔서 다행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 또한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정작 현실에서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26절만 보더라도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된 상황에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린 해당 본문을 잘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 ‘왜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왜 믿음이 작으냐?’라고 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를 항해하는 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려고 합니다. 누구라도 이젠 죽었구나. 끝났다. 망했다고 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이 죽겠다고 한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무엇이?, 누구라도 죽겠고 끝장날만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작을지언정 그래도 믿음이 있다는 인정을 받게 한 걸까요?
바로 앞 절인 마태복음 8:25절에 답이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하니.
만약 당시 상황에서 제자 중 누구라도 ‘우리 두려워하지 말자. 우린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하나님이 우릴 죽게 놔두지 않으실 거다.’라고 했다면 크고 담대한 믿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에겐 그런 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중에서도 제자들이 막판엔 예수님을 찾았고 그 이름을 불렀다는 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8:26절 후반부를 보면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 했습니다.
제자들의 작은 믿음에도 예수님은 큰 응답으로 역사해 주신 겁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큰 믿음까지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믿음만 있어도 예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서도 그렇게 역사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 역경 앞에서도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인생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고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매사를 믿음으로 이기려 하고 기도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작은 믿음이 조금씩이라도 크고 담대해지게 됩니다. 그리되면 우린 결국엔 큰 믿음 대로와 담대한 믿음대로 인생을 평안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4: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우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를 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린 먼저 말씀에서의 ‘근심하지 말라.’와 ‘나를 믿으라.’와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 둘은 각기 별개의 말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근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근심을 믿음으로 옮기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근심 대신 믿음!’ ‘근심을 믿음으로!’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음먹었다고 해서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린 근심하고 있을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응답을 믿으려 해야 합니다.
(한 번 따라하세요.) “내 근심들을 / 믿음으로 옮기자.”
그리만 하면 우리에게도 믿음 뒤엔 예수님의 응답이 따라올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세요. 아직 예수님이 안 계셨던 소돔에서는 그 죄를 대속 받을 기회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죄악 된 소돔에는 하나님의 즉결 심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공의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왕 심판하시기로 하신 하나님이 굳이 천사들을 직접 소돔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19:29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롯을 살리셔야만 했던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응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심판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천사를 보낼 이유가 뭐겠습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은 말씀만으로도 소돔을 멸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롯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천사들을 보내셨던 겁니다.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 롯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고.
이전 상황들로 볼 때 소돔의 멸망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심판에 대해 말씀하기 전에 먼저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명령하시기를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분명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굳이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공의보다는 사랑이 앞서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롯을 통해 우리에게 심판이 우선이 아니라 구원이 우선임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롯과 그에 속한 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우린 이걸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날엔 ‘성경 말씀’을 통해 나에게도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것을.
이게 우리가 내 생각이나 판단이나 욕심이나 미련을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부터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내게 살길이 열리고 내게도 기회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이스크림 광고를 보니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고 하던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됩니다. 설령 당장은 손해인 것 같고 당장엔 안 될 것 같은 말씀일지라도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말씀이나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말씀이 ‘하라!’ 했으면 하려고 하고, 말씀이 ‘하지 말라!’ 했으면 안 하려고 하는 것. 결국엔 그리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인 것을 믿는 게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하는 게 살길이고 기횐데도 본문 14절 마지막과 15절 처음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했고, 롯은 미기적거리기만 했기에 “동틀 때에 천사가 지체하는 롯을 재촉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을 보며 우린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진담으로 믿어야 한다!”
언제든 하나님의 진심을 우린 항상 진담으로 들으려 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말씀을 대하고 그런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농담으로 여겼다’는 말의 원뜻은 ‘비웃다.’는 뜻과 함께 ‘희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역사하십니다. 믿는 자에겐 사랑으로! 안 믿는 자에겐 공의 즉 심판으로!
하나님의 말씀 중엔 어느 하나도 ‘에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고 할 말씀은 없습니다. 다 말이 되고 진리가 되고 우리의 살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말씀 놓고 타협하지 말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방식이나 상식 또는 내 생각과 충돌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게 되면 누구라도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보다 우선한다면 누구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나는 “하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하실 줄로 믿는가?”
나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실 줄로 믿는가?”
믿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여러분의 소망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농담으로 여기면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한다면 하십니다. 그것도 즉시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전날 저녁에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던 사위들이었지만, 이튿날 동트기도 전에 하나님은 심판을 시작하셨습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농담이나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에 우린 언제든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을 향해 ‘될 거야!’를 기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일단은 작은 믿음으로라도 ‘될 거야’에서부터 시작하기만 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될 거야!’가 ‘된다!’고 하는 큰 믿음이 되게 되고, 그 후엔 뭐가 있겠습니까?
‘됐다!’고 하는 응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롯도 그랬으면 됐을 텐데 롯도 말씀을 믿지 못하긴 매한가지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위 ‘양다리 신자’였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긴 해야겠고 그럼에도 세상 것들을 포기하진 못하겠고. 그래서 머뭇거리는 그때 믿음 작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이때 자비를 더하셨다는 말에서 ‘자비’는 히브리어로 ‘라함’인데 단지 사랑을 더 베푸셨다거나 더 아끼셨다는 뜻만이 아니라, 명사형으로는 여인의 ‘자궁’을 뜻합니다. 때문에 자비를 더하셨다는 말은 곧 죽을 자리에서 미적거리는 롯을 향해 하나님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일단은 자식을 살리고 봐야겠다는 맘이 앞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야단을 칠 때 치더라도 일단은 곤경에서 구하고부터 보는 것.
기억하시지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약속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구하는 저나 여러분에게 결국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심이신 것을 알아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담으로 들어, 언제든 나를 살리시고 내게 살길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항상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늘 믿음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힘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