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오, 묘한 깨달음은 마음길이 끊어진 것을 요구헌다.」
이론으로 이리 따져보고 저리 따져보고 이리 더듬고
저리 더듬고, 이것은 마음길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 길을 점점 더 조장해나가는 것이여.
그래서 이론적으로 따지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자꾸 중생소견으로 더듬어 들어가면 이것은 점점
중생심을 더 치성허게 맨드는 것이라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어.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자기에 본참화두에 대해서 의심으로 관해나가.
이것이 바로 마음 길을 끊는 유일한 방법이여.
마음길이 끊어진 큰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나갈 때에
조사관을 뚫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조사관을 뚫지 못하며는 마음길이 끊어지지 아니헌 것이고, 마음길이 끊어지지 아니허며는 조사관을 뚧을 수가 없는 것이여.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술을 먹을 때에 술 취한 놈에게 어떤 것이 무자의지냐? 무자의지를 일러라!” 이러헌 그 법문이 나왔습니다마는,
우리 도학자는
그러헌 법문을 듣더라도 그것을 자기의 사량심으로
이리저리 더듬어보고 따져보고 그러헐 필요가 없습니다.
다맛 그러헌 법문을 듣고서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화두가 독로해야만 허는 것입니다.
만약에 도학자가 조사에 공안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분상에 이리저리 더듬어서 자기 나름대로
사량심을 일으키고 분별심을 낸다면 이것은 자기의
공부가 지연될 수밲에는 없는 것이여.
잠시라도 자기의, 자기가 꾸준히 가야할 길을 놔두고
곁길로 들어가서 허매고 있는 격이기 때문에,
마음길이 끊어지지 못하고 조사관을 뚫지 못하면 결국은 무엇이 되냐 하며는 풀잎이나 나무에 붙어가지고
날 궂을 때에는 불이 번쩍 번쩍 나는 도깨비와 같은
그러헌 잡귀에 지내지 못한 것이여.
중이 조주에게 묻되, 어떠헌 것이...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가 대답허기를, ‘무 ’ ‘어째서 조주는 무라고 했는고?’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다맛 알 수 없는 마음, 꽉 맥힌 상태에서 ‘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시심마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뭣고?’ 알 수 없어야지, ‘
아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면 그것은
활구참선이 아니여.
크게 의심을 험으로, 헌 사람이, 의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크게 깨닫는 것이여.
의심이 시원치 않으며는 그 깨달을 분이 없는 것이여.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달리지를
말아라. 뜻으로써 깨달을, 깨달음을 구허지를 말아라.
‘있다’, ‘없다’ 그러헌 생각으로 생각을 내지를 말아라. ‘
이 화두라 하는 것은 아무리 해봤자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고 화두 하나에만 의심을 허도록,
정신통일허기 위해서 화두를, 도저히 풀라야 풀 수 없는 그러헌 문제를 주어가지고 정신을 하나로 뭉치게 허기
위해서 허라는 것이지
그 뭐 깨달을 수가, 그 뭔 답이 있겠느냐?’고,
이러헌 말을, 생각을 허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이 화두라 하는 것은
쇠로 맨든 빗자락과 같애서 화두를 듦으로써 일체중생의 사리상량 번뇌망상을 다 쓸어버리기 위해서 화두를
들으라 하는 것이거니’, 이러헌 생각을 허지를 말아라.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철대오를 허면 반드시 이 조사공안에는
바로 이를 수 있는 답이 있는 것입니다.
미제 자물쇠통과 같애서
아무리 열쇠가 비슷해도 번허, 번, 번호가 하나만 틀려도 열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공안에는
체중현(體中玄) 도리와 현중현(玄中玄) 도리가 있는데,
체중현 도리로는 아무렇게 일러도 안 맞는 법이 없어.
다 맞지마는,
체중현 도리 가지고서는 생사를 면하지를 못하는 것이고,
현중현 도리를 바로 깨달라야
나도 생사를 해탈을 하고 남도 생사해탈허도록 바로 학자를 제접을 헌다고 조실스님께서 말씀을 허셨어.
그러니 ‘공안에 답이 있네, 없네’ 허는 생각도 헐 것도
없고 다못 알 수 없는 의관으로 화두를 관해나가야
하는 것이여.
또 ‘이 화두라 하는 것은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
생각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못하게 허기 위해서
그 생각을 한군데다가 묶어놓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다.’ 이러헌 생각도 허지를 말아라.
다맛 하루에면 열두 때 이십사 시간 이십사 시간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다맛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소지를 헐 때나, 빨래를 헐때나,
앉었을 때나, 누웠을 때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밀밀회광반조
급한 생각도 말고 다못 성성적적하게. ‘
성성하다’고 허는 것은
정신이 또록또록 하고 깨끗허다 그 말이여. ‘
적적허단’말은
일체 생각이 다 끊어지고 고요허단 말이여.
성성허면서 적적해야하고 적적허면서도 성성해야지,
적적허기만 하고 성성하지를 못하거나 성성허기만 하고 적적허지를 못하면 그것은 올바르게 공부가 되아간 것이 아니여.
화두를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화두를 들고 가고
화두를 들고 오되 아무 자미가 없어.
먹먹해가지고 아무 자미가 없다가 쪼끔 자미가 생긴다는, 생긴 때가 온단 말이여. 화두를 들랴고 안해도 들어지고, 알 수 없는 화두를 드는데 뭐라고 표현헐 수 없는 그 기쁨이 있고, 있단 말이여.
그럴 때에 번뇌, 번뇌심을 내지를 말아라.
환희심을 내지를 말아라.
‘아 공부가 잘되는구나. 계속해서 이렇게 좀 되았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를 말아라.
그 생각이 벌써 화두가 아니니라. 그렇게 공부가 잘 되아가다가 뚝 변해가지고 영 시간이 지루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릿골이 깨끗지를 못하고 먹먹허고 몸이 뒤틀리고
이렇게 또 공부가 영 안 될 때가 와.
그러더라도 번뇌심을 내지를 말아라.
공부가 시원허니 잘되는 그러헌 경우가 오더라도
환희심을 내지를 말아라.
이것이 공부해나가는 사람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여.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