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칠백아흔일곱 번째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
디케Dik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으로 그녀의 자매 둘은 ‘질서’를 뜻하는 에우노미아와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정의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 주는 기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의 여신상은 많은 나라에서 정의의 상징으로 법원에 세워져 있나 봅니다. 이 정의의 여신상이 우리나라 대법원에도 있습니다. 서양의 정의의 여신상 대부분이 한 손에 저울을, 다른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서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여신상은 우리나라의 전통 의복을 입고 오른손에 저울을, 왼손에는 법전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왼손의 법전은 올바른 판단의 근거이며, 정의의 실현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간혹 천으로 눈을 가린 여신상이 있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공정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을 가리면 볼 수가 없는데, 공정한 판단이 가능할까요? 이 눈을 가린 여신상의 모습은 1494년 독일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제작한 판화에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궤변으로 소송을 일삼아 사법기관의 업무를 마비시키는 브로커들을 풍자하기 위해 눈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앞도 못 보면서 저울과 칼을 들고 서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무력한 법집행을 희화화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전 유럽에 퍼지면서 어느 순간 원래의 풍자적 의미는 지워지고, 법의 공정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바뀌었답니다.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정의의 심판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똑바로 본다는 의미일까요, 알브레히트 뒤러의 생각처럼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뜻일까요? |